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시편 30:12)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9:1-6 (7-20))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7.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12.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18.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20. 그런 다음에 그는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
(시편 30)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수렁에서 건져 주시고, 내 원수가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해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우러러 찬양하렵니다.
2.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울부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3.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5.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
6.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 하였지만,
7.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8.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9.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10.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11.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12.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요한계시록 5:11-14)
11.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1-19)
1. 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8.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탄 채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백 자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9.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11.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3.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14.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16.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
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19.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나를 향하신 주님의 관심이 이리도 크시니’입니다.
사도행전,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사도행전 9:15)
시편, “주님께서 나를 고쳐주셨습니다”(시편 30:2)
서신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계시록 5:12)
복음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6,17)
오늘 요절은,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입니다.(시편 30:12)
[사도행전과 시편본문 정리 (사도행전 9:1-6(7-20) / 시편 30)]
오늘 사도행전본문의 소제목은 ‘사울의 회개’입니다.
부활예수님의 가장 대표적인 적대자였던 사울이 가장 적극적인 전도자로 변화한 것은
부활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그동안 제자들, 즉 교회를 핍박한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었습니다.(4-5)
그 제자 중 하나인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세례를 줍니다.
그 과정에서 사울은 눈이 열리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부활 예수님을 전도하기에 이릅니다.(20)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聖徒)”를 핍박하던 사울이(14)
오히려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당하는 자로,
부활예수 만나, 거룩한 성도로 변화한 것입니다.(16)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감사의 기도’입니다.
원래는 개인 치유 감사시였는데,
주전 165년 경, 훼손된 성전을 다시 세운 성전봉헌을 기념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성전(聖殿)은 곧 성도(聖徒)의 모임, 즉 교회입니다.
4절의 성도는 사도행전 13절의 성도와 짝을 이루는데,
사울 때문에 훼손되었던 성도들이 회복되고, 사울 또한 성도로 변화한 <성전회복 사건>!
그러므로 이 노래는 오늘 사도행전 본문의 온 성도들의 감사노래로 안성맞춤 찬양입니다.
나를 고쳐주시고(2), 나를 회복시켜주시고(3),
마치 옷 갈아입듯 쉽게 내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실 수 있는 분,
베드로를 바울을 저렇게 변화시키신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11)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요한계시록 5:11-14 / 요한복음 21:1-19)]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두루마리와 어린양’입니다.
희생양처럼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어린양이라고 지칭합니다.(12)
그런데 어린양은 지금 하나님 옆에 계시고 경배 받으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하나님께 통치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절은 수천수만의 천사들 찬양이고,
뒤의 두 절은 천하만물의 찬양입니다.
천사들이, 교회를 대표하는 일곱 교회가 바치는 듯(1:20), 일곱 헌사를 한 것과(5:12)
만물들이 네 가지 헌사를 하자(13) 네 생물이 “아멘!”으로 화답한 것이(14)
마치 짝을 이루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내 양떼를 먹이라’입니다.
2절의 일곱 제자는 계시록 1:11절의 일곱 교회, 즉 교회 전체의 대표를 암시합니다.
예수님 명을 따르자 고기를 많이 잡게 된 것은(6),
예수님 처음 만나 제자가 되었을 때를 기억나게 합니다.(눅5:1-9)
예수님의 3차례 똑같은 질문은 베드로의 3차례 예수 부인을 기억나게 합니다.
특히 첫 질문은(15,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마가복음 14:29절을 기억나게 하며(“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공동번역)
예수님은 이 3차례 질의응답 과정으로 베드로를 치유하고 세우십니다.(요13:37-38)
37.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해설 일부 참조)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정리]
부활절 3주에 주신 성서일과 본문말씀에는 상징이 많습니다.
숫자 상징도 많고 짝을 이루는 대구도 많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나에게 관심을 쏟으시며 증인으로 세워가는 장면들입니다.
그 두렵고 떨리는 선택과 세심한 어루만지심으로 내 영혼은 떨립니다.
일찍이 주님을 처음 만나던 그 날 베드로는
내 생업이 곤두박질하는 악전고투 끝에 그걸 건드려 솟구치게 하셨던 주님을 기억합니다.(눅5:1-9)
그 첫 만남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오늘 생생하게 반복된 것입니다.(요21:3-6)
그리고 먹이십니다.(요21:12-13)
그리고 먹이라고 하십니다.(15-17)
먹이시고 일꾼으로 세우시는 이 장면은 오늘 사도행전의 사도바울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행9:18-19)
또 하나 오늘 짝을 이루는 시몬과 바울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그들이 주님의 이름, 그 영광을 위해 헌신할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요21:19)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행9:16)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그릇을
주님께서 이토록 영광스러운 그릇으로 고쳐 쓰시니
깨진 그릇처럼 버려질 우리는 한국교회는 그저
떨리는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울부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시편30:2,12)
[나머지]
* 오늘 본문 가운데 짝을 이루는 구절들
먼저 ‘부르심’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행전 9:4)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 이어서 ‘급식(給食)’입니다.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행전 9:19)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내 양떼를 먹여라”(요한 21:15-17) 그리고 ‘고난함께’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행전 9:16)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요한 21:19) 예수님처럼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급식’의 길, ‘고난 함께’입니다. 그 길 가라고, 부활예수님께서 오늘도 제 길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 오늘 시 30편은 수전절 찬양시
주전 165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지고 파괴된 성전을 정결하게 재건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수전절(광명절, 성전봉헌절)입니다. 오늘 시 30편은 이 수전절에 부르는 시편찬양입니다. 이 시편을 묵상하면서, 수전절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수전절은 성경전서 중에 요한복음 10장에 딱 한 번 나오는 절기입니다. 말씀이신 주님,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로마군에게, 유대인들에게 모욕당하시고, 그렇게 온몸이 허물어지고 다시 부활하신,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수전절의 의미와 똑같습니다. 바로 이 절기를 지키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신 예수님, 성전 솔로몬 행각을 거니신 요한복음 10장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그 때 무슨 묵상을 하셨을지 묵상합니다. (마침 다음 주일-부활절 4주 본문이네요!)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서본문의 부활 예수님과 베드로의 새벽 대화에 나오는 “사랑”의 희랍어 단어가 아가페와 필리아로 구분되는 것에 대해, 구별된 의미로 보는 입장과, 차이 없이 썼던 당시 문화를 주장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묵상에서는, 베드로의 죽음을 암시하시는 대목과, “내 양떼를 먹여라”고 하시는 말씀,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 때문에, 아가페의 의미가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아가페는 당신의 몸을 먹이로 주신 하나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양떼를 먹이라는 말씀이 아니실까 생각하며 묵상했습니다.
**** 큰 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신 것은
오늘 사도행전과 복음서본문의 공통점은 회복인데, ‘부활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회복, 사울과 시몬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의 길은 시원하게 달리는 고속도로가 아니라 울퉁불퉁 고난의 길입니다. 부활예수를 만난 사람은 인생길이 회복됩니다. 물질중심의 세상길에서 돌이켜 진리의 길, 십자가의 길로 회복됩니다. 죽음권세 깨뜨리신 부활예수님을 영접하고 부활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을 따라 부활의 증인이 되어갑니다. 오늘 베드로는 부활예수님을 만나 큰 고기 153마리를 잡으면서 나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기억을 회복합니다.(누가5:1-11)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내 밥, 내 권력, 내 명예를 채우는 군침 도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 몸을 먹여야 할 책임을 지는 참으로 무거운 길입니다. “내 양떼를 먹여라”(15-17) “나를 따르라!”(19) 당신의 몸을 아낌없이 바치신 십자가의 길 말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 권세 무너뜨리신 부활의 길 말입니다.
***** 기억에 대하여
①새벽 바다에서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던 제자들과 나누시는 대화와 진행과정은 딱 누가복음 5장을 연상시킵니다. 밤새 허탕만 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던,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잔뜩 잡았던, 이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고백했던 베드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마지막 만난 베드로는,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으면서 예수님과의 그 첫 만남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②예수님과 처음 만난 그 날 “나를 따라오너라...”(막1:17) 그 음성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마지막 만난 오늘도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말입니다.(요21:19) 그런데 나를 따르라시는 말씀의 느낌, 그 무게는 그때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③12절에, “와서 아침을 먹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생전 주님과 마지막 나누었던, 며칠 전 그 밥상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내 양을 먹여라” 하시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당신께서 스스로 몸을 쪼개 주셨듯이 베드로는 양떼를 먹이기 위해, 주님의 몸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온몸을 다 던져야 하는 목자의 심정을 실천하게 됩니다. 19절 말씀들이, 특히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④17절에서 베드로는, 새벽바닷가에서 3번 연거푸 질문하시는 선생님 때문에 몹시 불안합니다. 그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3연속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입니다. 어쩌면 그 새벽, 첫 닭 울음과 함께 울었던 그 통곡이 기억났을지도 모릅니다.
****** ‘모도가 봄이다’
서울에 있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모도가 봄이다’라는 행사를 2019년 5월 5일 주일까지 했습니다. 저는 그때 먼 거리를 달려 그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왜냐하면 ‘모도가 봄이다’는 방정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방정환이 1920년, 22세 나이에 「개벽」 창간호에 실은 소설 ‘유범(流帆)’에 나오는 시가 바로 ‘모도가 봄이다’입니다. <모도가 봄이다. 山(산)도 봄 물도 봄이고 사람도 봄이고 空氣(공기)까지도 봄 空氣(공기)이다 그 부들업고 다사한 봄바람에 섯기어 가장 流暢(유창)하고 가장 平和(평화)로운 노래소리가 獨立門(독립문) 全體(전체)를 싸고 돈다 그것은.> 그런데 일제는 개벽 가운데 이 소설, 이 소설 가운데서 이 시 ‘모도가 봄이다’를 콕 짚어 까만 먹물로 지워버렸습니다. 그 부드러운 노래가 그만큼 강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빛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덮는다고 덮어집니까?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둠은! 드디어 삼일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드러난 이 빛나는 ‘모도가 봄이다’에 누가 곡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인터넷으로 들은 그 노래가 하도 좋아서 그 행사 전시장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것입니다. 그 현장의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 어른들의 저 어두운 온갖 탐욕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빛나고 맛있는 노래를 먹여주고 싶습니다. 이 노래를 지어준 방정환과 그림(the林)연주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큰 박수를 보냅니다. “내 어린양떼를 먹여라”는(요한21:15) 예수님 명을 따라야 할 교회의 일을, 바로 이 분들이 하셨습니다.(이 노래는 지금도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 ‘작은 물결’ 방정환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베드로가 변하고 사울도 변합니다. 베드로의 변화과정이 눈물겹고, 사울의 변화과정이 가슴 벅찹니다. 큰 고기떼를 잡은 뒤에(6) 베드로는 예수님 첫 만남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누가5:10)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로 물으시고 바로 명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떼를 먹여라”(15) 우리는 베드로가 뒤에 이런 제자로 변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그런 바울로 변화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그 어린양떼로서 말씀을 받아먹으며 어린양 예수님의 몸, 교회로 자라난 우리가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어린양 가신 길을 따르고 있는지...(요21:19) 내일은 어린이 날입니다. “내 어린양 떼를 먹여라”는 예수님 말씀이 가슴을 찌릅니다. 소파(小波) 방정환은 천도교인으로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서른 셋 짧은 나이를 살면서도 누구 못지않게 마음껏 어린이를 사랑하였고 식민지 시대 굶주린 어린이들을 먹이기 위해 수많은 글을 짓고 책을 만든 사람입니다.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잔잔히 퍼지고 있는 잔물결 소파(小波)의 정신과 작품들이 아름답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부터라도,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명을 기억하여,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 땅의 어린양떼 같은 어린이들을 먹이는 일에 방정환처럼 몰두해야 할 것입니다.
******** 사람을 고쳐 쓰시는 예수님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안 변한다, 그러니 연장처럼 고쳐 쓰려하지 말고 그냥 버려라. 둘째, 사람은 개성이 있다, 그러니 개성을 고치려하지 말고 그 개성에 맞게 써라. 보통은 첫째 의미로 이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이 두 가지가 다 통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주님께서 쓰시려고 지은 주님의 도구, 주님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 그릇에 사랑을 담고 은혜를 담고 말씀을 담으십니다. 각 그릇의 개성에 따라 담으실 뿐 아니라 원하시면, 고쳐서도 담으십니다. 부활절 3주 성서일과 본문들은 내용들이 매우 강렬합니다. 시편의 찬양과 계시록의 찬양이 우렁차고 사도행전과 복음서의 주인공들의 심장이 강렬하게 뛰고 있습니다. 얼핏, <예수님 뒤끝 작렬!>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주님 앞에서 사울과 시몬의 가슴이 마구 쿵쾅거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9:5) 하실 때 사울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차례 반복하실 때 시몬은 얼마나 송구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복음13:37-38) 지난 주 복음서본문에서, 문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믿음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주님께서, 이번 주는 그릇을 가리지 않고 고쳐서 쓰십니다. 사울도 시몬도 모두 주님께서 택하신 주님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행9:15) 그 길이 비록 험난할지라도(행9:16, 요21:19) 사울과 시몬이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간 것처럼, 예수님께서 택하신 또 하나의 그릇인 우리 또한 지금 비뚤어진 눈 고쳐지고 주님과 함께 험난한 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가장 좋은 것 (김윤서 지음. 세움교회 청년부. 「성실문화」 122호)
물고기를 잡으면 좋겠지
가족들을 먹이고
친구들도 나누고
배불릴 수 있으니
물고기를 팔면 좋겠지
옷을 사고
양식도 구하고
통장잔고를 채우니
하지만...
베드로에게 가장 좋은 건
사람을 얻는 어부
길 잃어 갈 길 모르는 사람들
살리고
먹이고
인도하는 일
[시편시조] 시편 30, 수렁에서 무덤에서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22호)
수렁에서 무덤에서 스올에서 날 건지사
상복을 벗기시고 나들이옷 입히신 분
주님을 찬양합니다 날 살리신 하나님
[시편노래] 시편 30, 수렁에서 날 건지신 (이정훈 편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 122호)
[본문] (시편 30)
[노랫말]
1. 수렁에서 날 건지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 우러러 찬양합니다
내 원수가 날 비웃지 못하게 하신, 내 주님을 우러러 찬양합니다
2. 스올에서 날 건지신 나의 하나님, 무덤에서 일으키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소리높여 울부짖을 때, 주님께서 고쳐주심 찬양합니다
3. 주를 믿는 성도들아 찬양하여라, 거룩하신 주의 이름 찬양하여라
주의 은총 영원하고 진노는 짧아, 밤새 울다 새벽이면 기쁨이 솟네
4. 태산처럼 든든하게 날 지키시던, 주님께서 외면하니 두렵습니다
죽은 몸이 어찌 주를 찬양하리까, 오 주여 자비를 베푸옵소서
5. 나의 통곡 나의 상복 벗기신 주님, 기쁨의 춤 날개옷을 입히신 주님
내 영혼이 잠잠하랴 주 찬양하리, 영원토록 나 주님께 감사드리리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이신 이석훈 목사가 지은 ‘시편 90, 대대손손 품어주신 사랑의 주여’(성실문화 116호) 가락에 붙였다.
[악보] 시편 30 (수렁에서 날 건지신 나의 하나님) (이정훈 편사, 이석훈 작곡)
[시편송서(誦書)] 시편 30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22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수렁에서 건져 주시고, 내 원수가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해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우러러 찬양하렵니다.
2.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울부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3.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5.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
6.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 하였지만,
7.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 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8.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9.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10.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11.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다함께]
12.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말씀동화] 모도가 봄이로구나!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건 호랑이가 어린 동물들을 위해 작은 솜사탕 짓던 시절 이야기예요.
다랑이논 위로 봄바람 불어오니 잔물결이 일기 시작했어요.
모내기 전 유리바다처럼 고요한 다랑이논에서
성급한 올챙이 한 마리가 꼬물꼬물 헤엄치는 걸 바라보며
봄바람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오자
그 따사로운 봄기운에 도저히 잠잠할 수 없어서
잔잔한 유리바다 다랑이논은 두근두근
잔물결이 일기 시작한 거였죠.
논두렁 노오란 애기똥풀 잔꽃송이들이 허둥허둥 팔락팔락
길 건너 조팝나무 하얀 꽃송이들도 화들화들 춤추고
마을에서 가장 평화로운 다랑이논 유리바다
다랑이논의 일 년 열두 달 가운데서도 가장 평화로운 지금 유리바다를 바라보던
정환이의 잔잔한 마음에도 잔물결이 춤추기 시작했어요.
“이리도 다사롭고 평화로운 잔물결이라니!
잔물결에 마음을 빼앗긴 정환이의 눈에서 환한 은하수가 쏟아지고
잔물결을 두 글자로 줄인 소파(小波)라는 이름을
가장 작은 소리로 조심조심 불러봅니다.
“소∼파∼!”
정환이의 목구멍이 작은 방 공기가
잔물결처럼 부드럽게 진동하니
하늘도 땅도 한순간에 평화로워지고
거대한 일본제국에 빼앗긴 작은 나라
빼앗긴 작은 들, 작고 작은 잔꽃송이들에도 이렇게 봄은 오고야마니
정환이의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독립문에도 지금 봄바람 불겠지?”
문득 내가 태어나기 한해 전에 태어난 독립문이 보고 싶어서
그리운 마음을 모아 따사로운 봄기운을 모아
흥얼흥얼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모도가 봄이다, 모도가 봄이다, 모도가 봄이다
「모도가 봄이다. 山(산)도 봄, 물도 봄이고, 사람도 봄이고, 空氣(공기)까지도 봄 空氣(공기)이다.
그 부들업고 다사한 봄바람에 섯기어, 가장 流暢(유창)하고 가장 平和(평화)로운 노래소리가
獨立門(독립문) 全體(전체)를 싸고 돈다 그것은.」
(방정환 지음. 「개벽」 창간호 中 소설 ‘유범(流帆)’ 첫 장면에 나오는 시)
봄기운 따라 날아온 봄 친구 꾀꼬리가 노래를 시작합니다.
음력 삼월삼일에 돌아온 제비도 꾀꼬리를 반깁니다.
양력 오월오일에 돌아온 꾀꼬리 노랫소리에
다랑이논 유리바다에 다시 잔물결 일고
정환이의 눈에 다랑이논 올챙이들과 논두렁 애기똥풀 잔꽃송이들
그리고 조팝나무 하얀 잔꽃송이들이 알알이 들어옵니다.
온누리 작은이들 어린이들의 작은 빛깔 작은 얼굴이
바로 봄기운 봄바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시편30:12)
마을 작은 예배당에서
봄바람 같은 작은 노래가 울려나오고
그 노래에 온 마을 다랑이 논 유리바다에 다시
잔물결이 춤추기 시작합니다.
[이정훈 지음. 2025년 5월 3일 토요일 아침]
(오랜만에 다시 듣는 방정환 선생님의 시 ‘모도가 봄이다’에 감동하며 지었습니다.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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