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이 오셨다!
[성서일과 4본문]
(이사야 52:7-10)
7.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8.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9.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시편 98)
1. 새 노래로 주님께 찬송하여라.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시다. 그 오른손과 그 거룩하신 팔로 구원을 베푸셨다.
2.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알려 주시고, 주님께서 의로우심을 뭇 나라가 보는 앞에서 드러내어 보이셨다.
3. 이스라엘 가문에 베푸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해 주셨기에, 땅 끝에 있는 모든 사람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수 있었다.
4. 온 땅아, 소리 높여 즐거이 주님을 찬양하여라. 함성을 터뜨리며, 즐거운 노래로 찬양하여라.
5. 수금을 뜯으며, 주님을 찬양하여라. 수금과 아우르는 악기들을 타면서, 찬양하여라.
6. 왕이신 주님 앞에서 나팔과 뿔나팔 소리로 환호하여라.
7.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과 세계와 거기에 살고 있는 것들도 뇌성 치듯 큰소리로 환호하여라.
8. 강들도 손뼉을 치고, 산들도 함께 큰소리로 환호성을 올려라.
9. 주님께서 오신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오시니, 주님 앞에 환호성을 올려라. 그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뭇 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리실 것이다.
(히브리서 1:1-4(5-12))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게 되셨으니, 천사들보다 더 빼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신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 천사들 가운데서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그러나 자기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하나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7. 또 천사들에 관해서는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시고, 시중꾼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 하였고,
8. 아들에 관해서는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 주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하며, 공의의 막대기는 곧 주님의 왕권입니다.
9. 주님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님의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셔서, 주님을 주님의 동료들 위에 높이 올리셨습니다" 하였습니다.
10.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11. 그것들은 없어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낡을 것이요,
12.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두루마기처럼 말아 치우실 것이며, 그것들이 다 옷처럼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의 세월은 끝남이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다. 그 증언으로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 자신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온 것뿐이다.
9.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4본문 전체에 감도는 느낌]
4본문에 여러 이미지와 주제들이 가득하다.
그 가운데 가장 빈번하고 가장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은 ‘빛’이다.
그 빛으로 인한 ‘기쁨’이 출렁인다.
그 빛의 근원은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오시니> 세상은 빛으로 환해지고 기쁨이 가득해지는 것이다.
그 빛과 기쁨은 금세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오셔서 정의로운 심판을 통해 세상을 깨끗이 씻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 (이사 52:7-10)]
구약본문에서 반복되는 문구들이 눈에 띈다.
“희소식”이 두 차례 눈에 띈다.(7)
“기뻐”하며 외치는 모습도 두 차례 나온다.(8, 9)
오랜 바벨론 포로생활,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의 끝에 환한 빛이 쏟아지듯, 기쁨의 함성이 솟구친다.
기쁨의 이유, 희소식의 정체는 무엇인가?
바로 주님 오심이다.(8)
오셔서 그 오랜 고통을 손수 위로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9)
처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는 개구쟁이 어린이였을, 지금은 노쇠한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들조차 기뻐 춤추며 함성을 지르는 것만 같다.
→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9)
[시편 (시편 98)]
시편본문 역시 기쁨으로 가득하다.
“새 노래”(1), “즐거운 노래”(4)로 가득하다.
“함성”(4)과 “환호”(6, 7), “환호성”(8, 9)과 “손뼉”(8) 소리로 가득하다.
무엇 때문인가?
역시 주님께서 오시기 때문이다.(9)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다.(2, 9)
[서신서 (히브 1:1-12)]
서신서 본문은 성자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소개로 가득하다.
성탄절 본문으로 적절하고 뜻 깊다.
이 소개 속에도 ‘빛’의 이미지가 엿보인다.
→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3)
또 하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설명된다.
→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2)
“...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3)
그리고 역시,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분이시다.
→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3)
오늘 서신서 본문이 예수님을 ‘빛’과 ‘말씀’으로 소개하는 것은 복음서의 그것과 통한다.
[복음서 본문 (요한 1:1-14)]
복음서 본문의 알맹이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서 본문의 예수님 표현은 서신서에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쓴 ‘빛’과 ‘말씀’과 통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빛과 말씀이 우리에게 오신 것으로 표현한다.
→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9)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
오늘 복음서 본문의 알맹이, 즉 예수님이 오셨다는 선언을 극적으로 표현한 3구절을 아래와 같이 꼽아 본다.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5)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
[나머지]
주님께서 오셔서 정의로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 묵상하면서, 빛과 어둠, 의(義)와 불의(不義)에 대한 생각을 했다.
성경에서, 출애굽 과정의 모세를 비롯하여 사사와 왕들의 역할 가운데 죄와 무죄, 참과 거짓을 가리는 ‘심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는 안다.
그러고 보니 성경 전체에서, 우리 인간사 전체에서 참과 거짓, 의와 불의를 가리는 일이 매우 중요한 알맹이라는 생각이 든다.
죄, 구원, 영생, 천국에 대한 이야기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지금도 쉬지 않고 펄떡이고 있는 내 심장처럼 생생한 현실, 내 뼈와 살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면서 죄(罪)와 의(義)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죄란 무엇인가? 불의란 무엇인가? 거짓이란 무엇인가? 어둠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욕망의 충돌로 인한 결과지만,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면서 시작된 비극의 열매이다.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자라나는 독초다.
독초가 변하여 산삼이 될 수는 없지만, 죄인은 변하여 의인이 될 수 있다.
이 신비로운 변신의 열쇠는 단순하다.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일, 회개다.
하나님의 뜻을 향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면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먼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죄란, 불의란, 거짓이란, 어둠이란 바로 사랑을 외면하는, 사랑의 결핍이었던 것이다.
일례로, 지금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음에도, 주일공동 예배 때마다 죄 고백을 하는 것은, 내 안에 사랑이 결핍하다는, 내가 사랑을 외면하고 있다는, 내가 지금 사랑의 길, 사랑의 기회를 외면하고 살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오늘 성탄절 4본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빛’, ‘기쁨’, ‘희소식’ 안에는 바로 그분의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자비(慈悲)’라고도 부른다.
대자대비(大慈大悲)!
큰사랑과 큰 슬픔!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다.
탕자, 집나간 자식의 고통을 몸소 느끼시며 슬퍼하시는, 단장(斷腸)의 어버이 마음이다.
그렇다.
이 어버이 마음, 자비심, 그 사랑 잊고 사는 게 바로 죄다.
(4본문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지난 해 성탄절 예배마당-성실문화 73호에 소개했다. 참고로, 성탄절 성서일과 본문은 ‘가, 나, 다’해 3년 모두 동일하다.)
[절기노래] 성탄아리랑 (이정훈 지음)
1절. 아기예수 오시던 날 꿈같은 밤에, 산아 산아 시온산아 너는 보았니
동방박사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별빛에 반짝이던 고마운 눈물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예수 오신다
2절. 아기예수 오시던 날 차가운 밤에, 산아 산아 시온산아 너는 들었니
빈들판 목자들이 밤새 부르던, 달빛에 덩실덩실 춤추던 노래
3절. 박사들은 보았단다 빛나는 큰 별, 하늘에서 내려오신 빛나는 말씀
목자들은 들었단다 천사의 노래, 참목자 우리예수 평화의 노래
4절. 참목자 우리예수 오시는 날을, 산아 산아 삼각산아 너는 보리라
알곡양떼 찾으시러 오시는 그 날, 백두산아 한라산아 너는 곧 보리라
[말씀동화] 빛을 품은 항아리
나는 항아리야.
천하장사급은 못 되도 몸집이 제법 둥글둥글한 편이고, 키는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만 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어.
해방둥이니까 내일 모레면 벌써 70살이란다.
내 고향은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봉성리 공장골이야.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래전 공장골엔 커다란 옹기가마가 있었단다.
공장골에 옹기가마가 들어서게 된 데는 아주 비밀스런 이야기가 숨어 있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힘없고 마음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
옛날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피해서 외진 산비탈을 찾아다녔어.
왜냐하면 산비탈에 옹기가마를 짓고 항아리를 만들기 위해서야.
옹기가마를 짓기 위해 구태여 산비탈을 찾은 이유가 무얼까?
옹기를 만들려면 1200도나 되는 높은 온도를 일주일간이나 유지하며 불을 때야 하거든!
그 때 필요한 넉넉한 장작 마련과, 또 경사지게 위로 흐르는 불길잡기에도 산비탈이 안성맞춤이지.
장작은 소나무 장작이 으뜸인데, 봉성리 공장골 뒷산에는 소나무와 좋은 흙이 지천이었단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늘 조마조마 숨죽이며 살아야 했었어.
모진 박해 속에서도 그분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늘 성경말씀을 읊조리며 얻는 큰 위로와 소망 때문이었단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이사야 63:9)’
큰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리저리 피신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
특히 여러 가정이 한꺼번에 도망할 때는 남들 눈에 띄는 게 늘 걱정이었을 거야.
그러나 봉성리 공장골처럼 외진 산비탈이라면 큰 걱정이 없었겠지.
생각해봐, 외진 산비탈에는 근처에 집도 없고, 게다가 옹기를 지으려면 노동력이 많이 필요할 테니 여러 가족이 한데 모여 사는 게 별로 의심받지 않았겠지?
그분들이 맨 처음 봉성리에 정착한 것이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지금 마을 어른들 기억에는 천주교인들이 대략 30여명 모여 살았다는 기억만 남아있단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때 탄압을 피해 흩어졌다가 해방과 동시에 다시 가마를 짓고 옹기를 굽기 시작했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육이오 전쟁 때 비행기 폭격으로 옹기가마가 부서진 뒤로 공장골에는 더 이상 연기가 피어오르는 옹기가마는 없단다.
아무튼 나는 해방과 동시에 새로 지은 옹기가마에서 구워냈던 첫 항아리야.
공장골 바로 옆 원덕(元德)에 옹기장(場)이 서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항아리를 사러 모여들었지.
처음에 나는 큼지막한 물 항아리가 필요한 어느 양평 아줌마께 팔려갔단다.
그런데 아줌마의 시어머니께서 나를 요리조리 꼼꼼히 살펴보시더니 간장항아리로 삼아버렸어.
그렇게 40년 동안 그 집의 씨간장을 담는 귀하신 몸이 되었지.
그런데 우리 주인아줌마는 양평교회 교인이셨어.
신앙생활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늘 성경말씀과 찬송을 입에 달고 사는 독실한 신자였단다.
특히 매일매일 우리 장독대 앞에 와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소리는 아주아주 정성스러웠지.
더구나 매일매일 방에서는 성경을 구성지게 읊조리며 독경(讀經)하셨어.
그 덕분에,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성경말씀을 제법 잘 알아듣게 되었단다.
익숙한 말씀이나 찬송가를 들을 때면 나도 웅웅거리며 공명을 일으키곤 했지.
간장 수면 위로 빈 공간에서 말씀 독경소리가 공명할 때마다 간장이 더 향기롭게 무르익는다는 건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해마다 성탄절 전야에 양평교회에서 새벽송을 부르러 올 때면 내 가슴은 뽀글뽀글 발효 소리로 장단을 맞추곤 했지.
새벽송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어.
그런데 이상하지?
우리 주인아줌마가 자주 읊조리시는 성탄절 말씀인 요한복음 1장 말씀을 들어보면, 분명히 빛이 오셨다고 했거든?
그런데 왜 이 노래 1절은 ‘어둠에 묻힌 밤’이라고 하는 걸까?
나는 어두컴컴한 건 딱 질색인데... 아무튼 좀 이상해.
그래서 이 노래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4절 가사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 밤, 그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었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아기 예수님 얼굴빛이 얼마나 환했으면 세상 빛이 되실 정도였을까?
아무튼 난 환한 빛이 좋아!
내 안에 담긴 낯빛 거무스름한 간장도 밝은 빛을 좋아한단다.
빛이 환하게 들어와서 항아리 속이 따뜻해지면 보글보글 발효도 잘되거든.
그리고 빛은 모든 색을 찾아준다지?
어둠이 세상 모든 것의 색을 새까맣게 만들어버리듯이, 빛은 반대로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걸까?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어둠 속에서 온통 새까맣던 세상은 빛이 비치는 순간 각각 제 빛깔을 되찾게 되는 거라고!
음식에 소금을 치는 것도 짜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원래 그 음식 맛을 살려내기 위한 거라지?
소금과 빛은 바로 그런 거야!
그렇게 40년 세월이 흘렀단다.
어느덧 주인아줌마는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셨어.
그리고 자식들 성화에 못 이겨 장남네랑 함께 사시려고 서울로 이사를 가시게 되었지.
그 때 작은 항아리들은 다 가져가셨는데 나는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가져갈 수 없으셨단다.
40년 정든 씨간장 항아리를 두고 떠나시는 게 마음 아프셨는지 이사하기 전날 밤 나를 닦고 또 닦아 주셨지.
내 안에 들었던 씨간장도 다 퍼 가시는 바람에 내 안은 참 오랜만에 텅 비게 되었단다.
빈집의 대문도 굳게 잠겼고 빈 항아리가 된 나를 부엌에 들여놓은 바람에 햇볕도 제대로 못 쬐었지.
그렇게 나는 10년을 어두컴컴한 곳에 살게 되었단다.
밝은 빛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그리운 건 햇빛만이 아니었어.
그 오랜 세월동안 우리 아줌마, 아니 할머니 성경 독경 소리도 못 듣고 찬송 소리도 못 들었어.
물론 양평교회 새벽송도 더 이상 안 찾아왔지.
아! 언제나 성경말씀과 찬송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삐끄덕∼ 부엌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잠을 깨었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지.
서울 가신 할머니께서 십년 만에 돌아가시자 자식들이 고향집을 팔기로 한 거였어.
빈집이 팔리면서 나도 따라 팔려나가게 되었네?
집에 있던 오래된 물건들과 함께 서울 황학동 골동품 가게로 팔려간 거야.
덜컹덜컹 난생처음 자동차를 타고 한 시간도 넘게 달려서 황학동에 도착했단다.
와! 그런데 그 가게에는 나보다 먼저 와 있는 항아리들이 여러 개 있었어.
오랜만에 만나는 항아리 동무들이 하도 반가워서 덥석 인사를 했지.
“야∼ 반갑다 얘들아! 난 양평에서 왔어. 공장골 옹기가마 출신이지. 그런데 너흰 어디서 왔느냐?”
그러자 저 구석에 있던 자그마한 요강단지 녀석 하나가 날 째려보며 대답하네.
“야, 너 몇 살이야? 어디서 처음 들어온 녀석이 반말지거리야? 덩치만 크면 다냐? 너 도대체 몇 살이야?”
얼떨결에 한 방 맞은 나는 어리버리 하게 대답했어.
“어? 어! 난 한 쉰 살 쯤 되었는데?”
“쉰 살? 흥! 난 낼 모레가 환갑이야. 너보다 열 살이나 많은 형님이라고. 앞으로 반말하지 마라.”
기가 죽은 나는 그냥 입을 닫고 조용히 있었지.
그 때 내 옆에 있던 작은 항아리 하나가 입을 열었어.
“야, 항아리끼리 무슨 나이 타령이냐? 항아리는 나이보다는 그저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 무얼 담는 항아리냐가 중요한 거야. 안 그래?”
그러자 모든 항아리들이 그 항아리 말이 옳다고 맞장구를 쳤어.
그 때 또 다른 단지가 입을 열었지.
“그렇다면 무얼 담은 항아리가 최고의 항아릴까? 금을 담은 금 항아릴까? 쌀을 담은 쌀 항아릴까? 아니면 소금항아리? 꿀단지?”
그 때 가장 깊은 구석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 있던 항아리 하나가 대답했어.
자세히 보니 구석구석에 흠집도 나고 거미줄도 잔뜩 친 낡은 항아리였어.
“최고의 항아리는 화수분이란다. 화수분 단지가 최고지.”
젊은 항아리들이 물었어.
“어르신, 화수분이 뭐예요? 화수분 단지가 뭘 담는 단지죠?”
“화수분이란 무얼 담든지 그걸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신비로운 항아리란다. 성경책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와 사르밧과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때 그 과부 집의 그릇에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나왔지? 그런 게 바로 화수분이야.”
난생처음 화수분이라는 걸 알게 된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어.
내가 화수분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
그날부터 나는 난생 처음 꿈을 갖게 되었단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꿈을 비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
“하나님 제가 화수분이 될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화수분이 되게 해주세요. 최고 항아리가 되고 싶은 욕심보다는, 그냥 화수분이 되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아서예요. 화수분이 되면 아무도 나를 외롭고 컴컴한 곳에 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서 여기보다 좀 더 환한 곳으로 팔려가게 해주세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기도를 시작한지 사흘 만에 나는 정말로 팔려가게 되었단다.
그것도 어느 교회로 팔려가게 된 거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기도를 너무너무 잘한 건가? 아니면 원래 기도를 하면 이렇게 빨리 소원이 이루어지는 건가?’
내가 살게 된 교회는 서울 청파동에 있는 청파교회라는 곳이었어.
난생 처음 만난 교회지만 왠지 낯설지가 않았지.
더구나 그 교회에는 햇빛발전소라는 게 있지 뭐야?
햇빛을 받아서 전기를 만드는 건데, 아무튼 햇빛을 무지무지 좋아하는 나는 이 교회가 매우 마음에 들었어.
나는 교회 울타리 안 예배당 뒤꼍에 놓였단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그마한 뒷문이 있어서 가끔씩 지나다니는 곳이었어.
교회 여선교회 아줌마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깨끗한 물로 목욕도 했지.
그리고 뒤꼍에 놓여진지 며칠 뒤 어느 저녁 무렵이었어.
어린아이 하나가 자그마한 비닐봉지를 들고 조심조심 다가오더니 내 뚜껑을 열고 무언가 쏟아 붓는 거야.
쌀이었어.
나중에 알고 보니 내 가슴에 자그마한 이름표가 붙어 있었단다.
거기 이렇게 쓰여 있었지.
‘사랑의 쌀 항아리’
그 뒤로 시도 때도 없이 이사람 저사람 쌀을 가져와서 내 안에 붓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조용히 다가와서 쌀을 퍼가기도 했지.
퍼가는 분들은 주로 홀로 사는 외롭고 가난한 할머니거나, 부모 없는 가난한 어린이들이었어.
이렇게 내 안에 담긴 쌀은 떨어질 만하면 차오르고, 넘칠만하면 누군가 퍼가고 그랬지.
아주 가끔 넘칠 정도가 되면 여선교회 아줌마들이 쌀을 퍼서 떡을 만들어 이웃에 돌리곤 했어.
이 때 내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니?
내가 그토록 꿈꾸며 기도했던 화수분이 된 거잖아?
게다가 내 안에 쌀만 가득가득 차는 게 아니야.
내 안에 쌀을 담는 사람, 내 안에서 쌀을 퍼가는 사람,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를 쓰다듬기도 하고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도 하고...!
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항아리가 바로 나 아닐까?
그렇게 한 해, 두 해, 어느덧 2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어.
내 나이도 70세가 다 되어가던 어느 날, 내게 상상도 못했던 비극이 찾아왔단다.
큰 바람이 불던 어느 날이었어.
이웃 건물 옥상에 있던 커다란 양철통이 태풍에 날아와 내 가슴을 때린 거야.
나는 쨍그랑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지.
울상이 된 여선교회 아줌마들은 “주여∼ 주여∼” 흐느끼면서 쌀을 주워 담고 내 조각을 차곡차곡 모았단다.
난 몸도 마음도 너무너무 아파서 기절해버렸고!
그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희한한 냄새를 맡고 눈을 떠보니 내 몸이 다시 회복되고 있는 중인 거야!
이런 걸 봉합수술이라고 하나?
목사님과 교우들이 함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나를 재생시키고 있는 중이었어.
여러 교우들이 한데 모여 직소퍼즐 맞추듯이 내 조각조각을 요리조리 맞춰가며 강력접착제를 붙여서 드디어 내 원래 모습처럼 만들어주었단다.
그러나 사실 완전한 원래 내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어.
아무리 공들여 붙였어도 군데군데 울퉁불퉁하고 곳곳에 금간 모습이 완전 불량배 같아 보였지.
이런 항아리에 다시 쌀을 담을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렇다고 간장을 담거나 물을 담는 건 더더구나 불가능한 일이었지.
‘아! 이제 난 완전히 폐품이 되고 마는구나!’
이렇게 낙심하고 있는데 교회 청년들이 다가오더니 나를 번쩍 들고 어디론가 가는 거야.
이대로 재활용 처리장으로 가는 건가 싶었는데, 웬걸? 나를 교회 앞마당으로 가져가는 거였어.
20년 동안 뒤꼍만 지키던 나를 사람들이 수도 없이 지나다니는 앞마당에, 그것도 교회에서 가장 환하고 아늑한 자리에 가져다 놓는 거야.
그런데 좀 이상하네?
나를 바로 세워두는 게 아니라 눕히고 있네?
‘이건 뭐지?’
아니 항아리를 세워두지 않고 눕혀서 뭘 하려는 거람?
또 내가 구르지 않도록 바닥에 닿는 부분에 폭신폭신한 것들로 채워 나를 고이는 거야.
그리고는 세상에나! 내 안쪽에 칠을 시작하는 거였어.
아주 진한 쪽빛 염료로 깨진 항아리 안쪽을 잔뜩 칠하고 나니까 아주 신비한 분위기, 신비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지 뭐니?
그러고 나서 그 검푸른 색깔 위에 하얀 물감, 연노랑 빛깔의 물감으로 작은 점들을 찍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내 항아리 안쪽 윗부분, 그러니까 둥근 천정 같은 곳에 작은 별들을 그려 넣은 것이었어.
그리고 그 가운데 아주 밝고 커다란 별을 하나 그려 넣었어.
‘이건 또 뭐지?’
얼떨떨, 어리둥절, 내 안에 칠한 물감이 마르자마자 교회학교 교사들과 어린이들이 내게 다가왔어.
그들은 함께 온 정성을 모아 내 안에 짚을 깔고 이런저런 소품과 인형들을 넣어 장식을 했어.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교회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모두 모여 나를 둘러싸고 합창을 하네?
대림절 찬양이었어.
그러고 보니 지금은 대림절,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성탄절이야!
내 겉은 울퉁불퉁 여기 저기 금간, 마치 동네 불량배같이 험하고 추한 모습이지만, 내 안은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집으로 꾸민 것이었어.
아기 예수께서 태어난 작은 집, 여러 가축들과 함께 여물통 속에 강보에 싸여 누인 아기 예수님!
세상에서 가장 누추한 집, 별빛도 들어올 수 없는 동굴 속 가축우리였지만, 그 안에 별 중의 별이 뜬 거야!
그 안에 왕 중의 왕이 태어나신 거야!
그 안에 참 빛이 태어나신 거야!
“오! 하나님! 고맙습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내 안에, 이 누추하고 남루하고 어두컴컴한 내 안에 세상에서 가장 강렬하고 가장 맑고 밝은 빛이 들어오신 거야!
목사님께서 교회학교 학생들과 함께 성경말씀을 봉독하셨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한 1:1)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5)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
얘들아, 난 항아리야.
최고의 항아리라는 화수분도 되어보았지만, 지금은 그 보다도 더 멋진 항아리가 되었어.
깨지고 망가지고 비록 볼품없는 외모지만, 내 안에 주님을 모시니까, 성도들이 내게 다가와서 함께 말씀을 읊조리고 말씀노래를 부른단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내 안에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듯 웅웅웅 공명을 한단다.
너흰 이렇게 어마어마한 성탄절 선물 받은 적 있니?
난 말씀을 품은 항아리야, 그리고 난 빛을 품은 항아리야!
얘들아 너희는 어떤 성탄절 선물을 받고 싶니?
지금 너희 안에 무엇을 품고 있니?
[이정훈 지음. 2013년 11월]
(* 오늘 예배준비 노트는, 『성실문화』 77호 ‘예배마당’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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