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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4년 6월 29일(성령강림 후 3주) 예배준비 노트

“하나님의 선물”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22:1-14)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5.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6.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9.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14.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시편 13)

1.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3.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4.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5.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6.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12-23)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마태복음 10:40-42)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을 징검다리처럼 이어주는 구절들은 이것입니다.

“여호와이레”(창세 22:14), “하나님의 선물”(로마 6:23), “받을 상”(마태 10:41, 42)

오늘 제목은, “하나님의 선물”로 정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생명을 비롯해서, 내 가족, 내가 맡은 일들, 세상만물 어느 하나 주님의 선물 아닌 것 없습니다.

 

 

[구약본문 (창세기 22:1-14)]

지난 주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이삭 출생 전까지 14년 동안) 외아들이었던 이스마엘을 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마저 버리게 되었습니다.

둘 다 한창 잘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생명력 넘치는 청소년 나이입니다.

 

더구나 이삭은 제 손으로 죽여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늙을수록 아브라함은 점점 더 힘이 듭니다.

세상에 이런 고통이 어디 또 있을까요?

아브라함의 속은, 그야말로 창자란 창자는 마디마디 다 끊어져 처참하게 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대사들 속에는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 엿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의 이 대사들은 얼마만큼 진실한가? 과연 100% 진실한가? 아니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일까?’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5절)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8절)

 

히브리서 11:19절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히브 11:19)

 

본문 중간중간에 중요한 부분이 생략된 것만 같은 빈 공간들이 곳곳에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100%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命)에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마음속에서 아무리 큰 번민과 의심, 그리고 고통이 소용돌이쳐도, 그럼에도 그는 행동으로 100%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생강과 계피처럼 늙을수록 매워지는 강계지성(薑桂之性)!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은 갈수록 혹독해지고, 이에 질세라 아브라함의 순종은 더 독해집니다.

 

그런데 창세기 22:1절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의 그 시험은 무슨 시험일까요?

문득 지난 주 복음서본문 마태 10:37이 떠오릅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창세기 22:2절에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이라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너무 잔인하시다는 생각이 들다가, 계속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는 동안 문득 거기서 주님의 마음이 강하게 느껴져 뭉클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본문의 원 뜻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바치는지 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만 의지하는지, 그 믿음을 보시려는, 달리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단련시키시는 것인데...

그런데 저는 여기서 좀 다른 것까지 마치 연속극처럼 느껴졌다는 말입니다.

 

너무 외람되고 순정만화 같은 상상이지만, 저는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훗날 당신의 외아들을 바치시게 될 하나님의 마음!

그래서 하나님 스스로 당신을 단련하시고 다짐하시는 듯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외아들 이삭을 죽음 가운데서 구하지만, 하나님은 끝내 외아들을 십자가에 바치십니다.

 

“주님의 산”, “그 곳”, “거기”... 8회 반복하는 그 곳은 “모리아 땅”입니다.(2절)

전설에 의하면 이삭을 바치려던 모리아는 예수께서 바쳐지신 골고다와 같은 장소라고도 합니다.

꼭 같은 장소는 아니어도, 적어도 주님의 몸 성전이 세워지고 무너졌던 곳입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주님의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역대하 3:1)

 

이사야 41:8절에 “나의 벗(나의 친구(親舊)-새번역) 아브라함...”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하나님과 아브라함!

우리도 말씀과 더불어 오래 가까이 지내다보면 이런 믿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조차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사랑이 생길까요?

 

 

[시편본문 (시편 13)]

오늘 시편본문의 알맹이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5)이라 보았습니다.

표제에는 다윗의 노래라고 되어 있지만, 오늘 구약본문의 응답찬송으로 보아, 아브라함의 노래로 볼 때,

세 차례 반복되는 “원수”, “대적”(2, 4절)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의심과 불안, 아까움, 안타까움 등일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어느 날 문득,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을 다시 바치라고 하실 때 받게 될 혼란들,

한없이 내가 흔들릴 때(4), 아브라함처럼 이를 금세 정돈할 열쇠는, 바로 이 노래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시 13:5)

 

 

[서신서본문 (로마서 6:12-23)]

오늘 서신서본문의 주제어들인 “순종의 종”(로마 6:16), “의의 종”(18절, 19절)의 모범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아브라함입니다.

“교훈의 본” 즉 말씀 앞에 “순종”(17)함으로 순종의 종, 의의 종, 하나님의 종(22)이 되어가는 법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선물”을 받습니다.

영원한 생명,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생,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누려야 할 그 선물 말입니다.(23)

 

 

[복음서본문 (마태복음 10:40-42)]

오늘 복음말씀을 읽을 때, 처음에는 마태복음 10:40절의 “너희”와 42절의 “너희”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40절의 “너희”는 제자들이고, 42절의 “너희”는 제자들을 맞이할 유대 백성들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10장은 계속해서 12제자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므로, 결국 40절과 42절의 “너희”는 모두 12제자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결론은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알맹이는 41, 42절에 세 차례 반복되는 “받을 상”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내내 예수님께서 이르시는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미션을 수행할 때,

수많은 박해와 고통을 감수해야 할 그 제자도(弟子道)를 갈 때,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라!

 

“받을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받을 상”이란 제자들이 받을 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제자들을 영접하는 이들이 받게 될 상을 가리킵니다.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먹일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을 갈 때 우리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뜻밖의 천사와 같은,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리]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외아들을 더 의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 인간본능을 넘어선 노인 아브라함!

오늘 아브라함은 인간의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큰 선물을 받습니다.

그의 인생을 마무리하며, 한평생 그러했던 체험을 집대성한 그 이름, ‘여호와이레’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늘 모리아의 시험 과정에서 그 뒤를 이을 후손 이삭도 단련되어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점점 더 확고해져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연스런 인간본능 대신 주님의 명(命)에 목숨 맡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종, 예수님 제자의 길은 힘들지만 불가능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 중간 중간 주님께서 숨겨놓으신 여호와이레!

제자의 길은 보물찾기처럼 신바람나는 길입니다.

 

 

[나머지]

*하나님(천사)과 나누는 아브라함의 대사는 왜 이리 짧고 간단할까요?

“예, 여기 있습니다.”(1절, 11절)

 

** 저희 교회 매일 밤 기도회 때 아이들의 질문이 특히 창세기 본문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소현이 질문(수요일) 12절, 왜 하나님을 두려워서 그랬다는 걸까?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서라고는 안했을까?

선구 질문(목요일) 이삭은 왜 반항하고 도망하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하나님과 관계하시는 순종의 모습을 평생 보며 자랐기 때문일까?

 

*** 매일성서일과 6월 26일(목)에 갈라디아 5:6절 말씀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개역개정)

믿음은 무감각한 로봇(기계적) 같은 맹종이 아닙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 안에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있었습니다!

 

**** 인신공양

심청이 인당수, 왕지네와 두꺼비 이야기, 에밀레종 이야기 등 옛날이야기는 눈물겨우면서도 몸서리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이것은 이미 익숙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거룩한 산제물”이 된다는 것(롬 12:1)은, 주님의 말씀으로 변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정 “거룩한 산제물”이 되는 길은, 나(자아)를 죽여 하나님 빼닮은 자녀로 거듭나 천국 삶, 에덴의 삶 사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진정 “거룩한 산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천국에 합당한 삶으로, 우리 몸이 온전하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니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8)

 

그렇습니다. 이건 결국,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말씀동시] 베푸는 사람 (김현서 지음. 명암교회 중등부 3. 『성실문화』 79호)

좋은 사람을

정성으로 맞이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그런 사람..

 

예수님이

기억하시리

 

 

[말씀시조] 마태복음 10:40-42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9호)

예언자 영접하면 보상이 따르듯이

내제자 영접하면 큰상을 받으리라

꼭나를 영접하듯이 내제자를 대하길

 

 

[말씀서예] 시편 13:5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 79호)

 

 

 

 

 

[말씀노래]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주원남 지음. 『성실문화』 79호)

[본문] (마태복음 10:40-42)

[노랫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영접하는 자마다 상을 받을 것이요 / 영접하는 자마다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해설]

삶의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맞아들임, 즉 영접하는 것이다. 보냄 받은 이를 영접하는 것은 보내신 이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상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본문의 내용을 곡으로 엮었다.

[악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높은소리 주원남 지음, 2014년 4월 12일)

 

 

 

 

[시편송서]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79호)

(* 전래자장가, 천자문독송 풍으로 읊조리기)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함께]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말씀동화] 에밀레종과 동자삼(童子蔘) 이야기

 

앞산 뒷산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꾀꼬리 가족이 한바탕 노래 배틀을 벌이더니 잠시 숨을 고르나봅니다.

우리 교실도 지금 선생님 옛날이야기에 군침 넘기는 소리만 꼴깍꼴깍 들립니다.

 

“이리하야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 하는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성덕대왕신종은 에밀레종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 잠시 조용하던 교실이 다시 들썩이기 시작하네요.

아이들 표정도 가지각색입니다.

눈빛이 반짝반짝 무언가 되게 궁금한 표정부터, 허탈한 표정, 분노한 표정에 무표정까지...

 

“에이 암만 그래도 그렇지, 종이 잘 안 만들어진다고 어떻게 사람을 넣어요? 그것도 어린 아기를!”

 

“만약에 그 전설이 참말이라면, 부처님이 자비로운 분이라는 거, 그거 순 뻥이다!”

 

아이들이 제각각 떠오르는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십니다.

그 때 우리 반 척척박사 영구가 젊잖게 한마디 거듭니다.

 

“일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들 집집마다 살림살이들을 거두어가는 공출을 하려고 만들어낸 이야기란 말도 있어요.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제 아기까지 바칠 정도로 공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전통이 있었다나 뭐라나? 아우∼ 웃기고자빠지셨어 증말!”

 

영구의 재미있는 마무리에 아이들이 까르르 한바탕 웃습니다.

영구는 아는 것도 많지만 재주도 많습니다.

연예인 성대모사도 일품입니다.

 

“일제의 강제공출은 에밀레종 설화보다 훨씬 더 엽기적이고 무자비했단다. 언제 기회 있을 때 강제공출의 역사를 자세히 찾아보도록 하자꾸나. 자,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

 

선생님 말씀과 함께 학교종이 울렸어요.

종알종알 종달새처럼 떠들면서 하나 둘 교실을 나섭니다.

졸졸졸 시냇물처럼 교문을 빠져나가 집으로 향합니다.

 

 

영구와 영희, 그리고 철수는 늘 함께 다니는 삼총사예요.

학교도 교회도 함께 다니는 동네 친구들이죠.

오늘도 삼총사는 함께 걸어갑니다.

 

“야, 암만 생각해도 에밀레종 이야기는 순 뻥이야. 어떻게 살아있는 아기를 끓는 쇳물에 넣어?”

 

“맞아, 내 생각도 그래!”

 

철수의 이야기에 영희가 맞장구를 칩니다.

 

“그래 그건 그저 옛날이야기일 뿐이야. 언젠가 에밀레종 성분 분석을 했는데,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인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서, 그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라고 결론 내렸데.”

 

영구는 아는 것도 참 많네요.

거의 선생님 수준이죠?

영구의 말에 아이들은 은근히 위로가 되고 또 안심이 되나 봅니다.

 

“우리 지난주일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말씀 들었잖아? 아휴, 아브라함이 칼을 번쩍 드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 가슴이 조마조마한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오늘 에밀레종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되게 안 좋다, 그치?”

 

철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실 난 어젯밤 악몽을 꾸었거든.”

 

“무슨 꿈인데?”

 

영구와 영희는 눈을 반짝이며 철수를 바라봅니다.

 

“내가 우리 아빠한테 벌을 받는 꿈인데, 아빠가 회초리를 번쩍 치켜드시는데 순간 회초리가 아브라함의 칼로 바뀌는 거야!”

 

“우와 대박! 대박 놀랐겠다!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되었어?”

 

“어떻게 되긴 그냥 ‘으악’ 소리 지르며 깼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던 모리아산 이야기는, 내겐 완전 트라우마야! 그렇잖아도 우리 집에서 내가 회초리 제일 많이 맞는데, 어제 그런 꿈까지 꾸고, 게다가 오늘 에밀레종 이야기까지!”

 

척척박사 영구가 말을 잇습니다.

 

“그걸 인신공양(人身供養)이라고 하는데, 인신공양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나 흔한 이야기야.”

 

“인신공양? 그게 무슨 말인데?”

 

“인신(人身)은 사람 몸이라는 뜻이고, 공양(供養)은 어른께 음식 대접해 드리는 걸 가리키는 말이야. 보통 신께 사람을 바치는 걸 인신공양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도 그 비슷한 거고, 괴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이 동네 처녀를 해마다 왕지네에게 바치는 옛날이야기도 그런 거지.”

 

“맞아, 그 때 처녀가 돌보던 두꺼비가 나타나서 두꺼비 독을 뿜으며 왕지네랑 사투를 벌이는 그 이야기 나도 기억나!”

 

철수가 영구의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야, 암만 그래도 난 싫어, 인신공양, 그게 말이 돼? 미개한 원시인들이나 쓰는 말, 우린 그런 엽기적인 말 쓰지 말자.”

 

철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철수 왔니? 오늘 학교에서 별 일 없었고?”

 

“예 엄마. 근데 엄마, 혹시 엄마도 에밀레종 이야기 아세요?”

 

“그럼 그 얘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늘 에밀레종 이야기 들었구나?”

 

“예, 그런데 그거 옛날이야기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자기 자식을...”

 

“호호, 우리 철수 많이 놀랐구나? 그런데 옛날이야기 중에는 그보다 더 심한 것도 많단다. 한번 들어볼래?”

 

철수는 엄마가 들려주시는 동자삼 이야기에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함께 듣던 형이랑 누나는 무덤덤한데 유독 철수만 으스스합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엄마의 이야기도 깊어만 가고, 바깥에서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장단을 맞춥니다.

 

“소쩍, 소쩍, 소쩍다∼”

 

“철수야, 소쩍새가 솥이 작다는데? 우리 철수 집어넣기에는 솥이 너무 작다는데?”

 

“아니거든, 내가 아니라 형이거든!”

 

철수는 침을 튀기며 짓궂은 형을 째려봅니다.

 

 

그날 밤 철수는 또 꿈을 꿉니다.

꿈에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자 엄마아빠가 걱정이 태산이십니다.

백약이 무효라는 말을 하십니다.

아무리 약을 써도 병이 낫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일예배 때 목사님 설교가 좀 이상합니다.

목사님은 지난주일 모리아산 이야기를 또 반복하십니다.

그거 지난주에 하신 말씀인데요.. 하고 말씀드리려고 애쓰는데 입이 열리지 않습니다.

다른 교우들은 모두 새로운 말씀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경청합니다.

철수 하나만 빼고 교회가 온통 이상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칼을 번쩍 치켜드는 모습을 볼펜을 들고 아주 리얼하게 흉내 내십니다.

볼펜을 번쩍 치켜든 채 목사님이 영구 엄마아빠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아버님 병이 나으시려면 집에서 가장 예쁜 아이를 솥에 넣어야 해요.”

 

아니 무슨 이런 설교가 다 있지?

무슨 이런 목사님이 다 있어?

목사님 눈빛이 거의 피에 굶주린 드라큘라 수준입니다.

 

순간 영구는 등골이 서늘합니다.

평소에 엄마아빠가 자기를 가장 예뻐하시는 것만 같아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아빠가 황토방 가마솥에 물을 잔뜩 넣고 불을 지핍니다.

 

‘괜찮아, 저 솥은 내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으니까!’

 

철수가 스스로 위로를 하고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에서는 소쩍새가 웁니다.

 

“소쩍, 소쩍, 소쩍다.”

 

“훠이, 훠어이, 저런 미친 새가 다 있나. 솥이 작긴 뭐가 작아, 딱 적당하구만. 가, 가, 저리가, 가버려!”

 

가마솥 물이 끓기 시작하자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철수를 바라보십니다.

 

“사랑하는 철수야 미안하다. 엄마 아빠를 용서해다오.”

 

“사람 살려, 으악∼!”

 

 

벌떡 일어나니 꿈입니다.

철수는 온몸에 땀이 흥건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철수 할아버지는 진짜 편찮으셔서 앓고 계신 중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바깥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립니다.

 

“세상에! 여보 이게 뭐예요? 산삼이잖아요?”

 

엄마의 목소리에 철수는 얼른 뛰어나갑니다.

아빠는 연신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리셨습니다.

 

“백년은 족히 묵은 것 같아. 게다가 동자삼이잖아! 어서 아버님께 드립시다.”

 

순간 철수가 외칩니다.

 

“아빠, 그게 바로 나예요. 알고 보니 내가 동자삼이었다고요.”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린가 하며 엄마아빠는 어리둥절해 하십니다.

철수가 간밤 꿈을 순식간에 늘어놓습니다.

엄마랑 아빠 입이 해물탕 큰 조개처럼 딱 벌어집니다.

그리고 언제 나왔는지 눈 부비며 나온 형과 누나의 눈도 쟁반같이 번쩍 커집니다.

 

“그러네, 그러고 보니 우리 철수 꿈 덕분에 내가 이 귀한 동자삼을 캔 것이네! 맞네!”

 

아빠께서 연신 감탄하며 철수의 머리를 쓰다듬으십니다.

엄마는 철수를 꼭 껴안으며 볼에 뽀뽀를 해주십니다.

누나도 철수의 꿈이 대견하다고 거듭니다.

장난꾸러기 형은 짓궂은 표정으로, 철수는 변변치 않아도 꿈 하나는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주일이 되었습니다.

아빠의 동자삼을 드시고 힘을 되찾으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예배당에 갑니다.

설교말씀하시는 목사님을 철수는 진지하게 바라봅니다.

그중에서도 온몸으로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제스쳐를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지난주일 모리아산의 아브라함으로부터 참 순종의 길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살리신 하나님께서, 2천 년 뒤에 마침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바치셨던, 우리 하늘아버지의 큰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2천 년이 흘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바치고 있습니까? 꼬깃꼬깃 몇 푼 호주머니 돈을 바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병들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려고 외아들을 가마솥에 넣는 심정으로, 죄로 죽어가는 우리를 살리시려 외아들을 십자가에 바치신 그분께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바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새벽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너다. 너는 나에게 거룩한 산제물이 되거라!

성도들이여! 거룩한 산제물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대언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산제물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 변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정 “거룩한 산제물”이 되는 길은, 나, 내 자아를 죽여 하나님 빼닮은 자녀로 거듭나 천국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거룩한 산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천국에 합당한 삶으로, 우리 몸조차 온전하게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장 7절로 8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바로 이겁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하나님아버지는 여러분으로부터 무엇을 받으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베푸시려는 분입니다. 끊임없이 좋은 선물을 주시려 애쓰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그분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어, 언제 어디에서나 기쁘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천국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거룩한 산제물로 바쳐진 삶,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부터 받기를 원하시는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인 것입니다.”

 

오늘따라 목사님 설교말씀이 철수의 귀에 쟁쟁하게 울리네요?

마치 에밀레종소리처럼 긴 여운으로 마음에 남습니다.

철수는 산삼보다 귀한 하나님 말씀을 매일매일 먹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진짜 동자삼처럼 귀한 사람이 되면, 병들고 약한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의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따라 꾀꼬리 노래 소리가 더 맑고 밝게 들립니다.

 

[이정훈 지음. 2014년 6월 29일 주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