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이루어졌다”
[성서일과 4본문]
(이사야 63:7-9)
7. 나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을 말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일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은혜, 그의 긍휼과 그의 풍성한 자비를 따라서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크신 은총을 내가 전하렵니다.
8.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9.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
(시편 148)
1.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2. 주님의 모든 천사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모든 군대야, 주님을 찬양하여라.
3. 해와 달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빛나는 별들아,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4. 하늘 위의 하늘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위에 있는 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5. 너희가 주님의 명을 따라서 창조되었으니, 너희는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6. 너희가 앉을 영원한 자리를 정하여 주시고, 지켜야 할 법칙을 주셨다.
7. 온 땅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바다의 괴물들과 바다의 심연아,
8. 불과 우박, 눈과 서리, 그분이 명하신 대로 따르는 세찬 바람아,
9. 모든 산과 언덕들, 모든 과일나무와 백향목들아,
10. 모든 들짐승과 가축들, 기어다니는 것과 날아다니는 새들아,
11. 세상의 모든 임금과 백성들, 세상의 모든 고관과 재판관들아,
12. 총각과 처녀, 노인과 아이들아,
13. 모두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 이름만이 홀로 높고 높다. 그 위엄이 땅과 하늘에 가득하다.
14. 주님이 그의 백성을 강하게 하셨으니, 찬양은 주님의 모든 성도들과, 주님을 가까이 모시는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할 일이다. 할렐루야.
(히브리서 2:10-18)
10.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12. 그리하여 그분은 "내가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13. 또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4.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15.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16. 사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십니다.
17.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18.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3-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고, 내가 네게 일러줄 때까지 그 곳에 있어라."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15.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16.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19. 헤롯이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20. 말하기를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하였다.
21.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22.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서,
23.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성탄절 1주(송년주일) 성서일과 본문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얻은 주제는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2:15, 17, 23)입니다.
그 “말씀”의 알맹이는 사랑입니다.
그 말씀, 즉 그 사랑(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몸소”, “친히” 고난을 감당하시며 이루시는 구원 말입니다.(이사 63:9 / 히브 2:17-18)
①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오늘 시편 148편은, 하늘과(1-6절) 땅(7-14절), 온 천지(天地) 만물(萬物)이 주님을 찬양하라고 외치는 노래입니다.
“모든(모두)”라는 표현이 10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주님을 (이름을) 찬양하여라”는 표현은 11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렇게 스케일이 큰 찬양의 근거가 무엇인가?
오늘 서신서 본문 앞에 그 단서가 나옵니다.
②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
천지만물이 그분을 찬양하는 까닭은, 그분이 바로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지으시기만 하고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천지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 2:10)
‘창조와 보존’, 이를 풀어서 ‘창조와 구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창조와 구원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시면서까지 시험 받는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히브 2:18)
“몸소” 시험받고 고난당하시는 서신서의 말씀이 오늘 구약 본문과도 이어집니다.
③ 친히 고난 받으시고, 친히 구원해주시는 분
오늘 대단한 스케일의 시편 찬양의 근거는 서신서 뿐 아니라 구약 말씀에도 근거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이사야 63:9)
“친히” 고난 받으시고, “친히” 구해주시는 주님!(구약의 “친히”는 서신서의 “몸소”와 통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런 주님의 사랑을 가리켜 한마디로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7절)
이 변함없는 사랑의 극치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 이름 임마누엘,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33년 인생이 바로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 당하”시고(히브 2:18), “친히 고난 받으”시는(이사 63:9)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바로 이런 예수님 인생의 첫 모습입니다.
④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의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미친 헤롯, 초절정 사이코패스 같은 헤롯의 광란(13-18)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요셉의 모습입니다.
친 아들도 아닌 아기 예수를 살리기 위해, 키우기 위해 노심초사, 동분서주하며 고난을 무릅쓰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여담이지만, 오늘 본문을 분석하다보니 마태복음에 나타난 요셉의 모습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의 족보에 따르면 요셉의 아버지 이름이 ‘엘리(헬리)’입니다.(누가 3:23)
그런데 마태복음의 족보에 따르면 요셉 아버지 이름은 ‘야곱’입니다.(마태 1:16)
그래서 그런지 자연스레 창세기의 야곱과 요셉 부자(父子)가 연상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창세기의 요셉처럼 마태복음의 요셉도 꿈과 관련이 많습니다.
두 사람 모두 꿈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혼자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가족을 움직이는 것도 같습니다.
살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가고, 역시 살기 위해 이집트를 나오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서 본문은, 한마디로 이스라엘 고난 역사를 압축해놓은 듯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집트를 나올 때, 출애굽의 주인공이었던 모세도 떠오릅니다.
모세의 출생과정에서 벌어진 참혹한 일들이 오늘 복음서 본문의 예수님의 그것과 통합니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오늘 구약본문의 주님 모습과 아빠 요셉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주셨습니다.”(이사 63:9)
이런 구약과 복음서의, 마치 데자뷰(기시감)같은 현상들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제가 느낀 한 가지는, 아빠 요셉을 통하여 구약의 언약들이 마구마구 기억나고, 그 언약이 낱낱이 이루어지는 것이 환하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복음서 본문에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아무튼 오늘의 주인공 요셉을 통해 느낀 알맹이는 이것입니다.
‘남루한 구유 같은 내 안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를 살리기 위해 지금 나는 과연 무얼 하고 있나?’
[나머지]
*
그런데... 이사야 63:8절에 나오는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고 하시는 말씀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한 주간 내내 묵상하면서도 그분 마음을 아직도 잘 못 느끼겠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내가 그분을 속이는 자녀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요?
**
또 하나, 마태복음 2:23절에 나오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의 뜻을 두고도 오래 묵상했습니다.
이 구절이 구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 마음이 쓰여서 묵상했습니다.
이 역시 여러 해석을 찾아보았지만, 제 마음 속에 쏙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지금 내 사는 모습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요?
이것도 지나친 콤플렉스일 뿐일까요?
다들 쉽게 이해하는데 나만 어렵게 느껴지니 더 마음이 쓰입니다.
한 가지 느껴지는 게 있다면, 예로부터 나사렛은 구유처럼 초라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
오늘,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은 말씀으로 오십니다.
지금 나에게 오신 예수님은 마치 2천 년 전 아기예수처럼, 아무 힘도 없습니다.
볼품없고 무슨 능력도 신비도 안 느껴집니다.
그저 초라하고 남루한, 냄새나는 말밥그릇 같은 내 안에 담겨계실 뿐입니다.
아무 힘도 능력도 가능성도 안 보이는 그 아기 예수님, 그 아기 말씀님이, 지금 내 안에 모셔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떠한가?
마리아같이, 요셉같이 그 아기예수, 아기 말씀님을 위해 목숨 걸고 망명, 목숨 걸고 엑소더스를 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안주하고 있는 애굽의 고기가마 곁을 떠나 광야를 향해 무조건 나갈 수 있는가?
요셉처럼, 나 살던 집 내 일터 내 밥줄 목공소조차 벗어버릴 수 있는가?
그 아기 말씀님을 위해...!
침잠완색(沈潛玩索)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께서 가르쳐주신 공부법입니다.
비록 아무 뜻 몰라도 그냥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아예 노래처럼 읊조리다보면, 그렇게 천독 만독 하다보면 자연히 문리(文理)가 나고, 그리고 또 어느 날 통째로 깨달아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침잠완색입니다.
침잠(沈潛), 푹 빠져서, 말씀 속에 푹 잠겨서, 완색(玩索), 노는 것입니다.
놀면서 찾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성탄의 계절에, 내게 오신 아기예수님, 아기 말씀님을 꼭 품고, 그 아무 힘도 없는 아기에 집중하렵니다.
요셉처럼, 그분을 살리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살아보렵니다.
그렇게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나는 임마누엘의 신비를, 임마누엘의 기쁨을, 임마누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나와 내 가정, 우리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껍데기 교회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예수님의 몸, 사랑 많고, 능력 많고, 눈물 많으신 우리 예수님을 닮은, 참다운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시조] 마태복음 2:13-23 (이정훈 지음)
미친 헤롯 칼을 피해 예수가족 이집트로
출애굽 광야역사 그 길 따라 고국으로
여기가 갈릴리랍니다 나사렛사람 예수여
[말씀노래] 나사렛으로 (이정훈 시, 이길승 곡)
1. 소년요셉 꿈을따라 온가족이 이사하듯, 굶주림을 피하여서 애굽으로 피난하듯
아빠요셉 꿈을따라 예수가족 이사하네, 헤롯왕을 피하여서 애굽으로 피난하네
2. 히브리 노예들의 생육번성 무서워서, 아기모세 해치려던 무자비한 바로처럼
평화의왕 예수님의 탄생소식 무서워서, 아기예수 해치려고 헤롯이 미쳐가네
3. 아기모세 죽이려던 바로왕도 사라지고, 아기예수 죽이려던 폭군헤롯 죽었다네
모세와 야곱백성 애굽을 떠나듯이, 예수님의 온가족이 애굽을 떠나시네
4. 아빠요셉 꿈을따라 이스라엘 땅을향해, 예언자 말씀따라 갈릴리 나사렛으로
불편하고 불안한길 우리예수 나그네길, 작고작은 구유로다 나사렛에 안기시네
[말씀 동화] 내 마음의 구유
“지게 지고 벌어놓으면 갓 쓴 놈들이 다 가져간다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선구오빠가 또 떠벌이기 시작하네요?
예배당 단상 위 십자가 바로 아래 놓여있는 지게를 보자마자 이 속담이 떠오른 겁니다.
옛날 농촌에서 추수철에 지주에게 다 빼앗기는 소작농들의 애환이 담긴 속담이라네요.
선구오빠는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아는 것도 참 많습니다.
이젠 속담까지 척척박사 수준이네요.
지게는 노동의 상징입니다.
요사이는 농촌에서도 지게를 쓸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러나 손수레를 가지고 올라갈 수도 없는 산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가지를 잘라 땔나무를 해올 때도 역시 지게가 최곱니다.
도시에서도, 길이 좁은 시장 골목에서 짧은 거리로 급한 물건을 나를 때는 지게가 최곱라죠?
지게는 오토바이가 오르내릴 수 없는 계단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죠.
그러고 보니 지게는 속담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살아있는 전통입니다.
우리교회 예배당 단상 위에 지게가 등장한 것은 지난 대림절 첫 주일부터예요.
교인들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지게를 처음 보는 진구오빠는 저게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엄마 귀에 소곤거립니다.
엄마도 진구오빠 귀에 소곤소곤 무언가 대답을 해주십니다.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느닷없이 지게가 등장한 까닭은 목사님 설교 속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게 오랜만에 보시죠? 저도 오랜만입니다. 우리 동네 할아버지께 부탁해서 빌려왔어요. 대림절에 십자가 아래 지게를 두니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진구가 한번 말해볼까?”
“글쎄요? 저는 지게가 뭐하는 물건인지는 아는데, 왜 예배당 안에 지게를 가져다 두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 때 옆에 있는 영원이언니가 손을 들고 말합니다.
“지게는 무거운 짐을 나를 때 쓰는, 짊어지는 도구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과 무언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옳지, 우리 영원이가 아주 예리하구나. 좋은 해석이다. 또 다른 느낌 얘기해 볼 사람 있나요?”
그러자 이번에는 우리 교회 반주자 정표아저씨가 손을 들고 대답합니다.
“목사님, 저는 지게를 보면서 제일 먼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랑 비 오듯 줄줄 흘러내리는 구슬땀이 떠오르는데요?”
“가족들에게 맛있는 밥을 먹여주고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게 해주시려고 애쓰는 아빠가 떠오릅니다.”
정표아저씨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교회 똘똘이 나리가 대답하네요.
“와∼ 우리 교회 성도님들 수준이 보통이 아닌걸요? 그렇습니다. 지게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비지땀 흘리시는 아빠의 수고를 떠올리게 하죠. 그래서 제가 이번 대림절 4주 동안 십자가 아래 지게를 둔 것입니다. 우리를 제대로 먹여 살리시기 위해 피땀 흘리시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사랑, 아예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여 참 생명을 주시려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 사랑을 좀 더 리얼하게 느끼고 싶어섭니다. 그 사랑 이루시려고 우리에게 새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번 대림절 4주 동안 우리 모두 이 지게를 보면서, 지금 나온 느낌들처럼 더 풍부한 느낌들을 하나하나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4주가 흘러 성탄절 전야가 되었죠.
찬양대가 한창 성탄절 칸타타를 준비하고 있는데 선구오빠가 들어오더니 장구를 보고 또 떠벌입니다.
“마당은 기울었어도 장단은 바로 쳐라!”
바로 그 순간 장단을 치고 있던 정표아저씨 눈빛이 싸늘하게 빛납니다.
정표아저씨와 눈이 마주친 선구오빠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살인미소를 날립니다.
정표 아저씨 그 미소에 살인당하지 않으시고 젊잖게 한마디 하십니다.
“너의 속담질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표아저씨 장단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냥 장구를 보니까 자동적으로 튀어나온 속담이에요. 오해마시길...”
바로 그때였습니다.
목사님과 이웃교회 오요섭 권사님이 낑낑거리며 무언가를 들고 오시네요?
그걸 날라다가 강대상 위 십자가 아래 있는 지게 바로 앞에 두십니다.
가만 보니 소 여물통을 닮았습니다.
실제 여물통보다는 작게 만든 미니 여물통인가 봐요?
길이는 90㎝ 정도에, 키는 지게의 절반 정도입니다.
성탄절 칸타타 준비 중이던 찬양대원들이 우르르 여물통 가까이 몰려듭니다.
그 순간을 못 참고, 또 우리의 척척박사 선구오빠가 또 끼어듭니다.
“여물통에 누워있는 개는 자기도 먹지 않고 소도 먹지 못하게 한다.”
정말 못 말리는 순발력입니다.
“목사님, 이게 여물통인가요?”
우리교회 막내인 내가 질문했습니다.
“우리 교회 막내 소현이 눈이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걸 보니 꽤나 궁금한가보네? 그래 이게 여물통인데, 보통 여물통보다 작은 것을 구유라고도 하거든? 이건 구유 중에서도 꽤 작은 편이란다.”
내가 또 질문했어요.
“그런데 여물통에서 여물이 뭐죠?”
“여물은 소나 말의 먹이를 가리키는 말이야. 짚이나 풀을 잘 말려서 적당한 길이로 썰어 주는 게 바로 여물이란다.”
“아, 알겠다! 그러니까 여물통이나 구유는 바로 말이나 소의 밥그릇이로군요?”
“옳지, 우리 소현이 역시 똑똑하네?”
“그런데 목사님, 왜 구유를 지게 앞에 두시는 거죠?”
목사님께서 잔잔한 미소를 지으시며 저를 바라보고 대답하십니다.
“내일이 성탄절이지? 그래서 오늘 밤부터 우리 온 교회가 이 구유를 바라보며 무언가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여기 두는 것이란다.”
“아, 알겠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며 이 구유에 누우시고, 어른이 되셔서 지게 지고 애쓰시듯 늘 우리에게 말씀을 먹이시고 오병이어도 먹이시다가, 마침내 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차례차례 보여주는 것 아닌가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맞죠 목사님?”
영훈이오빠가 신바람나게 외칩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존경스런 눈초리로 영훈이오빠를 바라봅니다.
“와∼ 우리 영훈이 대단한 걸? 순식간에 정리해 버리는구나? 네 말이 맞다. 키가 가장 낮은 구유, 그보다 큰 지게, 그리고 그보다 훨씬 키가 큰 십자가가 차례차례 예수님의 일생을 보는 것 같지? 그런데, 한 가지 더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이 구유 장식을 하게 되었단다. 지금 비어있는 이 구유를 보면서 오늘 성탄절 전야부터 내년 1월 5일, 성탄절 둘째주일까지, 성탄절기 내내 묵상한다면, 금년 성탄의 의미가 좀 더 풍성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이튿날 성탄절 예배 때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구유 이야기를 또 하셨어요.
설교말씀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밥이 되시려고 한다는 거였어요.
빵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에 탄생하신거랑, 그것도 말과 소의 밥그릇인 구유에서 나신 것도 그냥 우연이 아닌 것 같다고 하시네요?
그리고 또 기억나는 건, 이건 좀 어려운 얘긴데요... 우리 안에 구유가 있다고 하시네요?
우리 속 마음이 지저분하고 어두컴컴하고 냄새나는 마굿간이나 외양간 구유를 닮았다고 하시네요?
그래서 차마 존귀하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래도 우리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난 경험이 있으셔서 그런 것 크게 가리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참 다행이죠?
그러고 보니까 정말 중요한 말씀이 하나 더 기억나네요.
예수님은 발가벗은 아기로 오셨다는 말씀이셨어요.
그건, 미래에서 현재로 발가벗고 온 터미네이터 같은 힘센 영웅과는 아주 다르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아주 힘없는 아기로 오셨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빠 요셉과 엄마 마리아는, 아무 힘없는 아기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 걸고 이집트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대요.
그건 바로 폭군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고요.
아무튼 중요한 건, 내 마음 속 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내가 지키고 양육해야 한다는 말씀이셨어요.
좀 황당하죠?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건, 내 마음의 구유 안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님이 바로 성경말씀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말씀 중에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절)는 구절이 있대요.
아무튼, 우리 목사님은, 이제부터 내 안에 새로 담기신 갓난아기 같은 새 말씀을 목숨 걸고 지키고 젖을 먹이면서 길러야 한다는 거였어요.
요셉처럼, 마리아처럼 말이죠.
아무튼, 목사님은 좀 너무 지나치신 것 같아요.
내 안에 새로 태어나신 아기 말씀님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는 헤롯이 누구인지 알아보래요.
아∼ 방학숙제도 못했는데, 또 숙제를 내 주시네요?
못된 왕 헤롯으로부터 아기 말씀님을 지키고 건강하게 양육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도 찾아보래요.
그러지 않고 말씀을 품기만 하고 게으름을 피우다가는 도둑같이 헤롯이 들이닥친다네요?
바로 그 대목에서 선구오빠가 또 떠벌이기 시작했어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선구오빠 저 속담사랑은 정말 못 말려요!
그나저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에게 헤롯왕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요셉처럼 아기예수님을 지키려고 이집트로 망명한다는 건 또 무얼 뜻하는 걸까요?
[이정훈 지음, 2013년 12월 28일 밤]
'성실문화 응용하기 > 본문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1월 12일 (주현절 1주) 예배준비 노트 (0) | 2014.01.11 |
---|---|
2014년 1월 5일(성탄절 2주, 신년주일) 예배준비 노트 (0) | 2014.01.04 |
2013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준비 노트 (0) | 2013.12.23 |
2013년 12월 22일(대림절 4주) 예배준비 노트 (0) | 2013.12.21 |
2013년 12월 15일(대림절 3주) 예배준비 노트 (0) | 2013.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