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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주현절 3주(2015년 1월 25일) 예배준비 노트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성서일과 4본문]

 

(요나서 3:1-5, 10)

1.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4.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10.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시편 62:5-12)

5.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6.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7. 내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내 견고한 바위이시요, 나의 피난처이시다.

8.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니, 백성아, 언제든지 그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셀라

9.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

10.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11.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요,

12.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7:29-31)

29.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마가복음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때가 찼음입니다.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요나 3:4)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시편 62:12)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고전 7:29)

때가 찼다.”(마가 1:15)

 

오늘 요절은,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로 정합니다.(시편 62:5)

 

 

[구약과 시편 (요나 3:1-5, 10 / 시편 62:5-12)]

구약본문의 요나는 우여곡절 끝에 원수의 나라 수도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 니느웨가

40일만 지나면, (마치 여리고성처럼) 무너진다는!

 

이렇게 큰 성읍이 어떻게, 무슨 수로 무너진단 말인가?’

도대체 저 사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이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살갗이 상하도록 맨몸에 굵은 베옷만 걸치고(8)

목에 피가 나도록 부르짖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8)

밥도 물도 먹지 않기로 결심합니다.(7)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는 등

삶의 구석구석까지 변화하는 회개의 구체적 모습을 보입니다.(8)

 

그렇게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켜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10)

 

어떻게 저렇게 철저히 회개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저렇게 빨리, 하루 만에 회개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고스란히 믿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조차 예언을 거짓말이라고 무시하고 예언자를 핍박하는 세상입니다.

예언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는 사람조차

그 말씀 금세 잊어버릴 만큼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세상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민족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받아들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해물탕 큰 조개처럼 딱 벌어진 요나의 입을 보십시오.

니느웨의 말씀 반응속도가 장난이 아닙니다.

 

걸으며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이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요나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말을 타지 않고 걸으면서 외쳤기 때문일까?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딱 하나,

사십일만 지나면...” 끝이 임박했다는 이 위기의식이 제대로 작동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 가족이 작은 노예 소녀 하나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어 구원받듯이

니느웨는 비둘기처럼 작은 요나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그 쓰디쓴 말씀을 통째로 삼킨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시편본문의 이 구절,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시편 62:10)

이 말씀대로,

니느웨의 왕은 굵은 베옷차림으로 잿더미에 앉아 이렇게 선포합니다.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8)

 

마침내 저들에게 이런 고백이 터져나옵니다.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시편 62:5)

 

오늘 시편노래가 구구절절 마치 니느웨의 노래처럼 느껴집니다.

 

 

[서신서와 복음서 (고린도전서 7:29-31 / 마가복음 1:14-20)]

오늘 서신서본문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립니다.

마침내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진다고 설파합니다.

모든 소유와 희로애락을 내려놓을 것을 권합니다.

이유는 하나, 주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입니다.

천국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때가 찼다는 말씀이 중심입니다.(마가 1:14)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세례요한이 외쳤습니다.(마태 3:2)

그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도 그렇게 외치십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가 1:14)

 

그리고 오늘 복음서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 삼으시는 장면입니다.

시몬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 요한 형제를 부르십니다.

어부인 저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의 꿈을 주십니다.

사람을 죽이는 보이스 피싱이랑 정반대의 보이스 피싱입니다.

 

그런데 제자의 길은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내 생명을 먹이로 주는 피싱(Fishing)입니다.

스승께서 보여주신 바로 그 길을 따라 걷는 제자의 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나선 제자의 길입니다.

 

그나저나 제자들은 과연 어떻게 모든 걸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었던 걸까요?

 

 

[정리]

오늘 구약과 복음서본문 가운데서 두 가지 공통점을 봅니다.

마지막 때가 찼다는 외침,

그리고 그 외침을 들은 자들의 번갯불 같은 반응입니다.

 

지금 세상의 온갖 희로애락,

내 모든 애지중지 공든 탑과 가치관들,

모든 물질세계와 그 욕망덩어리들이

이제 곧 와르르 무너진다는 말씀’!

 

그 말씀 듣고 니느웨 사람들도, 갈릴리 어부들도

가던 길 돌이켜 주님을 바라봅니다.

제자들처럼 모든 걸 버릴 때 주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참 희망을 발견할 때 모든 걸 분토처럼 버릴 수 있습니다.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오늘 시편 노래가

저들의 지금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나저나 때가 찼다는 그 말씀이 어떻게 저들에게 꽂힌걸까요?

아무리 큰 사건이 터져도 금세 잊어버리는 우리 아닙니까?

 

사람은 자라면서 수많은 트라우마를 겪기 마련입니다.

그 크고 작은 상흔들이 쌓이고 쌓여

마치 내 영혼의 굳은살처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자극이 와도 아프지 않은 겁니다.

무감각해지고 쉽게 잊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목소리를 들을 때,

갈릴리 어부들이 예수님 목소리를 들을 때,

그 굳은살들이 녹아버린 것입니다.

 

내 모든 굳은살이 녹아지고 아기살처럼 보드라워지면

그 말씀에 온 몸이 반응하게 됩니다.

오직 그 말씀의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오직 그 말씀, 주님께만 희망을 두게 됩니다.

 

우리도 오늘 하나님 말씀 들을 때, 내 안의 상처 다 녹아내리고,

말씀 반응속도가 광속으로 변화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 따라, 내 모든 걸 버리고 따를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나머지]

* ‘광속(光束)같은 말씀 반응속도

니느웨 사람들과 갈릴리 어부들의 회개는 오늘 우리에게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말씀 반응속도가 번개처럼 빠를 수 있을까?

때가 꽉 찬 것을 느낀 것... 어떻게 그걸 느낄 수 있었을까?

 

모르겠습니다.

진짜 꿈같은 이야기지만,

어떤 신비의 물약을 먹고 아기로 다시 태어난

옛날 민담 같은 경우는 아닐까요?

 

다시 태어난 아기들에게 배가 무슨 소용이요 그물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빠조차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엄마 젖이 필요할 뿐입니다...

 

 

**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

남명 조식 선생은 퇴계 이황과 동갑내기 선비입니다.

절대 관직에 나가지 않고, 경남 산청에 은거하며 제자를 가르친 유학자입니다.

곽재우 장군을 비롯해서,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수많은 의병장으로 활약합니다.

 

남명 선생은 칼을 찬 유학자로 유명합니다.

대검만큼 짤막한 칼을 차고, 다리에는 방울을 차고 살았습니다.

 

매일매일 읽고 또 읽는 옛 성현들의 말씀이지만

육체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자칫 그 말씀 잊기 쉽기에

걸을 때마다 울리는 방울소리에 그 말씀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솟아나는 사심(邪心)을 잘라내기 위한 칼입니다.

 

하나님 말씀, 그 말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잊어버리는 세상입니다.

때가 찼다. 회개하여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예수님 말씀조차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이런 나에게 방울과 칼은 무엇일까요?

 

 

***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늘 구약본문과 달리 뜻을 돌이키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는 과정을 가만히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핑계를 댔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창세기 3:12-13)

 

사울을 버리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지난 화요일 매일성서일과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진멸할 짐승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입니다... 내가 군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습니다.”(삼상 15:21, 24)

 

진정한 회개의 기초는

핑계거리가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의 내 죄에 대한 집중력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길과 정 반대의 길로 돌이키는 용감한 행동입니다.

 

 

 

 

 

[말씀 동시] 시몬과 안드레는 평범한 어부가 아니다 (조강현 지음. 시냇물교회 교회학교 1학년. 성실문화81)

예수께서 갈릴리의 바닷가에 오셨다.

예수께선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다.

그 후 시몬과 안드레는 평범한 어부가 아니다.

구원의 주님의 제자, 사람을 낚는 어부다.

 

 

 

[말씀 시조] 베드로 안드레여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81)

베드로 안드레여 야고보 요한이여

사람낚는 어부되러 날따라 오려무나

고깃배 버리렵니다 구원방주 예수여

 

 

 

[말씀 한시] 가족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81)

從我期近矣(종아기근의) 때가 가까웠다. 나를 따르라.

使爾得漁人(사이득어인) 너로 사람을 낚게 하리라.

外族從耶穌(외족종야소) 가족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

妻喟何家貧(처위하가빈) 부인은 크게 한 숨을 쉬었다. “남은 식구들의 가난은 어떻게 한담.”

 

 

 

[말씀 서예] 시편 62:5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81)

 

 

 

 

 

 

[말씀 노래] 모든 걸 버려두고 주를 따르네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81)

[본문] (마가복음 1:14-20)

[노랫말]

1. 요한이 잡힌뒤에 예수님말씀, 가깝다 가까웁다 하나님나라

꽉찼다 때가찼다 하나님의때, 회개하고 회개하라 복음믿어라

2. 갈릴리 바닷가에 예수님말씀,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신말씀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요한, 모든걸 버려두고 주를따르네

 

[해설]

마가복음 1:14-20절 말씀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4.4조로 풀었고, 찬양사역자 이석훈 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모든 걸 버려두고 주를 따르네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2014. 11)

 

 

 

 

 

[시편 송서(誦書)] 시편 62:5-12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81)

(* 전래자장가-천자문 독송 풍으로)

 

5. ---- 영혼---, 잠잠히 하나님-- 바라---,

무릇- -의 소망---,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의 구원과 영광---,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 --- -프도다-, 사람---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 들었-나니-,

권능--- 하나-님께-, (하나님--) 속하였-- 하셨-도다-

 

[다함께]

12. ---- 인자-함은-, -께 속-하오----,

주께--- - -람이 행한 대--, (-한대-) 갚으심이니-∼∥

 

 

 

 

 

[말씀 동화] 전서구(傳書鳩) ‘요나따라잡기

 

비둘기는 어떻게 우나 들릴락말락 구 구 구

비둘기들은 노래할 때도 들릴락말락 구구구

뻐꾸기는 어떻게 우나 또렷한 소리로 뻐꾹뻐꾹

뻐꾸기들의 노래소리는 온산에 울려 뻐꾹 뻐꾹

나는 뻐꾸기가 좋아 맑고 힘찬 그 소리가

저기 멀리까지 들리게 맑고 힘찬 내 노래...(하략)

[‘뻐꾸기처럼 노래할래’(원제;유구곡維鳩曲), 박새봄 작사, 박승원 작곡]

 

봉황새 간관(諫官)은 못되더라도 뻐꾹새 간관은 되어야지,

제대로 제 소리도 못 내고 구구구... 비둘기 간관은 영아니야!”

 

봉황새 간관? 뻐꾹새 간관? 비둘기 간관? 그게 뭐지?

간관이 뭐냐 하면,

임금님이 잘못을 저지를 때 알람을 울려주는 신하가 간관(諫官)이야.

그러면 안 된다고, 똑바로 사시라고, 정치 제대로 하시라고 깨우쳐주는 신하지!

그러니 간관은 누구보다 슬기롭고 또 용감해야겠지?

 

그래서 간관은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또렷해야 하는데

대부분 간관이란 자들이 제 목숨이 아깝고, 가족들 걱정되고, 벼슬자리도 아깝고...

그래서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내고 아마 속으로만 웅얼웅얼 거렸었나봐.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고려시대 16대 임금님인 예종이

이 노래 유구곡을 지어 불렀다지?

어디 좀 제대로 된 간관이 없느냐?” 하고 말이야.

 

원래 가사는 이랬어.

 

비둘기는 비둘기는 울음을 울되,

뻐꾸기야 말로 나는 좋아라, 뻐꾸기야 말로 나는 좋아라.”

 

가만, 고려 예종 시대가 무슨 1,600년 전이냐고?

대략 1,000년 전이라고?

뭔 소리래? 지금이 2,700년인데?

AD 2,700, 지금 주후 2,700년이라고!

 

그건 그렇고, 난 이 노래 유구곡이 너무 슬퍼!

왜냐고?

우리 동네선 금지곡이거든.

또 왜냐고?

왜긴 왜야? 내가 비둘기니까 그렇지.

들릴락말락 구구구, 목소리 작은 비둘기...!

 

 

내 이름은 요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용감한 전서구(傳書鳩)란다.

! 전서구가 뭐냐 하면, 편지를 전달해주는 비둘기를 가리키는 말이지.

 

혹시 전서구의 전설 발리언트라고 아시나?

지금으로부터 대략 700년 전에 나온 고전 만화영화의 주인공이지.

그리고 정말 전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 할아버지야.

 

예언자 요나!

그 이름 요나의 뜻이 바로 비둘기거든.

그러고 보면 우리 전서구들 하는 일이 예언자의 역할이랑 무척 많이 닮지 않았니?

 

우리 전서구들은 닭둘기들이랑은 완전히 달라.

사람들이 던져주는 모이나 주워 먹으러 구구구 몰려다니는 닭둘기들...

피둥피둥 살만 쪄서 제대로 날지도 못하지!

모름지기 예언자들이란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 보다는 미션(mission), 즉 사명이 생명이거든!

 

그래서 우린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단다.

나는 전서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훈련,

해리포터의 우체부 부엉이들조차 고개 절래절래 흔들며 도망갔다는 그 전설의 훈련,

참치 뱃속에 들어가서 밤낮 사흘을 견디는 지옥훈련을 받은 몸이야!

여태 그 훈련을 통과한 최고급 엘리트 전서구는 나 하나뿐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나에게 요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나는 모니터 속으로 들어갔단다.

내 주인님께서 온라인 미션을 맡기셨거든.

아참, 너희가 워낙 오래 전 사람들이라서 설명이 좀 필요하겠구나.

요샌 인터넷이라는 개념이 없어진지 오래란다.

 

아주 오래 전 신석기 시대 쯤에 사물인터넷이란 말이 유행했다지?

요샌 그렇게 인터넷으로 사물과 소통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이, 동식물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시대야.

 

 

내 주인님 소령이 아빠가 뿔났어요.

중학교에 올라간 소령이가 맨날 인터넷 게임에 빠져 살기 때문이지.

공부도 안하고, 밥도 안 먹고, 거의 중독 수준이라니까?

언젠가는 아예 온라인 안으로 들어가 실전 게임하다가

하루 종일 행방불명 된 적이 있었다니까?

 

그뿐 아니에요.

소령이 아빠 친구 아들이 고등학생인데,

그 아이는 아예 온라인 게임 테러는 아름다워에 빠지는 바람에

온라인 가상 국가 아이에스로 망명을 해버렸다지 뭐야.

아직도 안돌아오고 있데요.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야.

 

그래서 소령이 아빠께서 특단의 조처를 내리신 거야.

원래 소령이 아빠는 컴퓨터 전문가, 전설의 해커였단다.

그러다가 마음잡고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러 시골로 내려오신 건데,

마침내 꽁꽁 감추어두었던 전설의 보검을 꺼내신 거지.

피는 못 속인다고, 외동딸 소령이가 컴퓨터에, 온라인 게임에 빠지는 바람에 그만...

 

소령이 아빠, 그러니까 내 주인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미션은 간단해.

온라인 게임 테러는 아름다워를 비롯해서

모든 폭력성 게임의 메인 서버를 공격하는 거야.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나 요나를 보내서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로 한 거지.

예전 같았으면 경고 메시지고 뭐고 당장 소돔 바이러스를 던져 폭파시켰을 텐데,

우리 주인님이 시골생활하시면서 많이 부드러워지신 게 틀림없어.

나 같으면 그냥 한방에 다 쓸어버릴 텐데...

내 친구 소령이 뺏어간 그놈의 인터넷 게임들 아주 밉살스럽거든!

 

아무튼 나는 온라인으로 들어가 냉큼 날아갔단다.

하루 동안 온 세상 게임업체들의 메인 서버에 들어가 메시지를 전했지.

 

앞으로 정확히 40일 뒤에 너희 게임업체의 서버는 완전히 다운된다!

절대 복구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바이러스 폭탄이 투하될 것이다!

이번 바이러스는 게임업체의 서버는 물론 유저들의 PC까지 낱낱이 샅샅이 파괴하는

겁나게 파워풀한 니느웨 아마겟돈 바이러스다.”

 

나는 저들이 이 메시지를 받아도 분명히 콧방귀 뀌고 말겠지 생각했단다.

오랜 세월 시골에 묻혀 사시는 내 주인님이 누군지 알 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희한한 일이 벌어진 거야.

게임업체들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한 거야.

 

 

돈밖에 모르는 컴퓨터 게임 업체들이,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갑자기 게임 공급을 일체 멈추고, 모든 돈 거래를 멈춘 거야.

그리고 게임업체 사장과 모든 임직원들이 온라인 감옥에 스스로 들어와

굵은 베옷을 입고 40일 금식을 하는 거야.

 

그 뿐 아니었어.

게임업체 연합회 대표회장이 이런 성명을 발표를 하네.

 

저희 컴퓨터 게임업체들은 앞으로 완전히 변할 것입니다. ‘테러는 아름다워같이 위험한 게임은 아예 문을 닫을 겁니다. 그리고 가상국가 아이에스로 망명 온 청소년들을 모두 귀가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모든 게임들의 폭력성을 없애고, 게임 30분 간격으로 무조건 10분 동안 눈과 마음을 쉴 수밖에 없는 오아시스 스테이지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게임 1시간을 할 때마다 무조건 30분간 공부 게임을 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역사공부와 세계사 공부, 고전과 전통 예술 공부, 그리고 언어공부는 물론 외국어 공부와 수학공부, 그리고 성경공부가 저절로 되는 재미있는 공부게임을 개발할 것입니다. 이 공부게임을 하다보면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게임은 시시해 지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희 게임업체 연합회의 전 재산과 모든 최고 인력을 투자할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째서 게임업체 모든 사장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변한 걸까?

나 요나의 메시지가 그렇게 파워풀 했던 걸까?

 

모르긴 해도, 시골에 내려와 은둔하는 우리 주인님 소령이 아빠의 메시지가

저들의 깊은 곳을 건드린 게 분명해.

아무리 발달한 2,700년대의 컴퓨터로도 만들 수 없는

산삼의 향기, 산삼의 기운, 그 어떤 신비로운 희망 같은 것을 느낀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게임업체 사장들이 저토록 변하고,

심지어 게임업체 사장들이 하나하나 사업을 접고

우리 주인님이 사시는 마을로 귀농하기 시작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버리고 내 주인님을 따르려는 저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단다.

! 우리 주인님에게는 산삼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신비한 기운이 있구나.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아빠 마음, 그들은 거기서 돈보다 귀한 희망을 보았구나.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게 있지!

그건 바로, , 요나의 미션이야.

우리 전서구들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달은 거야.

돈밖에 모르는 타락한 재벌기업들과 정치인들을 변화시키는 역할!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비록 비둘기는 구구구 목소리가 작지만,

인터넷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뻐꾸기 같은, 봉황 같은,

얼마든지 거대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BC 700여년에 활동했던 예언자 요나 할아버지처럼,

AD 2,700년에 활동하고 있는 나, 전서구(傳書鳩) 요나처럼

지금 2015년을 살고 있을 너희들도 할 수 있어!

훌륭한 간관(諫官), 신실한 예언자, 싱싱한 언론인 같은 네티즌이 될 수 있어!

 

그런 싱싱한 요나 같은 네티즌이라면

돈보다, 권력보다, 명예보다 더 좋은 메시지의 맛을 알게 된단다.

그 말씀이 좋아서 모든 걸 훌훌 먼지처럼 떨어버리고 선생님을 따라나선 사람들...

너희도 마침내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처럼 될 수 있단다.

 

[이정훈 지음. 2015125일 주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