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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왕국절 2주(2014년 9월 7일) 예배준비 노트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성서일과 4본문]

 

(출애굽기 12:1-14)

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3.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알리어라. 이 달 열흘날 각 가문에 어린 양 한 마리씩 곧 한 가족에 한 마리씩 어린 양을 마련하도록 하여라.

4. 한 가족의 식구 수가 너무 적어서, 양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으면,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을 계산하여, 가까운 이웃에서 그만큼 사람을 더 불러다가 함께 먹도록 하여라.

5. 너희가 마련할 짐승은 흠이 없는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골라라.

6.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해 질 무렵에 모든 이스라엘 회중이 모여서 잡도록 하여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다가, 잡은 양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야 한다.

8. 그 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기는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함께 먹어야 한다.

9. 너희는 고기를 결코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서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 할 것 없이, 모두 불에 구워서 먹어야 한다.

10. 그리고 너희는 그 어느 것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이 있으면,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11.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에는 이렇게 하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어라. 유월절은 주 앞에서 이렇게 지켜야 한다.

12. 그 날 밤에 내가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두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신을 벌하겠다. 나는 주다.

13. 문틀에 피를 발랐으면, 그것은 너희가 살고 있는 집의 표적이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피를 보고 내가 너희를 치지 않고 넘어갈 터이니, 너희는 재앙을 피하여 살아남을 것이다.

14. 이 날은 너희가 기념해야 할 날이니, 너희는 이 날을 주 앞에서 지키는 절기로 삼아서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켜야 한다."

 

(시편 149)

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 앞에서 찬양하여라.

2. 이스라엘아, 창조주를 모시고 기뻐하여라. 시온의 주민아, 너희의 임금님을 모시고 큰소리로 즐거워하여라.

3. 춤을 추면서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소구치고 수금을 타면서 노래하여라.

4.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눌림받는 약한 사람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 주신다.

5. 성도들아, 이 영광을 크게 기뻐하여라. 잠자리에 들어서도 기뻐하며 노래하여라.

6. 성도들의 입에는 하나님께 드릴 찬양이 가득하고, 그 손에는 두 날을 가진 칼이 들려 있어,

7. 뭇 나라에게 복수하고, 뭇 민족을 철저히 심판한다.

8. 그들의 왕들을 족쇄로 채우고, 고관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9. 기록된 판결문대로 처형할 것이니, 이 영광은 모든 성도들의 것이다. 할렐루야.

 

(로마서 13:8-14)

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9.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11.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18:15-20)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17.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중에, 내 생각의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른 것은, 우리의 어두운 구석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왜 나는 닮지 못한 것일까?

사랑이신 하나님을 나는 어쩌면 이렇게까지 닮지 못한 것일까?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이번 주 요절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로 정했습니다.(로마 13:12)

 

(하나 더한다면, 오늘 4본문에는 전쟁의 분위기, 긴장감이 역력합니다. 자세한 것은 뒤에 ‘나머지’에서 정리하겠습니다.)

 

 

[구약과 시편 (출애굽기 12:1-14 / 시편 149)]

오늘 구약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시는 마지막 재앙에 앞서서 주신 말씀입니다.

임계점(臨界點)이랄까요?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이제 꽉 찬 상황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까지 고집스러울 수 있을까요?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 바로 말입니다, 파라오!

지난 수요일(2014. 9. 3) ‘매일성서일과’ 본문 가운데, 출애굽기 7:22-23절 말씀을 읽으며 저는 몸서리를 쳤습니다.

 

22. 그런데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와 똑같이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고집을 부리면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23. 이번에도 바로는 이 일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발길을 돌려서 궁궐로 들어갔다.

 

자기 이집트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건 첫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고집은 계속됩니다.

하나님과 대결하는 저 어리석음의 끝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끝이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한 이집트 모든 맏이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신을 벌하겠다”(12)고까지 하십니다.

이집트에 어떠어떠한 신들이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문득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과연 어떠어떠한 신들을 하나님께서 치시려고 결심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예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 말입니다.

나보다 약한 자들이 부르짖는 고통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 뒤, 출애굽기 12:29절 이하에 저 처절한 ‘야훼의 밤’이 펼쳐집니다.

물론 야훼의 밤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큰 비극이지만, 히브리 백성들에게는 큰 희망이요 해방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오늘 구약본문의 ‘야훼의 밤’이 펼쳐지게 된 계기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약자(弱者, 히브리, 즉 하삐루)들의 고통,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약자들의 예배였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나를 임금님께 보내어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에게 예배하게 하라, 하셨는데도, 임금님은 아직까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출애 7:16)

 

이 뒤에도 바로는 열 번째 재앙이 내리기까지

여러 번 요리조리 미꾸라지 같은 핑계를 대며 온전한 예배를 방해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히브리백성들의 최소한의 인권과 예배권이 짓밟히던 원인과

지금 대한민국에서 약자들의 그것이 유린(蹂躪)되는 원인은 하나로 통합니다.

 

지나친 물질욕심이 그것입니다.

(이게 바로 온갖 “어둠의 행실”들을 키웁니다.)

그게 바로 ‘바로’의 마음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온전한 예배, 즉 온전한 출애굽을 방해한 이유 말입니다.

 

오늘 구약본문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시편본문의 알맹이는 이것으로 보았습니다.

 

“눌림 받는 약한 사람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 주신다.”(시 149:4)

 

내 인권이 회복되고, 내 예배권이 회복되니, 자다가도 웃을 정도로 기쁩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기뻐하며 노래하여라.”(시 149:5)

 

3,500년 전 이집트는 물론이고, 지금 대한민국에도 힘없는 약자들의 억울한 고통은 끊이지 않습니다.

세상 법으로 해결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져만 갑니다.

세상 법으로 안 된다면, 하늘의 법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법으로 벌을 주지 못한다면, 하늘의 법으로 하늘의 벌을 줘서라도,

저 무법자들로 하여금, 이젠 “어둠의 행실”들을 벗어버리게 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의 마지막 구절은 약한 자들, 억울한 눈물만 흘리고 있던 이들에게 한줄기 시원한 희망의 노래입니다.

 

“기록된 판결문대로 처형할 것이니, 이 영광은 모든 성도들의 것이다. 할렐루야.”(시 149:9)

 

 

[서신서와 복음서 (로마서 13:8-14 / 마태복음 18:15-20)]

오늘 서신서본문은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사랑’을 강조합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다고 하십니다.(로마 13:9)

“사랑의 율법의 완성”이라고 까지 하십니다.(로마 13:10)

그런데 오늘 유독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로마 13:10)

 

이 사랑과 반대편에 있는 단어들이 줄줄이 뒤이어 나옵니다.

“잠”(11), “밤”(12), “어둠의 행실”(12), “육신의 일”(14) 등입니다.

이것들은 자신만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것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들의 뿌리는 바로 ‘과도한 물질욕심’입니다.

이 물욕이 자라나면서 지나친 권력욕과 방탕, 시기, 분쟁 등 인간사의 온갖 비극들을 일으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의 바로 앞뒤에 어떤 말씀들이 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는 ‘길 잃은 양’에 대한 말씀이,

그리고 바로 뒤에는 ‘용서에 대하여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서본문의 알맹이는 ‘용서’로 보았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건강한 교회는 용서의 기술, 용서의 힘이 세다는 것입니다.

 

용서란 대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두철미해야 합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죄가 무엇인지 직시하게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됩니다.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는데 할 수 있는 용서란 없습니다.

그런 용서는 무늬만 용서입니다.

그런 용서는 교회를 다시 제대로 하나 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지금 땅에서 제대로 매고 푸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18∼19절)

철저한 징계와 철저한 용서 말입니다.

 

(18∼19절 말씀은, 넓게 해석하자면, 2주전 본문인 마태 16:19절 말씀에 이어서, 곧 태어날 교회의 생생하고 왕성한 기운, 천국과 직통하는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전반부와 이어서 볼 때, 용서의 철두철미한 과정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공동체의 기도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물론 교회가 땅에서 수미일관하게 외쳐야 할 복음은 이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반복하지만, 이 용서의 과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건 미뤄서도, 덮어두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적당히 잊히면서 상처가 아물겠지, 그런 식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용서의 과정이 교회의 참 힘을 키웁니다.

교회를 더 단단하게 합니다.

 

이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어둠의 행실을 제대로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을 수 있게 합니다.

 

 

 

[정리]

오늘 구약과 시편본문에 등장하는 약자들에게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현장에서 힘없이 부서지는 구럼비 바위를 봅니다.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아무 힘없이 쓰러지는 밀양 할머니들을 봅니다.

세월호 법 제정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밥을 끊는 사람들을 봅니다.

 

ALS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보았습니다.

찬물을 뒤집어씀으로써 근육이 수축되는 고통을 체험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런 병(루게릭병; 근위축성 측색경화증-ALS)을 앓고 있는 벗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소통하고 잊지 말자는 취지입니다.

어떤 철없는 이는 찬물을 뒤집어쓰고 나서도 폼을 잃지 않으려는 듯, 늠름하게 “시원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뜻 깊습니다.

 

세월호 단식 릴레이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찬물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을 우리 아이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그 부모들의 애끊는 고통, 밥 끊는 고통을 공감하고 소통하고 잊지 말자는 취지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동포들이 이젠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과도한 물질욕심, 권력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죄를 지은 사람들이 제대로 용서받고서 다시 대한민국이 똘똘 하나 될 수 있도록,

매고 푸는 과정을, 징계와 용서의 과정을 제대로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밥을 끊고 엎드린 수많은 한국교회의 기도가

하늘 문을 활짝 열 때가 가깝습니다.

부디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저 어리석은 고집쟁이 바로 왕처럼 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내일, 한가위 둥근달처럼, 우리 모두 둥글둥글 어여뻐질 수 있기를 빕니다.

 

 

[나머지]

* 전쟁 분위기

오늘 4본문 전체에 감도는 분위기를 요약하자면, 전쟁의 분위기, 긴장감입니다.

요새 전쟁 영화 ‘명량’, ‘군도’ 등을 보아서인지, 이런 분위기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음식 먹는 분위기조차 그러합니다-무교병과 쓴나물, 남은 것 태워버리기, 허리띠, 신발, 지팡이 등-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이집트의 모든 신들을 벌합니다.

시편은 승리한 약자들의 기쁨과 적들을 처형하는 판결문이 인상적입니다.

서신서는 나 자신과의 전쟁입니다. 내 ‘육신의 일’과의 전쟁! 이 전쟁에서 가장 큰 무기는 사랑입니다.

복음서는 교회의 전쟁입니다. 바로 죄와의 전쟁! 이 전쟁에서 가장 멋진 승리는 온전한 용서입니다. 자신의 죄를 직시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는 철저한 징계와 철저한 용서! 이런 ‘철두철미한 용서의 과정’이 중요합니다.

 

 

 

[말씀동시] 줄줄이 (이소현 지음. 성실교회학교 4학년. 『성실문화』 80호)

줄줄이 줄줄이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한 두 사람을 더 불러와라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면은

그를 이방사람이나 세리로 여기거라

 

줄줄이 줄줄이

난 이 말씀 속에서

어려움을 당한 교회를 위해

여럿이

줄줄이 줄줄이

힘을 합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말씀시조] 마태복음 18:15-20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80호)

형제가 지은죄는 정성껏 풀어가라

땅에서 푸는것은 하늘서도 풀리리라

내이름 찾는소모임 나거기에 있으리

 

 

 

[말씀한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 80호)

獲罪于天落陰府(획죄우천낙음부) 하늘에 죄를 얻으면 음부로 떨어진다

世人犯過勸歸眞(세인범과권귀진) 죄 지은 이들이여, 진리로 돌아오라

傳播悔改勉傳道(전파회개면전도) 회개를 전파하기 애쓰고 힘쓰라

亦釋於地當解天(역석어지당해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말씀서예] 시편 149:1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 80호)

 

 

 

 

 

 

 

[말씀노래] 우리 중의 두 사람이 (홍의종 지음. 『성실문화』 80호)

[본문] (마태복음 18:15-20)

[노랫말]

우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아버지가 이루시리

우리 두세 사람이 / 주 이름으로 모인 곳에 / 주님 우리들 가운데 / 함께 하시리

[해설]

본문 19-20절을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어 보았다.

음원은 다음 카페 ‘성서일과사랑방’의 ‘노래 마당’ 방에 올려놓았다. 악보만 보기보다는 노래를 한 번이라도 들어보는 것이, 곡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성서일과사랑방’ 카페에서 곡을 들어보고 소화하여 창조적으로 표현해 보기를 권한다.

[악보] 우리 중의 두 사람이 (홍의종 지음, 2014년 7월 31일)

 

 

 

 

 

 

[시편송서(誦書)] 시편 149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80호)

(전래 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 독송 가락으로 읊조리기)

 

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3. 춤추며 그-의 이름-을--, (그 이름) 찬-양 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 지어-다--∼

 

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5. 성-도들-은 영광-중에-,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6.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7.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8.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사슬-로-- 결박-하고-),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다함께]

9.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모든)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말씀동화] 강강술래를 사랑한 이순신 장군님

 

“강∼강∼술∼래∼, 강∼강∼술∼래∼

달아달아 밝은 달아∼, 강강술래∼ / 이태백이 놀던 달아∼, 강강술래∼

저기저기 저 달속에∼, 강강술래∼ / 계수나무 박혔으니∼, 강강술래∼

금도끼로 찍어내어∼, 강강술래∼ / 옥도끼로 다듬어서∼, 강강술래∼

초가삼간 지어놓고∼, 강강술래∼ / 양친부모 모셔다가∼, 강강술래∼

백년천년 살고지고∼, 강강술래∼ / 천년만년 살고지고∼, 강강술래∼♬”

[강강술래 머리 가락 ; 중중모리 장단으로]

 

휘영청 보름달이 솟아오릅니다.

한가위 둥근달입니다.

핏빛 가득했던 우리 마을 진도 팽목항조차 달빛으로 환한 밤입니다.

 

이순신장군님께서 돌아가신지 두 해가 흘렀어도

해마다 한가위만 되면 우리 진도 사람들은 장군님을 그리며 강강술래를 해요.

원래 아줌마들만 놀던 강강술래지만

장군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이젠 남녀노소 누구나 다 강강술래를 좋아하죠.

 

강강술래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라도 바닷가 엄마들의 놀이였는데,

아마 고구려시대보다 더 오래전부터 놀았을 거라고 추측해요.

고기도 많이 잡고 농사도 풍년들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득담긴 기도와 같은 놀이였다네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고사리대사리 꺾자 나무대사리 꺾자, 유자꽁꽁 재미나넘자, 아장장장 벌이여∼

껑자(꺾자) 껑자 고사리대사리 껑자, 지리산고사리 꺾어다가 우리 부모 반찬하세∼”

 

이렇게 산에 가서 고사리 같은 나물 해오는 놀이도 있고요,

또 바다에 나가 청어를 잡아 엮어 말리는 놀이도 있어요.

 

“청∼청∼ 청어엮자, 위도군산 청어엮자∼

청∼청∼ 청어풀자, 위도군산 청어풀자∼”

 

그뿐 아니죠, 심지어 농사를 망가뜨리는 들쥐를 잡는 놀이도 있다니까요?

 

“뒨쥐(들쥐)새끼 찔룩짤룩, 가사리 벗이여∼

뒨쥐새끼 찔룩짤룩, 가사리 벗이여∼

잡았네 잡았네, 뒨쥐새끼를 잡았네∼

콩하나 팥하나 던졌더니 오곡백과가 절시구∼♬”

 

 

어느 달 밝은 밤이었어요.

이순신 장군님이 수루(水樓)에 홀로 앉아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죠.

적의 배는 저렇게 많은데 우리는 숫자도 적고 한양에서는 쌀도 무기도 안 오고...

바로 그 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니 전쟁 중에 어디서 이런 신나는 노랫소리가?’

 

그건 바로 우리 동네 엄마들이 부르는 강강술래였어요.

우리 동네 엄마들은 한가위 뿐 아니라

보름달만 뜨면 강강술래를 놀 정도로 신바람이 많았답니다.

제아무리 지옥 같은 전쟁 중이라도 휘영청 보름달은 떠오르는 법!

 

오랜 전쟁으로 몸도 마음도 지친 엄마들이 달 신명에 이끌려 강강술래를 놀고 있었어요.

전쟁으로 불타버린 집과 곡식들, 전쟁으로 숨진 남편과 자식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 우리 동네 엄마들입니다.

아무리 아파도, 아픈 엄마들끼리 강강술래를 뛰며 새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는 우리 엄마들!

 

이순신 장군님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가 강강술래를 유심히 지켜보았죠.

이튿날 장군님은 부하들과 마을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러분에게 이런 멋진 강강술래가 있었다는 것을 어젯밤에야 알았소. 여러분은 모두 강강술래의 뛰어난 선수들, 강강술래의 세계 챔피언 감이오! 이번 전쟁은 여러분의 강강술래로 틀림없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장군님의 명에 따라 엄마들은 모두 남편이 입던 옷으로 갈아입고 강강술래를 돕니다.

바닷가 높은 언덕 위에서 점점 신명나게 강강술래를 돌면 흙먼지가 일어납니다.

저 멀리 왜적들에게는 뿌연 흙먼지와 강강술래 노랫소리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사훈련으로 보입니다.

 

장군님의 지혜는 이뿐 아니었어요.

원래 전쟁 중 신호를 위해서는 대장선에서 장수연을 날립니다.

커다란 방패연에 이런저런 각기 다른 문양을 그려 넣어 아군들만 알아보는 신호를 삼는 것이죠.

그런데 높은 언덕 위 강강술래 엄마부대는 커다란 강강술래 노래로 신호를 합니다.

물론 적선의 움직임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은 우리 장수 중 한 명이 맡았겠죠?

 

우리 전선들은 학의 날개모양인 학익진(鶴翼陣)으로 펼쳤다가

한 일자 모양의 일자진(一字陣)으로도 펼칩니다.

한산대첩에서는 학익진으로, 명량대첩에서는 일자진으로 대승을 거둡니다.

좁은 해협에서는 문지기 하나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죠?

 

“문지기 문지기 문열어라, 열쇠없어 못열겠네∼

문지기 문지기 문열어라, 열쇠없어 못열겠네∼

 

이 노랫소리가 들리면 절대 길을 열어줘서는 안 된다는 신호입니다.

사력을 다해 진을 지킵니다.

그러다 갑자기 노래가 바뀌고 강강술래 놀이 대형도 활짝 열립니다.

 

문지기 문지기 문열어라, 열두대문 열렸다∼♬”

 

이때는 적의 배들을 유인하기 위해 일자진(一字陣)을 순식간에 해체해 버리는 거죠.

그러다 청어엮기가 시작되면 다시 일자진으로,

아까보다 더 촘촘한 일자진으로 길을 꽁꽁 틀어막아버립니다.

 

그러다 갑자기 고사리 꺾기가 시작됩니다.

이건 조금씩 야금야금 공격할 기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이윽고 들쥐잡기를 시작하고 마침내 “쥐잡세(꼬리따세)∼♬” 하고 함성이 터지면,

전력을 다해 총공격을 하라는 신호입니다.

 

강강술래 덕분에 우리 이순신장군님의 깊은 시름이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어요.

강강술래 덕분에 우리 마을 사람들도 점점 기운이 나고 자부심이 솟구칩니다.

 

 

왜장 고니시 장군의 부하였다가 이순신 장군님에게 반해서 우리 편이 된

무라야마(村山)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이순신 장군에게 반해서 우리 편이 된 것이죠.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예수님을 누구보다 많이 닮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는 강강술래를 참 좋아하게 되었대요.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바로 이 노랫말 때문인데요, 이건 강강술래 노랫말 중에 가장 자주 부르는 노래죠.

 

“뛰어보세 뛰어보세, 업신업신 뛰어나보세

높은마당 낮아지고, 낮은마당 높아나지게

강강술래, 강강술래∼♬”

[자진모리장단으로]

 

이 노랫말이 성경말씀 가운데,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쏙 빼닮았다나 뭐라나?

그러고 보니 이순신 장군처럼 이사야 예언자도 이씨네요?

예수라는 분도 원래 그 나라 식으로는 이름이 이에수라나 뭐라나?

무언가 통하는 게 있는 것인가?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이사야 40:3-4)

그 날은 만군의 주님께서 준비하셨다.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 모든 오만한 자들이 낮아지는 날이다. 또 그 날은, 높이 치솟은 레바논의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언덕과,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튼튼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탐스러운 모든 조각물이 다 낮아지는 날이다.(이사야 2:12-16)

 

내 교만과 욕심을 내려놓는 날, 내 고집도 미움도 다 내려놓는 날,

그렇게 나를 낮출 때 불통이 소통이 되고,

나를 낮출 때 싸움이 그치고 평화의 임금님 예수님이 드높아지신다고 무라야마 아저씨는 말했어요.

예수님이라는 분은 마치 저 휘영청 밝은 달,

깜깜한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한가위 보름달 같은 분이시래요.

 

무라야마 아저씨가 들려준 예수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어렵고도 오묘한 이야기는 이거죠.

바로 용서에 관한 말씀이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다 용서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랑의 힘이래요.

그래서 우리도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고 하네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데요.

그런데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철저히 따져야 한데요.

자기가 지은 죄를 제대로 완전히 볼 수 있게 해줘야 한데요.

그렇게 자기 죄를 깨달아야만 제대로 회개를 할 수 있고, 벌을 달게 받고 용서받게 된다고요.

그렇게 온전한 회개는 죽을죄를 지은 사람도 용서받고 살아날 수 있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이래요.

 

진도 팽목항에는 지금도 핏빛 파도가 밀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군사들과 왜군들의 피가 섞인 파도입니다.

남의 땅을 탐하는 땅 욕심, 황금과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못된 일본 정치인들 때문에 벌어진 억울한 병사들의 죽음입니다.

고집불통 왕,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왕

의심 많은 조선의 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흘린 피눈물입니다.

 

이젠 그 핏물과 눈물들을 다 씻어 없애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고집을 내려놓고, 욕심을 내려놓고, 소통하기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도 떡을 해먹을 수 있는 나눔과 소통의 날 한가위,

휘영청 예수님을 닮은 한가위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습니다.

 

진도 팽목항에는 올해도 한가위 보름달이 떠오릅니다.

한가위에는 역시 강강술래가 제격입니다.

매고 푸는 덕석말이, 잔뜩 조였다가 활짝 풀어내는 강강술래 덕석말이가 제격입니다.

꽁꽁 틀어 조인 숨 막힌 덕석을 이제 활짝 풀어헤칠 일만 남았습니다.

 

[이정훈 지음. 2014년 9월 7일 주일 아침]

(* 강강술래와 이순신장군 역사를 바탕으로 상상을 더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