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성서일과 4본문]
(사무엘상 3:1-20)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4.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서,
5. 곧 엘리에게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다시 가서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얘야,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7. 이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8. 주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9.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10. 그런 뒤에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무서워서 귀까지 멍멍해질 것이다.
12. 때가 오면, 내가 엘리의 집을 두고 말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겠다.
13.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 죄를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집을 심판하여 영영 없애 버리겠다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14. 그러므로 나는 엘리의 집을 두고 맹세한다. 엘리의 집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도 영영 씻지 못할 것이다."
15. 사무엘은 아침이 밝을 때까지 누워 있다가, 주님의 집 문들을 열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기가 환상으로 보고 들은 것을 엘리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하였다.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렀다. 그는 "내 아들 사무엘아!" 하고 불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17. 엘리가 물었다. "주님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나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라. 주님께서 너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한 마디라도 나에게 숨기면, 하나님이 너에게 심한 벌을 내리고 또 내리실 것이다."
18. 사무엘은 그에게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하였다. 엘리가 말하였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19. 사무엘이 자랄 때에,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
20. 그리하여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께서 세우신 예언자임을 알게 되었다.
(시편 139:1-6, 13-18)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2.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5.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6.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13.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14.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16.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17.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2-20)
12.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13.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14.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18.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20.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요한복음 1:43-51)
43. 다음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44.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향 사람이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46.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48.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9.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5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나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부르십니다.
구약본문에서는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복음서본문에서는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십니다.
그분은 어쩌면 그렇게 나를 잘 아실까요?
시편본문은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뼈 하나하나”까지 다 아신다고 노래합니다.
서신서본문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나를 사셨다고 합니다.
복음서본문의 알맹이는 나다나엘을 이미 환히 알고 계신 예수님입니다.(47-48절)
오늘 요절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로 정합니다.(고전 6:19)
[구약과 시편 (사무엘상 3:1-20 / 시편 139:1-6, 13-18)]
구약본문의 주인공은 사무엘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뒤 말씀을 보면,(2장, 4장)
엘리의 자식들에 대한 주님의 분노 이유와 처벌과정이 나옵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 뜻을 전하시려고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너무 어려서 때가 안 묻어서일까요?
사랑 가득한 부모의 양육과 기도 때문일까요?
주님과 가장 가까운 곳, 늘 언약궤 가까이에서 잠을 잤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참 오랜만에 주님께서 음성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데(삼상 3:1)
하필 어린 사무엘에게 오신 것입니다.
본문은 그 과정을 재미있게(?) 묘사합니다.
세 차례나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 음성을, 사무엘은 엘리의 음성으로 착각합니다.
어린 사무엘, 한창 잠이 쏟아질 나이의 사무엘이지만
마치 군기가 바짝 든 병사처럼 달려갑니다.
하나님이 붙들(?) 겨를도 없이 냅다 달려갑니다.
달려가서 세 차례나 똑같은 구호를 외치며 선생님 앞에 섭니다.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5, 6, 8)
눈이 어두운 엘리(2절),
그리고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는(3) 사무엘이 누워있는 자리,
두 모습이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시편본문은 내 몸과 주님과의 관계를 매우 세밀하게 그립니다.
내 몸 속 장기와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다 아시는 주님!
내 몸을 그분이 손수 지으셨기 때문입니다.(15)
첫 사람 아담의 첫 몸을 어루만지시던 주님의 손길과 숨결이 느껴집니다.
첫아이에 대한 애정!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무엘을 향한 엄마 한나의 마음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그 사랑으로 “나를 환히 알고 계신” 하나님!(1절)
오늘 시편본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로 이것이 주제입니다.
나를 환히 알고 사랑하시는 주님!
그래서 시편 기자는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노래를 마무릅니다.(18)
이건 늘 언약궤 가까이에서 깨어나는 어린 사무엘, 딱 사무엘의 노래 같습니다.
[서신서와 복음서 (고린도전서 6:12-20 / 요한복음 1:43-51)]
시편본문처럼 오늘 서신서본문은 “몸”을 매우 중요하게 이야기합니다.
“몸”이 무려 9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급기야 내 몸이(내가) 내 것이 아니라고까지 강조합니다.
(시편본문 식으로 하자면, 그분께서 하나하나 지어주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십자가 보혈, 피 값을 주고 사신 몸이기 때문입니다.(고전 6:20)
이 귀한 몸을, 오늘 구약본문의 인물들, 엘리의 두 아들처럼 막 굴려서는 안 됩니다.
내 것도 아닌, 심지어 하나님의 소유인 이 거룩한 몸을
탐식과 음행의 진창에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내 몸에 대해 절대 무관심하시지 않습니다.
내 몸을 나보다 더 환히 잘 알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거짓이 없는” 나다나엘(47)이 마치
어리고 순수한, 그리고 밝은 사무엘처럼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 환경이 얼마나 거짓으로 가득한지 모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계에도 거짓이 만연합니다.
(이젠 유치원, 어린이집조차 거짓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곳곳에 ccTV를 설치할 수도 없고...
교회 지도자들은 엘리처럼 눈이 어둡고...
거짓과 눈 어두움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수많은 종류의 거짓 가운데,
오늘 구약과 서신서본문에 비추어 볼 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저지른
탐식과 음행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두 개가
크고 작은 범죄를(어두움, 거짓을) 불러일으키는 병원균입니다.
[정리]
오늘 본문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 이야기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나를 그렇게 잘 아신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시편기자는 그분이 나를 지으셨다고 세밀히 노래합니다.
그러니 나를 샅샅이 잘 아시며, 그만큼 나를 낱낱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내 것이 아니고 그분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고전 6:20)
오늘 본문들의 주제,
‘주님 날 잘 아심’,
‘주님 날 사랑하심’,
그래서 ‘나와 아주 가까이 계심’... 은
‘성전’을 실마리로 풀어볼 수도 있습니다.
구약본문의 사무엘은 “언약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다가 주님과 만납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당신을 조금씩 알아가고 가까워져가는 나다나엘에게
스스로 성전이심을 드러내십니다.(요한 1:51)
서신서의 바울은 내가 바로 성전임을(고전 6:19),
즉, 그분의 영을 몸소 모실 정도로 그분과 내가 가까움을 설파합니다.
이렇게 가까운 사이, 사랑하는 사이라면
혼인서약처럼,
사랑하는 사이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두개 있습니다.
첫째, 오늘 구약과 서신서본문은,
내가 그분과 이렇게까지 가깝기에 지켜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내 몸입니다.
내 몸을 지켜야 합니다.
더욱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그분이 지으신, 그분이 값을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엘리의 두 아들을 반면교사로,
서신서는 고린도교회를 반면교사로 보여주십니다.
탐식과 음행, 이 두 가지는
내 것 아닌, 거룩하신 그분의 소유, 내 몸을 망가뜨리는 대표주자들입니다.
내 몸을 탐식과 음행으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내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고전 6:20)
이것은 사랑하는 분에 대한 도리이며, 권리요 자랑입니다.
둘째, 진정 사랑하는 사이는 서로의 진면목을 아는 법입니다.
주님은 나를 환히 아시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분을 환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언약궤 곁에서 자고 깨는 어린 사무엘처럼,
나는 성경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환하게 켜놓는 성전 등불처럼
시대의 어둠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성경말씀을 엽니다.
[나머지]
* 말씀과 함께
눈 어두운 엘리, 그리고 탐식과 음행으로 눈 어두운 그 아들들과 달리
주님 말씀을 직접 받을 만큼 사무엘은 밝고 깨끗했습니다.
문득 언약궤 가까이에 누워 자는 사무엘의 모습이(삼상 3:3)
마치 말씀을 끼고 사는 사람의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처럼
내가 아직 어려서 무슨 뜻인지 몰라도 읽고읽고 또 읽다보면
그 뜻이 시나브로 드러납니다.
늘 말씀과 함께 사는 사람은
말씀 속에서 지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 사다리와 성전
오늘 복음서 말미의 예수님 말씀은 창세기 28:12절을 연상시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창세 28:12)
창세기 28:16-17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이 성전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보입니다.(독일성서공회편 성경해설 참조)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17.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 하나님의 선물
내 몸이, 내가 내 것이 아니라 그분 것이라는 고백은
이미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 이름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구하여 얻었다는, 즉 그분의 은총, 선물입니다.
“나다나엘”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찌 사무엘과 나다나엘만 하나님의 선물이겠습니까?
나 역시, 구원받은 내 생명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로마 6:23)
[말씀 동시] 하나님 (김현서 지음. 명암교회 중등부 3학년. 『성실문화』 81호)
유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
또 그들만 믿고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진실한 믿음을 주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사람들
쓰러져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새 삶을 주시는
하나님.
[말씀 시조] 빌립을 부르시니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81호)
빌립을 부르시니 나다나엘 함께오네
참사람 나다나엘 참주님을 알아보네
높으신 하나님아들 이스라엘 왕이여
[말씀 한시] 구원은 누추한 변두리에서 오느니라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 81호)
腓力呼來觀 (비력호래관) 빌립이 소리쳤다. ‘이리 와서 보시요!’
汝誠猶大王 (여성유대왕) 진실로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拿村何善生 (나촌하선생)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救援來陋邊 (구원래누변) 구원은 누추한 변두리에서 오느니라.
[말씀 서예] 시편 139:1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 81호)
[말씀 노래] 참 성전을 볼 것이다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 81호)
[본문] (요한복음 1:43-51)
[노랫말]
1. 벳세다 빌립아 나를따라 오너라, 나사렛 예수님이 빌립을 부르시네
함께가요 나다나엘 어서가요 나다나엘, 벳세다 빌립이 길동무 전도하네
2. 참사람 나다나엘 나에게로 오는구나, 나사렛 예수님이 나다나엘 반기시네
언제저를 보셨나요 어찌저를 아시나요, 무화과 나무아래 너를내가 보았노라(단다)
3. 선생님은 하나님아들 이스라엘 왕이시오, 나다나엘 참사람아 더큰일을 볼것이다
내가너를 보았듯이 너도나를 볼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성전을 볼것이다
[해설]
요한복음 1:43-51절 말씀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4.4조로 풀었고, 찬양사역자 이석훈 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참 성전을 볼 것이다.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2014.10.15.)
[시편 송서(誦書)] 시편 139:1-6, 13-18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81호)
(* 천자문 독송-전래자장가 풍으로)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형체가) 주-의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다함께]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말씀 동화] 그래서 CCTV가 더 필요한 세상이라니!
옛날 옛적 호랑이가 죽도(竹刀)를 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검도(劍道) 하던 시절
아주 오래 전 옛날이야기예요.
오늘은 천년씩 이천년씩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휙휙 날아다니는 이야기니까
정신 줄 놓치지 말고 잘 따라오세요∼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어느 나라에 이스라엘이라는 사람이 살았어요.
이 사람 원래 이름이 뭔지 아세요?
야곱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 야곱은 거짓말쟁이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죠.
하루는 야곱이 쌍둥이 형 에서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눈 어두운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입니다.
큰아들 에서인척 변장을 하고, 형이 받을 아버지 축복기도를 가로챈 거죠.
그러다 들통 나는 바람에 야곱은 외갓집으로 줄행랑을 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길가에서 노숙을 하다가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죠.
돌베개를 베고 누어 자는데 꿈에 갑자기 커다란 사닥다리가 나타난 거예요!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린데,
마치 에스컬레이터처럼,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사닥다리 꼭대기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늘 너와 함께 있겠다.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마. 네 자손이 무지무지 많아질 것이다.”
이런 약속이었죠.
그런데 야곱이 과연 그 약속을 고스란히 믿었을까요?
사람을 잘 속이는 사람은, 남을 잘 믿지 않는 법인데...
그래도 하나님 약속이니까 어느 정도는 믿었다고 봐야겠죠?
아무튼 이 어마어마한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어리둥절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신이 멍멍한 상태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창세기 28:16-17)
그로부터 1천년 세월이 흘러흘러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
우리나라 고구려가 생기기 1천 년 전 고조선 시대,
그 먼 나라에, 야곱이랑은 아주 다른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태어납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응답’, 즉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죠.
자식이 없어 간절히 기도하던 어머니 한나가
마침내 옥동자 사무엘을 낳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큰 선물인 셈이죠.
경∼사(慶事) 났네, 경∼사 났어!
그런데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 있었습니다.
“만약 제게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마침내 한나는 그 약속을 지킵니다.
갓 젖 뗀 아이 사무엘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거예요.
뭐라고요? 한나가 피도 눈물도 없는 엄마 같다고요?
아니아니, 한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게 아니라,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속대로 독생자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처럼,
약속대로 외아들 사무엘을 제사장 엘리에게 맡기는 한나!
그런데 사무엘이 무럭무럭 자라나던 시대는
하나님 말씀이 안 들리던 어두운 시대였어요.
게다가 엘리 할아버지는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눈조차 어두웠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탐욕에 눈먼 사람들,
하나님 앞에 거짓이 가득한 타락한 종교인들이었고요.
사무엘은 그 가운데 홀로 빛나는 작은 등불 같았죠.
사무엘이 저녁부터 새벽까지 머무는 잠자리는 늘 은은한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담은 언약궤가 진리의 빛으로 은은하고
언약궤 앞을 밤새 밝히는 등불이 은은하게 빛납니다.
사무엘은 이 언약궤와 등불 가까이에서 매일 잠을 자고 꿈을 꾸었죠.
한창 말 배울 어린 나이에 엄마 품을 떠나
엄마 품 같은 주님의 언약궤 곁에서 새근새근 잠자는 사무엘!
언약궤와 등불을 닮아 어두운 구석이 없고,
엄마를 닮아 거짓이 없는 사무엘!
어느 날 맑고 밝은 우리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정말 오랜만에 말씀을 전하시려고 나타나십니다.
사무엘은 엄마를 닮아 거짓이 없고, 말씀을 닮아 빛처럼 밝은 사람이었거든요.
다시 세월이 흘러흘러 1천년 세월이 더 흘러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사무엘이랑 아주 닮은 사람이 하나 나타납니다.
그 이름은 나타나엘!
그 이름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이랑 매우 닮은 이름이죠?
그런데 나다나엘에게는 사무엘과 또 하나 닮은 게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나다나엘이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성경책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요한 1:47)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
거기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시골에 가면 마을 정자나무 아래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아 계신 어르신들을 볼 수 있죠?
아마 나다나엘은 그렇게 마음속에 평화의 기운이 가득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무화과나무 아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아니 어쩌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언가 열심히 줍고 있습니다.
가만 보니까 무화과 잎사귀를 줍고 있네요?
늦가을 뽕잎차를 만들려고 첫서리 맞은 뽕잎을 줍는 사람은 보았어도
무화과 이파리를 줍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요?
아니, 나는 보았어요.
그것도 성경책 가장 앞에 나오는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정확하게 이름까지 나오는 나무가 뭔지 아세요?
그게 바로 무화과나문데요(창 3:7)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몰래 못 먹을 걸 먹고 눈이 밝아지는 바람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죠.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화과 이파리를 주우며 중얼중얼 기도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죄송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는커녕 거짓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이 세상을 제발 용서해주세요. 오늘도 저는 옛날옛날 아담과 하와처럼 부끄럽고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어떻게 저희 모든 부끄러운 죄를 다 가릴 수 있을까요...”
바로 그때였어요.
나다나엘의 동무 빌립이 찾아오네요?
헐레벌떡 달려온 빌립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말합니다.
장화를 신은 고양이의 그 간절한 눈으로 초청합니다.
“어서 가요 나다나엘, 함께 가요 나다나엘. 우리가 기다리던 분을 만났어요!”
여기서 잠깐 말씀노래를 불러볼까요?
“벳세다 빌립아 나를 따라 오너라, 나사렛 예수님이 빌립을 부르시네,
함께 가요 나다나엘 어서가요 나다나엘, 벳세다 빌립이 길동무 전도하네∼
참사람 나다나엘 나에게로 오는구나, 나사렛 예수님이 나다나엘 반기시네
언제 저를 보셨나요 어찌저를 아시나요, 무화과 나무아래 널 내가 보았노라∼♬”
[‘참 성전을 볼 것이다’ 1∼2절.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예수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의 눈이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집니다.
입은 해물탕 큰 조개처럼 딱 벌어지고요!
거짓이 없는 사람 참사람 나다나엘 입에서 주님을 향한 진지한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허허, 뭐 그 정도 가지고∼ 나다나엘아, 너는 이보다 더 큰일을 볼 것이다. 내가 진짜로 진짜로 말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거야!”
어? 이 대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요?
맞다, 아까 옛날이야기 1탄에 나왔던 이야기,
거짓말쟁이 야곱, 도망자 야곱이 노숙하다 꾼 꿈이랑 되게 비슷하죠?
그 때 야곱이 그랬죠,
‘오!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하나님의 집이 바로 성전이죠?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은, 인자, 즉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라는 말씀,
바꿔 말하면, 블랙홀보다 빠르게, 웜홀보다 빠르게 하나님께 직행할 수 있는
하늘문 같고 하늘 사다리 같은 분이라는 거죠.
“선생님은 하나님아들 이스라엘 왕이시오, 나다나엘 참사람아 더 큰일을 볼 것이다
내가 너를 보았듯이 너도 나를 볼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 성전을 볼 것이다∼♬”
[‘참 성전을 볼 것이다’ 3절]
또 다시 세월이 흘러흘러 1천년, 2천년 세월이 더 흘러
어라? 그새 현대가 되어버렸네?
그리고 여긴 어디지?
어디긴 어디야 대한민국이지!
에효∼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사무엘, 나다나엘, 그리고 예수님 만날 때는 참 좋았는데...
고향에 돌아왔는데, 가슴이 참 답답하네요...
왜냐고요? 왜긴 왜겠어요. 신문을 보고 방송을 보면 온통 거짓말쟁이 투성이라 그러죠.
천하의 거짓말쟁이 야곱이 대한민국에 왔다가는 오른뺨 왼뺨 남아나질 않을거라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무엘같이 어린 내 아이들을 힘차게 후려 패는 선생님들 좀 보세요.
어머니 한나처럼 믿고 맡긴 사무엘 같이 사랑스런 내 아이를 어떻게 저렇게...
그래서 CCTV가 필요한 세상이라네요.
정말 나 그거 되게 싫은데...
그래도 필요하다네요, 온통 거짓말쟁이투성이니까...
그런데 말이죠, 더 기가막힌 건 말이죠,
정작 CCTV가 필요한 곳은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부정부패를 만들어내는 관료정치꾼들!
그들이 끼리끼리 모여 온갖 냄새나는 것들 만들어내는 꿍짝꿍짝 밀실들!
그러고 보니까, 오늘 옛날이야기 주인공들이 오늘 대한민국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죠?
대통령이란 대통령은 모두 다 거짓말쟁이 같아요.
약속도 안 지키고, 비겁하게 이리저리 핑계만 대는 거짓말쟁이들!
이건 딱 제 탐욕을 채우려는 아담과 하와 같아요.
딱 야곱 같고, 아니 그보다 더 비슷한 인물이 있네요.
바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탐식과 음행, 온갖 탐욕덩어리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그대로네요.(삼상 2:12-17, 22-25)
사자방!
사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 저 천문학적인 국민 혈세는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천안함과 세월호, 이 슬픈 두 배의 침몰 원인은 왜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눈 어두운 엘리 할아버지는 딱 한국 교회 같아요.
탐욕에 눈 어두운 두 아들은 교회가 낳은 그 정치인들 같고요.
그리고 그들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사무엘은...
몇 안 되는 양심적인 언론인이랄까요? 아니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얼마나 반가우셨을까요?
거짓이 없는 참사람 나다나엘!
한국교회는 홉니와 비느하스 말고,
과연 언제나 나다나엘 같은, 사무엘 같은 거짓 없는 자식,
하나님을 닮은 참사람을 낳을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에서 나다나엘처럼 거짓이 없는 사람,
사무엘처럼 환하게 눈이 밝은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노쇠(老衰)한 엘리처럼 눈 어두운 한국교회가
심청이 목소리에 두 눈 번쩍 뜨길,
예수님 말씀에 두 눈 환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이정훈 지음. 2015년 1월 18일 주일아침]
[말씀놀이]
(사다리타기 식으로 준비)
1. 거짓말쟁이 야곱은 나중에 이름이 뭐로 바뀌죠? (힌트, 끝에 ‘엘’이 들어가요)
2. 에덴동산에 있던 과일나무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랑 생명나무 말고)
3. 아담과 하와는 그 나뭇잎으로 무얼 했을까요?
4. 나다나엘은 예수님 만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죠?
5.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은 창세기 누구의 꿈과 비슷하죠?
6. 그 꿈과 비교할 때, 야곱이 누웠던 땅과 인자는(예수님은) 무엇과 같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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