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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부활절 4주(2025년 5월 11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복음 10:28)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9:36-43)

36.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37. 그 무렵에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겨서 다락방에 두었다.

38. 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심부름꾼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42.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43.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9-17)

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하고 외쳤습니다.

11.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12.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13.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0:22-30)

22.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24.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26.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끝까지 양떼를 보살피시는 참 목자 예수입니다.

 

사도행전, “다비다여, 일어나시오!”(사도행전 9:40)

시편,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 23:4)

서신서,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계시록 7:17)

복음서,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요한복음 10:28)

 

오늘 요절은,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입니다.(요한복음 10:28)

 

 

[사도행전과 시편본문 정리 (사도행전 9:36-43 / 시편 23)]

오늘 사도행전본문 소제목은 다비다가 살아나다입니다.

과부들은 공동체에서 가장 가난한 약자들입니다.

다비다는 그 과부들의 후원자였습니다.(39)

다비다에게 붙은 여제자라는 이 표현은 성경에서 유일합니다.(36)

 

베드로가 묵은 집주인의 직업이 무두장이입니다.(43)

무두장이는 부정한 직업이라 유대인들이 꺼리고 가까이 하지 않음에도

베드로는 그 집에 들어가고 거기서 잠도 잡니다.

 

부활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의 능력은,

죽은 이가 되살아나는 능력만큼이나(40) 큰 능력은,

(예수님께서 평생 양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지키는 목자이셨던 것처럼)

약자들(여자-여제자, 과부들, 무두장이)을 높이고 섬기고 가까이 하는데서 나옵니다.

교회의 능력은!

 

오늘 시편본문 소제목은 좋은 목자입니다.

오늘 시인은 약자의 상징을 여럿 내보입니다.

약자의 인생길에는 그늘 골짜기와(4) 원수들이(5) 늘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약자의 노래인 시 23편은 목자를 노래합니다.

약자여서 목자가 더 간절한 것입니다.

 

이를 알기에 목자는 약자가 더 눈에 밟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다시 새 힘 주시고(3)

심지어 원수들 보는 앞에서까지

약자를 높이시고 극진히 대접하시는 것입니다.(5)

 

약자는 약자여서 무엇보다도 안전한 집을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집에 주님과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6)

이는 오늘 본문들 (7:15-16, 10:28-29)과 짝을 이룹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요한계시록 7:9-17 / 요한복음 10:22-30)]

오늘 계시록본문 소제목은 모든 족속으로부터 나오는 큰 무리입니다.

흰옷(흰 두루마기) 입은 수많은 사람들은(9) 땅에서 약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순교자들이기도 했습니다.(7:14, 6:9-11)

흰옷은 죄 없음의 상징이요, 천상의 존재를 가리킵니다.(9:3, 16:5)

 

흰옷 입은 무리는 본문 바로 앞에서 말한 인()치심을 받은 자들인데,

하나님의 도장이 찍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강렬한 표현입니다.

이들의 외침은(10) 땅의 노래인 시 23편의 하늘버전처럼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16-17절이 시 23편과 통합니다.

 

오늘 복음서본문 소제목은 선한 목자입니다.

오늘 수전절 예수님의 위기는 이미 가을철 초막절(7)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수전절 추운 겨울 기운과 더불어

유대사람들과 예수님 관계가 점점 더 얼음처럼 차가워져 갑니다.

 

그럼에도 수전절은, 쓰러진 성전 등불을 다시 세우고 다시 밝힌

빛의 절기, 광명절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본문은 예수님 안의 그리스도, 하나님 모습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것은 약한 양떼를 끝까지 지키시려는 목자의 모습입니다.(28-29)

양떼를 위해 생명까지 바치는 목자!

이 대답은(28-29) 24절의 어리석고 어두운 질문에 대한 밝고 밝은 대답입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해설 일부 참조)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정리]

부활절 4주에 우리가 읽은 성서일과 본문들에는

주님만 바라보는 약자들로 가득합니다.

 

사도행전의, 죽은 여제자 다비다 때문에 슬피 우는 과부들이 베드로만 바라봅니다.(39)

시편의, 원수들에 둘러싸여 기가 꺾이기 일쑤인 약자들을 주님께서 환대하시고 추켜세우십니다.(5)

묵시록의, 주의 이름을 위하여 큰 환란을 겪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찬양합니다.(10)

복음서의, 예수님께만 희망을 거는 약자들이 마치 시냇물처럼 예수님 뒤만 졸졸졸 따릅니다.(27)

 

오늘 저 약자들의 노래 가운데서 유난히 제 마음을 두드리는 것은 이 구절입니다.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23:5)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니기 일쑤인 내 인생을 끝내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주님.(4)

주님만 바라보는 약자들의 딱 그 간절함으로 그분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심전심 그분 마음 당신 마음, 그 마음을 오늘 예수님은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복음 10:28)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가지 못한다”(29)

 

우리는 오늘도 이 말씀에 의지하여 담대해집니다.

비록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아무 이름도 없이 사는 불편한 인생이지만

나는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나는 오늘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23:5)

 

 

 

[나머지]

* 수전절(修殿節) 예수님 마음

수전절이라는 이름은 신구약 성경 중에, 요한복음 10:22 단 한곳, 단 한 번 나옵니다. 성전봉헌절이라고도 하고 광명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성탄절과 날짜가 거의 일치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의 때가 수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전절을 맞아 솔로몬 행각(주랑)을 거니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추측컨대, 주전 165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지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정결하게 회복되고 재건된 것을 기념하는 이 절기를 맞아, 성전이신 당신의 몸이 모욕당하시고 무너지실 것, 그리고 마침내 다시 정결하고 신비로운 부활의 첫 열매로 세워지시리라는 언약(요한2:19-21)을 되새기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19.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0.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1.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솔로몬 행각(주랑)에서

솔로몬 행각이 뜨겁습니다. 거기서 요한복음 10:34절 전후로 예수님께서 유대사람들과 신론(神論)에 관하여 심하게 갑론을박하는 장면이 나오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의 놀라운 표적을 본 백성들이 모여드는 장면이 나옵니다.(3:11, 5:12) 솔로몬 행각이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으며, 주로 종교적인 강의, 대화, 토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습니다.

 

*** 목자의 사랑

오늘 성서일과 4본문에는 곳곳에 양들과 목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간단하면서도 단단하게 밝혀주시고(요한복음) 예수님께 위임받은 제자 베드로가 죽은 양 다비다를 살리는 목자의 역할을 합니다.(사도행전) 예수님께서 어린양으로서 목자의 역할을 끝내 영원히 감당하시는 감격스런 모습에 이르니(계시록) 목자와 양의 노래, 23편을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시편) 부활의 신비, 부활의 기쁨, 부활의 능력을 지니고 사는 주님의 몸 교회는, 그 신비, 그 기쁨, 그 능력, 즉 부활의 열매란 약한 양과 끝까지 함께 하는 목자의 사랑임을 압니다. 그 사랑이 곧 참 생명이요 영생임을 기억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이 말씀에서(요한복음10:30) 또 한편, 양들과 나는 하나다라는 주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참 목자는 양과 하나 되어 그 양(약자들)의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을 느낌으로 목자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시편23:4) 양과 하나 되는 순간, 아버지와 하나 되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순간 양과 하나 되는 이 사랑의 원리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예수님은 일생을 통해 보여주셨고 천상천하 영원무궁, 예수님은 이 사랑의 언약을 이루십니다.

 

**** 목자와 양

오늘 사도행전본문의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지난주일 복음서본문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은 뒤 오늘 본문에서 즉각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비다(도르가)의 이름이 양과 통합니다. (도르가는 사슴보다는 영양 즉, gazelle가젤로 번역합니다. TEB, 유진피터슨 번역 성경 메시지) 다비다는 살아생전 억세고 활발한 영양처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약자를 도왔습니다. 다비다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목자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양이 또 있을까요? 씩씩하게 되살아나는 다비다를 보면서 오늘 시편본문 23:3절이 떠오릅니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시편 23편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고 알차게 묘사한 시입니다. 목자였던 다윗이 양이 되어 지은 노래입니다. 그러고 보니 베드로도, 다비다도, 다윗도, 모두 모두 양이면서 목자요, 목자이며 동시에 양, 즉 양의 마음을 잘 아는 목자요, 목자의 마음을 잘 아는 양들입니다.

 

***** 다비다(도르가)에 대하여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중요한 등장인물인 다비다(도르가)의 이름 뜻이 산양(山羊; 염소, 가젤)입니다. 사슴, 노루라는 번역보다 산양(염소)이 더 어울리는 까닭은, 산양은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모험심도 강하고 적극적이며, 그 젖과 고기 또한 사람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산양의 젖이 우리 몸에 우유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비다의 평소 삶이 이웃들에게, 마치 산양처럼, 적극적이고 유익했습니다. 산양의 억센 활동력과 그 활동반경을 연상하며 다비다의 평소 착한 일과 구제사업의 정성이 느껴집니다. 다비다 만큼이나 적극적인 욥바의 제자들과(38) 과부들(39)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 나와 우리 교회를 비추어 봅니다.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10:27)를 묵상하다 문득

오늘 사도행전본문은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만큼이나 괄목할만한 또 하나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교 율법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약자취급 받던 자들, 말도 섞지 않던 자들과 통하는 광경입니다. 약자인 여자가 드높은 제자의 반열에 오르고, 약자인 과부가 대우받고, 약자인 부정한 직업 무두장이의 집에서 교황 같은 감독회장 같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먹고 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은, 교회는 이런 곳이라는 사실을, 이런 곳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제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고 묵상한 장면은 이것입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바로 이 대목입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베드로는 먼저 주님과 대화합니다. 그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 주변사람들을 다 내보냅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구와 대화합니까? 죽은 사람과 대화합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그리고 그 대화가 통합니다. 죽은 사람이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은 걸 보니, 말이 통한 겁니다. 동물과 말이 통한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과 말이 통한 겁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비다는 주님의 양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그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소통 능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게 교횝니다.

 

******* 목자의 말씀 제대로 알아듣는 양이 부르는 노래, 시편 23

부활절 4주에 읽은 성서일과 본문말씀은 온통 양에 관한 느낌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더욱 끈끈하고 생생해진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도(關係圖)입니다. 죽은 주님의 양 다비다가 눈을 뜨고 일어나는 모습에서(9:4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10:27)는 예수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베드로의 목소리에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것입니다. 지난 주 베드로가 반복해서 들은 내 양떼를 먹이라는 그 말씀, 그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살아난 다비다의 노래처럼 들리고 오늘 계시록 본문 15-17절에 그 내용이 고스란히 실현됩니다. 계시록 본문의 흰 두루마기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양떼처럼 보입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 때문이기도 하고 예수님 말씀을 고스란히 순종한 참 제자(7:14), 참 양들이기 때문입니다.(10:27) 오늘 부른 시편 23편이 우리 한국교회의 노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만큼 참 목자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10:27). 온갖 편리와 편안을 추구하다 엉뚱한 길로 빠지지 말고, 큰 환난조차 거리낌 없는 참 제자 참 양이 되어서 어린양 예수님 보혈에 두루마기를 빨아 입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7:14)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김은주 지음. 성실문화122)

사랑과 신뢰와 믿음의 씨앗 심으셨네

오래 전 얼어붙은 추운 땅에

사랑과 신뢰와 믿음의 씨앗 심으셨네

그 씨앗이 은혜를 먹고 의로 배불러 아버지를 바라보네

사랑으로 살 올라 아버지를 노래하네

 

사랑과 신뢰와 믿음 심으셨네

사랑과 신뢰와 믿음의 열매 바라시며

오래 전 황량한 땅에

겨자씨만큼 작고여린

사랑과 신뢰와 믿음 심으셨네

 

사랑과 신뢰와 믿음 드리네

아버지 열매 올려드리네

사랑과 신뢰와 믿음의 향기

아버지 기뻐하시네

사랑과 신뢰와 믿음의 일상역사

더하시네 부으시네 넘치게 하네

더하시네 부으시네 넘치게 하네

 

하늘 사다리 오르게 하시네

내 발을 사슴처럼 굳건히 하시네

하늘 사다리 밟게 하시네

나로 내 높은 곳 오르게 하시네

아버지 말씀하시네

내가 너를 잘 안다

 

기쁨과 위로와 감사의 노래가

몸을 타고 나오네

기쁨과 위로와 감사의 찬양이

몸을 타고 흐르네

.. 이것이..생수의 강물일지도..

 

 

 

 

[시편시조] 시편 23, 주 나의 목자시니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122)

주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 전혀 없네

원수들 눈앞에서 잔칫상 차리시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목자 내 주님

 

 

 

 

[시편노래] 시편 23, 주님 나의 목자시니 (이정훈 편사, 박상은 작곡. 성실문화122)

[본문] (시편 23)

[노랫말]

1. 주님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 없네, 푸른 풀밭 좋은 물가 인도하시네

나에게 또다시 새 힘 주시고, 그 이름 바른 길로 날 인도하네

2. 나 비록 죽음골짝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니 두려움 없네

주님의 막대기와 주님 지팡이, 날 보살펴 주시니 두려움 없네

3. 내 원수들 눈앞에서 잔칫상 차려, 내 머리에 기름 부은 나의 하나님

귀한 손님 영접하듯 날 맞으시니, 오 주여 나의 잔이 넘치옵니다

4. 진실로 주의 인자 그 선하심이, 내가 사는 평생 동안 날 따르리니

나 주님의 집으로 어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KBS 국악관현악단 단원이신 대금 연주자 박상은 선생이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23 (주님 나의 목자시니) (이정훈 편사, 박상은 작곡)

 

20250511 시편노래 23 주님 나의 목자시니.m4a
7.15MB

 

 

 

 

[시편송서(誦書)] 시편 23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122)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

2. -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 ----, 새 힘--- 주시---,

당신의 이름을 위하---, 바른 길-- -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록 죽음의 그늘-, (-) --기로 다닐지라도-,

-님께서- 나와- 함께-, (-와 함-) 계시---

 

주님의 --기와 지팡-이로-, -를 보살펴 주시---,

내게--- 두려-움이-, (두려움이--) 없습-니다-

 

5. -님께서는 내 원-수들-, (원수들)--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 -리에 -름 부으-시어-

 

-를 귀-한 손님-으로-, ---- 주시---,

-- -이 넘칩-니다-, (내 잔--- 내 잔이 넘칩--)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하심---,

내가- 사는 날 동----, ---- 따르-리니-

 

---- 주님의 집--, (주님의 집)으로 돌아---,

-원히-- 그 곳-에서-, (- 곳에-) 살겠습-∼∥

 

20250511 시편송서 23.m4a
6.26MB

 

 

 

 

 

[말씀동화] 모범생 꾀꼬리가 지각생이 되던 날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건 호랑이가 이팝나무 꽃다발 만들어 귀에 꽂고 엄마미소 짓던 시절 이야기예요.

 

요란하던 산새들 합창이 갑자기 뚝 끊긴 것은

드디어 뒷동산 노래대장 꾀꼬리가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왜 꾀꼬리가 안 오느냐고 밤새 목청 높이던 소쩍새가

둥글둥글 젖은 눈 껌뻑이며 한마디 합니다.

 

왜 이제 왔어요. 어린이날이 닷새나 지났잖아요.”

 

해마다 어린이날 딱 맞춰 돌아오던 꾀꼬리가 닷새나 늦게 온 사정은

아무도 몰라요. 구름도 모르고 바람도 모른데요. 그래도

이제라도 온 게 어디냐고 뻐꾸기도 멧비둘기도 까마귀까지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로서로 위로하는데

 

어린이날이랑 어버이날이랑 얼마나 쓸쓸했는데.”

 

긴 꼬리 휘달리며 날아든 물까치가 젖은 목소리로 울기 시작하고

물까치가 울음소리에 너도나도 산새들이 지저귀며 위로합니다.

그래도 스승의날이 남지 않았느냐고

심지어 노인의날은 아직 멀지 않았느냐고.

 

 

산새들의 요란한 합창에 노인의날이 우두둑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립니다.

 

꾀꼬리가 그때까지 있어? 니들이 노인의 고독을 알어?”

 

언제부턴가 집에서도 밖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존경받지 못한다고

심지어 국군의날 때문에 세계노인의날에서 하루가 밀려버렸다고

노인의날의 푸념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어린이날은 12년뿐이지만, 노인의날은 50년도 넘잖어.

이젠 100세 시대가 아니라 120세 시대라고!”

 

노인의날 푸념이 길어지자 갑자기 어버이날이 툭 튀어나옵니다.

 

노인보다 긴 게 어버이잖아요.”

 

무슨 소리야. 자식 안 낳는 가정, 심지어 나홀로족이 점점 늘어가는 거 몰라?”

 

노인의날과 어버이날 입씨름에 도저히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는 어린이날이

아랫입술 툭 빼물고 말없이 잔뜩 찡그리며 눈을 감습니다.

 

 

그러자 조용히 듣고만 있던 스승의날이 드디어 입을 열었어요.

 

어린이가 어른 되고 부모도 되고 노인이 되어가는 거잖아요.”

 

그러니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노인의날도

다 하나로 이어져있는 거라고, 그러니

다툴 일이 아니라고 스승의날이 조근조근 이야기합니다.

 

온 세상 노인홀대에 잔뜩 부어올랐던 노인의날이

스승의날 이야기에 조금조금 가라앉고

어른들 옥신각신에 잔뜩 부어있던 어린이날도 시나브로 낯빛이 밝아지자

스승의날 이야기가 조용조용 느릿느릿 나지막한 노래로 이어집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복음10:30)

 

 

갑작스런 스승의날 노랫가락에 노래대장 꾀꼬리의 귀가 쫑긋거리고

어리둥절 산새들도 이 나무 저 나무에서 지저귀기 시작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스승의날 노랫가락을 따라하는 꾀꼬리의 선창에 맞추어

온 산 멧새들이 합창을 시작할 무렵, 문득

어린이날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어요.

 

그건 나도 커서 아버지가 되어갈 거라는 뜻이겠네요?

그럼 어머니가 될 어린이는 어떡하죠?”

 

 

당황한 스승의날이 어린이날에게 허둥지둥 설명합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예수님 말씀노래라고.

언뜻 이해가 안 되는 신비로움 가득한 노래지만

자꾸 부르다보면 그 신비로운 뜻이 시나브로 스미게 될 것이라고.

 

알 듯 모를 듯한 스승의날 이야기에 어린이날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를 지켜보며 노래하던 꾀꼬리와 온 산 멧새들이

예수님 말씀노래를 이어갑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10:27)

 

모범생 꾀꼬리가 어쩌다 지각생이 되어버렸어도, 금세

꾀꼬리의 샛노란 노랫소리는 뒷동산 멧새들 합창과 어우러지고

그렇게 연둣빛 뒷동산과 어울려 하나로 물들어갑니다.

[이정훈 지음. 2025510일 토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