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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3년 12월 22일(대림절 4주) 예배준비 노트

밝은 아기로 오시는 주님

 

[성서일과 4본문]

 

(이사야 7:10-16)

10. 주님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12.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13.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15.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될 때에, 그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미워하시는 저 두 왕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시편 80:1-7,17-19)

1. 아,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주님, 요셉을 양 떼처럼 인도하시는 주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룹 위에 앉으신 주님, 빛으로 나타나 주십시오.

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님의 능력을 떨쳐 주십시오. 우리를 도우러 와 주십시오.

3.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4. 주 만군의 하나님, 얼마나 오랫동안 주님의 백성들이 올리는 기도를 노엽게 여기시렵니까?

5. 주님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눈물을 물리도록 마시게 하셨습니다.

6. 우리를 우리의 이웃에게 시비거리가 되게 하시니, 원수들이 우리를 비웃습니다.

7. 만군의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17. 주님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주님께서 몸소 굳게 잡아 주신 인자 위에,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18. 그리하면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시오.

19. 만군의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로마서 1:1-7)

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3.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4.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 들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7. 나는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마태복음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이번 주 대림절 4주, 4본문 말씀의 주제는, ‘밝은 아기로 오시는 주님’입니다.

대림절 전체적인 주제가 예수님의 재림이지만, 대림절 마지막 주일 본문은 성탄절 직전이어서인지, 예수님의 초림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일 말씀의 주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임마누엘’입니다.

 

① 부르심

서신서 본문인 로마서 1장에 세 차례나 반복해서 나오는 ‘부르심’!(1, 6, 7절)

이 부르심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1절)

여기서 복음이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3절)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고, 성령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설명합니다.(3, 4절)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 예수의 존재가 왜 복음일까요?

예언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2절)

 

불순종의 결과로 백성들이 고난에 빠집니다.

그제야 백성들은 하나님 약속이 기억납니다.

고난 가운데서 고대하고 고대하던 차에 마침내 그 약속 이루어지니 이는 크나큰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는 일 또한 크나큰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부름 받는 과정과, 복음을 전하는 과정은 또 다른 고통이요, 고난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복음을(약속성취 수태고지를) 받아들이는 요셉, 서신서의 복음일꾼의 소명을 받는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② 순종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 앞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순종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은, 복음전도의 열매가 바로 ‘믿고 순종’이라 가르칩니다.(로마 1:5)

복음을 들었을 때, 오실 그분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지금까지의 불순종을 회개하고 이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새 약속을 고스란히 믿고 따르는 순종!

복음의 열매는 바로 이 ‘믿음과 순종의 삶’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순종의 삶이란, 전적인 하나님 의지, 그 약속만을 의지하는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구약의 주인공 유대임금 아하스는 대표적인 불신앙과 불순종의 인생입니다.

겉으로는 믿음이 가득한척,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듯이,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속으로 아하스가 진짜로 믿는 구석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외교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 앗시리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경책 가득한 하나님 언약을 굳게 믿으며 살고 있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정말 믿고 의지하는 것은 돈 아닙니까?

내가 내손으로 내 돈 벌 수 있다고 확신하는 내 능력, 내 재주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 진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까맣게 잊으면서도, 돈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잘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불신앙,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렇게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철두철미하게 육에 속하여 육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자식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급기야 주님께서는 육에 속한 불효막심한 자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육을 입고 오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연약한 몸, 육체를 입고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새 약속의 징조라고 하십니다.

가장 연약한 자의 상징인 ‘처녀’의 육체를 빌어, 가장 연약한 자의 상징인 ‘갓난아기’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이사 7:14)

눈높이를 낮추어도 너무 낮추신 건 아닐까요?

 

문제는 이것이 무슨 징조가 될 수 있다는 것인지,, 그 타당한 이유입니다.

처녀, 또는 동정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을 과연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인즉, 동정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누가 알아차리고 널리 전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한 것인지(마태 1:18, 20) 아닌지 누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가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조로서 동정녀 잉태 소식을 들었다 해도, 그리고 그것이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것을 어느 정도 믿는다 해도 그것이 저들에게 무슨 감동이 되겠습니까?

달리 말하자면, 그것이 저들에게 왜 감동이 되고, 어째서 징조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③ 임마누엘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이름, ‘임마누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아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지어놓고 내팽개쳐버리는 무정한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가 당신을 저버린다 해도,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 마음의 알맹이, 하나님 식 사랑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그 ‘임마누엘’ 마음이 급기야 육체를 입고 스스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저렇게 가장 연약한 사람 ‘처녀’의 몸을 빌어, 가장 연약한 무방비상태의 ‘아기’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냥 어마어마한 거인의 모습을 한 옥황상제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파워를 가진 존재로 오시지 않고, 하필이면 가장 작고 작은 아기로, 작고 남루한 자리에 태어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래 헨리 나우웬의 글을 임마누엘의 비밀 한 구석을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무력함’ (헨리 나우웬)

예수님은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커다란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그분이 우리 인간들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다치기 쉬운 어린이가 되어, 전적으로 인간들의 보살핌에 의존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없애기 원하십니다... 먹여 주어야 하고, 돌봐 주어야 하며,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꼬마를 누가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전적으로 무력하고 연약한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며, 또 우리 인간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고 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강력한 슈퍼맨 같은 힘도 없으신 분, 나를 낳아주신 분이 거꾸로 나에게서 어린 아기로 태어나십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그 몸을 송두리째 주시려고 오시는 아기입니다.

내 어두컴컴한 영혼이 순식간에 환해지는 밝디 밝은 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지요!

이 소중한 아기 예수를 보호해 드리고 무럭무럭 자라시게 해드리려면 지금 나는 무얼 해야 할까요?

아니 그 전에, 천상천하 그 어느 빛보다 밝은 그분 내 안에 태어나시도록 나는 지금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 그 이름 임마누엘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바로 알고,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 이름 안에 담긴 하나님 마음, 하나님의 그 간절한 사랑이 널리 알려지도록, 그 마음, 그 사랑 가득 담긴 그 이름 임마누엘을 큰 소리로 선포해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시편의 한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시오.’ (시편 80:18)

 

 

[나머지]

 

“다윗의 자손 요셉아!”

오늘 복음서 본문은 기나긴 족보에 이어집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마태 1:20)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예수님 외에 유일하게 표현한 구절이라, 이 구절이 매우 특별한 느낌이 듭니다.

요셉의 순종으로 예언 성취, 하나님 약속, 하나님 사랑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시편 80:1절에 나온 구약의 ‘요셉’처럼, 신약의 요셉은 참으로 꿈의 사람, 꿈에서 받은 말씀에 순종하는 순종의 대명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처녀가(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이사 7:14, 마태 1:23)

좀 엉뚱해 보이지만, 처녀, 또는 동정녀 탄생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 저런 세상 사람들, 육체에 사로잡힌 사람들, 우상숭배(바알공화국)의 생산(다산)지상주의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마음이 담긴, 육체의 생식, 육의 생산 논리를 전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주십시오.”

오늘 시편 80편에는 세 차례 후렴구가 나옵니다.(3, 7, 19)

 

“(만군의)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불순종의 결과 고난에 빠진 백성들의 외침입니다.

고난에 빠져 날마다 눈물로 사는 백성들의 아우성입니다.(5절)

물론 우리 인생이 회복되는 길은, 다름 아닌 ‘임마누엘’ 믿음과 순종의 길입니다.

시인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렴구의 끝마다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

오늘 구약본문 이사야 7:15, 16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15절에는 그 나이에 그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버터와 꿀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농경문화 보다는 유목문화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광야의 야인으로 살던 세례자 요한의 느낌이 듭니다.

정리하면,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한 예언자의 삶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란, 도대체 몇 살쯤일까요?

한마디로 철든 나이 아닐까요?

요새 한창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유행이라는데, 그런 대자보 써 붙일 정도면 철든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세상 잘못 돌아가는 것을 보고도 똑똑히 거절하지도 않고 사는 내 모습이 보입니다.

옳은 것인 줄 알면서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선택하지 못하는 내 모습도 보입니다.

철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말씀시조] 마태 11:2-11 (이정훈 지음)

요셉의 태몽 중에 주의천사 가라사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

꿈처럼 오신 아기여 임마누엘 예수여

 

 

[말씀노래] 임마누엘 (주원남 지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x 2)

 

 

 

 


 

[말씀 동화] 내 이름은 마누엘

 

“야, 임마! 임마! 임마, 누엘아∼ 누엘 치러 가느냐? 번데기 먹으러 가느냐?”

 

아휴! 저 녀석 또 시작이네요.

우리반 민식이 녀석이에요.

 

“이 녀석아, 내 이름은 ‘임마, 누엘’이 아니라 ‘임, 마누엘’이야. 성은 임이고 이름은 마누엘이라니까? 너 허수아비 알지? 허수아비 이름도 ‘허수, 아비’가 아니라 ‘허, 수아비’인 거 모르냐?”

 

그러자 민식이가 이번에는 능청을 부립니다.

 

“오, 그랬어? 그럼 네 고향은 어디지? 혹시 스페인이나 멕시코 아니냐? 마누엘은 그쪽 이름 같은데? 우리 임,마누엘이 한국사람인 줄 깜빡 속았는 걸?”

 

민식이는 개구쟁이에다가 소문난 장난꾸러기죠.

특히 아이들 이름 가지고 장난을 잘 칩니다.

 

우리 반 아름이의 쌍둥이 동생 다운이에게는,

 

“너희 집 컴퓨터는 맨날 다운된다지? 그게 다 네 이름 때문이라니까?”

 

그리고 우리 반 모범생 철수에게는,

 

“철수야 철수야 영희는 어디 두고 혼자 다니니?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겠네?”

 

뭐 이런 식으로 놀려먹습니다.

잊을만하면 내 이름 갖고 이리 저리 놀려먹는 민식이가 얄밉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귀가하자마자 엄마께 푸념을 늘어놓았어요.

 

“엄마, 나 오늘 또 이름 때문에 속상했어요. 우리 반 민식이 녀석이 이번에는 아주 대놓고 망신을 주지 뭐에요. ‘임마!’ ‘임마!’ 하면서요! 특이하게 지으실 거였으면 차라리 ‘임,금님’이라고 지었더라면 더 좋았겠어요. 세 글자고, 또 느낌도 좋잖아요?”

 

저의 푸념을 들으시며 엄마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십니다.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 임마누엘 스트레스가 많구나? 그런데 네 이름은 특이하게 짓고 싶어서 그리 지은 게 아니란다. 특이한 걸 원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네 이름은 임마누엘이 된 것이란다.”

 

“특별한 이유요? 그게 뭐죠?”

 

“너도 알다시피, 너는 성탄절 아침에 태어났지. 너의 탄생은 우리 가족 모두의 큰 기쁨이었고, 특히 네가 태어난 날이 성탄절이어서 그 기쁨은 두 배였단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네 이름을 임성탄이라고 지을까 아니면 아예 임예수라고 지을까 의논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때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임마누엘이 더 낫겠다고 하셨지. 그래서 우리 온 가족은, 마침 네 성(姓)이 임씨라, 더 기쁜 마음으로 네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짓게 되었던 거란다.”

 

엄마 말씀을 가만히 경청하다가 다시 엄마께 여쭈었어요.

 

“그럼 엄마,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에요?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데, 거룩한 아드님이신 성자(聖子)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로 우리에게 오신 목적이 담겨 있는 존귀하신 이름이란다.”

 

“아하, 그럼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목적, 그러니까 성탄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고 싶어하신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그 이름에 담으신 거네요?”

 

“맞아, 바로 그거야. 우리 임마누엘 점점 총명해지네?”

 

“그런데요 엄마, 사람도 나이 먹으면 엄마 아빠로부터 독립해서 사는 게 정상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계속 함께 사시려는 것일까요? 매년 성탄절이 계속될 때마다 그 이름 임마누엘이 반복되는 게, 딱 하나님의 그런 마음 같은데요?”

 

“그건 말이다. 이건 엄마 생각인데, 우리가 아무리 나이 먹어도 여전히 철부지같이 살기 때문이 아닐까? 천국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을 자꾸만 잃고 헤매기 때문이 아닐까? 오래전 네가 유치원 다닐 때, 엄마랑 길이 엇갈려 네가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었단다. 그 때 엄마가 얼마나 애타게 너를 찾아 헤맸던지, 네 아빠가 그러시는데 그 때 엄마가 딱 정신줄을 놓은 여자 같았다고 하시더구나. ‘임마누엘아, 임마누엘아’ 하고 네 이름을 고래고래 부르며 이 사람 저 사람 아무나 붙들고 너를 못 보았느냐고 물으면서 정신없이 횡단보도도 무시하고 그냥 막 찻길을 이리 건너고 저리 건너면서 찾아다니는 모습이 정말 대단했데. 아빠는 조금이라도 체면을 차릴 정신은 있었다는데, 엄마는 체면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더래. 그래서 그 때 네 아빠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나는구나. 하나님은 길 잃은 우리를, 아빠처럼이 아니라 딱 엄마처럼 찾으신다는 말씀! 그래서 임마누엘은 딱 엄마누엘 같다고 하신 재미있는 말씀이 기억난다. 그런데 말이다. 그 때 엄마가 너를 어디서 찾았는지 아느냐? 바로 동네 교회마당에서 찾았단다. 그 순간 열두 살 어린이 예수님께서 정신없이 당신을 찾아 헤매던 엄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하신 그 말씀이 기억나더구나. 그 때 순간 깨달았지, 아! 길을 잃은 건 어쩌면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무튼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를 찾게 해주셨단다. 그리고 너를 찾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셨던 거지.”

 

“와! 엄마, 정말이에요? 그 때 정말 그러셨었어요? 대∼박! 그나저나 와∼ 임마누엘에 그렇게 진한 뜻이 담겨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제 이름 속에는 우리가 길 잃지 않도록 늘 가까이서 지켜보시는 하나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네요. 내일 학교에 가면 민식이 녀석에게 똑똑히 가르쳐줘야겠어요. 다시는 제 이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게 만들어줄 거예요.”

 

엄마가 미소 지으시며 다시 말씀하시네요.

 

“임마누엘아, 내가 보기에 민식이는 매우 재치 있고 총명한 친구인 것 같다. 이름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장난을 잘 치는 것을 보면, 문학적인 상상력이 뛰어난 친구가 분명해. 민식이가 네 이름 임마누엘의 뜻을 제대로 알게 되고 예수님과 좀 더 친해지게 된다면, 어쩌면 네 이름에 더 풍부하고 멋진 이야기를 담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럴수록 민식이와 하나님은 점점 더 가까워질 테고 말이다.”

 

“맞아요 엄마, 그러고 보니 민식이는 친구들 이름 가지고 삼행시도 곧잘 지어요. 제 이름으로는 사행시를 지어야겠죠? 아무튼 민식이가 제 이름 임마누엘 덕분에 우리 예수님하고 친해지면 좋겠네요. 그리고 엄마, 제게 이렇게 좋은 이름 지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임,금님 보다 임,마누엘이 훨씬 멋진 이름인줄 이제야 알았어요.”

 

엄마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십니다.

나도 엄마의 허리를 두 팔로 꼭 껴안았습니다.

엄마처럼, 지금도 나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우리 하나님의 허리도 두 팔로 꼭 껴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이정훈 지음, 2013년 1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