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45:1-15)
1.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2.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3.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4.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7.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9. 이제 곧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하는 말이라고 하시고, 이렇게 말씀을 드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체하지 마시고, 저에게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10. 아버지께서는 고센 지역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여러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더 계속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께 딸린 모든 식구가 아쉬운 것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여쭈십시오.
12. 지금 형님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요셉임을 형님들이 직접 보고 계시고, 나의 아우 베냐민도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13. 형님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누리고 있는 이 영화와 형님들이 보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다 말씀드리고, 빨리 모시고 내려오십시오."
14. 요셉이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얼싸안고 우니, 베냐민도 울면서 요셉의 목에 매달렸다.
15. 요셉이 형들과도 하나하나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제야 요셉의 형들이 요셉과 말을 주고받았다.
(시편 133)
1.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2.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3.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로마서 11:1-2a, 29-32)
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29.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30.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31.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32.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10-20)21-28)
21.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2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2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7.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8.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4본문 가운데 인상적인 인물이 여럿 등장합니다.
구약본문은 요셉이 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굉장히 크게, 굉장히 길게 웁니다.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아우 베냐민도 함께 웁니다.
그런데 이 울음의 배경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었던 유다의 간절함이, 오늘 요셉을 크게 울립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구약의 숨은 주인공은 유다라고 봅니다.
복음서본문의 주인공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본문 구석구석 그녀의 간절함이 절절이 배어있습니다.
굳게 닫힌 예수님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들 정도입니다.
오늘 요절은,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마태 15:28)로 정했습니다.
[구약과 시편 (창세기 45:1-15 / 시편 133)]
오늘 구약본문은 시작부터 끝까지 큰 울음소리로 가득합니다.
쌓였던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폭발한 울음이지만,
슬픈 느낌보다는 감격의 느낌이 더 강합니다.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창세기 44장 뒷부분에,
동생 요셉의 목숨만은 건지기 위해,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자고 제안했던 유다가
이젠 스스로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간절히 비는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44:33-34)
마치 요셉의 한풀이 과정처럼 보이는 42∼44장을 거쳐
마침내 요셉은 켜켜이 쌓인 형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웁니다.
형 유다의 마지막 애원을 통해, 요셉 자신과 형들 속에 남아 있는
‘형제살인’의 상처들이 치유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 45:5)
동생을 이집트인의 종으로 팔았던 유다의 상처는 평생의 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베냐민 대신 스스로 이집트인의 종이 되겠다는 유다의 간청이
요셉의 마음에 스며들어가 무의식 깊은 곳까지 배인 형제원망의 고통마저 스르르 녹여줍니다.
원수를 다시 형제로 변화시킨 것은, 형의 간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아우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기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는 유다의 진심입니다.
사랑은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인가 봅니다.
오늘 시편본문은 구약본문에 대한 응답찬송으로 제격입니다.
1절부터 주제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시 133:1)
이어지는 2, 3절은 매우 아름다운 영상을 떠오르게 합니다.
“보배로운 기름”과 “(보배로운) 이슬”이 흘러내리는 장면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사랑처럼,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북쪽 높은 산 헤르몬(2,850m), 만년설이 있고 이슬이 풍부한 헤르몬의 이슬이
상대적으로 이슬이 부족한 남쪽 야트막한 땅 시온 산으로 흘러내립니다.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매우 돋보입니다.
이는 딱 우리 시인들이 노래했던,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북이스라엘에 있는 헤르몬 산, 그리고 남 유다의 시온 산이었습니다.
분단된 땅, 골육상쟁으로 갈라진 형제를 하나로 이어주는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영상(映像), 그 느낌이 매우 아름답고 강렬합니다.
특히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기름과 이슬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힘 있는 자가 힘을 움켜쥐려고만 할 때, 독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힘을 아래로 흐르게 할 때 진정 그 힘이 아름다워지는 법입니다.
진정 강렬한 힘, 사랑의 힘이 되어가는 법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 (로마서 11:1-2a, 29-32 / 마태복음 15:(10-20) 21-28)]
오늘 서신서본문의 알맹이는 “순종”과 “자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회개, 즉 잘못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이슬처럼 부어주시는 자비(慈悲)입니다.
비처럼 쏟아부어주시는 대자대비(大慈大悲)입니다.
그 자비심은 이스라엘의 경계, 핏줄을 뛰어 넘습니다.
그런 이방인들에게까지 쏟아지는 하나님의 자비는,
순종이라는 열쇠만 있다면, 물론 타락(墮落)이스라엘에게도 내릴 수 있습니다.
(복음서본문은 21-28절까지만 보았습니다.)
복음서본문의 주인공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두로와 시돈 즉, 완전 이방 땅에서 만난, 그것도 가나안, 완전 이방의 상징, 가나안 여인입니다.
당시로서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이슬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이방 가나안 여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시종일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마태 15:22)
“나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아주 간절한 느낌이 듭니다.
얼마나 간절한지 이방여성의 입에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는 뜻밖의 폭탄발언도 나옵니다.
“주님”이라는 말도 그러한데,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몇 배 더 강렬합니다.
이방사람의 입에서 “다윗”이란 참 자존심 상하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거꾸로 이 말을 듣는 당시 이스라엘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위태로운 호칭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춘 그 간절함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웬일인지 꼬일 대로 꼬인 것만 같았던 예수님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마음과 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까지 천국사역의 장을 넓히시기 전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나 군중들까지 배려하시어)
일부러 가나안 여인의 간절함을 이끌어 내신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왠지, 오늘 복음서본문 앞 구절을 보아서,
유대민족의 불신앙, 불순종에 속상하신 예수님 마음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동족들조차 이 모양인데 언감생심 이방인, 그것도 이방여인임에야!
그런데 그 이방 여인의 입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야라는 표현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조차, 심지어 제자들조차 못 알아보는 예수님 자신을
이방 가나안 여인이 알아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일언반구(一言半句)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폭탄 발언, 결정적인 신앙의 수식도 소용없었습니다.
반복되는 간청도 소용없었습니다.
귀찮아서인지 걱정돼서인지, 오히려 제자들이 적당히 들어주시라고 예수님께 간청할 정도였습니다.(23)
그럼에도 꿈쩍하지 않던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중심에 담긴 간절함이었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는 가장 낮은 자세의 결정판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식들에게 주는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바라는 자세!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마태 15:27)
지나친 연결입니다만, 앞에서 살핀 시편 133절의 “보배로운 기름”, 그리고 “이슬”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마태 15:27)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라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저 가나안 여인을,
어디까지 더 낮아질지 알 수 없는 저 여인의 간절함을
어떻게 더 외면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심(慈悲心)을 활짝 열 수 있는 열쇠인 순종,
그 순종의 결정판을 보여준 가나안 여인!
그 순종의 중심에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살리려는 어미의 간절함!
세상 누구도 살려주지 못하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
꽉 막힌 예수님의 가슴을 뻥 뚫어드린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믿음이 참 대단합니다.
[정리]
사랑은, 사랑의 힘(자비심)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법입니다.
그 사랑의 힘을 구하는 길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길입니다.
나무막대기처럼 딱딱하고 뻣뻣한 나를 구부려 엎드릴 수 있게 하는 길은,
바로 간절함입니다.
그렇게 진심(眞心, 盡心)이 담긴 간절함은 통하게 합니다.
아무리 꽉 막힌 세상도 뻥 뚫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안하무인(眼下無人)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무자비한 사람조차
그 속에 숨어있을 일말의 자비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간절함입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 아니십니까?
[나머지]
*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
오늘 요셉(유다)의 눈물과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레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이 떠오릅니다.
지금 세월호에서 숨진 자식들의 한과 소원을 풀어주려고 부모들이 애쓰고 있습니다.
저 꽉 막힌 정치권력의 귀를 뻥 뚫어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낮게 엎드려도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던 차,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이 저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상념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가나안 여인만큼 일지는 몰라도
저 유가족들의 진심 가득한 간절함을 지금 주님께서 크게 느끼고 계시다는 증거를
교황이 전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수고 많았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더 간절한 마음으로 비는 길 뿐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귀신들린 딸을 위해 엎드린 가나안 여인처럼,
귀먹은 귀신처럼 타락한 이 정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님께 엎드려 간구하는 길뿐이라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경제가 아닌데도 ‘문제는 경제’라고 떠들어댑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를 보면서도 금세 잊게 만드는,
저 경제라는, 돈과 편리라는 귀신에 씌어 있는 이 정부와 일부 여론과 언론의 귀를 열 수 있는 길은
어떤 논리도 설득도 아니고, 이젠 오직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뿐이라는 생각입니다.
문득 가나안 여인처럼, 귀신들린 아들을 위해 예수님께 비는 어느 아비 이야기를 담은
마가복음 9장 말씀이 떠오릅니다.
24. “...그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25. 예수께서 무리가 어울려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28.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마가복음 9장)
[말씀동시] 바리새파의 최후와 가나안 여인의 사랑스런 부스러기 (이선구 지음. 성실교회 고등부 1학년. 『성실문화』 79호)
바다같이 넓은 밭에 가득심긴 과일나무 군데군데 잡초들
그 가운데 큰 나무 과일 잔뜩 열린채로 뽐내며 서있는데
자세히 보니 열매마다 벌레구멍 잔뜩 있어 성한 열매 없더라
열매들이 떨어져서 터지면서 악취 풍겨 벌레들이 꼬이니
밭주인이 도끼 들고 큰 나무 베어다가 아궁이에 던진다
가나안의 엉겅퀴
정원에 한 그루 자라있는 사과나무
그 아래 애처롭게 피어있는 엉겅퀴
사과들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 한줄기 맞으며
이파리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이슬 먹고 자라서
활짝 핀 꽃잎에서 진한 향내 풍기니
집주인이 뽑아다가 양지바른 곳에 심더라.
[말씀시조] 마태복음 15:(10-20) 21-28 (이정훈 지음.『성실문화』 79호)
다윗의 자손이여 내딸을 구하소서
내자녀 몫이로다 찌꺼기라도 좋나이다
여자여 네믿음이크다 소원대로 되어라
[말씀한시]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오세종 지음.『성실문화』 79호)
入鬼少女苦痛甚 (입귀소녀고통심) 귀신들린 소녀의 고통이 매우 심하여
其母絶叫大闢裔 (기모절규대벽예) 그 어미가 울부짖었다. ‘다윗의 자손이여’
狗亦得之机下式 (구역득지궤하식)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汝信大矣女得癒 (여신대의여득유)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딸이 고침 받았느니라.
[말씀서예] 시편 133:3 (오세주 작품.『성실문화』 79호)
[말씀노래]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 (이정훈 지음.『성실문화』 79호)
[본문] (마태복음 15:(10-20) 21-28)
[노랫말]
1. 두로와 시돈지방 예수께서 지나실 때, 가나안 낯선여인 예수님께 부르짖네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귀신들린 저의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2. 유대동포 불신앙에 마음상한 예수께서, 이방여인 부르짖음 외면하고 가시는데
주님저를 도우소서 무릎꿇고 매달리니, 내새끼 먹을빵을 개들에게 줄수없다
3. 주님주님 옳소이다 백번천번 옳소이다, 그렇지만 개새끼도 부스러긴 먹나이다
이 소리 들으시고 주님귀가 열리누나, 우울하던 주님마음 순식간에 열리누나
4. 여자여 대단하다 네믿음이 대단하다, 부르짖은 너의간청 소원대로 되었도다
이방여인 큰믿음에 큰힘얻은 예수께서, 발걸음도 성큼성큼 갈릴리로 향하시다
[해설]
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어, ‘비석씻이’가락에 붙였다.(성실문화 74호 201쪽)
[악보]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 (이정훈 지음, 2014년 4월 17일)
[시편 송서(誦書)]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79호)
(※아리랑 가락에 맞추어)
(뒷소리)[찬양대]
1. 보- -- 라-, 형- -제 가-, 연합 하- 여-, 동- -거 함이,
어- -찌 그리, 선- 하- 고-, 아- -름 다운, 고- -- --,
(앞소리)[독창]
2. 머- 리- 에-, 있- -- 는-, 보배 로- 운-, 기- -름 이-,
수- -- 염-, 곧- 아론 의-, 수염 에흘 러-, 서- -- --∼
(뒷소리)[찬양대]
그- -- 의-, 옷- -깃 까지, 내- 림- 같-, 고- -- --,
3. 헐몬 의이 슬이, 시온 의산 들에, 내- 림- 같도, 다- -- --,
(앞소리)[독창]
거- 기- 서-, 여호 와께 서-, 복을 명령 하셨, 나- -- 니-,
곧- -- --, 영- 생이 로다, (영- -생 이로, 다- -- --)∼
[다함께]
(뒷소리)[다함께]
할- -- 렐-, 루- -- 야-, 할- 렐- 루-, 야- -- --,
할- -렐 루야, 할- 렐- 루야, 할- -렐 루-, 야- -- --∼∥
※ 가락은 아리랑가락이고, 장단은 세마치로 읊는다.
(뒷소리는 세마치로, 앞소리는 중중모리로 해도 좋다.)
※ 쉼표(‘,’)까지 세마치 한 장단 3박 이다.(중중모리일 경우는 한 줄이 한 장단)
(즉, 세마치 4장단이 중중모리 1장단이다.)
※ 세마치장단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편의상 1박을 3분박 대신 2분박으로 구분했다.
(예; 악보 세 번째 마디에 종종 나오는 셋잇단음표 식으로 표기한 것이 3분박의 맛을 살린 것이다.)
※ 뒷소리는 찬양대 합창으로, 앞소리는 독창이나 이중창으로 하면 좋겠다.
[말씀동화] 예수님의 개타령
어느 날 예수님께서 한국에 오셨어요.
제자들이랑 같이.
예수님 고향이 이스라엘인데, 잠시 고향을 떠나시기로 한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도 하나님 말씀 안 듣고
힘없는 사람들 못살게 구는 꼴이 하도 밉살스러워서
정이 뚝 떨어지신 걸까?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예배당에도 가보시고
가장 작다는 성당에도 가보셨는데,
그런데 예배당에도 성당에도 사람이 없어서
그냥 밖으로 나오셨어요.
아마 건물구경 보다는 사람구경을 하고 싶으시나봐요.
그래서 사람이 가장 많다는 서울 광화문 한복판을 지나시는데,
길 가운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는 걸 발견하셨어요.
예수님이 한참을 올려다보시며 관심을 기울이시네?
이때 곁에 있던 제자 베드로가 냉큼 하는 말이,
“주님, 저 자가 바로 이순신이라는 장군인데요, 지금 한국에서 인기가 최고래요.”
“그러네. 그래서 이렇게 큰길 한복판에 동상까지 만들어 놓은 게야. 아니 그런데 베드로 자네는 어떻게 그리 이 자에 대해 잘 아나?”
“아 그건, 이순신이 저처럼 뱃사람으로 유명했거든요. 뱃사람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죠. 그런데 이순신은 그냥 평범한 뱃사람은 아니고요 배타고 나라를 지키는 장수였습니다. 이순신 하면 왜적들이 벌벌 떨었대요.”
“그래? 그거 참 반가운 소린걸? 나랑 아주 많이 닮았잖은가? 거 왜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선장이라고 하잖아? 구원의 방주라는 교회를 움직이는 선장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마귀들도 내 이름만 들으면 벌벌 떨고 그러잖은가? 그러니 저 이순신이라는 장군도 평소 나를 꽤 좋아했겠군?”
“아뇨, 유감스럽게도, 그 때 한국 땅에는 교회가 세워지기 전이라 주님에 대해 잘 몰랐고요, 게다가 적군인 일본 장수 중에 주님을 꽤 좋아하던 고니시라는 장수도 있었거든요. 소서행장이라고도 부르는데요, 그래서 아마 그를 통해 예수님 이름을 들었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래? 거 참 유감이군.”
예수님이 시무룩해지시자 베드로가 얼른 분위기를 바꾸네?
“그래도 아마 저 자가 주님 소식을 제대로 듣게 된다면, 저희처럼 금세 예수님 제자가 되었을 겁니다요. 거북선도 버리고 예수님 따라나섰을 게 틀림 없고요. 주님도, 이순신도 똑같이 특별한 뱃사람이시잖아요? 뱃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잖아요!”
베드로의 너스레에 예수님 마음이 좀 풀리시려나?
어? 그런데 예수님이 또 뭔가를 발견하셨나봐요.
“그런데 저기 이순신 장군 동상 뒤에 저기 멀찍이 황금색 동상은 또 뭐지? 누가 앉아 있는 형상인데?”
이번엔 요한이 끼어들었어요.
예수님이랑 베드로의 대화를 곁에서 엿들으며 호시탐탐 끼어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거든요.
“아 저건 이순신보다 더 인기 많은 왕의 동상인데요, 세종대왕이라고 합니다.”
“세종대왕? 로마의 가이사처럼 큰 왕이었나?”
“예, 아마 그보다 훨씬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순신도 그렇고 세종대왕도 그렇고 둘 다 백성을 하늘처럼 사랑하던 사람들이어서 그처럼 훌륭한 업적도 남기고 지금까지 사람들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다니, 저들이 비록 나를 몰랐어도, 나의 벗으로서 자격이 충분하겠군. 아니 그런데 저 세종대왕 동상 뒤에 서 있는 게 뭐지? 어디서 많이 본 건데? 어라? 저거 십자가 아닌가? 저기도 교회가 있었나?”
베드로가 다시 냉큼 나서서 대답하네요?
베드로의 표정을 보니까 아주 의기양양한 게, 뭔가 있는 모양인 걸?
“아! 저건요, 오늘 큰 행사가 있어서 임시로 세우는 십자간데요, 프란치스코라는 교황이 오기로 되어 있거든요. 그 친구 제가 특히 아끼는 직속 후밴데요, 요새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아주 높다고 하네요? 아마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가 봐요.”
예수님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네요?
허름한 옷차림이라 좀 튀긴 했지만,
그런대로 사람들이랑 잘 섞여서 광화문 일대를 이리 저리 다니며 구경하시던 예수님이,
문득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시네요.
“그나저나 베드로 자네 직속 후배인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자가 저리 환대를 받는데, 만약 내가 온 걸 알면 한국 사람들 어떨까? 좀 궁금해지는 걸?”
“그야 물론 대환영이겠죠. 아마 온 나라가 난리가 날 겁니다요! 아니 전 세계가 깜짝 놀랄걸요?”
“그렇게 다들 좋아할까?”
예수님 얼굴표정이 다시 환해지시네?
그 때 야고보가 불쑥 끼어들었어요.
“주님! 제 생각엔 모두 다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세상엔 돈 많은 사람들도 꽤 많고요, 또 한창 돈맛에 길들여진 사람들 참 많거든요. 주님도 아시죠? 돈맛을 아는 사람들은 천국 맛, 예수님 말씀 맛을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신 줄 알면, 즉 천국이 가까이 온 줄 알면, 돈맛을 더 이상 맛보기 어렵게 될 테니까, 십중팔구 싫어할 게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고개를 끄덕이시며 다시 분위기가 어두워지시네요.
어라? 그런데 누가 노래를 시작하는 걸?
아하! 노래 잘하는 빌립이 부르는 노래예요.
그런데 좀 색다른 노랜 걸? 어디 노래지?
“개야 개야 검둥개야, 개야 개야 검둥개야 (개야 개야 검둥개야),
가랑잎만 달싹해도 짖는 개야,
청사초롱 불 밝혀라, 우리님이 오시거든 개야 개야 검둥개야, (개야 개야 검둥개야)
짖지를 마라, (짖지를 마라) 멍멍 멍멍, 짖지를 마라∼♬” [통영 개타령, 1절]
와∼ 예수님이랑 제자들이랑 모두 박수를 칩니다.
박수칠만하네, 분위기가 급상승하잖아! 분위기엔 역시 노래가 최고라니까!
신바람 난 빌립이 반복해서 부르니까 다들 따라 부르네?
따라 부르기도 쉽고, 은근히 중독성 있는 걸?
빌립에게 동료들 질문이 쏟아집니다.
“아니 자넨 언제 그런 노래를 다 배웠나? 그 무슨 노래지?”
“아 이건 여기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개타령이라는 노래야. 경상도 통영에서 부르던 민요지. 저기 아까 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통영에서 큰 활약을 했거든, 그래서 지금 통영을 가리켜 충무시라고 부르기도 했었어. 이순신이 일본군을 대파했던 한산대첩의 그 한산도가 바로 통영에 있는 작은 섬이지. 그래서 통영에 가면 개타령 말고도, 이순신공원도 유명하고, 충무김밥도 유명하고 그래...”
“그런데 갑자기 그 개타령은 왜 부른 거야? 이순신 장군 때문인가?”
“어, 그건, 이순신 장군 때문은 아니고, 우리 예수님 오시면 싫어하는 사람들 많다길래... 우리 님 오실 때 조용조용 아무도 모르게 오시는 게 낫겠다 싶어서, 청사초롱 불은 밝혀도 검둥개야 너는 짖지 마라... 뭐 그런 뜻으로 부른 거야.”
“거 좋은 뜻을 담은 노래로구나. 앞으로 종종 불러다오. 아니 함께 부르자꾸나...”
예수님이 고개를 끄덕이시며 중얼거리시네, 표정은 그리 밝지 않으시고...
어라? 그런데 저건 뭐지?
저 여자애가 갑자기 왜 저래?
옷도 예쁘게 입은 애가 갑자기 바닥을 기고 뒹굴고 난리가 아닌 걸?
마치 진드기 붙은 개가 가려워서 땅바닥에다 온 몸을 굴리며 벅벅 긁고 있는 모양 같아요.
아하! 저거 저거 간질병인가 봐요.
쯧쯧 참 안타깝네, 예쁜 애가 어쩌면 좋담?
어라? 그 옆에 서 있던 아줌마가 예수님께 막 달려오네요?
아이 엄만가?
“예수님, 살려주세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어라? 그나저나 도대체 저 여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본 거야?
어라?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예수님이 고개를 획 돌리고 저리 가버리시잖아?
도대체 예수님은 또 왜 저러시는 거지?
아하, 아마 저 아줌마가 예수님 이름을 막 부르면서 예수님의 신분을 확 드러내니까
얼른 가리려고 저러시는 건가 봐요.
어라? 그래도 저 아줌마가 더 끈질기게 예수님께 달라붙네요?
진드기가 따로 없네?
제자들도 예수님께 뭐라뭐라 하는 데요?
아마 저 아줌마 딸을 고쳐주시는 게 좋겠다고 권하는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았다가는 저 아줌마 때문에 점점 예수님 정체가 드러나게 될 테니까!
그래도 예수님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시지도 않는 걸요?
“예수님,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를 좀 도와주세요!”
아유 깜짝이야. 무슨 아줌마 목소리가 저리 크지?
예수님도 저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셨겠어요!
어라? 근데 예수님은 이미 가슴 철렁하신 표정이에요.
왜 그러지? 뭘 보셨나?
아하! 고개를 휙 돌리고 어딜 보시나 했더니,
저 위에 고층빌딩 꼭대기에 붙어있는 전광판 뉴스를 보신 게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자지구 사람들 못살게 구는 뉴스 동영상이네!
이윽고 예수님이 우울한 목소리로 뭐라뭐라 대답하시네요?
“내 새끼들에게 줄 빵을 개들한테 던져줄 수는 없어요!”
와∼ 우리 예수님 되게 쎄게 나오시네요!
맞아, 저런 진드기 같은 아줌마 떼어내는 데는 저 정도는 하셔야지!
가뜩이나 예수님 오신 거 감추시려 애쓰시는데, 그래서 개타령도 익숙해지시던 차였는데,
그래서 저 아줌마한테도 개타령 하시는 걸까?
어라? 그런데 저 아줌마도 금세 배웠는지 개타령을 하고 있네?
그런데 신나는 개타령이 아니라 흐느끼는 개타령인데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바짓단을 붙잡고 흐느끼며 부르는 개타령입니다!
“맞아요 예수님, 그래도 개새끼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잖아요! 아시잖아요!”
오! 예수님 표정 좀 봐요.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이스라엘 뉴스 때문에 속상하시고,
예수님 인기가, 이순신 보다도, 세종대왕 보다도, 프란치스코 교황 보다도 훨씬 못해서 잔뜩 우울하셨었는데,
저 아줌마랑 번갈아서 개타령하시다가 갑자기 표정이 바뀌시네요?
“애기엄마, 일어나요. 정말 한국 아줌마들 끈질기네요! 이렇게까지 자기를 낮출 수 있는 간절한 믿음이면 딸아이 병은 물론이고 이 병든 세상도 바꿀 수 있어요.”
“오! 고맙습니다 예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좀 힘이 나시는 것 같아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저 아줌마 때문이었을까?
자식을 살리려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엄마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맞아! 그게 바로 하늘 문 열고 땅에 내려와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의 마음이잖아! 똑같잖아!
어라? 한바탕 개타령 부르시는 바람에 예수님 기운이 솟구치시나?
제자들보다 씩씩하게 마구마구 앞서 가시네요?
우리 예수님 이번엔 어딜 가시나?
오! 세월호 단식 농성 중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 아저씨한테 가시려나봐요.
죽어가는 딸을 살리려는 엄마랑 개타령 하셨던 것처럼,
죽은 딸 고운 정신 살려내려 밥도 안 먹고 애쓰는, 김영오 아빠!
저렇게 목숨걸고 낮아지고 있는 간절한 아빠!
김영오 아빠랑 예수님은 과연 무슨 개타령을 하실까요?
되게 궁금하네?
[이정훈 지음. 2014년 8월 17일 주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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