주님을 아는 지식
[성서일과 4본문]
(이사 11:1-10)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2.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3.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4.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5.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6.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7.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10.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시편 72:1-7, 18-19)
1. 하나님, 왕에게 주님의 판단력을 주시고 왕의 아들에게 주님의 의를 내려 주셔서,
2. 왕이 주님의 백성을 정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불쌍한 백성을 공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3. 왕이 의를 이루면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안겨 주며, 언덕들이 백성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4. 왕이 불쌍한 백성을 공정하게 판결하도록 해주시며, 가난한 백성을 구하게 해주시며 억압하는 자들을 꺾게 해주십시오.
5. 해가 닳도록, 달이 닳도록, 영원무궁 하도록, 그들이 왕을 두려워하게 해주십시오.
6. 왕이 백성에게 풀밭에 내리는 비처럼, 땅에 떨어지는 단비처럼 되게 해주십시오.
7. 그가 다스리는 동안,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주시고, 저 달이 다 닳도록 평화가 넘치게 해주십시오.
18. 홀로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9. 영광스러운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송합니다. 그 영광을 온 땅에 가득 채워 주십시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여기에서 끝난다.
(로마 15:4-13)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5.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8.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9.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10. 또 "이방 사람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하였으며,
11. 또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12.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하였습니다.
13.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마태 3:1-12)
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였다.
2. 그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사람을 두고서,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부근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나아가서,
6.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요한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이 많이들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그는 손에 키를 들었으니,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이번 주 4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담은 주제어는 ‘주님을 아는 지식’입니다.(이사 11:9)
대림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주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모호하게 알고 있거나, 심지어 무관심하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얼마나 될까?
과연 그 지식은 얼마나 올바른가?
(대구(對句) 찾기)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이사 11:4) / “불쌍한 백성”(시편 72:2, 4), “가난한 백성”(시편 72:4)
“판결, 재판, 논죄, 선고”(이사 11:3-4) / “판결”(x3, 시편 72:2, 4)
“주님을 아는 지식”(이사 11:9) /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로마 15:5)
※오늘 주제로 삼은, “주님을 아는 지식”에 따라, 구약과 신약 본문들이 주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나 살펴봅니다.
[구약과 시편 (이사 11:1-10, 시편 72:1-7, 18-19)]
오늘 구약과 시편 본문은, 주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구약은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열매), 시편은 왕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공의로 판결하시는 분(이사 11:4, 시편 72:2, 4)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분(이사 11:5)
“만민의 깃발”(이사 11:10)
[서신서와 복음서 (로마 15:4-13, 마태 3:1-12)]
오늘 서신서 본문은, 주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분(로마 15:7)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는 분(로마 15:8)
이를 위해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려는 분!
특히 복음서 본문의 주인공은 세례자 요한인데, 요한은 짧은 구절을 통해 주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마태 3:11-12)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분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실 분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분!
[종합]
구약본문의 “주님을 아는 지식”이 언급된 맥락을 살펴봅시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이사 11:9)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꿈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가?
바로, “주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은 이 세상을 창조질서가 회복된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길입니다.
창조질서가 회복된 세상(=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한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①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사라진 나눔의 세상입니다.(이사 11:6∼8)
특히 구약 본문에서 길게 묘사된(6∼8절) 동물들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몇 주 전 (왕국절 13주) 구약본문이었던 이사야 65:25절에도 나온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다는 말씀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본능대로 움직이는 동물들조차 그 본능보다 더 원초적인 모습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초적인 모습이 무엇인가?
바로 창조질서가 회복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해치지 않는, 이런 창조질서 회복은 언제 일어나는가?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할 때 일어납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편들어주는 공의로운 재판관, 정의롭고 성실한 재판관의 모습(이사 11:4, 5)!
창조질서를 회복한 동물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창조질서가 회복되어가는 인간세상의 모습입니다.
②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로마 15:1-6)
며칠 전, 12월 5일 『하늘양식』에서 읽은 내용을 옮깁니다.
『... 하나님은 세상을 균형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우주의 질서는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풍족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흐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기압의 차이에 의해 균형이 흐트러지면 바람이 불게 되어 있습니다.(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이 흐름은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며, 이 흐름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자신에게 넉넉한 것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창조의 질서이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평화롭고 균형있게 만들어가는 지혜입니다...』(포천교회 엄상현 목사)
새벽기도 때 이 말씀 읽으면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가지 부연하자면, 지금 내가 넉넉하지 않고 부족하다면, 그런데 나보다 더 없어서 힘들어하는 이가 눈에 보인다면? 그렇다면, 나도 넉넉하지 않지만, 나보다 더 적은 이에게 흘러가야 균형(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내가 비어야, 또 새로운 바람이 내게로 불어 올 것입니다.
마치 “우물치기”처럼 말이죠.
③ 창조질서 회복의 또 하나의 길을, 오늘 서신서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7)
지난 화요일, 성서일과 사랑방 모임에서 김준헌 목사님(팔당교회)이 진주조개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껄끄럽다고 내치지 않고, 나와 아주 다른 이질적인 존재일지라도 받아들여 품어줄 때 진주조개가 된다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로마 15:5)
좀 더 구체적으로 “인내심과 위로”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인내심과 위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5), 성경말씀이 주시는 것입니다.(4)
한마디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즉 “주님을 아는 지식”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받아들이기!’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또 하나의 길입니다.
④ 오늘 복음서 본문이 제시하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한 세상”, 즉 창조질서가 회복된 세상 건설을 위한 또 하나의 길은 무엇인가?
바로 “회개”입니다.(마태 3:2,8,11)
회개란 정신없이 가던 길 멈추고 주님의 길로 방향을 다시 잡는 일입니다.
물론, 주님에 대한 오해는 회개를 어렵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분이 오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 오셔서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시기 전에, 즉 추수를 완성하시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마태 3:12)
오늘 우리는 이미 몇 가지 회개의 길을 보았습니다.
①나보다 약한 자를 먹잇감으로 보지 말고, ②오히려 주님 모시듯 약한 자에게 내 것을 나눠주고, ③나와 다른 이질적인 자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대림절 2주 본문말씀이 주시는 “주님을 아는 지식”, 즉 회개의 길입니다.
주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기 전에, 먼저 위의 세 가지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을 잘 모르겠다고 포기하기 전에, 먼저 위의 세 가지 길을 걸어가 봐야겠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을 아는 지식”을 내 안에 가득하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말씀시조] (마태 3:1-12) (이정훈 지음)
들사람 세례요한 광야에서 외치누나 /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 / 내 뒤에 그분 오셔서 회개열매 찾으리
[말씀 동화] 홍길동을 기다리는 차돌바위처럼! “어여차, 쿵-, 쩍-” 영구는 오늘도 도끼질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늘처럼 아빠가 안 계신 날은 영구의 독무대거든요. 열일곱 살 먹은 고등학생답지 않게 영구는 도끼질이 능숙합니다. 몇 년 전부터 아빠의 도끼질을 눈여겨보며 아빠 몰래 연마한 솜씨입니다. 이젠 무거운 도끼를 단번에 머리위로 번쩍 치켜 들만큼 근력도 생겼습니다. 영구는 학교에서는 주먹대장들을 슬슬 피해 다니는 작고 온순한 아입니다. 그러나 키는 작아도 도끼질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도끼대장이죠. 도끼질 맛을 알고 난 뒤부터 영구는 스스로 별명을 하나 지었습니다. ‘차돌바위!’ 오래전에 본 적 있는 옛날 만화영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홍길동과 호피, 곱단이, 그리고 악당두목 골반대사 등과 함께 나오는 작달막한 도끼소년의 이름입니다. 작지만 차돌처럼 야무지고 바위처럼 단단한 차돌바위는 도끼질의 달인입니다. 도끼질만큼은 홍길동보다도 호피보다도 차돌바위가 으뜸입니다. “차돌바위라 불러다오!” 영구는 도끼질을 할 때마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가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곤 합니다. 그러면 괜히 온몸에 힘이 불끈불끈 솟곤 합니다. 영구네 뒷산에는 나무들이 많습니다. 일부러 톱질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나무들 천지입니다. 무덤을 만들려고 쓰러뜨린 나무들도 있고, 숲의 건강을 위해 잘린 간벌 나무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나무들을 몇 동가리로 잘라서 지게에 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둥그런 원기둥모양 나무들을 도끼로 쪼개어 차곡차곡 장작을 만드는 겁니다. 장작을 팰 때 도끼질 맛이 가장 좋은 나무는 역시 참나무입니다. 아주 단단한 나무지만 세로로 도끼질 할 때는 큰 힘들이지 않아도 맑고 밝은 소리를 내며 쉽게 쪼개집니다. 반면에 도끼질이 퍽 까다로운 낙엽송 같은 나무도 있습니다. “역시 나무는 참나무가 최고야! 사람도 마찬가지지. 참나무처럼 참사람이 되어야 해! 주인이 부르실 때, 장작처럼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나를 버리고 쪼개질 수 있어야 하는데, 저 낙엽송처럼 계속 미련을 부리면 안 되지! 미련이 많으면 미련해지는 법이거든. 미련한 낙엽송, 크크크!” 도끼질을 하다 보니 며칠 전 학교 성경시간에 배운 성경말씀이 기억납니다. 학교 성경수업 교사이신 교목님이 그러시는데, 지금은 대림절이랍니다. 대림절은 원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마태복음 3장 1절부터 12절까지를 배웠습니다. 영구네 학교 성경 선생님은 성경암송을 강조하십니다. 교회에 띄엄띄엄 나가는 영구도 마태복음 3장을 애써 외우려 노력했습니다. 가장 빨리 완벽히 외우는 사람에게는 맛있는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말씀은 맛있는 상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3장 10절 말씀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 세례자 요한의 말씀인데, 이건 마치 도끼대장 영구 자신을 위해 준비된 말씀 같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열매’란 무엇일까? 가만 살펴보니, 8절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고 하십니다. 아마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어떤 나무든지 도끼로 찍혀 장작이 된다는 말씀인가 봅니다. 이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천주교 신부님들이 모여서 지난 2012년 12월의 불법선거를 규탄하며,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현 정권의 사과와 퇴진을 요구하는 미사를 했었단다. 그런데 그것을 가리켜 성직자들이 정치에 참여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뉴스에 나오더구나. 이 문제에 대해 너희 생각은 어떠한지 한번 토론해 보자. 자, 누가 먼저 자기 의견을 말해볼까?” 그러자 반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똘똘이 철수가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났습니다. “선생님!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그 신부님들이 미사 중에 너무 과격하게 종북스러운 발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훼손한 불법선거라고 외치는 그분들 주장이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퇴색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영희가 손을 들고 일어나 발언합니다. “제가 보기에는요,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어느 정도 불법적인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일 년이나 지난 일이기 때문에 정권퇴진까지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인들이 정치문제를 놓고 왈가왈부(曰可曰否)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경박사 보라가 손을 들고 일어납니다. ‘보라’는 성경 인물 ‘바울’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이름이라고 하네요? “저는 솔직히 지난해 말 대통령선거가 민주주의를 훼손할 정도로 불법을 저질렀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고, 또 큰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고 보는데요, 종교인들이 정치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시대 지도자들 중에는 한편에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목자의 역할을 하는 왕이 있었죠. 이렇게 성경시대에는 세 가지 역할이 따로 따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목사님과 신부님 같은 성직자들이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맡아서 일하는 상황입니다. 즉, 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 역할과, 설교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역할, 그리고 교인들을 돌보는 목자의 역할 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언자의 역할을 놓고 볼 때, 구약과 신약의 여러 예언자들은, 예배당에서 하는 설교를 넘어서, 나라의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타락, 그리고 왕의 타락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예언자 아모스처럼, 마치 남한 예언자가 북한에 가서 북한 정권을 비판하듯이, 다른 나라에 원정까지 가서 예언하는 경우도 있었죠. 신약시대 요단강 예언자로 유명한 세례자 요한만 보더라도, 타락한 왕 헤롯을 비판하다가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이 정치문제, 대통령의 타락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형식만큼은 정당하다고 봅니다.” 거침없는 보라의 말솜씨에 성경 선생님은 물론 학급 아이들의 입이 해물탕 큰조개처럼 딱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도 질세라, 대위가 손을 들고 일어나네요. ‘대위’는, 성경 인물 ‘다윗’을 한자로 표기한 우리식 이름입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까 교회가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만에 하나 대통령이 불법으로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그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다른 국민들은 몰라도 최소한 교회만큼은 그 대통령의 권세에 도전하는 일은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자 거침없는 보라가 다시 손을 들고 일어섭니다. “제가 성경을 깊이는 모르지만, 성경책의 다른 곳에 보면, 모든 권세를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라고 보이는 구절도 있습니다. 말장난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3장 1, 2절, 그리고 그 이하에 보면, 짐승이 용에게 큰 권세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용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아마, 로마서를 쓴 바울과 계시록을 쓴 요한이 처한 상황과 개인적 스타일이 각각 달랐고, 또 그 글을 쓴 목적 또한 달랐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론으로, 제 의견은, 정권퇴진을 외친 천주교 미사에 대해 평가할 때, 그 신부님들의 주장이 객관적인 증거가 있는 정확한 주장인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성직자라서 대외적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영구는 보라의 말솜씨와 성경지식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날 영구는,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보라의 말을 들으면서, 평소 띄엄띄엄 다니던 교회를 좀 더 열심히 진지하게 다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 정도니까요. 영구는 다시 번쩍 도끼를 치켜듭니다. 도끼날이 번쩍 빛을 발하는 순간 나무는 두 토막 장작으로 갈라집니다. “덤벼라 골반대사! 보아라, 내 도끼가 네 뿌리에 닿았다. 어서 회개하지 못할까?” 차돌바위가 도끼의 달인이라면, 차돌바위의 절친 호피는 검술의 달인입니다. 한 때 골반대사의 제자였다가 골반대사의 악한 실체를 알게 된 뒤에 골반대사와 과감히 결투를 벌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다가도 진실을 알게 된 뒤에는 과감하게 가던 길을 돌이켜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심지어 때론 과거에 가던 길과, 호피처럼,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회개라고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호피는 회개의 열매를 제대로 맺은 알곡과 같은 인물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하나님 말씀’이 바로 ‘성령의 검’이라고 합니다.(에베소서 6:17) 그러고 보니, 영구네 반 성경말씀의 달인 보라야 말로 검술의 달인 호피가 아닌가 싶습니다. 호피는 차돌바위의 절친이니, 그렇다면 보라는 영구의 절친이 되는건가요? “흐흐흐, 차돌바위라 불러다오!” 진짜 차돌바위나 된 듯이, 영구의 도끼가 공중에서 신명나게 춤을 추네요. 문득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흰 눈 내리는 날 도끼질은 더 환상적입니다. 문득 우리의 차돌바위 영구는 홍길동이 그립습니다. 부패한 공무원, 권력가와 부자들로부터 사회적 약자들을 구하기 위해 활빈당을 이끌던 홍길동! 잠시 사라진 그 홍길동이 그립습니다. 차돌바위가 홍길동을 그리워하듯, 홍길동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사 11:9)이 이 땅에 가득해 지도록, 내 안에 성경말씀을 가득가득 채우는 계절입니다. 펄펄 내리는 흰 눈처럼, 소복소복 말씀이 채워집니다. 흰 눈처럼 소복소복 예수님이 다시 오고 계십니다. [이정훈 지음, 2013년 12월 7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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