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땅히 가야할 그 길을 가르쳐주십시오”(시편 25:4)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9:8-17)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에게 직접 언약을 세운다.
10.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13.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14.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15. 나는, 너희와 숨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땅 위의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언약의 표다.”
(시편 25:1-10)
1.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2.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의지하였으니,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내 원수가 나를 이기어 승전가를 부르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3.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수치를 당할 리 없지만, 함부로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4.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고,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5. 주님은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6. 주님, 먼 옛날부터 변함없이 베푸셨던, 주님의 긍휼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7. 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죄와 반역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8. 주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셔서, 죄인들이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9.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
10. 주님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진실한 사랑으로 인도하신다.
(베드로전서 3:18-22)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19.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20.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21. 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22.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9-15)
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12.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끈은, ‘주님께서 우리가 살 길을 가르쳐주시다’입니다.
구약,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창세기 9:10)
시편,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신다”(시편 25:8)
서신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베드로전서 3:19)
복음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가복음 1:14)
오늘 요절은, “주님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내가 마땅히 가야할 그 길을 가르쳐주십시오”입니다.(시편 25:4)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창세기 9:8-17 / 시편 25:1-10)]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가 8차례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축약해보니, 그 언약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아브라함과의 약속과 달리, 사람에게 그 어떤 의무도 지우시지 않은 약속입니다.
둘째, 사람이 지킬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지키실 약속입니다.
셋째, 사람뿐 아니라 온 땅 생물들을 보존하시려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약속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언약입니다.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생명을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마음입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하나님의 용서와 인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시는 외우기 좋게, 1∼22절 각 절 시작을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지은 시입니다.
1,3,5절에 ‘주님을 기다림’(우러름, 바람 ; 개역개정)의 목적은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길”(4), “올바른 길”(8)!
그 길은 주님께서 세워주신 언약을 지키는 삶입니다.(10)
길을 잃고 헤맬 때(7)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회개의 길입니다.(4,5,8)
그 길 따라 살면 “진실한 사랑으로” 인도하실 생명의 길입니다.(10)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베드로전서 3:18-22 / 마가복음 1:9-15)]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는,
점점 핍박이 심해져가는 이교환경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사도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그 권면의 내용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핵심은
그런 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키며 살 모범,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복음을 전하러 다니셨고, 불의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18)
심지어 죽음감옥에 갇혀 있는 영들에게까지 친히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19-20)
그리고 지금 하늘 아버지의 오른쪽에 계십니다.(22)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예수의 세례와 시험, 갈릴리에서의 활동 시작’입니다.
요단강 세례 때, 성부음성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는(11)
예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통치할 왕으로 오셨음입니다.(시편2:7)
40일 광야 장면은(13) “마지막 아담”(고전15:45)을 떠올립니다.
유대적 관념에 따르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 아담은 동물들이 따르고 천사가 시중들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복음 선포 장면은(15) 오늘 4본문의 알맹이들을 모두 담습니다.
한없으신 하나님의 사랑, 창조와 구원, 그 마음, 그 결행...!
지금 그 때가 찼고 그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 복음을 믿고, 어서
가던 길 멈추고 하나님 마음을 향하여, 생명을 향하여 돌아서야 할 때입니다.
지금!
(※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을 참고했습니다.)
(※ 예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정리]
오늘 사순절 1주에 우리가 받은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끈은
‘주님께서 우리가 살 길을 가르쳐주시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우리”는, 우리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생명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산소처럼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 생명과 이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 작은 생명들까지 “우리”에 포함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반복합니다.
작은 동물들에게까지도 언약을 세우신다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까지도 가셔서(벧전3:19)
생명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관심 밖의 존재들까지 살리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온 세상 짐승들로 꽉 찬 방주와 달리
세상에서 가장 텅 빈 공간으로 보이던 광야가
오늘 예수님과 더불어 들짐승들과 천사들로 가득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곳에 주님의 뜻이 계십니다.
거기 주님께서 계십니다.
감옥처럼 갇혀서, 없는 존재처럼 살던 이스라엘 가자지구 사람들
지금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온 세상 강자들에게 학살당하고 있는 사람들,
일본 후쿠시마에서 13년 전 죽어간 사람과 동식물들,
그리고 지금 죽어가는 눈에 안 보이는 바다생명들,
그 공포와 고통의 자리로 주님께서 가십니다.
교회는 그 공포와 고통, 절망의 자리에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앞서 가시니, 그 뒤를 따라야 교회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 한 가지씩 끊고
그래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내가 마땅히 가야할 그 길”입니다.(시편 25:4)
[나머지]
* 교회의 길
때가 찰수록, 하나님 나라가 가까울수록, 교회는 점점 무지개의 일곱 빛깔로 선명해져야 합니다. 평소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낮아지며 지냈더라도, 때가 찰수록 교회는, LED 십자가 조명보다 더 환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게 바로 교회라는 증거이기도 하니, 교회는 지금 내 색깔에 대해 수시로 주시해야 하며, 지금 내 밝기에 대해 수시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지금 내 자리에 대해 수시로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무지개는 항상 보이는 게 아닙니다. 비바람 몰아친 뒤, 즉 고난의 때 순식간에 떠올라 잠깐 희망을 주고 미련 없이 사라지는 게 무지개입니다. 호시절 대기업들과 어깨를 겨루며 커가는 게 아니라, 세상이 어려울 때 드러나야 무지개라는 말입니다. 덩치가 커진다고, 마이크가 커진다고 잘 보이고 잘 들리는 게 아닙니다. 너무 크면 오히려 잘 안보이고 안 들립니다. 오만가지 중독에 빠진 세상 사람들, 수많은 우상의 늪에 빠진 사람들 눈에 어디 뵈는 게 있겠습니까? 막장 인생들 눈에 높고 높은 고층 빌딩이 보일 리 없습니다. 교회는 그들 눈에 진정 번쩍 뜨일 수 있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타락한 세상, 고난 받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인생 막장까지 들어가 그들 눈에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막장에서 떨고 있는 그들에게 작은 난로, 빛과 온기가 되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구약본문을 따라, 우리 탐욕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멸종되어가고 있는 생명들, 이 땅의 생명 현실을 직시하며 교회는 좀 더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그 동물들이 내몰린 막장까지 가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방주가 되어줘야 할 것입니다. 온 죄인을 살리시려는, 온 생명을 살리시려는 성부 하나님 마음으로, 구원의 광야 길, 십자가 길을 순종하신 분, 용감하신 갈릴리 예언자, 성자 하나님 마음으로, 둥실 무지개가 되기 위해, 지금 교회는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 광야로 내보내셨다?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서 가장 충격적인 구절을 꼽으라면 12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여기서 내보내셨다는 구절을, 개역성경에서는 ‘몰아내셨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좀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헬라어 성경본문이 ‘에크발로’, 즉 내던져버린다는 뜻의 단어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이 모시는 것이 아니라, 팽개치듯이 내던진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아주 강권하시는 모습입니다. 조금 전까지 성부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하셨는데 금세 그 성령께서 내팽개치듯이 성자를 광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부터 한 주간 삶 가운데서 이 말씀을 화두로 잡으려 합니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고 좋아하시는데... 왜 나를 이렇게 마귀와 들짐승들 우글거리는 광야 한 가운데로 내팽개치시는가?
*** 무지개 동아줄처럼
사면초가에 빠진 아이들 그리고 동물들... 입시지옥, 세상 온갖 폭력들... 갖가지 탐욕으로 멸종되어가는 생명들... 탐욕스런 호랑이에게 몰리고 몰려 자포자기하며 옥상으로 몰려올라가는 우리 <어린 오누이>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작고 힘없는 동물들에게, 이런 튼튼한 동아줄을, 생명의 구름다리를 드리워줘야 하는 것이 무지개, 곧 교회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 그 동물들 모두 그 무지개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 튼튼한 동아줄 붙잡고 올라가 하늘의 해와 달처럼 빛나게, 별처럼 빛나게 해줘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시는 가운데 생생하게 들려오시던 하늘 아버지의 음성처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이 하늘 아빠의 음성을, 지금 꿈을 잃은 아이들, 마음의 힘을 잃은 온 세상 사람들, 심지어 온 세상 불의한 자들까지, 그리고 우리가 큰 빚을 지고 있는 온 생명, 작은 동물들까지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 주님의 에덴동산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3:8)
노아 때나,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기억에 에덴동산은 어제처럼 생생하실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굽어보시던 어제였습니다. 창조질서가 살아 있던 거기, 그리고 거기 그 사람들... 그러나 사람들은 다릅니다. 비교적 첫 사람 아담 시절로부터 멀지 않았을 노아시절 사람들조차 에덴동산 시절의 창조질서를 까맣게 잊고 살다가 천벌을 받았습니다. 창조질서를 잃은, 잊은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어떤 천벌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아담”(고전15:45)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지내실 때가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일생 33년 가운데서, 아마 가장 에덴의 기억이 생생하셨던 때가 아니었을까요? 만화 같은 설정입니다만, 마치 웜 홀 같은 통로를 통해 빨려 들어가
과거에, 고향집에 뚝 떨어지듯이 정신없이 몰려간 그 광야에서, 인적 없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광야에서 홀로 40일을 지내시며 들짐승들과 함께 노시며, 천사의 시중을 받으시는 동안 에덴동산의 기억이 환하게 살아나셨을 것입니다. 40일 금식하며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는 첫 사람들이 받은 옛 뱀의 유혹, 그 슬픈 기억조차 솟아나셨을 것입니다.
*****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시편25:4)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하나님 마음,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가신 마지막 길의 첫걸음, 첫 말씀입니다. 온 땅 생물들의 생명까지 하나하나 아끼시는 주님 마음,(창 9:10-17) 죽음감옥에 갇힌 영들에게까지 가셔서 말씀 전하시는 주님 마음,(벧전 3:19) 아! 한없으신 주님의 마음, 끝없으신 주님의 길! 오늘 주신 말씀들의 끈은 ‘주님 가신 길’입니다. 복기하듯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르며 묵상해 봅시다. 사순절 40일 내내 광야 예수님의 40일 하루하루를 묵상하면 어떨까요? 그때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것처럼, 나도 단 한 가지라도 끊으며 묵상하는 건 어떨까요? 이제 그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올바른 길”!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그 길, “죄인들이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 ‘회개의 길’(시편25:8),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시편25:4)말입니다.
(※ 전에 실은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하나님 나라 (김은주 지음. 골방교회 교우. 「성실문화」 118호)
하나님 나라 거꾸로 나라
저는 자가 걷고
눈먼 자가 보고
귀먼 자가 듣고
울던 자가 웃고
죽은 자가 사네
하나님 나라 이상한 나라
무명하나 유명하고
거짓되나 진실하고
근심하나 기뻐하고
가난하나 부요하고
죽었으나 살아 있네
하나님 나라 영원한 나라
시작도 끝도 없고
시작이요 끝이라
불로 둘러싼 성곽
그 가운데 영광된 나라
하나님 나라 영원한 나라
[시편시조] 시편 25, 내 영혼 기다리네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18호)
내 영혼 기다리네 종일 주만 기다리네
마땅히 가야할 길 진리로 이끄실 분
주 말씀 지키는 사람 사랑으로 이끄신
[시편노래] 시편 25,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정훈 편사, 김영준 작곡. 「성실문화」 118호)
[본문] (시편 25:1-10)
[노랫말]
1.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내 하나님 내가 주님 의지합니다
거짓을 일삼는 자 수치를 당하고, 승전가를 못 부르게 막아주시며
주님의 길 나에게 보여주소서, 마땅히 가야할 길 가르치소서
2.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젊은 시절 지은 허물 기억마시고, 한결같은 그 자비를 기억하시며
주님의 진리로 가르치소서, 바른 길로 주 뜻대로 인도하소서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이신 새명성교회 김영준 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25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정훈 편사, 김영준 작곡)
[시편송서(誦書)] 시편 25:1-10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18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2.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의-지-하였으니-∼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내 원수가 나를 이기어 승전가를 부르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3.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수치를 당할 리 없지만, 함부로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4.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고,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5. 주님은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6. 주--님-- 먼 옛날부터-, 변-함없-이 베푸-셨던-,
주님의 긍휼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7. 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죄와 반역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으로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8. 주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셔서, 죄인들이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9.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
[다함께]
10. 주님-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진실-한-- 사랑-으로-, (진실한 사랑으-로-) 인도하∼신∿다-∼∥
[말씀동화] 방주요양원 가던 날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병원 안 가려고 팔굽혀펴기 하던 시절 이야기예요.
방주요양원의 정확한 이름은 방주요양병원입니다.
이름은 병원인데 의사도 거의 없고 간호사도 드물죠.
그 대신 간병인은 많은데 대부분 낯선 외국인 노동자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요양원에서 살게 된 키다리 할아버지는
며칠 전 방주요양병원 가던 날, 그 첫날의 슬픔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식들도 공손하고 요양병원 사람들도 공손하고 침대도 부드러웠지만
할아버지는 마치 광야로 내팽개쳐지는 느낌뿐이었습니다.
“여긴 방주가 아니라 광야야!”
건강하던 시절 친구 병문안 갔던 요양병원에서 목격한 나쁜 기억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병실 부족인지, 간호사 부족 때문인지 몰라도
병실 바깥 간호사가 있는 텅 빈 복도에 커튼으로 두른 침대가 여러 개 있고
때마침 어느 간병인이 커튼을 열어둔 채 벌거벗은 환자의 몸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눈은 떴지만 의식이 없는 환자였는데
할아버지는 수치스러운 그 광경에 얼른 고개를 돌렸으나
그 몽롱한 눈길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나쁜 기억을 가졌음에도 할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올 수밖에 없었으나
그래도 기독교계통 요양병원이라 이름도 방주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자식들은 다 돌아가고 혼자 남은 키다리 할아버지는 한없이 외롭습니다.
그나마 같은 방 환자들이 모두 중증 치매나 의식 없는 분들이라 말벗도 없기 때문입니다.
키다리 할아버지가 몸만 불편하지 의식은 멀쩡한데도
간병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식 없는 환자들을 거칠게 대합니다.
적어도 키다리 할아버지의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온통 똥오줌냄새 진동하니 그 이름 방주가 새롭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가득했을 짐승들 똥오줌 냄새가 연상되는 한편
마치 나 혼자 정신 차린 사람이라 생각하니
여긴 방주가 아니라 광야라는 생각에 다다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마가복음1:12-13, 개역개정)
간병인이 창가 침대에 누운 환자의 옷을 거칠게 벗기며
기저귀 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십자가의 예수님까지 떠오릅니다.
오늘도 키다리 할아버지는 유일한 말벗 성경책을 엽니다.
성경말씀 글자와 글자 사이 여백마다 사랑스런 손주들 얼굴이 가득합니다.
백일사진, 돌사진, 초등학교 입학사진, 졸업식 사진까지
한없이 이어지는 아이들 얼굴이 한없이 그립습니다.
잠깐 성경책을 내려놓고 기도공책을 펼칩니다.
사랑스런 손주들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가며 축복기도문을 짓습니다.
한없이 불편한 몸이지만 한껏 기운을 모아
한 자 한 자 아이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적어 내려 갑니다.
“이 기도문 많이 모아서 너희에게 각각 책 한권씩 만들어 줄 거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의 책이 될 거야.”
멀리 떨어져 사는 병약한 할아버지가 사랑스런 손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 마지막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할아버지의 기도공책에는 오늘도 애틋한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다시 성경책을 열어 시편을 찾습니다.
사랑하는 자식들 손주들과 함께 부르고 싶은 시편노래가 산더밉니다.
그런데 지금 키다리 할아버지는 당장 내가 처한 신세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의지하였으니,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수치를 당할 리 없지만...”(시편25:2,3)
저 멀리 창밖 세상을 그리워하며
키다리 할아버지는 오늘도 자식들과 손주들이 그립습니다.
내가 보러 갈 수 없으니 자식들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가르쳐주십시오.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시편25:5)
요양원 오던 날이 집 떠나던 날이었습니다.
한없이 그리운 내 작은 집,
지금은 내 작은 집보다 더 작은 방, 작은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여기도 정들면 내 집처럼 여겨질까?”
정신 차리고 다시 유일한 말벗 성경책을 펼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마가복음1:11)
저 멀리 창밖 손바닥만 한 저녁 하늘을 바라봅니다.
방주요양원 작은 방 작은 침대 위로 뉘엿뉘엿
햇볕 한줌 쏟아집니다.
[이정훈 지음. 2024년 2월 1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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