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낮추는 사람”
[성서일과 4본문]
(요엘 2:23-32)
23. 시온에 사는 사람들아, 주 너희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희를 변호하여 가을비를 내리셨다. 비를 흡족하게 내려주셨으니, 옛날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 주셨다.
24. 이제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가득 쌓이고,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칠 것이다.
25. "메뚜기와 누리가 썰어 먹고 황충과 풀무치가 삼켜 버린 그 여러 해의 손해를, 내가 너희에게 보상해 주겠다. 그 엄청난 메뚜기 군대를 너희에게 보내어 공격하게 한 것은 바로 나다.
26. 이제 너희가 마음껏 먹고, 배부를 것이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의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찬양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27.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28.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29.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30. 그 날에 내가 하늘과 땅에 징조를 나타내겠다. 피와 불과 연기구름이 나타나고,
31.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붉어질 것이다. 끔찍스럽고 크나큰 주의 날이 오기 전에, 그런 일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32.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안에는 피하여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살아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시편 65)
1. 하나님, 시온에서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한 일이니, 우리가 주님께 한 서원을 지키렵니다.
2.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육신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3. 저마다 지은 죄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울 때에, 오직 주님만이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4. 주님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시어 주님의 뜰에 머물게 하신 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집,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온갖 좋은 복으로 만족하렵니다.
5.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그 놀라운 행적으로 정의를 세우시며,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시므로 땅 끝까지, 먼 바다 끝까지, 모든 사람이 주님을 의지합니다.
6. 주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허리에 띠를 동이시고 산들이 뿌리를 내리게 하셨습니다.
7. 주님께서는 바다의 노호와 파도 소리를 그치게 하시며, 민족들의 소요를 가라앉히셨습니다.
8. 땅 끝에 사는 사람들까지, 주님께서 보이신 징조를 보고, 두려워서 떱니다.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까지도, 주님께서는 즐거운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9. 주님께서 땅을 돌보시어, 땅에 물을 대주시고, 큰 풍년이 들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놓으신 물길에, 물을 가득 채우시고, 오곡을 마련해 주시니, 이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다가 그렇게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10. 주님께서 또 밭이랑에 물을 넉넉히 대시고, 이랑 끝을 마무르시며, 밭을 단비로 적시며, 움 돋는 새싹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
11. 주님께서 큰 복을 내리시어, 한 해를 이렇듯 영광스럽게 꾸미시니, 주님께서 지나시는 자취마다, 기름이 뚝뚝 떨어집니다.
12. 그 기름이 광야의 목장에도 여울져 흐르고, 언덕들도 즐거워합니다.
13. 목장마다 양 떼로 뒤덮이고, 골짜기마다 오곡이 가득하니,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오고, 즐거운 노랫소리 그치지 않습니다.
(딤후 4:6-8, 16-18)
6.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6. 내가 처음 나를 변론할 때에, 내 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17. 주님께서 내 곁에 서셔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여 전도의 말씀이 완전히 전파되게 하시고, 모든 이방 사람이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셨습니다.
18. 주님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구원하셔서 그분의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누가 18:9-14)
9.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노트]
이번 성서일과 4본문을 읽으며 묵상하는 동안 마음속에 쏙 들어온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4절의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허물 많은 세리가 잔뜩 주눅이 들어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전에서 멀찍이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을 치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가리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 하신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세리를 멸시하던 바리새파 사람은 “자기를 높이는 사람”입니다.(14)
그는 결국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누가 18:14)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부분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성경을 읽고 따르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알맹이입니다.
결코 흘리고 지나쳐서는 안 될 알맹이 중의 알맹이입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렇게 중요한, ‘자기를 낮추는 일’을 잘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이 먹을수록 어렵습니다.
돈 많아질수록, 권력, 직급이 올라갈수록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홀쭉했을 때는 잠수해서 전복을 따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나이 먹을수록 점점 살찌고 내 배 둘레에 바람주머니까지 하나 둘 달리기 시작합니다.
부력(浮力)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물 속 깊이 잠수를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부력(富力)이 바로 부력(浮力)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를 낮추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부력(浮力, 富力)을 없애면 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하나 둘씩 떼어내면 됩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이론대로 되나요?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오늘 서신서 말씀인 디모데후서 4:8절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더 있다 오시면 안 될까요?’ 이런 자들 많습니다.
어쩌면 바로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살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개똥밭에 뒹굴어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이죠.
그러나 식민지 백성으로, 흑인 노예로, 지옥 같은 감옥에서 사는 이들이라면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그냥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하늘나라”(딤후 4:18), 즉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콩알만 한 기득권조차 다 내려놓을 때, 그만큼 낮아질 때 비로소 주님 재림을 진심으로 사모하게 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부어드리는 제물처럼 피를 흘릴” 지경까지 아래로, 막장으로까지 내려가 있지 않습니까?(딤후 4:6)
때론 주님께서 나를 치셔서 낮추시기도 합니다.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주님만 의지하지 않고, 지금 내게 가까운 내 돈, 내 권력, 내 지식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언약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꽉 막힌 귓구멍에 그 말씀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우리 몸을 치십니다.
몸이 아파야 비로소 몸속에 있는 기억장치가 작동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인 요엘 2:25절의 “메뚜기 군대”나, 31절의 “끔찍스럽고 크나큰 주의 날”이 그 경우일 것입니다.
이는 크나큰 위기요 비극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몸에 붙은 돈벌이 관성을 떼어낼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내 몸에 붙은 부력(浮力, 富力)을 떼어낼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리하여 낮아지고 또 낮아질 수 있는 길이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이 위기를 이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의 종착역은 행복입니다.
작은 것 속에서도 신비로운 기쁨을 만끽하는 행복!
안빈낙도(安貧樂道) 할 수 있는 만족!
그래서 저는 시편 65:4절의 “온갖 좋은 것을 누리는 큰 복”이란 결코 진수성찬, 흥청망청한 지경이 아니라고 봅니다.
작고 작은 감옥 속 자그마한 우유갑 화분 안에서 기른 야생초로 김치를 만들어 먹는 행복!(황대권, 『야생초 편지』)
온갖 젓갈이 들어간 김장김치와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작고 작은 김치 속에 깃든 숨은 맛을 느낄 수 있는 행복!
비유가 좀 심했나요?
오늘 구약본문말씀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고 묵상한 구절은 26절과 27절입니다.
여기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치 노래의 후렴구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다른 본문들과 이어서 묵상하다보니까, 낮아지는 것이 결코 수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수치는,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나의 허물, 내 죄를 보지 못하는 일 말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바리새인의 경우랄까요?
예수께서는 거기 그 세리의 수치지심, 자기 죄 인식,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 오히려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구약본문 요엘 2:32절의 “시온산”(예루살렘).
시편 65:4절의 “주님의 뜰, 주님의 거룩한 성전, 주님의 집”.
서신서본문 딤후 4:18절의 “그분의 하늘나라”는 무엇입니까?
크나큰 벌, 크나큰 비극을 통해, 크나큰 내 죄 인식을 통해 회개한 사람들,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나머지]
그러고 보니 오늘은 496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500주년이 코앞이네요.
교회의 죄를 미주알고주알 열거하며 논했던 루터가 기억납니다.
지금 루터가 한국교회 안에 있다면 어떤 죄목을 열거하고 따지고 들지 궁금합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바로 내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낮아지기 위해, 내 허물을 직시하기 위해, 그래서 제대로 회개할 수 있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시편 65:3절 말씀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저마다 지은 죄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울 때에, 오직 주님만이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그 세리에게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세리처럼, 그분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엘 2:27)
[말씀노래] 자비를 베푸소서
1. 하나님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 하늘을 우러를 엄두도 못냅니다
이죄인 머리숙여 가슴칠 뿐이오니 / 아하나님 이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2. 하나님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게 하옵소서
돈도 명예도 먹을거리도 낮추소서 / 아하나님 이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말씀동화] 멧돼지의 기도
저는 돼지예요. 꿀∼
그냥 집돼지가 아니라 산에 사는 산돼지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산을 뫼, 메라 불러요.
그래서 제 이름은 멧돼지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저희를 싫어하게 되었어요.
싫어도 아주 많이 싫어해요.
냄새나는 집돼지보다 더 싫어하네요.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해요.
첫째로, 우리는 덩치가 아주 크죠.
아마 그래서 싫어하나 봐요.
자그마한 다람쥐처럼 만만한 크기였으면 아마 애완용으로 사랑받았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우리 멧돼지는 다 자라면 큰 건 길이가 2미터나 되요.
제 몸무게도 300㎏이 훨씬 넘는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할 밖에요!
이렇게 덩치 큰 멧돼지를 산에서 만나게 되면 아마 혼비백산하겠죠?
언젠가 ‘차우’라는 영화에 우리 멧돼지들이 나왔습니다.
차우는 덩치가 집채만 한 전설의 멧돼지예요.
그런데 요새는 방사능 오염수에 오염된 멧돼지들이 돌연변이를 일으킵니다.
전설 속에만 있던 무자비한 차우가 현실로 나타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죠.
(그나저나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꿀∼)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어요.
그건 바로, 우리가 농촌의 농작물을 훔쳐 먹기 때문이에요.
그냥 몇 개 훔쳐 먹는 정도가 아니라 이리저리 다 파헤쳐 놓기 때문이죠.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 먹어도, 고구마를 파먹어도 한 개를 끝까지 얌냠 얌전히 먹는 법이 없어요.
저희 멧돼지들에겐 한 입 먹다가 금세 다른 걸로 바꿔 먹는 못된 습성이 있답니다.
잘 자란 논바닥을 휘젓고 다니는 것도 아주 좋아하죠.
그 바람에 멀쩡한 벼이삭들이 다 쓰러지게 됩니다.
아무튼 이래저래 저희 멧돼지들은 대한민국 농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이 되어 버렸어요.
저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인간 여러분께 두 손 모아 빕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는 죄인입니다, 아니 죄돼집니다. 꿀∼
저는 절제 못하고 배불리 먹는 것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먹보입니다.
음식찌꺼기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을 줄 모르는 게걸스러운 돼지일뿐입니다.
돈 밖에 모르는 세리 같은 놈이 바로 접니다.
의로운 동물 황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죄인, 아니 죄돼지입니다.
아, 여러분, 부디 이 죄돼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성경말씀에 나오는 세리를 보고 예수님은 의롭다고, 하나님과 다시 친하게 되었다고 하셨대요.
부디 인간 여러분도, 이런 저 멧돼지를 용서하시고 좀 가깝게 사랑해주실 수 없으실까요?
(그나저나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꿀∼)
저는 용문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삽니다.
용문산 백운봉 아래 삿갓봉 끝자락까지 오르내리는데 멀리 양평읍 봉성리까지 돌아다니죠.
거기 산중턱에 자그마한 수도원이 하나 있는데 저는 그 수도원 뒷길로 다니길 좋아해요.
근처에 아름드리 도토리나무들이 많고, 산에다 밭을 일군 곳이 많거든요, 꿀∼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도사님들이 읊조리는 성경말씀 독경소리 듣는 재미가 쏠쏠하죠.
수도원 독경소리는 절집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처럼 구수하고 왠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줘요.
어쩐지 내가 착한 멧돼지가 되어가는 것만 같아요.
이러다 점점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멧돼지가 되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친구들은 저를 낭만돼지라고 부른답니다.
저는 그 수도원 수도사님들 가운데 특히 프란치스코 수사님을 가장 좋아해요.
왜냐구요?
몇 가지 이유가 있죠.
첫째는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산을 좋아한다는 점이예요.
그래서 약초는 물론이고 우리 산짐승들에 대해서도 잘 아시죠.
언젠가 제가 수도원 뒷길을 지나고 있는데 저 위에서 수사님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저랑 딱 마주쳤죠.
후각이 예민한 저는 금세 프란치스코 수사님을 알아봤어요.
그래도 모르는 척 그냥 지나가고 있었죠.
그 때 수사님은 화들짝 놀라거나 부스럭거리지도 않고 가만히 나무 곁에 서서 끝까지 나를 지켜보셨어요.
저희 멧돼지들의 습성을 잘 아시는 거죠.
여러분도 혹시 산에서 저 같은 멧돼지들을 만나게 되면 절대로 놀라서 소리 지르거나 그러지 마세요.
등을 돌리고 달아나서도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산에서는 제가 제일 빠르거든요.
저는 눈이 나쁘기 때문에 그냥 나무나 바위 뒤에 가만히, 조용히 계시면 됩니다.
그러나 제 코는 예민하니까 절대 짙은 화장이나 향수 같은 거 뿌리고 산에 오지는 마세요.
(그나저나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꿀∼)
참고로, 저희 멧돼지들이 가장 난폭할 때는 덫에 걸렸다 빠져나왔거나 사냥꾼 총에 상처 났을 때죠.
그리고 갓 낳은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에요.
새끼가 예쁘다고 만지고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수풀 속에 숨어있던 어미는 이성을 잃고 아무나 가리지 않고 저돌적(猪突的)으로 공격을 하게 되거든요.
아무튼 저희는 위협을 느끼거나 깜짝 놀랐을 때만 사람을 공격한답니다.
제가 프란치스코 수사님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이름 때문이에요.
저희 멧돼지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름이 바로 그 이름, ‘프란치스코’거든요.
이제부터 그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잘 들어보세요.
올해는 특히 우리 멧돼지들 뉴스가 많았다죠?
멧돼지가 시도 때도 없이 도시에까지 나타난다고 말예요.
며칠 전엔 카센터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그랬다죠?
우리는 엔진오일 썩은 거, 그런 폐유 냄새를 아주 싫어하는데 거긴 왜 들어갔나 모르겠네요.
쯧쯧 철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이유는 한 가지, 바로 먹을거리 때문이죠.
병원 영안실까지 휘젓고 다니고, 병원 응급실에서 사람까지 물었다네요.
역시 이유는 한 가지, 바로 먹을거리 때문이죠.
가만 보면 뉴스에 나오는 멧돼지들은 대부분 100㎏도 안 되는 어린놈들이랍니다.
사람으로 치면 중학생 정도랄까?
원래 중학생 아이들이 좀 철없고 마구 들이대고 그러잖아요.
사춘기 호기심도 아주 끝장이죠.
멧돼지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로 호기심도 많고 버릇도 없고, 무서운 걸 모르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멧돼지 청소년들에게는 사람과는 다른 사연이 있답니다.
그건 바로 어른 멧돼지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먹을거리를 놓고 다투는 영역싸움에서 덩치 큰 어른 멧돼지들에게 밀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깊은 산으로부터 인가 근처 야산으로까지 점점 밀려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산에는 도토리 씨가 마른다는 겁니다.
저희 멧돼지들은 뭐든지 잘 먹습니다.
과일도 잘 먹고 작은 짐승이나 뱀, 심지어 벌레들까지 먹는 잡식성이죠.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저희 주식은 바로 도토리입니다.
가을이면 산에서 무진장 얻을 수 있는 도토리!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도토리에 환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옛날보다 먹을거리가 훨씬 풍부해졌는데도, 배고프던 예전보다 도토리에 더 환장하는 겁니다.
그건 바로 도토리묵이 몸에 좋다는 소문 때문이죠.
여기 봉성리 야산에도 원덕역 때문에 서울사람들까지 시도 때도 없이 도토리 뒤지러 옵니다.
배낭 하나 가득 도토리를 주워갑니다.
며칠 전엔 길가에 있는 아름드리 도토리나무를 지나가던 포클레인이 수차례 들이받았어요.
그 바람에 그 멋진 참나무가 곳곳에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줌마들이 부탁했나 봐요.
도토리 털어달라고!
이지경이다보니, 저희 멧돼지들이, 특히 한창 먹어야 하는 청소년 멧돼지들이 밭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심지어 도시에까지 출몰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치고, 등을 보이며 도망갑니다.
그 바람에 우리 애들도 깜짝 놀라서 사람들에게 마구마구 덤비게 되는 됩니다.
그래서 제가 프란치스코 수사님을 좋아하는 겁니다.
저희 멧돼지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이 바로 프란치스코라는 겁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 바로 그분이 저희 동물들의 수호성인이시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고요?
그건 바로 그분이 저희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신비로운 은사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희 멧돼지들에게 가장 급히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람들과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몇 가지 희망찬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요.
지난봄에 새로 천주교 교황이 되신 분 이름이 바로 프란치스코라는 사실이죠.
그뿐 아니에요.
지금 올라오고 있는 태풍 27호 이름이 바로 프란치스코라는 사실 아세요?
사람들은 태풍 때문에 벌벌 떨지만, 저희는 그 이름 프란치스코 때문에 두근두근 가슴이 설렌답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과 대화를 하고 싶은 제 마음 때문입니다.
말이 통한다면, 프란치스코님 덕분에 여러분과 말이 통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겁니다.
제발 산에서 도토리 주워가지 말아달라고 빌고 싶은 거, 이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러분, 저희는 덩치는 크지만, 참으로 낮고 낮은 죄인, 아니 죄돼지입니다.
음식물찌꺼기 너무 많이 남기는 게걸스러운 죄돼지입니다.
힘없는 약자들,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눠먹을 줄 모르는 욕심꾸러기 죄돼지입니다.
약자를 몰아내고 제 영역 넓히기에 여념 없는, 저 세리보다도 더 못된, 무자비한 죄돼지입니다.
늘 여러분께 도움만 주고 묵묵히 자기 희생할 줄 아는 저 의로운 황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죄돼지입니다.
늘 약자들과 나눠먹을 줄 아는 여러분 인간들의 의로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저희는 죄돼지입니다.
아, 여러분, 부디 이 죄돼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저는 여러분과 좀 더 친해지고 싶습니다.
제가 프란치스코 수사님을 좋아하는 보너스 이유가 또 하나 있어요.
수사님은 구제역 사건 때 집돼지 살처분 하는 뉴스를 보시고 돼지고기를 끊으셨죠.
덕분에 그 좋아하는 감자탕도 끊고 그 좋아하시던 병천 순대국도 끊으셨다는!
그리고 급기야, 우리 멧돼지들을 위해서 그 좋아하시던 도토리묵조차 끊으셨다는 거예요!
도토리묵 열풍 때문에 멧돼지들이 수난당하는 뉴스를 보신 뒤로 그러셨다는군요.
탐욕의 상징 돼지!
탐욕과 무자비, 무절제의 상징 멧돼지!
저 같이 낮고 낮은 동물을 위해, 대신 좋아하는 음식을 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제겐 크나큰 희망입니다.
여러분,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님이 어떻게 동물들과 대화가 통하셨는지 아세요?
그건 바로, 저 같이 낮고 낮은 동물들을 동등한 벗으로, 형제자매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낮고 낮은 세리가, 더 낮고 낮게 자기를 낮추었을 때 어떻게 되었죠?
마침내 그는 높고 높으신 그분과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 꼭 기억하세요!
(그나저나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꿀∼)
오늘도 저는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 같은 벗들을 기다립니다.
맛있는 먹을거리 욕심 조금만 낮추면 들리기 시작합니다.
도깨비방망이 같은 돈 욕심도 조금만 더 낮추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저희 같이 낮은 곳에 있는 동물들이랑 벗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랑 친구 안하실래요?
[이정훈 지음, 2013년 10월 27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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