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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3년 11월 24일(왕국절 마지막주일-왕이신 그리스도의 날)예배준비 노트

 

낙원으로 인도하는 목자

 

[성서일과 4본문]

 

(예레 23:1-6)

1.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 나 주의 말이다.

2.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 너희의 그 악한 행실을 내가 이제 벌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3.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다시 그들이 살던 목장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떠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하나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5.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6.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누가 1:68-79)

68.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69.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70. 예로부터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셨다.

72.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자기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

73.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

74.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75.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78.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79.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골로 1:11-20)

11.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13.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14.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누가 23:33-43)

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이번 주 4본문 말씀은, 왕국절 마지막 주일, 즉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에 어울리는 본문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왕’이란 평화를 이루실 분, 즉 우리를 구원해주실 분입니다.

본문에는 ‘왕’을 ‘목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주일 4본문의 알맹이는 ‘구원자’입니다.

 

[구약 (예레 23:1-6장)]

오늘 구약 본문에는, ‘나쁜 목자들’과 ‘좋은 목자’가 짝을 이룹니다.

동시대 예언서 에스겔 34장에도 나옵니다.

나쁜 목자는, 주님 목장의 양 떼, 즉 유다 백성들 죽이고 흩어버린 유다의 엉터리 왕들을 가리킵니다.

‘목자’는 옛 중동지역에서 임금을 품위 있게 부르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독일성서공회판 성경 해설)

주님께서 “친히” 남은 양을 모아 원래 살던 목장으로 모으시리라고 선언하십니다.(3)

“참다운 목자들”을 세우신다고 합니다.

주님만 의지하는 의로운 왕들을 의미합니다.

급기야, 진정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그리하여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의로운 가지”를 다윗가문에서 돋아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5)

 

참 목자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양떼를 생각합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양떼를 좋은 곳으로, 평화의 땅으로 인도합니다.

 

[신약 (누가 1:68-79, 골로 1:11-20, 누가 23:33-43)]

오늘은 시편 대신 누가복음 1장 끝에 나오는 ‘사가랴의 예언’입니다.

오늘 구약본문과 짝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서 “능력 있는 구원자를” 일으키시리라는 예언을 재확인합니다.

바로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분입니다.(71, 74)

그 능력 있는 구원자(참 목자)는 우리 안에 남아있는 “두려움”들을 없애고(예레 23:4, 눅 1:74) 평화의 땅, 정의의 땅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상, 구약과 누가복음에서 예언한 “의로운 가지”, “능력있는 구원자”는 물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서신서 본문인 골로새서 역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정의와 평화 사랑으로 통치하실 그 나라로 이끄실 평화의 임금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복해서 가르칩니다.(골로 1:13)

특히 서신서에서는 우리의 참 구원자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심을 강조합니다.(1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구원하실 무기는 다름 아니라 “십자가의 피”입니다.(20)

 

오늘 복음서 본문이 누가복음 23장이 선택된 것 때문에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깊이 읽고 묵상하다보면,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에 왜 이 본문을 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년 1월 6일 주현절(주현절 첫 주일) 본문에서는 아기 왕의 탄생을 축하하러 동방박사들이 왔었는데, 주현절 마지막 주일, 정작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본문은 참으로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본문의 분위기는 시작부터 참담합니다.

이런 저런 영화들을 통해 본, 인간의 가장 비참한 장면으로 기억될 전쟁장면이 연상됩니다.

한 겨울, 전쟁터에 수많은 전사자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그 사이를 헐벗은 피난민 하나가 다니면서 죽은 병사들의 몸을 뒤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 발에 맞는 신발을 발견하고 얼른 벗겨내어 기쁘게 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최소한의 욕망이라고 하면 변명이 될까요?

죽은 자에 대한 아무런 예의나 존엄, 뭐 이런 건 이야기할 짬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보다 더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포함한 벌거벗은 죄수 세 명이 십자가 형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서 병정들이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인간의 가장 밑바닥 욕망과, 예의 없음, 무례함을 봅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이런 인간 밑바닥 암흑의 경지에, 참혹함을 더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병정들, 그리고 곁에 달린 한 죄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 말, 말입니다.

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것은 오늘 4본문의 공동 주제인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나 구원하라지.”(35)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37)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39)

 

그리고 그 앞에는 단서가 달려 있습니다.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35)

“유대인의 왕이라면,”(37)

“그리스도가 아니냐?”(39)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 무례한 자들의 마음속에 0.1%의 기대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 골로새서 1:18절,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이 말씀과 연이어, 지금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실망하며 외치는 소리를 듣는듯합니다.

(물론 지금 한국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실망은, 예수님에 대한 실망(?)과는 차원이 다른 실망입니다.)

한국교회에 대하여 99.9% 절망한 세상이, 0.1%의 희망을 가지고 입에 거품을 물고 “개독”이라고 외치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오늘 복음서 본문의 대미는 다른 쪽에 달린 죄수와 나누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

 

저는 이 말씀에서 참 목자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그 무지막지한 고통과 절망, 낙심 가운데서도 목자의 마음을 잃지 않고 한 영혼과 대화하시는 모습!

남은 양 한 마리까지, 기어코 낙원으로 이끄시는 목자여!

 

 

[나머지]

* 오늘은 왕국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대림절이 시작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전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왕국절 마지막 주일인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과 절묘하게 이어집니다.

 

** 한국 최초의 한인 작사작곡 찬송가 ‘목자여’ (박재봉 작사, 장수철 작곡)를 소개합니다.

1930년대 북간도 만주벌판에 여기 저기 흩어져 살면서, 일제의 수탈과 마적떼의 습격에 시달리면서도 주님 오실 날 기다리며 살던 동포들의 교회를 위해 목숨 걸고 부흥회를 이끌러 다니시던 박재봉 목사님이 지으신 노래입니다.

 

[목자여]

1.저목자여 깊은잠을 어서 깨어라

밤은벌써 사라지고 먼동이 터온다

희미하던 지평선도 완연해오니

목자들아 양을몰아 가야하리라

 

2. 금빛같은 새벽놀이 비낀 저언덕

신기하게 이슬맺힌 푸른 저초원

신선하고 거룩하다 내목장이니

목자들아 양을몰아 그리로 가자

 

3. 비탈길을 싸고돌제 다리 아프고

산마루를 올라갈때 숨이 막혀도

주린양떼 생각하여 참고 갈지니

양을치는 참목자의 장한 뜻이라

 

4. 몸에걸친 단벌옷이 내게 족하고

짚고나선 지팡이가 넉넉하여라

이제내게 다른염려 아주 없으니

이한날을 목장에서 양을 치리라

 

 

 

 

 

[말씀노래] 나의 임금, 나의 예수님

1. 골고다 예수님곁 십자가에 달리던날 / 골고다 예수님께 피토하며 간구했네

예수님 주님께서 주님나라 드실때에 / 날기억해 주옵소서 나를기억 하옵소서

2. 십자가 저아래서 지도자들 비웃었네 / 택함받은 분이라면 자신이나 구원하소

병정들도 희롱하네 왕이라면 너나살려라 / 옆에달린 죄수조차 구원하라 원망하네

3. 이는유대 왕이니라 죄패아래 예수얼굴 / 가시돋힌 면류관에 보혈이 흐릅니다

온세상이 비웃어도 낙심하지 마옵소서 / 나의왕 예수시여 나를기억 하옵소서

 

 

 

 

 

 

[말씀 동화] 낙원동 골목대장 하늘이를 아시나요?

 

하늘이를 아시나요?

아마 우리 낙원동에서는 골목골목 하늘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걸요?

그런데 낙원동은 아시나요?

낙원동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유명한 동네죠.

낙원동은 근처에 유명한 탑골공원도 있고요, 옛날 물건들 많이 파는 유명한 인사동도 근처에 있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낙원동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낙원상가죠.

 

낙원상가는 오래된 건축물이에요.

1960년대 말에 지은 꽤 큰 건물이죠.

한 건물 안에 상가 뿐 아니라 영화관, 아파트까지 섞여 있어요.

김수근이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지었다는데 자동차 다니는 도로 위에 지은 특이한 건물이에요.

그래서 꼭 하늘위에 둥실 떠있는 집 같답니다.

 

하늘이는 어느 해 10월 4일 외할머니께서 사시는 바로 이 낙원아파트에서 태어났어요.

하늘이는 10월 4일생이라서 1004, 즉 천사(天使)처럼 하늘스러운 아기라고들 했죠.

더구나 하늘 위에 떠 있는 아파트, ‘낙원(樂園)’에서 났으니 하늘이란 이름이 꽤 잘 어울리네요.

 

그런데 그런데 하늘이는 이름과는 달리 좀 험한 아이로 유명하게 되었답니다.

어른들이 그러시는데요, 하늘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둘이서만 살아서 그렇다네요.

엄마아빠가 하늘이 낳고나서 헤어지고, 엄마는 곧 재혼하면서 하늘이를 친정엄마께 맡겨버린 거죠.

그래서 하늘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집보다는 바깥에서 많이 놀게 되었답니다.

 

친구가 없어도 낙원에는 놀거리, 볼거리가 많았죠.

물론 먹을거리도 많았고요.

낙원에는 허리우드극장이라는 영화관도 있고요, 엄청나게 많은 악기점들로 가득합니다.

하늘이는 허리우드 극장에도 제집처럼 들락거립니다.

아름다운 소리 가득한 악기점들도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습니다.

 

값싼 순대국집, 추어탕집, 그리고 하늘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두텁떡이 산더미처럼 쌓인 떡집들!

호두, 잣, 밤, 대추... 수많은 견과류를 잔뜩 넣고 만든 두텁떡을 보고 하늘이가 침을 꼴깍거립니다.

그러면 마음씨 좋은 주인아줌마는 만들고 남은 두텁떡 쪼가리를 주시곤 하죠.

낙원상가 안팎의 모든 가게 아줌마 아저씨들은 매일 만나는 하늘이를 매우 귀여워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에게 낙원상가는 엄마보다 사랑 많고, 먹을거리도 많고, 참 재미있는 낙원이었어요.

낙원상가 구석구석, 낙원동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하늘이는 누가 뭐래도 낙원동 골목대장이었습니다.

 

그런 하늘이가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주먹대장이 되어버린 거예요.

부모 없는 고아라고 놀리는 아이들에게는 주먹이 약이었거든요.

낙원동 골목골목마다 누비고 다니던 귀염둥이 골목대장이 어느새 악바리 주먹대장이 되어버린 거죠.

 

중학생이 되고나서는 하늘이를 따르는 졸병들도 꽤 늘었습니다.

어른들 흉내 내느라고 자기들 멋대로 ‘스카이파’라는 이름도 붙였죠.

돌주먹 하늘이가 어느 날 낙원동 골목, 오십대 일의 위기상황에서, 마치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늘을 날아다니며 순식간에 전쟁을 끝내버렸다는, 그 유명한 오십대 일의 전설도 지어냈습니다.

 

하늘이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낙원동 거리를 지나면, 언제나 조무래기들이 뒤를 따릅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낙원동 떡집 아줌마들은 이구동성으로 걱정을 하시네요.

 

“아휴 어쩌면 좋지? 그 착하고 귀엽던 우리 하늘이가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그런데 하늘이에게는 한 가지 남다른 점이 있답니다.

절대 아이들에게 셔틀을 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셔틀이라는 말은, 마치 셔틀버스가 짧은 구간을 부지런히 반복 운행하는 것처럼, 학교에서 주먹대장이 약한 아이들을 부려먹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죠.

가방셔틀, 빵셔틀, 심지어 안마셔틀, 숙제셔틀까지 다양하답니다.

 

하늘이는 학교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주먹대장이지만, 절대 힘없는 아이들에게 셔틀을 시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요, 좀 우스운 거지만, 그 까닭이 바로 엄마에 대한 미움 때문이라네요?

어느 날 문득, 엄마가 종종 외할머니께 반찬 만들어 와달라는, 반찬 심부름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하늘이는 깨닫게 된 거예요.

 

‘아니 이건 반찬셔틀?’

 

그 뒤로 하늘이는 절대 힘없는 아이들에게 그 어떤 셔틀도 시키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어울려 다니는 스카이파 아이들에게도 셔틀 같은 짓은 못하게 합니다.

셔틀이 비굴한 짓이라는 것을 하늘이는 온몸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따라 하교 길에 하늘이는, 점심 급식을 제대로 안 먹어서 그런지 배가 몹시 고팠어요.

예전 같으면 낙원동 떡집에 가면 맛있는 두텁떡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 텐데, 이젠 그럴 수 없습니다.

머리가 크면서부터는 잘 놀러가지도 않게 되고, 어쩐지 주인아줌마들께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피해 다녔기 때문이죠.

그건 떡집 뿐 아니라, 대부분 가게들, 극장과 악기점들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덧 낙원상가는 더 이상 하늘이에게 낙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수요일이라 하늘이는 얼른 인사동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인사동에는 미술품을 전시하는 화랑들이 많기 때문이죠.

대부분 수요일마다 새 작품전시를 시작해서 화랑들 곳곳마다 기념행사들을 엽니다.

그래서 화랑들마다 돈 없어도 눈치껏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잔치음식들 천지거든요.

 

그날도 하늘이는 대충 아무 화랑에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른 따라온 아이인척, 손님인척 이것저것 맛있는 걸 골라 먹고 있었습니다.

물론 미술작품이나 그걸 그린 작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죠.

그렇게 이것저것 음식을 먹다가 문득 가까운 벽에 걸린 작품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담한 화폭에 사자와 소가 사이좋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그림입니다.

온통 연두 빛깔 풀밭과 주렁주렁 달린 색색깔 과일들이 참 풍성하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칫, 무슨 마다가스카 알렉스랑 마티가 여기 또 나오네?’

 

마다가스카는 하늘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 제목입니다.

거기 동물원을 탈출한 숫사자 알렉스와 친한 벗 얼룩말 마티가 나오죠.

그런데 그림 저 아래엔 붉으락푸르락한 빛깔로 전쟁의 포화로 불타고 있는 세상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자와 소가 사이좋게 풀을 뜯는 세상은 공중에 둥실 떠 있네요?

어릴 때 본 만화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랑 비슷합니다.

 

그림 아래 제목이 있어서 유심히 들여다보니, ‘실낙원(失樂園)’이라 쓰여 있습니다.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뜻입니다.

때마침 작가 선생님이 바로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하시네요?

 

“이 그림은 성경말씀 이사야서 65:25절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린 작품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욕심 때문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로, 이 잃어버린 에덴, 잃어버린 낙원, 실낙원은 언제나 우리들의 부끄러운 욕심꾸러기 모습을 비춰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이 되었죠.”

 

하늘이는 그 그림과 제목을 번갈아 보다가 왠지 문득 자기 모습을 느끼게 되었어요.

마치 거울처럼 내 모습이 보이네요.

소들과 함께 풀을 뜯던 평화로운 사자가, 세상에나! 어느새 소를 잡아먹고 피투성이가 된 입을 벌리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지? 엄마 잃고, 낙원동을 잃고, 나 자신 조차 잃어버리다니!’

 

엄마 없는 아이라는 설움, 엄마에 대한 분노로 시작한 주먹질이, 나를 길러주신 우리 외할머니 사랑조차 외면하고 집에도 안 들어가게 만든 겁니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들어갈까?

지금 하늘이는 거의 집을 나와 살고 있습니다.

낙원동 구석구석, 마치 내 엄마 젖처럼 거저먹을 수 있었던 수많은 낙원들과도 멀어진지 오랩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얼굴도 모르는 아빠, 나를 버린 엄마, 그리고 나를 비웃고 업신여기는 아이들에 대한 분노, 그 분노가 내 주먹질의 에너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나를 잃고, 낙원동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나를 삼키고 나의 낙원을 삼켜버린 어둠이었던 것입니다.

 

문득 ‘실낙원’ 옆에 걸린 그림도 눈에 들어옵니다.

십자가에 달린 세 사람을 그린 작품이네요!

아마 예수님 죽으시는 장면을 그린 그림 같습니다.

그림은 온통 어두운 검정색과 검붉은 색으로 가득한데, 유독 예수님과 그 옆에 달린 또 한 사람의 얼굴 부분만 환한 색으로 칠했습니다.

하늘이는 눈을 크게 뜨고 제목을 들여다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오∼!”

 

하늘이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 그림을 보니,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그 옆에 달린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은 머리에 쓴 가시관 때문에 온통 피투성이 얼굴이지만, 마주보는 그 사람 얼굴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 같지 않게, 씻은 듯이 아주 맑고 깨끗합니다.

어?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사람의 얼굴이 딱 하늘이를 닮았네요?

하늘이는 또 한 번 심장이 멎을 뻔했습니다.

 

‘뭐지? 이건 도대체 뭐지?’

 

정신없이 화랑을 나왔습니다.

배고픈 줄도,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는 욕구도 다 사라졌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그림으로 다시 만난 예수님 때문에 지금 하늘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얼굴을 쏙 빼닮은 그 십자가에 달린 그 이름 모를 사나이 때문에 몸이 덜덜 떨립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하늘이는 멘붕 상태입니다.

 

‘내가 왜 십자가에 달려 있는 거지? 그리고 왜 제목이 저렇지? 십자가에 달렸다는 건 죽는다는 건데... 왜 낙원에? 왜 예수님이랑 함께 낙원에 있을 거란 말이지? 그럼 내가 곧 죽나?’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낙원아파트 앞입니다.

하늘이는 한달음에 뛰어올라 집에 들어갑니다.

오늘도 외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중이셨습니다.

보나마나 나를 위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하얗게 질린 하늘이 얼굴을 본 할머니는, 참 오랜만에 하늘이를 꼭 껴안으십니다.

덜덜 떨리던 하늘이의 몸뚱이가 할머니의 품속에서 조금씩 편안해집니다.

할머니 품에 안기니 비로소 낙원에 돌아온 느낌입니다.

 

이튿날 하늘이는 오랜만에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집밥을 먹고 학교로 갑니다.

주먹대장 하늘이 주위로 스카이파 아이들이 몰려드네요.

하늘이는 당분간 주먹을 펴고 연필을 잡자고 아이들을 타이릅니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어제 그 화랑으로 달려갔습니다.

조금이라도 말짱한 정신에, 배도 안고픈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그 그림을 다시 찬찬히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 그림을 그린 작가를 만나 확인하고 싶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 이름 모를 사나이의 얼굴이 왜 내 얼굴하고 똑 같냐고... 내 사진을 어디서 보고 베낀 거냐고... 꼼꼼히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랑에 도착해 보니, ‘실낙원’은 걸려 있는데 , 그 바로 옆에 걸려있던 십자가 그림이 없어졌습니다.

그 대신 전혀 다른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뭐지? 이건 또 뭐지?’

 

허겁지겁 화랑에 앉아 있는 작가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저, 아줌마 어제 저기 걸려 있던 그림 어디 갔나요?”

 

“무슨 그림 말이니?”

 

“네 저기 ‘실낙원’ 옆에 걸려 있던 그림이요. 제목이 아마..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였을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세 사람 그림이요.”

 

“어머, 그런 그림은 여기 없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그나저나 네 이야기가 참 멋진데? 사실 나는 저 ‘실낙원’을 그리면서 무언가 심한 갈증을 느꼈었단다. 낙원을 잃어버린 뒤에 이어질 낙원을 다시 찾는 이야기를 한창 궁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딱 느낌이 오는 걸?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정말 멋지다. 고마워, 그런데 네 이름이 뭐니?”

 

하늘이는 정신없이 다시 화랑을 뛰쳐나왔어요.

어제 그림으로 보았던 내 얼굴과 나를 마주보시던 피투성이 예수님 얼굴이 지금도 이렇게 생생한데, 그게 현실이 아니었다니?

그럼 꿈이었단 말인가?

비몽사몽이라는 거, 환상이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오늘부터 하늘이는 할머니랑 할 말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하늘이 외할머니는 교회 권사님이시니까 여쭤보면 많은 걸 알려주실 것입니다.

아주 어릴 때 할머니 손잡고 교회 다니던 시절, 교회학교 선생님께 배운 예수님 이야기 기억도 조금씩 되살아나겠죠.

 

그러고 보니 낙원동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네요.

하늘이는 오랜만에 낙원상가를 올려다봅니다.

떡집 아줌마들께도 오랜만에 꾸벅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모두모두 돌아온 하늘이를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낙원동 골목대장 하늘이가 다시 사랑스러워지나 봅니다.

 

[이정훈 지음, 2013년 11월24일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