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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왕국절(신정절) 1주(2014년 8월 31일) 예배준비 노트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성서일과 4본문]

(출애굽기 3:1-15)

1.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2.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5.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6.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9.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10.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15.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시편 105:1-6, 23-26, 45c)

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생각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23. 그 때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내려갔고, 야곱은 함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24.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불어나게 하셔서 그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그들의 마음을 변하게 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자기의 종들을 교묘하게 속이게 하셨다.

26. 그러므로 그가 종 모세와 택하신 아론을 보내셔서,

45. (이것은 그들에게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법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할렐루야.

 

(로마서 12:9-21)

9.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11.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13.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마태복음 16:21-28)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27.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동안 주님의 마음 하나가 느껴집니다.

늘 그러시지만, 이번 주는 그 마음이 두드러집니다.

당신을 오해하는 우리들에게 조금이라도 자세히 당신 뜻을 보여주시려는 마음입니다.

주님 뜻을 제대로 느끼고, 그 뜻이 우리 마음 되어, 그 마음대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번 주 요절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로 정했습니다.(출애굽기 3:12)

 

 

[구약과 시편 (출애굽기 3:1-15 / 시편 105:1-6, 23-26, 45b)]

오늘 구약본문을 읽는 동안 내내 이신론(理神論)을 떠올렸습니다.

오늘 구약본문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하나님 오해가 이신론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이신론이란 17-18세기 계몽주의 시절에 유행하던 신관입니다.

우주를 지으셨어도 지으신 뒤 그것과 결코 상관하지 않으시는 신!

간섭도 안 하시고, 계시도 안 하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시는 신!

 

그런데 그런 신관이 이렇게 3,500여 년 전 고대에도 있었나봅니다.

지난 주 구약본문 앞머리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그 때 바로는 요셉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만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조차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던 것입니다.

 

언제부터 그리 된 것일까요?

이집트 좋은 땅에서 점점 더 풍요롭게 살게 되면서부터였을까요?

아니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에게 핍박을 받게 되면서부터였을까요?

 

이집트에 자리 잡고 살면서, 조상 대대로 400여 년 동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귀로는 전수(傳受)했지만,

마음으로 몸으로 전수하지는 못했나 봅니다.

(저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대하던 모습과 사뭇 비교됩니다.)

이건 출애굽 뒤로 40년 내내 광야에서 보인 저들의 모습이 증거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7, 9)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소리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여쭙는 모습(13),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반복해서, 업그레이드(?)해가며 밝히시는 모습에서도 그것이 느껴집니다.(14, 15)

 

정리하자면,

오늘 구약본문의 주인공 모세의 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습니다.

막연히만 알았던 하나님,

멀리 계시는 줄만 알았던 하나님,

나의 살림살이와 희로애락에 대해 무관심한 줄만 알았던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가까이 내려와 상관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오늘 모세의 가슴을 방망이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께서 마치 도깨비불처럼 내 가까이 오신 것입니다.(2)

(비교하자면, 어린 사무엘에게 음성만으로 나타나셨던 것과 달리, 모세 시대에는 이런 희한한 현상까지 동원하셨어야만 했던 것일까요?)

“나의 백성”을 위해 몸소 내려오셔서 직접 구해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8)

 

그리고 이렇게까지 결정적으로 확언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12)

 

오늘 시편본문은, 늘 그렇듯이, 구약본문의 응답찬송입니다.

특히 1, 3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그의 이름”, “그의 거룩하신 이름”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1, 2, 5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그가(주님께서) 하신 (이루신 놀라운) 일”도 눈에 띕니다.

그분께서 우리 삶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으시고, 속속들이 상관하시는지에 대한 각성과,

그러하신 분, 주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 (로마서 12:9-21 / 마태복음 16:21-28)]

오늘 서신서본문은 하나님을 새로 발견한 사람, 바울의 고백입니다.

세례 받고 주님과 한 몸 된 교회라면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도깨비불처럼 나타나신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몸소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고, 마침내 십자가 보혈로 우리 심장을 적시기까지 하신 그 하나님!

온 세상 스토커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무시로 나와 상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지금도 느끼며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야 할 길, 교회의 길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가슴이 세차게 방망이질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마 첫 절(21)부터 우리 주님의 마음은 두근거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처음으로 밝히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 어린 제자들이 이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 기대와 달리, 수제자 베드로부터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건, 이신론(理神論)과는 많이 다른 하나님 오해입니다.

이신론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하시기는 하는데,

하나님의 크신 뜻을 못 보고 내 뜻, 내 꿈에 하나님 뜻을 맞추려는 모양샙니다.

 

오늘 베드로의 반응이 의외로 지나칩니다.

아예 스승의 멱살을 잡고 휘두르려는 기셉니다.(22)

(이걸 지나치게 보면서도, 사실 우리도 스타일만 달랐지, 얼마나 자주 내 뜻을 관철시키려 주님을 협박하는지 모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 가슴이 아주 세차게 뛰기 시작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23)

 

그냥 물러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것은 잔말 말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지난 주 본문에서는 주춧돌, 반석이라 부르셨는데, 이번엔 반대로 걸림돌이라 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23)

 

수제자로 여겼던 베드로, 천국의 열쇠도 주고, 교회의 반석으로까지 삼겠다고 하셨던 베드로조차,

주님을 이렇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십자가를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당장의 권력과 평화, 식민지 해방과 안락한 생활 정도를 꿈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소박한(?) 생각, 인간적인 꿈은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생각입니다.

심지어 지금 한국교회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리켜, “사탄아, 내 뒤로!”라고 소리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요!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적당히 따르는 것도 아니고, 아예 하나님 뜻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신 것입니다.

 

“...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

 

그리고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25)

“... 그 때에 그(인자)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27)

 

 

[정리]

오늘 구약본문의 이신론적인 모습과, 복음서본문의 하나님을 내 뜻에 맞추려는 행태는

오늘 각 본문 주인공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호언장담하고 자부합니다.

임마누엘, 임마누엘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나 사는 모습은 ‘말로만 임마누엘’, ‘무늬만 임마누엘’일 뿐입니다.

 

한국은 아직도 세월호 문제가 현재진행중입니다.

그러나 일부 또는 많은 사람들이 애써 잊으려 합니다.

이젠 좀 그만하자고 합니다.

심지어 이런저런 소문을 부풀려 퍼뜨립니다.

일반 교통사고 사망자들처럼 처리해버리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의 바탕에는 ‘내가 뽑은 정권 편들기’와 ‘경제논리’(돈과 편리)가 깔려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네 경제논리는 정의와 평화의 정반대 논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이런 수준의 경제논리, 정권 편들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봅니다.

억울한 죽음을 적당히 덮으려는 불의한 권력을 편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의한 세력들의 죄를 덮어버리려는 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나를 죽여 세상 죄를 덮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정반대 행동입니다.

 

불의한 권력, 바로에게 가기를 모세는 두려워했습니다.

가서 약한 자를 편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기를 두려워하는 모세와 같은 우리에게,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출애굽기 3:12)

 

 

[나머지]

* 도깨비 불?

지난 8월 초(성령강림 후 8주) 구약본문에 주님께서 마치 도깨비처럼 나타나셨습니다.(창세기 32:22-31)

오늘 주인공인 모세, 모세의 조상 야곱이 하나님 만나는 대목입니다.

‘도깨비처럼’이라 한 것은, 우리 전통 도깨비들이 유달리 씨름과 메밀묵을 좋아한다는 옛 이야기가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본문에는 주님께서 딱 도깨비불처럼 나타나시네요?

 

우리나라 도깨비는 요괴보다는 서양 민담의 요정에 가깝습니다.

특히 막걸리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한마디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요정,

자주 사람에게 나타나 깜짝 놀라게 하며 장난 걸고 씨름 한 판 하자고 조르는 요정,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는, 그게 한국 고유의 도깨비입니다.

 

아무튼, 창세기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출애굽기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모두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도깨비 형상으로 나타나신 것인데,

이것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건,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인, 형상화 할 수 없게 하시려는 뜻이었다는 사실!!

성경시대의 하나님은, 당시 중동지역의 다른 큰 종교들의 신과 달리 절대로 형상화 하지 못하게 하시는 특징이 있었죠.

언뜻 생각하기에는 형상화해서 눈에 보이는 우상이 하나 있어야지만 더 잘 믿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상’이란 기독교인들에겐 매우 불온한 개념으로 고정되어 있는데,

원래 우상이라는 단어는 그보단 훨씬 좋은 뜻, 모두 우러러보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돌이 번역하면 우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그런 우상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 것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오늘 구약에서 하나님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나타나신 까닭은,,,

스스로 고정된 우상이 되기 싫으신 것입니다.

장승처럼 한자리에 박혀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한자리에 떡 버티고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힘,

찾아 와서 그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제물을 바치는 그런... 그런 제사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먹여살리시기 위해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먼저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정의한 사도 요한의 통찰이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움직이는 사랑!

 

(노파심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도깨비라거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도깨비불 같은 분이시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 가나안 원주민을 몰아내신 까닭은? (출애굽기 3:8)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원주민들을 몰아내시고

히브리민족을 이주시킨 데는 몇 가지 명분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 땅을 더럽힌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땅을 더럽혔다는 것은, 풍요를 위해,

경제를 위해 더러운 음행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히브리사람들도 그 같은 짓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그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아래 몇몇 본문말씀을 소개합니다.

 

(창세기 6:12-13 ) 12.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레위기 18:24, 25, 28) 24.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25.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 28.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

 

(레위기 26:34) 34. 그 때에야 비로소, 땅은 안식을 누릴 것이다. 땅이 그렇게 폐허로 버려져 있는 동안, 곧 너희가 원수들의 나라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비로소 땅은 쉴 것이며, 제 몫의 안식을 누릴 것이다.

 

(민수기 35:34) 34.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 주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함께 머물고 있다."

 

*** 왕국절이란?

(성실문화 80호에 실린 왕국절 소개를 아래 정리합니다.)

「성실문화」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매년 신정절(왕국절․창조절)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 한국교회에는 아직 생소한 이름이지만 예배교육적으로 꼭 필요한 절기이고, 여러모로 명분이 있는 일이기에 계속 시도하고 있다. 「성실문화」를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이미 게재했던 것을 다시 간추려 싣는다.

 

(1) 신정절 출현

예배력(교회력)은 교회 역사상 지금껏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었고 완성된 적도 없었다. 아니 예배력이란 아예 처음부터 완성될 목적으로 출발한 존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배력은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 중이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과정에서 쉼 없이 계속 발전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가장 괄목할만한 예배력 발전상을 이야기한다면, 먼저 1970년대부터 통용되기 시작하여 전세계 초교파적으로 상용(常用)하고 있는 ‘성서일과’ 제정일 것이며, 또 한 가지를 들자면, ‘신정절’ 제정일 것이다.

 

(2) 신정절이라는 용어

신정절(神政節)이라는 이름은 제임스 F. 화이트의 「기독교예배학입문」. 엠마오. 1992. 68쪽에 나오는 ‘Kingdomtide(왕국절)’을 장신대 정장복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성실문화」에서는 감리교회의 ‘왕국절’과 장로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의 ‘창조절’의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검토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단 ‘신정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3) 신정절 제정 역사

신정절(특히, 왕국절)은, 1920년 이후 미국 개신교가 교회력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던 과정에서 보스턴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인 아담스(F.W. Adams) 등의 노력에 의하여 제정되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1956년 스코틀랜드 출신 목사 알렌 맥아더 등이 이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대부분의 예배학 서적에는 신정절의 존재조차 소개되지 않고 있다.

(신정절을 소개하고 있는 책으로는, ①김소영, 「현대예배학」, 대한기독교서회, 1993, 183쪽, ②김폴린, 「예배법」, 보이스사, 1987, 378-379쪽, ③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대한기독교서회, 1992, 172쪽, ④화이트, 「기독교예배학입문」, 정장복역, 엠마오, 1992, 68쪽, ⑤곽전태, 「기독교대한감리회 예배서」, 기독교대한감리회, 1992, 176쪽, ⑥UMC, 「The Book of Worship」, U.M.P.H, 1964, 61, ⑦George. M. Gibson, 「The Story of the Christian Year」, Nashville:Abingdon, p.217, ⑧A. McArthur, 「The Christian Year and Lectionary Reform.」, London:SCM Press, 1958, 1968 등이 있다.)

 

(4) 신정절의 의미

신정절은, ①복음의 가현화(假顯化)를 막고 교회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게 하며, ②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③무엇보다도 지나치게 긴 기존의 성령강림절기 기간을 둘로 나누어 예배교육 설계에 활기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 가치가 돋보인다. Gibson이 위의 책 198쪽에서 신정절의 의미와 가치를 논한 것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력 가운데서 특히 신정절은 복음서와 서신서에 함축되어 있는 윤리적, 사회적 문제들을 우리 속에 다시 떠오르게 해준다. 노동의 문제, 인종차별 문제, 이웃사랑 문제, 에큐메니칼 문제 등등이다.’

 

(5) 왕국절과 창조절의 차이점

신정절, 즉 왕국절과 창조절은 이상의 공통점과 동시에 몇 가지 차이점을 갖는다. 먼저 창조절의 경우 왕국절과 달리, 그 시작이 9월 첫 주일부터라는 점, 그리고 한 해 예배력의 시작이 대림절(대강절)부터가 아니라 창조절부터라는 점이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하나님의 호칭 순서로나, ‘창조’를 모든 것의 기점으로 잡는 성경의 순서로서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는다.

「성실문화」에서는 신정절을 지키는 것이 신앙교육상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생각하여, 신정절을 처음 제정했던 왕국절 전통을 살려, 8월 마지막주일부터 대림절 전까지로 기간을 잡았다.

또 한 가지의 차이점은 이 두 절기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창조절이 ‘성부하나님의 절기’인 것과 비교하여 왕국절의 경우는 ‘성자하나님의 절기’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이 ‘(성부)하나님의 나라’와 차별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교리상 ‘삼위일체력(창조절)’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소개한 김폴린 교수의 「예배법」에 실린 다음과 같은 왕국절 소개가 참고할 만하다.

 

‘왕국절 :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지키는 절기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란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또 그 사랑의 왕국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것들이다. 곧 인간의 형제 됨과 국가 간의 평화와 인간의 자유와 영생 같은 문제들에 관한 것들이다. 이 절기에는 녹색을 사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성장과 활동을 상징한다..’

 

  

 

[말씀동시] 걸림돌 (이진구 지음. 성실교회학교 6학년. 『성실문화』 80호)

 

걸림돌

이 세상에는 걸림돌이 많다

걸림돌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그리고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말씀시조] 마태복음 16:21-28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80호)

나는 고난을받고 죽임을 당하리라

절대로 아니되오 대드는 베드로여

너는네 십자가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말씀한시] 두 모습의 사람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 80호)

人心有兩像 (인심유양상) 사람에게는 두 모습이 있다

一魔反天使 (일마반천사) 하나는 마귀요, 한편으로는 천사다

彼得勸避苦 (피득권피고) 베드로가 고초를 피하시라 권하였더니

主罵爾害我 (주매이해아) ‘너는 내 방해꾼이다’ 꾸짖으셨다.

 

 

 

[말씀서예] 시편 105:3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 80호)

 

 

 

 

 

[말씀노래] 누구든지 주를 따르려면 (홍의종 지음. 『성실문화』 80호)

[본문] (마태복음 16:21-28)

 

[노랫말]

누구든지 주를 따르려면 / 자기를 부인하고 / 자기 십자가 지고 / 주를 따라가라

누구든지 제 목숨 구하려면 / 잃게 될 것이요 / 주를 위하여 잃으면 / 찾게 될 것이라

 

[해설]

본문 말씀 중 24-25절을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어 보았다.

음원은 다음 카페 ‘성서일과사랑방’의 ‘노래 마당’ 방에 올려놓았다. 악보만 보기보다는 노래를 한 번이라도 들어보는 것이, 곡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성서일과사랑방’ 카페에서 곡을 들어보고 소화하여 창조적으로 표현해 보기를 권한다.

 

[악보] 누구든지 주를 따르려면 (홍의종 지음, 2014년 7월 31일)

 

 

 

 

[시편 송서(誦書)] 시편 105:1-6, 23-26, 45b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80호)

(* 전래 자장가 풍-천자문 독송 풍-으로 *)

 

1.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 지어-다--∼

 

3.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항-상) 구-할 지어-다--∼

 

5-6.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24.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번성하게 하사 그의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또 그))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게 하여-, 그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 하셨-도다-∼

 

[다함께]

26. 그리하여-- 그--는--, 그-의 종-- 모세-와--,

그-의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45b) 할-렐루-야- (할렐∼루∿야∼)∥

 

 

 

[말씀동화] 모세와 개똥벌레

 

달빛어스름 한 밤중에, 깊은산길 걸어가다

머리에 뿔달린 도깨비가, 방망이 들고서 에루화 둥둥~

(덩∼덕 궁∼더러러러, 어절∼씨구 좋∼다)

깜짝놀라 바라보니, 틀림없는 산도깨비

에고야 정말 큰일났네, 두 눈을 꼭 감고 에루화 둥둥~

(덩∼덕 궁∼더러러러, 어절∼씨구 좋∼다)

저 산도깨비 날잡아 갈까, 가슴 소리만 콩당콩당

걸음아∼ 날 살려라∼, 꽁지빠지게 도망갔네

(덩∼덕 궁∼더러러러, 어절∼씨구 좋∼다)

[조광재 지음, ‘산도깨비’]

 

 

모세는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며 산을 오릅니다.

중학생이 되었지만 아직도 혼자 산에 오를 때면,

가슴이 제멋대로 콩닥콩닥 콩닥콩닥 휘모리장단으로 뛰거든요.

 

산이 무서울 때마다 모세는 산도깨비 노래를 부르지요.

처음에는 모기소리만큼 작게 부르지만

마지막 ‘어절씨구 좋다’는 고래고래 목청껏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콩닥콩닥 휘모리장단으로 뛰던 가슴도, 어느새 굿거리장단으로 제법 편안해지죠.

아무렴! 산이 제아무리 무서워도 바다보단 낫지!

 

모세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산속 뽕나무 밭으로 갑니다.

맹구형은 똥이 안 나온다고 변소에 앉아 변비타령 중이라, 그냥 혼자 나온 길입니다.

가방을 등에 지고 지팡이를 짚고 씩씩하게 뒷동산 오솔길을 오릅니다.

 

“아버지도 참, 아무리 뽕잎 칼국수가 좋아도 그렇지, 갑자기 이게 뭐람?”

 

그래도 우리 효자 모세는 늘 부모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근데 어쩐담? 뽕나무 잎이 다 어디 가버렸네?

아마 다른 사람들이 손에 닿는 건 다 훑어 가버린 게 틀림없어요.

아직 잎이 많이 남아있는 저 위에 있는 가지들은

키가 작은 모세의 손에는 닿지 않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모세는 얼른 한 고개를 더 넘기로 마음먹습니다.

아이들은 잘 가지 않는 깊은 산이지만,

거기엔 뽕나무가 지천으로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엄마아빠가 좋아하시는 뽕잎 칼국수를 위해 모세는 용기를 냅니다.

 

“해지기 전에 얼른 다녀오자. 나도 이젠 중학생이잖아! 저 정도 봉우리쯤은 문제없어! 칼국수는 역시 뽕잎 칼국수지, 암, 그렇고말고!”

 

원래 모세의 이름은 영구였지요.

몇 해 전 가족들과 함께 속초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하다 살아난 뒤로는

모세라는 별명을 얻게 된 거랍니다.

그래서인지 영구, 아니 모세는 이젠 바다보다 산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아무리 높은 산봉우리도 점점 안 무서워집니다.

 

씩씩하게 산봉우리를 오르던 모세의 걸음이 점점 느려집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리네요.

이제부턴 밥도 맹구 형보다 더 많이 먹고, 칼국수도 더 많이 먹고,

매일매일 줄넘기도 천개씩 해서 어서 키도 크고 다리도 튼튼해 져야지!

하고 모세는 결심을 합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걸음을 멈춘 모세가 눈을 들어 산마루를 올려다봅니다.

 

“어라? 저게 뭐지? 도대체 저게 뭐람?”

 

아직 어둡지도 않은데 산봉우리 옆 골짜기 사이 풀숲이 환한 빛이 뿜고 있는 거였어요.

 

“이상하다? 산불이면 불이 확 번져야 맞는데, 왜 번지지도 않고 풀숲이 타 없어지지도 않는 걸까? 이상하다? 혹시 저거 도깨비불 아냐?”

 

순간 모세는 오금이 저립니다.

이를 어쩐담? 오줌도 마렵네요.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모세는 일단 급한 것부터 해결합니다.

바지춤을 내리고 나무 밑에 시원한 거름을 줍니다.

오줌을 누면서도 도깨비불을 힐끗힐끗 쳐다봅니다.

 

‘이상하다? 도깨비불이면 사람을 쫓아올 텐데, 그냥 가만히 있네? 되게 궁금하네, 한번 가볼까?’

 

살금살금 도깨비불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자그마한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엔 잘 안 들려서 모세는 귀를 쫑긋 세웁니다.

 

“모세야, 모세야!”

 

‘아니 이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잖아?’

 

모세는 다시 오금이 저리기 시작합니다.

엉겁결에 대답을 합니다.

 

“누구세요? 누군데 제 이름을 아시죠?”

 

“모세야,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란다. 그러니 신을 벗으렴. 그리고 여기 옹달샘에 발을 담가보지 않을래?”

 

가만 보니까 골짜기 부근에 옹달샘이 솟고 있네요?

그 물이 졸졸졸 자그마한 계곡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어요.

 

“산신령님이신가요? 아니면 도깨비님인가요? 아니면 혹시 하느님이신가요? 그런데 제 발은 지금 땀 냄새가 장난이 아닌데, 이 깨끗한 옹달샘에 어떻게 발을 담그죠?”

 

“괜찮다. 발만 담그는 건 괜찮다. 산에 올라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건 너희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좋은 풍습이란다. 탁족(濯足)이라고 하지. 탁족을 하면서 세상에서 묻은 욕심찌끼들을 씻어내며 마음을 씻는 풍습이란다.”

 

모세는 말씀을 따라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었죠.

그리고 옹달샘에 발을 담갔어요.

와∼ 발이 정말 시원해집니다.

마음도 따라 시원해지는 걸요?

 

저절로 눈이 감깁니다.

그리고 문득 언젠가 교회에서 했던 세족식 기억이 나네요?

졸졸졸 흐르는 샘물이 모세의 발을 간질간질 씻어주고 있습니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모세야. 이제 샘물을 마셔보렴.”

 

“네? 발 씻은 물을 먹으라고요?”

 

“괜찮다. 이미 그 물은 흘러갔고 새물이 흐르고 있단다.”

 

그러고 보니 옹달샘은 계속 빠른 속도로 솟구치고 있었어요.

모세는 두 손을 모아 샘물을 떠서 할짝할짝 조금씩 맛을 봅니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무슨 샘물이 이렇게 맛있지?

 

모세는 벌컥벌컥 먹고 또 먹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마신 물중에, 아니 앞으로 마실 물중에도

이렇게 맛있는 물은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때? 모세야 맛있지?”

 

“예, 정말 맛있어요. 여기 뭘 탔나요? 산삼효소를 탔나요? 아니면 머루나 다래 효소를 탔나요?”

 

“이건 물이란다. 참 물!”

 

“참 물이요? 그럼 지금까지 제가 마신 물은 거짓 물이란 말씀인가요?”

 

“그래. 물은 물이지만, 원래 에덴동산을 적시며 흐르던 그 참 물이 아닌, 너무 많은 때가 묻은 물이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모세의 눈에 도깨비불이 환하게 들어오네요.

암만 생각해봐도 하도 신기해서, 모세는 도깨비불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어라? 저거, 저거 혹시 개똥벌레 아닌가?’

 

그러고 보니 도깨비불의 정체는 반딧불이였어요.

그 유명한 반딧불이, 개똥벌레를 여기서 보다니!

그것도 저렇게나 많이!

깜깜한 밤도 아닌데 저렇게 장작불처럼 환하게 비치는 개똥벌레는 세상에 다시없을 겁니다.

 

“모세야. 이제 보이느냐? 이제 알겠느냐? 이건 개똥벌레란다. 이 어두운 세상을 위한 소중한 빛을 간직한 사랑스런 벌레지. 개똥벌레는 이처럼 깨끗한 참물이 있는 곳에서만 살 수 있는 환경지표, 생명지표란다. 개똥벌레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세상이 되기 전에, 세상은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더 이상 돈타령, 경제타령이나 하면서 강을 망가뜨리고, 산을 파헤쳐 송전탑을 세우고, 좀 더 편하게 잘 살겠다고 핵발전소를 세우는, 그런 바벨탑 건설을 당장 멈추어야 너희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모세야. 가거라. 가서 사람들에게 이 개똥벌레들을 살려야 한다고 전해주렴. 그래야 환경이 살아나고, 온 생명이 살아난다고 전하거라.”

 

잔뜩 귀 기울여 경청하던 모세의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아휴, 제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해요... 전 못해요. 그런 말 하면 다들 오글거린다고 할 게 틀림없어요. 순식간에 이상한 사람 되고, 외톨이가 되어 버린다니까요?”

 

“물에 빠져 죽을뻔한 네가, 모세처럼 되살아난 네가 세상에 겁날게 무엇이냐? 모세야. 힘 내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땅이 꺼져라 푹 한숨을 쉬며 모세는 고개를 뚝 떨굽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라? 도깨비불, 아니 개똥벌레들이 다 사라져버렸네?

아니 이럴 수가, 게다가 옹달샘도 계곡물도 다 사라진 거에요.

이게 뭐지? 세상이 이런 신기루(蜃氣樓)가 다 있나?

 

한참을 제자리에 장승처럼 서있던 모세가 이윽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느님, 저를 물에서 건져주셨듯이, 이젠 이 세상을 죽음의 욕심물결에서 건져주시려는 거죠? 저 이젠 다 알아요. 비록 잠시 친구들이 다 제 곁을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한번 용기를 내볼게요. 우리 친구 개똥벌레를 살리기 위해 욕심을 줄이고, 전기도 아껴 쓰고, 모든 에너지를 아끼고 물도 밥도 아끼겠습니다. 음식물찌꺼기 잔뜩 줄일게요. 그렇게 살고, 그런 동시도 쓰고, 그런 동화도 짓고, 그런 노래도 지어서 여기저기 마구마구 부르며 다니겠습니다.”

 

문득 언젠가 들은 성경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 (레위기 18:28)

 

그리고 흥얼흥얼 ‘개똥벌레’ 노래를 부르며 산을 내려갑니다.

하느님 마음을 전하다가 친구들 다 떠나가고 나 혼자 외롭게 울게 될지라도,

온 세상 친구 다 사라져버린 저 개똥벌레만큼 외로울까, 저 개똥벌레만큼 슬플까요?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노래를 해주렴

나나 나나나나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마음을 다 주어도 친구가 없네,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뿐인 걸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손을 잡고싶지만 모두 떠나가네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손을 잡아 주렴

아아 외로운 밤 쓰라린 가슴안고, 오늘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울다 잠이 든다∼♬ [한돌 지음, ‘개똥벌레’]

 

[이정훈 지음. 2014년 8월 31일 주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