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로마서 4:17)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17:1-7, 15-16)
1.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2.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4.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5.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7.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시편 22:23-31)
23.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여라. 야곱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이스라엘 자손아, 그를 경외하여라.
24.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
25.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회중이 다 모인 자리에서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서원한 희생제물을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치겠습니다.
26. 가난한 사람들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늘 유쾌하길 빕니다!” 하면서 축배를 들고,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27.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28. 주권은 주님께 있으며,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29. 땅 속에서 잠자는 자가 어떻게 주님을 경배하겠는가?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가 어떻게 주님 앞에 무릎 꿇겠는가? 그러나 나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겠다.
30. 내 자손이 주님을 섬기고 후세의 자손도 주님이 누구신지 들어 알고,
31.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로마서 4:13-25)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마가복음 8:31-38)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끈은, ‘죽음의 땅에서 새 생명 일구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약, “너에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겠다”(창세기 17:16)
시편,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가 어떻게 주님 앞에 무릎 꿇겠는가? 그러나 나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겠다”(시편 22:29)
서신서,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로마서 4:24)
복음서,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가복음 8:31)
오늘 요절은,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로마서 4:17)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창세기 17:1-7, 15-16 / 시편 22:23-31)]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영원한 언약과 새 이름’입니다.
아브람이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은 뒤 13년이 흐른 99세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언약을 세우십니다.
하나님 언약은 하나님의 선택으로(은혜로) 시작되고, 사람의 순종으로 완성됩니다.
75세에 하나님의 첫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납니다.
86세에 첫 아들 이스마엘을 낳고,
99세에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매사에 늦은 아브라함이지만, 그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모범입니다.
그는 순종의 사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랍니다.
한없이 자랍니다.
아브람이란 ‘존귀하신 아버지’ 즉 ‘나의 아버지, 곧 하나님은 크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훌륭한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열국의 아버지’, 즉 ‘많은 무리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이름(아브람)이었는데,
초점을 사람에게로 옮긴 듯한 이름(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새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내용이 담긴 이름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의인의 수난과 영광’입니다.
시편 22편은 1절부터 22절(또는 21절)까지는 탄원시이고,
오늘본문인 23절부터 31절, 끝 절까지는 감사시로 구성된
유일한 시편입니다.
누구보다 시편을 애송하셨을 예수님께서
22:1절을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시고, 7-8절처럼 조롱받으십니다.
십자가 아래서는 18절처럼 예수님의 옷이 나누어지더니,
마침내 29절처럼 부활하심으로, 시편 22편을 완성하십니다.
이 시편 22편을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인용하시고, 체험하시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29절은, 당시 구약시대 상황에 비추어 아직 부활의 구체적인 강조는 아닌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리고 원문이 많이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을 알기 어려워서,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그리스어 번역을 따랐다고 합니다.)
시편 22편의 알맹이는 나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찬양과 경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찬양입니다.(23)
이처럼 죽음의 고난을 겪으며 주님께 매달려 탄원하고 구원받은 사람,
이만큼 주님과 깊은 친교를 맛본 사람만이,
주님을 진짜 경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로마서 4:13-25 / 마가복음 8:31-38)]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약속과 믿음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약속”(×7)과 “믿음”(×6)이 많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결론은 끝부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만나 언약을 세우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다는!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화해하고 친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예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입니다.
오늘본문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시기 바로 직전 상황입니다.
사천 명을 먹이시고(8:1-9) 벳새다 맹인을 눈뜨게 하신 뒤(22-26)
베드로로부터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들으신 직후(27-30)에 벌어진 일입니다.
스승의 멱살을 잡는 듯한 베드로의 격렬한 저항과(32)
그보다 더 강력한 예수님의 반응이 인상적입니다.(33)
여기서 “사탄”은 대적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를 뜻합니다.
“내 뒤로”는 “나를 따르라”는 뜻으로도 새겨집니다.
34절의 “자기 부인”은 내 자아와 내 소유와 소원을 포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기 십자가”는 항소의 가능성조차 없어진 최종 사형선고를 가리킵니다.
참으로 무겁고 무서운 경지입니다.
내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
그 생명을 하나님나라에서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
이 복음이, 내 모든 가치, 소유, 관계, 목숨보다도 앞선다고 깨달은 자만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고, “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34)
주님을 경외하는 자,
주님과 진정한 친교를 누려본 사람 말입니다.
(※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을 참고했습니다.)
(※ 예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정리]
사순절 2주에 읽는 성서일과 본문들의 공동주제를
<죽음의 땅에서 새 생명을 일구시는 하나님>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사라의 죽은 태에서조차 약속하신 새 생명이 태어납니다.(롬4:19)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롬4:17)
이것은 피 한 방울 안 섞였음에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증거요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롬4:13)라는 근거입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매일 새 생명을 얻으며 살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막8:38)
거기 빠지지 않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살고 죽을 때(막8:35),
사라의 죽은 태에서조차 새 생명 이삭이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도 그 생명약속 이루실 것입니다.
대한민국, 한반도에서 희망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구석구석 권력자들의 불의와 부정이 기승을 부리고
3.1절이 코앞임에도 겁도 없이 토착왜구들이 발호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처럼(롬4:18),
죽음공포 속에서도 오히려 만세 부르던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유관순처럼,
다시 한 번 희망을 품고, 죽음의 땅에서 새 생명 일으키실 하나님을 향합니다.
[나머지]
* 죽음에 대하여
오늘 복음서본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처음 선포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을 처음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님, 그리고 미친 듯이 놀라는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친김에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관계를 새로 정리하십니다. 제자가 되려면(“나를 따라오려면”)(34)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절반이 넘는, 34절 이하 통째로, 죽음에 대해 더 깊이 묵상하고 결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의) 아브라함의 믿음, 그 교훈을 알고 있다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힘들고 부담스러워도, 적어도 그 말씀을 멱살 잡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물투성이 나를 의롭게 만드시려는 저 거룩하고 장엄한 죽음과 부활의 청사진을 꾸짖듯 찢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 아브라함과 베드로
사순절 2주 성서일과 본문들의 두 주인공을 꼽으라면 아브라함과 베드로입니다. 이 두 사람이 아주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 표현을 빌리자면, 아브라함은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한 인물이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만 생각한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들의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이란, 비유하자면, ‘죽음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영원한 생명 약속’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이 하나님 약속을 외면한 채, 시나브로 죽음의 세력에 빨려 들어가는 가련한 살림살이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 곤혹스러운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내 경험, 아니 인류의 생리적인 상식, 가장 기본적인 생명·죽음의 원리를 뛰어넘는 그 약속을 믿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경험, 내 체험, 인류의 상식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베드로를 후려치신 치도곤(治盜棍)과 같은 예수님 말씀대로 그건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상상조차 못하는 제 잘난 “사람의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베드로와 달랐습니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에서 생명을, 무궁무진한 생명의 용솟음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마치 탄광 막장에 매몰되어 갇힌 광부와도 같았던 시인이,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푸른 하늘을 환하게 보며 귀로는 들리지도 않는 구조 소리를 선명하게 듣고 있는 것처럼 오늘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24) “그러나 나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겠다”(29)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31) 이 노래 제대로 부를 수 있기를, 이 노래 부를 수 있을 만큼 내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길 원합니다. 어설픈 베드로, 저 충동적이고 허깨비 같던 내 믿음, 늘 사람의 일만 생각하던 내 믿음이 단단한 베드로, 든든한 반석 같은 믿음, 먼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믿음이 되길 원합니다.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로마 4:17) 그 하나님의 약속은, 바짝 마른 내 믿음의 눈시울조차 촉촉하게 적실만큼 신비롭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내 믿음의 장작조차 활활 타오르게 하실 만큼 뜨겁습니다.
*** “사탄아 내 뒤로”
오늘 복음서본문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멱살을 잡는 대목입니다. 32절 끝에 베드로가 “항의”하는 대목은 33절의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대목과 비슷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즉 이성을 잃은 베드로가 젊은 스승의 멱살을 잡고 꾸짖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와중에 예수님은 이성을 잃지 않고, 시선을 놓치지 않고 십자가 길을 직시합니다. 베드로, 이 걸림돌을 단호하게 정리하여 디딤돌로 바꾸십니다. 베드로를 향해, 아니 모든 제자들을 향해 외치십니다. “야 이 마귀새끼 같은 놈아, 내 뒤로 물러가! (가서 저 밑바닥부터 다시 따라와!) (희랍어 성경에 “내 뒤로”는 “나를 따르라”와 똑같은 “ὀπἰσω μου”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전혀 죽을 생각 안 하며 살고 있는, “자기 십자가”(34)라고는 목걸이 십자가밖에 모르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죽음 뒤에 부활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전혀 믿지 않고 살고 있는 지금 우리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는 모습도 종종 저 천방지축 베드로처럼 지금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 주님의 멱살을 잡는 꼴은 아닐까요? 내 마음대로 십자가 길과 정 반대 길로 가려고 말입니다.
**** 독립만세! -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제자의 길은, 교회의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길 따르는 그 길입니다. 아브라함 믿음만큼은 못되더라도 오늘 본 베드로처럼 굴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부인(否認)”이 먼저입니다. 내 자아와 소유와 소원을 다 내려놓지 않고서 어떻게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십자가” 말입니다. 꿈같은 일이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마는, 꿈은 꿀 수 있는 일이요, 언감외면(焉敢外面)할 그 길입니다. 자기 부인(否認)과 자기 십자가 없이는 주님 경외, 주님과의 진정한 친교가 너무 멀기에 교회라면, 반드시 가야만하는 길입니다. 삼일절이 코앞입니다. 유관순열사, 제암리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길, 그 꿈같은 길, 내 십자가 길을 걷기 시작한 바로 그 날입니다. 오늘날 세상 기준으로 말씀을 재단(裁斷)하지 맙시다.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그 말씀 부끄럽게 여기게 만드는(마가 8:38) 내 온갖 탐욕과 게으름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는 독립만세 그 날이 바로 코앞입니다.
[※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등 (이소현 지음. 성실교회 청년부. 「성실문화」 118호)
베드로야, 나의 아이들아
사람의 일을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다시 내 뒤에 서서 나의 등을 보고
나를 따라오너라
[시편시조] 시편 22, 고통과 부르짖음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18호)
고통과 부르짖음 눈에 담고 귀에 담아
응답하신 내 주님께 온 민족이 경배하네
오로지 주님의 능력 나를 살려 주시니
[시편노래] 시편 22, 주님을 경외하고 찬양하여라 (이정훈 편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 118호)
[본문] (시편 22:23-31)
[노랫말]
1. 주님을 경외하고 찬양하여라, 너희는 하나님께 영광돌려라
사람의 부르짖음 들어주시고, 그 고통 어루만지며 응답하신다
2. 주님을 경외하고 주를 찾는 자, 주의 구원 그 역사를 기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도 축배를 들고, 땅 끝에서 사는 자도 주 경배하라
3. 땅속에서 잠자는 자 어디있느냐, 주께서 살리신 나 주 경배하리
내 자손 대대손손 주님을 듣고, 그의 백성 구원하신 주 찬양하리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이신 이석훈 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22 (주님을 경외하고 찬양하여라) (이정훈 편사, 이석훈 작곡)
[시편송서(誦書)] 시편 22:23-31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18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23.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여라. 야곱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이스라엘 자손아, 그를 경외하여라.
24.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
25.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회-중이 다- 모인 자리에서 찬양하-겠- 습니다---∼
내가 서원한 희생제물을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치겠습니다.
26. 가난한 사람들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늘 유쾌하길 빕니다!" 하면서 축배를 들고,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27.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28. 주권은 주님께 있으며,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29. 땅 속에서 잠자는 자가 어떻게 주님을 경배하겠는가?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가 어떻게 주님 앞에 무릎 꿇겠는가? 그러나 나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겠다.
30. 내 자손이 주님을 섬기고 후세의 자손도 주님이 누구신지 들어 알고,
[다함께]
31.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말씀동화] 개구리의 독립만세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개구리랑 높이뛰기 시합하며 만세 부르던 시절 이야기예요.
경칩이 열흘이나 남았는데도 개구리가 번쩍 눈을 떴어요.
아직 비 내리다 눈 내리기를 반복하는 추운 날씨지만
동무들이랑 대보름 쥐불놀이도 하고
여럿이 함께 삼일절 만세도 부르고 싶어서 개구리는 일찌감치 깨어났죠.
그런데 멍멍이도 야옹이도, 송아지랑 꿀꿀이랑 꼬꼬닭도
다들 낯빛이 어둡고 맥이 빠져 있네.
“내가 겨울잠 자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개구리가 커다란 눈 끔뻑이며 갸웃거리자
겨우내 집집마다 좀도둑이 들어 마을곳간이 텅텅 비었다며
야옹이가 투덜거렸어요.
“내가 마을을 지키지 못한 탓이야”
고개를 푹 숙이며 멍멍이가 웅얼거리자.
꼬꼬닭도 덩달아 고개를 푹 숙입니다.
그건 좀도둑이 아니라 날강도라며 꿀꿀이가 소리치고
꼬꼬닭도 덩달아 날개를 치며 온 몸을 부르르 떱니다.
도둑놈들을 모두 잡아 벌을 주고 싶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남의 것 빼앗는 힘센 날강도들인데다가
대다수 마을 사람들은 제 집 곳간은 괜찮겠거니 쿨쿨 잠만 잡니다.
그러니 어린이들이 맘껏 누려야 할 학교교육과 먹을거리도 줄어들고
병든 이들이 마음껏 치료받을 기회도 줄어들고
연약한 어르신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양식도 점점 줄어듭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무들의 신세타령을 들으며 커다란 눈 끔뻑거리던 개구리가
갑자기 번쩍 고개를 쳐들고 개굴개굴 노래를 시작합니다.
“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전중이 ; 징역살이 하는 사람)
(※ 서대문형무소 여감방 8호실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만세 부르던
심영식 님이 아들 문수일 님에게 가르쳐주셔서 온 세상이 알게 된 노래)
개굴개굴 개구리를 따라서 꼬꼬닭도 목청껏 노래하고
음매음매 송아지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단을 맞춥니다.
날강도 같은 일본과 그 앞잡이들 때문에
삼천리금수강산이 지옥 같던 시절
모진 고문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 언니와 동무들이 옥에서 부르던 노래입니다.
“겨울잠 자는 어두운 땅 속 생활도, 우린 3월의 희망으로 견딘단다.”
누구보다 간절히 삼일만세를 부르고 싶던 개구리의 밝은 목소리에
동무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박수를 칠 때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멍멍이가 중얼거렸어요.
“좀도둑, 아니 날강도들의 힘이 너무 크고, 마을 사람들은 다들 잠만 자”
멍멍이의 말에 모두 금세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고 맥이 빠지려 할 때
개구리가 그 큰 눈 번쩍 뜨며 큰 입을 열어
또박또박 이렇게 외쳤어요.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로마서4:18)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를 개굴개굴 신나게 들려주자
개구리의 동무들은 다시 고개를 듭니다.
온 마을 살림살이를 도둑질하고
일제시대 친일파들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날강도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개구리가 깨어나는 경칩처럼,
이제 곧 온 마을이 깨어나리라 희망을 품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우리 마을 만세∼! 하나님나라 만세∼!”
개구리의 선창에 따라 동무들이 만세를 부를 때
어느덧 두둥실 대보름달이 떠오르고
휘영청 밝은 대보름달을 바라보며 개구리와 동무들이 합창합니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 유튜브에서 ‘대한이 살았다’, 또는 ‘8호 감방의 노래’ 등을 검색하면
가수 박정현, 안예은 등이 각각 부른 여러 곡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정훈 지음. 2024년 2월 24일 토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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