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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4년 6월 22일(성령강림 후 2주) 예배준비 노트

“두려워하지 말아라”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21:8-21)

8.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벌였다.

9.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10.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11.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12.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13.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14. 다음날 아침에 일찍, 아브라함은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었다. 그는 먹거리와 마실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서, 그를 아이와 함께 내보냈다. 하갈은 길을 나서서, 브엘세바 빈들에서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15. 가죽부대에 담아 온 물이 다 떨어지니,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16.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17.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18.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20.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21. 그가 바란 광야에서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이집트 땅에 사는 여인을 데려가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

 

(시편 86:1-10, 16-17)

1. 주님,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입니다.

2. 그러나 나는 신실하오니, 나의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을 신뢰하는 주님의 종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3. 내가 온종일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4. 주님, 내가 진심으로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주님의 종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십시오.

5. 주님, 주님은 선하시며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누구든지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한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6. 주님,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7. 주님은 나에게 응답해 주실 분이시기에, 제가 고난을 당할 때마다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8.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9. 주님께서 지으신 뭇 나라가 모두 와서,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10. 주님은 위대하셔서 놀라운 일을 하시니, 주님만이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16. 내게로 얼굴을 돌려주시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17. 은총을 베풀어 주실 징표를 보여 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나를 돕고 위로하셨습니다.

 

(로마서 6:1b-11)

1...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3.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4.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9.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24-39)

24.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제 주인만큼 되면, 충분하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

26.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28. 그리고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30.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

3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35.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을 묵상하면서 얻은 요절은, “두려워하지 말아라”입니다.

참고로, 이 구절은 창세기 21:17절과, 마태복음 10:26,28,31절 등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쫄지마!”입니다.

 

무엇에 쫄지 말라는,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이런저런 박해와 죽음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만 사랑하여, 내 모든 우선순위를 그분께 둘 때, 즉 그분만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내 속의 온갖 정체불명의 두려움이라는 허깨비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생명의 빛이 가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본문]

<구약본문에서> 하갈은 아들과 함께 쫓겨납니다.

저는 오늘 구약본문의 주인공을 아브라함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스마엘이라는 이름도 안 나오고 대사도 한마디 없습니다.

그래도 그를 주인공으로 보았습니다.

(이름은 안 나와도, “(그)아들”(8회), “(그)아이”(10회), “그”(4회)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많이 나오네요?)

 

이스마엘은 젖 뗀 이복동생 이삭을 놀리는 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삭의 어머니 사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아마도 유산상속 문제로 사라가 잔뜩 예민해져 있었겠죠?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창세기 21:10)

 

그리고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그것도 매우 비정하게 쫓아냅니다.

어깨에 메워준 먹을거리 배낭과 물 한 가죽부대가 전부였습니다.

광야에서 헤매다가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살아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삭을 바치는 심정과 비슷하리라고 보는 것은 지나칠까요?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어도, 생이별하는 아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이삭이 태어나기 전, 자그마치 14년 동안이나 금지옥엽(金枝玉葉) 독자로 사랑하던 아들 아니었습니까?

본문에는 없지만, 아브라함의 오열(嗚咽)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드디어 물은 떨어지고 이스마엘이 죽어갑니다.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아들을 살릴 길 없는 하갈은 멀찍이 떨어져서 아들을 바라만보고 엉엉 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갈이 우는 소리’가 아니라 ‘이스마엘이 우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표현입니다.

본문은 이스마엘이 우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천사 역시 그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17∼18)

 

이스마엘을 향한 아비 아브라함의 오열, 특히 어미 하갈의 통곡!

이 울음에 비하면 기진해서 다 죽어가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병든 병아리 소리처럼 작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울음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14년 전 하갈의 울음소리였습니다.(창세기 16:11)

 

아무리 작은 자의 세미한 울음소리일지라도,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우는) 그 어미의 울음소리와 이어질 때,

그 소리는 하나님 귀에 마치 우레소리처럼 크게 들리나봅니다.

 

오늘 구약본문에서 가장 마음 따뜻해지고 힘이 나는 대목은 이 말씀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20)

 

이스마엘을 향한 하나님 사랑이 담뿍 담긴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을 향한 믿음 (그분만 의지하는 마음)에서 빛을 더하는 법입니다.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겠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이스마엘의 병아리만한 믿음이 그 아비 아브라함의 독수리 같은 믿음과 이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마음 흐뭇해지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12∼13)

 

이스마엘을 돌보신 하나님의 사랑, 그것은 아브라함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뢰와 사랑이었습니다.

 

<시편본문은> 오늘 구약본문에 대한 응답찬송으로 안성맞춤입니다.

[다윗의 기도]라는 표제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스마엘의 기도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부르짖고 애원한다는 표현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옵니다.(3, 5, 6, 7)

 

그리고 “사랑을 한없이 베푸시는 분”(5), “주님께서 친히 나를 돕고 위로하셨습니다.”(17)라는 구절이, 오늘 구약본문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창세 21:20)와 짝을 이룹니다.

내 부모 내 자식을 내 손발보다 먼저 가서 더 깊이 사랑하시고, 동행하시고, 돌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가슴 절절히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오열하며 자식을 버렸던 아브라함입니다.

 

특히 눈에 띄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16)

 

여기서 “여종의 아들”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바깥에서 낳아서 데리고 들어온 종이 아니라, 집안에서 주인의 종의 자식으로 태어난 경우를 가리킵니다.

즉, 영원히 주인에게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독일성서공회편 성경 해설 참고)

내 목숨까지도, 내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한다는 믿음과 순종의 표현입니다.

 

이 고백 속에서,

마치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까지 무럭무럭 자라가는 이스마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믿음은 그 어떤 두려움도 다 이깁니다.

 

 

[신약본문]

<서신서본문에는> “죄”와 “죽음”이라는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온갖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옛 사람”, “죄의 몸”, “죄의 노예”, “죄의 세력”(6∼7절)

 

그럼에도, 서신서본문의 결론 역시 아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연합하는 사람”(5)

 

세례를 통하여 십자가 예수님, 부활 예수님과 연합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권세, 그 두려움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완전히 죽은 사람은 죄의 세력, 죽음의 세력이 결코 그를 지배하지 못하는 법입니다.(2, 6, 7, 9)

 

어미의 울음, 아비의 믿음에 잇닿아 있는 이스마엘의 당당함,

그것에 견주어 결코 손색이 없어야 할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믿음이 비록 콩알만 할지라도, 예수님과 연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비유가 좀 거칩니다. 콩알이라... 겨자씨보다는 너무 크네요^^)

 

<복음서본문의> 내용도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 때문에 어마어마한 박해가 닥칠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진리를 밝히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귀하게 여기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30∼31)

 

특히 32∼33절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마태 10:33)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오열했던 베드로가, 어쩌면 이 말씀이 떠올라 그리 많이 울었던 건 아니었을까요?(마태 26:75)

 

34절 이하의 말씀은 마음을 더 무겁게 합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36)

 

은폐된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 되십니다.

부모자식 간을 갈라놓기까지 하십니다.

천하의 효자이신 예수님께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거기 참된 효의 길, 참 사랑의 길, 참 생명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병이 나면 두고두고 다스려 녹이는 방법도 있지만, 급히 칼로 째고 도려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야 병이 다스려지고 몸에 생기가, 평화가 돌아옵니다.

우리 몸의 회복을 위해서 37절 말씀은 매우 구체적인 처방입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태 10:37)

 

예수님의 이 말씀은 딱 아브라함을 모델로 삼고 선포하신 말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부모를 버리고 자식 둘을 버렸던 아브라함입니다.

최우선순위는 언제나 우리 주님이셔야 합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길이었고, 그 길이 그의 모든 가족들에게 복, 행복, 생명의 길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정리]

오늘 구약본문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사라에게 쫓겨나 브엘세바 빈들에서 헤매다가 기진해 지금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에는 제자들의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제자들은 유대 권력층이 무섭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부모자식 간에도 원수지간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멘붕!)

 

이스마엘이 어떻게 생명을 얻었습니까?

그 아이를 살린 것은 어미아비의 사랑이 아니라, 알고 보니 하나님의 사랑, 아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생명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 인생의 우선순위를 예수님께 두는 길임을, 예수님(을) 사랑이 살 길임을 선포하십니다.

내 부모자식 사랑보다 내 예수님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부모자식 사랑은 내 몫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이 사랑, 우리 주님의 사랑에 몰두할 때, 주님 사랑만 바라볼 때 내겐 이미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바알세불” 운운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저들의 그런 왕따, 그런 핍박, 그런 죽음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시선을 저들의 세력에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입니다.

 

걸음마하는 아이 앞에 엄마가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아이는 뒤뚱뒤뚱 엄마를 향해 걸어갑니다.

엄마만 바라보고 갑니다.

그러다 잠깐 다른 곳에 한눈파는 사이에 그만 기우뚱,,, 어이쿠!!

 

어느 영화에서 그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높은 곳에서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넙니다.

앞에서는 동료들이 손을 벌리고 앞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고소공포증의 주인공은 절대 아래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순간 아래를 보고 맙니다... 어쩌자고!!

 

베드로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위를 걷다가 큰 바람 풍랑을 보자마자 물에 빠져버립니다.

베드로의 시선은 오직 예수님만을 행했어야 했습니다.

지금 내 시선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님만을 향하고 있나요?

 

시선이 그분께 가 있는 사람은 압니다.

내가 아무리 효도하려 애써도, 내가 아무리 내 자식 사랑한다 호들갑 떨어도, 주님의 사랑에는 미칠 수 없음을!

주님께서 내 부모, 내 자식들을 돌보시는 그 깊고 치밀하신 사랑, 그 한결같으신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그 사랑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압니다.

세상 어떤 두려움도 그 사랑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내 부모님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자식들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그분의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사랑으로 낳은 친자식들이었습니다.

 

 

[나머지]

* 6.25 동족상잔(同族相殘)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그리고 하갈)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생이별 당하는 우리 이산가족의 느낌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6.25를 며칠 앞둔 오늘 본문말씀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6.25 때의 고통과 두려움... 6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한 가족 안에도 종북빨갱이와 꼴통보수로 나뉘어 있으니 말입니다.

서로가 밉고 서로가 두렵습니다.

내 자식이 내 부모가 바알세불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격이 다르지만,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라고 하신 오늘 예수님 말씀이 실감이 납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속히 몰아내야 합니다.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내 가족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몰아내는 길, 6.25의 상처를 낫게 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먼저 내 안의 상처를 돌아보는 길입니다.

똑바로 보고 올바로 치료하는 길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내 주님, 내 깊은 상처를 보시면서 지금 눈물 떨구고 계시는 내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나의 해맑은 사상, 나의 거대한 체험만 바라보던 눈을 돌려, 이젠 그분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래서 지금 아주아주 마음 아파하고 계시는 그분의 눈물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말씀동시] 두려워하라 (김현서 지음. 명암교회 중등부. 『성실문화』79호)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절대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말씀시조] 마태복음 10:24-39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79호)

절대 두려워마라 소중한 사람들아

너희는 애오라지 하나님만 경외하라

나위해 십자가지면 참생명을 얻으리

 

 

 

[말씀서예]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79호)

 

 

 

[말씀노래]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원남 지음. 『성실문화』79호)

[본문] (마태복음 10:24-39)

[노랫말]

1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의 제자들아 / 그들이 나를 모욕했으니 너희도 모욕할 것이라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말고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을 지붕에서 외쳐라

2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의 제자들아 /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없인 떨어지지 않아

그러니 너희는 아버지 두려워하고 /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나를 시인하여라

3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의 제자들아 / 식구끼리 원수가 되어서 서로 맞서게 될 것이라

그러니 너희는 자기를 부인하고 / 가족보다 목숨보다 나를 더욱 사랑하여라

후렴)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 아니요 / 칼을 주러 왔노라

[해설]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는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본문을 3절로 엮었다.

[악보] (높은소리 주원남 지음, 2014년 4월 9일)

 

 

 

 

[시편송서] 시편 86:1-10, 16-17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79호)

(※‘새야새야’ 가락에 맞추어, ‘쉼표’까지가 중모리 한 장단)

 

1.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2.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3.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4.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6.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 하시리-이- 다==∼

 

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9.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10.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 (하나=님==)이시니-이-다==∼

 

16.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다함께]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 가락은 ‘새야새야, 파랑새야’로, 장단은 중모리로 (또는 중중모리로) 읊는다.

※ 쉼표(‘,’)까지 한마디가 12박이다.

※ 한 박(‘=’)은 편의상 2분박(‘--’)으로 쪼개어 짚을 수도 있다. 원래는 17절 둘째 줄처럼 3분박으로 쪼갠다.

(‘-’와 ‘=’가 헛갈릴 때 그런 식으로 확인하면 좋다.)

※ 밑줄(‘ ’)친 부분은 글자 수가 4∼6개여도 3박으로 읊으면 된다.

※ 크고 굵은 글자는 찬양대가 송서(誦書, 새야새야)로 읊조리고, 나머지 작은 글자는 회중이 낭독한다. (찬양대가 읊조릴 때 회중도 콧노래처럼 작게 따라 해도 좋다.)

※ 가락이 조금 차이가 나는 것이 오히려 어우러지는 멋이 있어 좋다.

※ 마지막 절은 다함께 읊조린다.

 

 

 

 

 

[말씀동화] 은장도와 광선검

 

“자투리∼ 자투리∼

자투리 자투리 자투리 자투리 자투리 사냥을 나간다∼♬

자투리 한 마리 푸드등 하니 매방울이 떨렁,

우여 우여 어허 자투리사냥을 나간다/

경기도라 봉성중학교 국영수 사냥을 나간다,

점심밥먹고 시계를 보고 매점지나 옥상에 올라,

자투리 한 마리 푸드등 하니 영어 세 문장 떨렁∼♬

후여 후여 어허 자투리 사냥을 나간다∼” [까투리타령 개사]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우리 담임샘 자투리타령이 또 시작이네요.

우리 선생님은 전라도 민요인 까투리타령을 개사한 자투리타령을 아예 입에 달고 사신다니까요?

에너지 절약! 특히 자투리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인데, 좀 심하죠?

누구 우리 담임샘 좀 말려줄 사람 없나요?

 

그래도 우리 선생님은 자칭 ‘낭만담임’이랍니다.

늘 낙천적이고 낭만적이시죠.

잘 부르시지는 못해도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고 특히 우리가락을 아끼는 분입니다.

에너지 낭비, 시간낭비에는 눈에 불을 켜시지만, 그래도 성적 때문에 들들 볶는 그런 분은 아니세요.

그래서 봉성중학교 3학년 3반은, 우리 담임샘 덕분에 낙오자가 하나도 없다니까요?

 

쉬는 시간에 우리가 수다 떨고 있으면 어느새 나타나 자투리타령을 부르시죠.

선생님의 자투리타령이 시작되면 우리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으레 단어장이나 오답노트를 꺼냅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자투리타령이 입에 붙고 단어장이 손에 붙게 되자 너도나도 공부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너무나 익숙해진 자투리타령 가락에 아예 이런저런 암기과목을 가사로 붙여 외우기도 할 정도입니다.

 

아마 우리 반 꼴찌도 다른 반 평균정도는 하고도 남을 걸요?

그런데 우리 반 꼴찌 철수는 우리 반 짱입니다.

힘도 세고 운동도 제일 잘하고 매사에 겁도 없이 씩씩한 아입니다.

그러나 딱 하나 우리 철수가 겁내는 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공부입니다.

그런데 3학년이 되어 담임샘의 자투리타령이 귀에 철썩 붙게 되면서부터,

공부에 대한 두려움이 차차 사라지게 된 겁니다.

 

 

3학년 1학기를 한창 신나게 보내며

너도나도 자투리타령 가락이 흥얼흥얼 입에 붙기 시작할 무렵, 어느 초여름 오후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학교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나 싶더니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터졌습니다.

학교 이사회에서 우리 철수를 퇴학시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며칠 전 ‘동아리 한마당’에서 벌어졌었죠.

‘동아리 한마당’은 우리학교 여러 동아리들이 봄철과 가을철에 한 번씩 벌이는 신나는 베틀입니다.

개인기 경연대회 같은 건데, 문제는 늘 종교동아리들이 일등을 차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한마당 경연대회의 열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역사동아리 ‘독도’의 간판스타인 우리 철수가 다른 동아리 신입생 하나를 놀린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석 달 동안 열심히 준비한 다큐멘터리 ‘독도의 역사’ 동영상도 점검하고,

동영상 그림에 맞추어 독도의 노래 ‘홀로아리랑’ 중창연습이 한창이었는데,

옆에 있던 동아리 신입생 하나가 오더니 시끄럽다고 목소리 좀 낮추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그마한 신입생 하나가 쪼르르 와서 뭐라뭐라하니까 처음에는 귓등으로 흘려들었겠죠?

그런데 그 아이가 무시당한 것 같아 마음이 상했는지 갑자기 동영상을 꺼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당찬 신입생이 다 있었다니?

 

“독도가 우리 학교 전세 냈냐니깐요?”

 

독도 아이들은 어안이 벙벙, 어처구니없어서 얼굴만 마주봅니다.

그때 철수가 그 신입생 아이에게, 어서 가서 너 네 동아리 준비나 열심히 하라고 타이릅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전혀 신입생답지 않은 거만한 포쓰를 내뿜으며 뭐라뭐라 옹알거립니다.

그러자 철수가 다가가 동영상 화면을 다시 켜면서 신입생 아이를 놀려댄 것이었습니다.

 

“너 이 녀석, 너 도대체 무슨 동아리냐? 이 옆에서 왔으면 혹시 십알단 단원이냐? 아무리 종교동아리가 대세지만 신입생 녀석이 남의 동아리 부스에 들어와서 연습을 방해하고 그러면 쓰나! 어디서 젖비린내 나는 녀석이 와서 하룻강아지처럼 까불어, 까불긴? 어서 돌아가!”

 

철수의 기세에 눌린 신입생 아이는 급히 돌아나가다가 그만 문지방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마 무릎이 까지고 자존심이 좀 상하고 그랬나 봅니다.

그 신입생 녀석이 바로 학교 이사장님 늦둥이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작년에는 구원파 우거지들이 일등 하더니, 이번에는 십알단 시레기들이 일등이야? 도대체 십알단 작품이 뭐 볼게 있다고 일등을 준거야? 이거 원, 우리도 동아리 이름을 좀 바꿔야 하는 거 아니야? 독도 앞에 모세나 요나 같은 이름을 붙이는 건 어떨까? 누가 봐도 우리가 훨씬 알차게 준비하고 멋졌잖아? 박수도 우리가 가장 많이 받았지? 그런데 3등 안에도 못 들다니, 이게 말이 돼?”

 

한창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일등 먹은 십알단 단장 아이가 다가옵니다.

 

“어이 철수, 너 어서 교장실로 가봐라. 다 큰 녀석이 왜 어린 신입생을 구타하고 그러냐?”

 

구타?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추에이션은 뭐지?

독도 아이들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미 우리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과 아이들 카톡방 마다 이런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극우 교과서만큼이나,

우리들 이야기를 왜곡편향편파 보도하는데 능수능란한 (종교)방송동아리가 바로 십알단이었던 것입니다.

 

“건드리려면 잘 골라서 건드려야지, 하필이면 이사장님 애지중지 독자를 건드리고 그러냐.”

 

 

교장실을 나오는 우리 철수의 어깨가 축 늘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다가가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천하의 철수가 뭐 이까짓 일로 풀이 죽냐? 힘내라 철수야.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해 버려.”

 

“스스로 자퇴하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데...”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아닌 밤중에 뚱딴지, 홍두깨, 날벼락 같은 소리야? 좀 자세히 말해봐.”

 

“나 하나면 몰라도... 우리 담임샘까지 자르려나봐...”

 

십알단의 방송이 어느 정도 왜곡·과장되었는지는 몰라도, 이사장실의 풍경은 대략 이러했다고 전합니다.

그 날도 이사장님이 이사들과 교장선생님 앞에서 은장도를 꺼내들었다는 겁니다.

은장도는 우리 학교의 교표에까지 들어있는 학교상징입니다.

이사장님의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죠.

 

옛날 우리나라 여성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품에 간직했던 호신용 칼이 은장도입니다.

그런데 은장도는 적을 해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이사장님은 학교에서 마음에 안 드는 학생이나 선생님을 자를 때마다 은장도를 꺼냅니다.

그 날도 이사장님은 은장도를 꺼내어 칼집에서 뽑아서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죠?

 

“철수라는 아이는 우리 학교의 암 덩이 같은 존재입니다. 어떻게 이사장의 독자를 구타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철수 담임선생도 문제예요. 어떻게 학생을 그리 난폭한 아이로 가르칠 수 있습니까? 게다가 그 독도라는 동아리 담당 선생이라면서요? 첩보에 의하면 그 반 담임이 전교조 첩자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참에 철수와 담임, 그리고 독도 동아리까지 싹 다 없애버리세요. 우리 학교를 분열시키는 그런 암 덩어리 같은 존재들은 당장 도려내버려야 합니다.”

 

 

교문을 나서는 철수와 담임선생님의 뒷모습을 아이들은 끝까지 바라봅니다.

떠나는 철수와 선생님보다 남은 아이들의 표정이 더 어둡네요.

철수의 구타사건은 잘못된 헛소문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밝혀내지 못한 것이,

철수와 선생님을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너무 큰 상처로 남습니다.

 

교문을 나서면서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철수야 우리 기분도 꿀꿀한데, 오랜만에 자투리타령이나 한번 부를까?”

 

“선생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선생님까지...”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냐. 사실을 왜곡해서 퍼뜨린 녀석들이 잘못이지. 그나저나 우리학교에서 가장 알찬 동아리, 우리 ‘독도’가 해체되는 것이 걱정이구나... 그건 그렇고, 철수야 내가 작별선물 하나 주마.”

 

선생님은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철수에게 건네십니다.

 

“아니 선생님, 이건 은장도잖아요?”

선생님이 씩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래 은장도다. 그런데 이건 보통 은장도가 아니란다.”

 

철수는 칼자루를 쥐고 칼집에서 뽑아냅니다.

어라? 칼집 안에 칼날이 없네요?

선생님이 주신 선물 은장도는 칼날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 닳은 칼날이 겨우 3센티미터 정도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철수야. 이건 보통 은장도가 아니라 광선검이란다.”

 

“광선검이라면... 스타워즈에 나오는 그런 광선검 말씀이신가요?”

 

“옳지 잘 아는구나. 바로 그런 광선검이야.”

 

철수는 칼자루 끝을 이리 저리 살핍니다.

아마 다 닳은 칼날 끝에서 광선칼날을 뽑아낼 버튼을 찾나봅니다.

선생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십니다.

 

“이 은장도에서 광선이 나오게 하는 버튼은 네 마음속에 있단다. 그리고 네 마음의 버튼을 찾으려면 오랜 수련이 필요하지. 학교를 떠나서도 자투리타령 열심히 익힌 것만큼 공부를 계속하고, 이번 독도아리랑, 즉 홀로아리랑 열심히 익히며 독도 공부한 것만큼 역사공부 수련에 전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너는 이 광선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선생님께 이 은장도를 물려주신 분이 바로 정신대 할머니셨다는 사실을 들으며 철수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평소 자주 찾아뵙고 말동무 해드리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유물로 남겨주신 것입니다.

칼날이 없는 은장도였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보도를 들으며 속이 타들어갈 때마다 꺼내어 땅바닥을 긁어대다가 다 닳아버린 은장도입니다.

할머니의 핏물과 눈물, 그리고 한숨이 배인 은장도입니다.

 

“철수야. 이 칼은 지금 강제로 학교를 떠나는 너와 나의 억울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한(恨)이 서린 칼이다. 이 칼을 볼 때마다, 정신대 할머니들처럼, 저 세월호 희생자들처럼,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가진 이웃이 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기 바란다. 그리고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 선생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이 칼은 남을 해치는 칼이 아니라 나를 다스리는 칼이 되어야 한다. 매일매일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탐욕과 미움의 싹, 그리고 게으름의 싹을 싹둑 잘라내는 칼로 사용해야 함을 명심하렴. 이제 며칠 있으면 6.25로구나. 우리가 힘차게 불렀던 홀로아리랑처럼, 이 은장도는 우리네 갈라진 마음들이 어서 하나 되도록 하는 칼이 되어야 한다. 겉으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화스러운 것처럼 묻어두지 말고, 다 드러나게 해서 수술할 것은 수술하고 새살이 돋도록 상처를 싸매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는 이념갈등을 자기 이익을 위해 계속 악용하는 무리들, 그들의 더러운 욕심을 싹둑 잘라내는 칼이 되어야 한다. 철수야. 너는 부디 정직하고 진실한 역사 지킴이가 되거라.”

 

철수의 마음이 어느새 이름 모를 새 기운으로 차오르기 시작하네요.

용솟음치는 이 기운은 세상 어떤 두려움도 다 물리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철수는 해처럼 환하게 웃으며 흥얼흥얼 노래를 시작합니다.

선생님도 철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후렴)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 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후렴)∼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이해보자∼ (후렴)∼” [한돌 지음. 『홀로아리랑』]

 

 

[이정훈 지음. 2014년 6월 22일 주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