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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3년 2월 24일, 사순절 2주 예배준비 노트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15:1-12, 17-18)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7.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8.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9.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10.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12.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18.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시편 27)

1.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2.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3.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4.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5.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6.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7.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8.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9.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0.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11.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엿보고 있으니,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12. 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내 목숨을 내 원수의 뜻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13.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14.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빌립보서 3:17-4:1)

17.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19.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누가복음 13:31-35)

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35.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4본문을 관통하는 주제]

저는 이번 주일 말씀들을 미리 먹으면서, ‘언약을 지키려고 목숨 거시는 주님, 언약을 지키려고 목숨 바치시는 주님’이라고 소화했습니다.

제목이 좀 메마른 것 같아서, 같은 주제로 다른 표현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4본문 살펴보기]

 

(구약 ; 창세기 15장)

  아브람(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유일하게 목숨을 의지할 수 있었던 가족, 씨족 공동체를 떠나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인생의 상징이요 모범입니다.

  그런 아브라함도 믿음이 자라기까지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칩니다.

 

  살아남으려고 부끄러운 거짓말도 종종합니다.

  그의 믿음의 정체를, 믿음의 색깔을 의심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종의 이름을 엘리에셀이라 부르는 것까지도 께름칙합니다.

  이에 대해서 성실문화 연구위원이셨던 이성호 목사님의 해설이 재미있습니다.

  저희 ‘도서출판 성실문화’에서 지난 2000년에 펴낸 이성호 목사님의 창세기 묵상집 『새벽에 길어올린 처음 말씀』53∼54쪽을 인용합니다.

 

(상략)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엘리에셀이라고 하는 아브람의 종의 이름은 그 뜻을 번역하면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브람이 자기 종을 부를 때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즉,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부리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자기 집 강아지의 이름을 자기 상관의 이름으로 정해놓고 불러대는 것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하나님을 대한 태도는 하나님은 자기의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는 분, 자기의 말을 듣고 실현해 주는 분, 자기에게 편하게 해주는 분으로 여겼지, 자기가 섬길 분, 자기가 따라야 할 분으로 여기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불러도 왜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사업을 위해, 내 자녀를 위해, 내 소유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께 매어 달렸는데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 불만을 가진 분들은 지금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대하시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시오, 역사의 섭리자십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바로 우리를 부르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지위는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용될 수 있는 처분 가능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계속)

 

  이렇게 아브람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울퉁불퉁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저는 왠지 아브람(아브라함)의 이런 과거가 마음에 듭니다. 왠지 정답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만 그런가요? ^^

 

  * 지난 한 주간 오늘 구약 본문의 1절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처음 아브람을 부르신 뒤로 하나님은 여러 차례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드물게 환상 가운데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여기 무슨 의미가 담긴 것일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좀 더 잘 느껴보려고 기억날 때마다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 5절,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을 더해주시려고, 그 어마어마한 숫자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시려는 시청각교육 도구로 밤하늘의 별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읽어보면, 언약에 대한 믿음을 더 단단하게 해주시기 위한 주님의 또 다른 배려가 느껴집니다. ‘말씀’으로 지으신 별들입니다. 그 말씀으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어찌 그 언약의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아브람의 믿음의 빛깔이 좀 더 선명해집니다. 별빛처럼 빛납니다. 역시 이성호 목사님의 글을 이어서 인용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하늘의 별을 보여주실 때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셔서 뭇별을 보여주시며 네가 이 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지 아브람의 자녀의 숫자가 그와 같이 많으리라는 단순비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수많은 별들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우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한 하나의 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태양계는 다시 은하계에 속한 많은 비슷한 별들의 모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은하계는 소우주의 일부이며 이 소우주는 다시 대우주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러한 대우주가 수백만 개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 이상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얼마나 더 큰 세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많은 별들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면 우리는 반드시 이루어 질 줄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략)

 

*** 10절과 17절,

몸통 가운데를 쪼개고 그 사이를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지나가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많은 자녀를 주시겠다는 표로 밤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7절부터는 많은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또 한 번 증표를 원합니다.

이걸 철없다고 해야 할지, 믿음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장사 수완이 매우 좋다고 해야 할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문득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행동 때문입니다.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 성경전서 해설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화덕의 연기와 타오르는 횃불은 마치 구름기둥, 불기둥처럼,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계약의 당사자가 되어 갈라놓은 동물들의 피비린내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희생제물을 흠향하셔야 할 분이, 그 권리를 포기하시고 마치 스스로 채무자가 되어버리는 꼴입니다.

‘이건 뭐지?’, ‘도대체 이건 뭐지?’

예레미야 34;17-20절입니다.

 

17.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모두 너희의 친척, 너희의 동포에게 자유를 선언하라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18.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 내 앞에서 언약을 맺어 놓고서도, 그 언약의 조문을 지키지 않고 나의 언약을 위반한 그 사람들을, 내가 이제 그 송아지와 같이 만들어 놓겠다.

19. 유다의 지도자들이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나, 내시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이 땅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갈라진 송아지 사이로 지나간 자들은 모조리

20. 내가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겠다. 그러면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이 보는 앞에서 벌이신 기괴한 퍼포먼스, 저 특이한 예식은, 바로 목숨 걸고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표입니다.

중동지역 대상(隊商)들의 계약문화를 잘 아는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 행동을 통해 다시 한 단계 그 믿음이 선명해졌을 것입니다.

 

**** 저는 오늘 구약 본문인 창세기 15장 말씀에서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는 우리와 비슷한 아브람입니다. 믿음의 길로 접어들었으면서도 계속 헛발질하는 모습,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거듭 그의 인생을 그의 믿음을 이끌어 가시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이게 말이 되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목숨 걸고 언약을 지키시겠다고 강력하게 표현하신 장면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삼라만상을 지으신 분께서, 어찌 말씀 한마디로 인류의 죄를 사하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께서 스스로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던 것은, 피 흘림으로 속죄할 수 있다는 언약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히 9: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레 17:11) 생물의 생명이 바로 그 피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피는 너희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물로 삼아 제단에 바치라고, 너희에게 준 것이다. 피가 바로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를 속하는 것이다.

 

목숨 바쳐 그 언약 지키신 우리 주님께서, 그보다 앞서, 일찍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실 때부터 목숨을 걸고 그 언약 지키시겠다고 몸소 보여주시는 오늘 구약의 장면입니다. 한없이 든든해지면서도, 한없이 부끄럽고 송구해지는 장면입니다.

 

 

(시편 27)

구약의 주제에 비추어 오늘 시편 27편은 13, 14절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13.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14.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13절은, 마치 더욱 선명해지고 단단해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14절은 아주 늠름한 느낌을 줍니다. 주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주님의 함께 하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조마조마해 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주님은 목숨 걸고 언약을 지키시는 분, 목숨 바쳐 언약을 지키신 분이 아니십니까?

 

 

(서신서; 빌립보서 3:21-4:1)

오늘 구약과 시편의 주제에 연이어서, 오늘의 서신서 빌립보서는 다음 구절이 두드러집니다.

 

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여기서 ‘비천한 몸’이란 18절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19절의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는, ‘땅의 것만 생각’하는 인생입니다. 한 마디로 물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육체적 탐욕을 쫓아가는, 돈의 노예로 사는, 명예욕과 권력욕의 노예 인생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란 십자가의 길, 그 죽음과 부활입니다.

전자는 더럽지만 편안한 길입니다. 후자는 성결하지만 매우 불편한 길입니다.

그런데 끝 절에서 바울은 매우 힘차고 사랑스런 말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끝 절처럼, 주님의 언약을 굳게 붙잡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합니다.

그 불편한 길을, 그 가난한 길을, 굳세게 가라고 합니다.

 

 

(복음서; 누가복음 13:31-35)

오늘 본문들의 전체적인 주제에 따라, 복음 말씀의 중심은 33절로 보았습니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힘차고 늠름하고 든든한 말씀이십니까?

배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땅의 것만 생각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저 철부지 헤롯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저 당당한 길은 바로 죽음의 길입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한 언약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입니다.

 

다시 결론으로, 오늘 4본문의 주제는, ‘언약을 위해 목숨 거시는 주님’, ‘언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주님’입니다.

이렇게까지 신실하신 주님, 미쁘신 주님, 믿음직하신 주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 믿음직하지 못합니다. 정말이지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보니 보이지도 않습니다. 잠시라도 주님이 안 보이면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모릅니다. 당장 앙앙거립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보이지 않아서 주님이 빨리 오시지 않아서, 주님이 날 버린 것 같아서 앙앙거리는 구절이 자꾸자꾸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창 15:2)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시 27:9)

 

마치 지금 우리의 모습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건 주님이 응답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홍의종 목사님이 이 점을 짚어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버린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외면한 것이란 말입니다.

 

...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눅 13:34)

 

우리는 한없이 무례하지만, 주님은 한없이 신실하십니다. 무례한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 한이 없으십니다. 

이번 주일, 홍의종 목사님의 말씀노래, 영의 노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를 부를 것을 권합니다.

 

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새끼를 모으듯, 내가 너희 모으려 하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2. 주님 우리 부르실 때에 귀를 열어 듣게 하소서, 주님 우리 모으실 때에 주 품에 안기게 하소서.

 

 

[나머지]

오늘 시편과 복음서는 묘하게 교차합니다.

시편 소리꾼은, 당당함과 조마조마함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교차하는 우리 인생을 노래하는 것만 같습니다.

(9절)‘주님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에 대한 공포가 역력합니다.

(4절)그래서 그의 유일한 소원이, '주님의 집'에서 주님과 딱 붙어사는 일입니다.

(5절)‘초막’과 ‘장막’ 역시 주님의 집을 상징할 것입니다.

(11절)‘주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길이란 안전한 길, 살 길, 생명 길을 뜻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예수님은 ‘내 길’을 가신다고 합니다. 이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려는 길입니다. 사랑의 길입니다.(33절)

시편이 그토록 간절히 소원한 ‘주님의 집’이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버림을 받을 것이다.”)(35절)

주님께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그 예루살렘이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떠나버린 예루살렘성전, 평화의 왕이 떠나버린 예루살렘(‘평화의 성’)는 이미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27편은 어떻게 새겨야 할까요? 우리가락으로 시 27편 시편가를 지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덩-더쿵!)

 

 

(* 절기 이야기)

예배력으로 사순절 2째주일인 오늘은 한국 전통 달력으로는 대보름날입니다.

오래 전 목회자, 신학자들 모임 개폐회 예배 디자인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마침 대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 중간에 둥근 보름달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마치 대보름달이 둥실 떠오른 듯 순간 예배실 안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폐회예배 때, 그 커다란 둥근 달 안에 동그란 지구 모형을 붙여 넣었습니다.

지구를 품은 달입니다.

예수님을 대보름 달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대보름은 원래 풍농, 풍어를 기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재미있는 놀이와 의식, 음식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대보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여야 할지 생각해봅니다.

 

꽉 차면 기우는 것이 달입니다.

대보름달을 보면서 이제 비울 때가 되었음을 느끼는 슬기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 예쁜 둥근달이 이리 불룩 저리 불뚝, 탐욕으로 울퉁불퉁해지지 않도록

이 시대 무한증식, 무한경쟁의 꿈을 버리고

가족과 마을 공동체를 위해 내 욕심을 한 뼘이라도 비우는 대보름날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비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꽉 찬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다시 3년간 자기 비움을 죽기까지 강행하셨습니다.

자기 비움은 용감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이제 새해 첫 보름달이 둥실 떠오릅니다.

 

 

 

  [말씀동화] 은동이의 사랑가

 

  나는 은동이예요. 백은동(白恩童)! 은빛 찬란한 강아지랍니다. 그래서 성(姓)이 백(白)가예요. 나랑 함께 사는 몽이 형은, 누런색이라 황(黃)가예요. 황몽이(黃夢利)! 내가 사는 집은 자그마한 야산 중턱에 얹혀사는 수도원이예요. ‘거룩한 말씀의 수도회’죠. 저 앞에 흑천(黑川)이 흐르고, 그 뒤로 큼지막한 칠읍산이 있어요. 맑은 물 아래 물개처럼 새까만 돌들이 많아서 흑천이고요,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사방에 일곱 개 읍(邑)이 보인다고 해서 칠읍산이라고 한대요. 동네 사람들은 예전부터 저 칠읍산 모양이 마치 죽은 사람 누워있는 모습 같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딱 코끼리 모양이에요. 앞에 커다란 엄마코끼리가 가고 있고, 그 바로 뒤에 새끼코끼리가 쫄래쫄래 뒤따라가고 있는 모양이죠. 아마 이건... 엄마가 그리운 나 같은 아이에게만 보이는 것 같아요.

 

  나는 지난 해 초겨울 이 동네 길가에 버려졌답니다. 추수가 끝난 텅 빈 겨울 밭에 개 사료 포대에 담겨 버려졌죠. 내가 밥 너무 많이 먹는다고 나를 버렸어요. 사료 조금 남은 포대에 나를 집어넣고 이 낯선 동네로 차를 몰고 와서는 한밤중에 남의 밭에다 휙 던져버리고 간 거예요. 이튿날 새벽 산책 나왔던 우리 수도원 수사 아저씨가 나를 발견했고, 나 얼어 죽을까 봐 데려다 키우기 시작한 게 어느덧 석 달이 넘은 거죠. 그래서 내 이름이 은동이에요. 하나님 ‘은혜로 살아난 아이’라는 뜻이랍니다. 이젠 나를 버린 못된 주인 얼굴도 까맣게 잊었지만 엄마 얼굴은 조금조금 가물가물해요. 그래서 울 엄마가 그리울 땐 저기 칠읍산, 코끼리 산을 바라보며 ‘멍∼’ 하고 딱 한 번 울죠.

 

  수도원에서도 나는 밥대장이에요. 밥 때가 다되었는데 조금이라도 늦으면 깽깽깽 난리가 나죠. 삼채장단이랑 휘모리장단으로 울어대니까 다들 쩔쩔맨답니다. 수사님들은 내가 사료포대에 싸여 버려진 트라우마 때문이라고들 해요. 난 트라우마가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아무튼 늘 배가 고픈 건 사실이죠. 오늘도 허겁지겁 사료를 먹기 시작했어요. 밥 먹는 나를 쓰다듬어 주시며 우리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중얼거리시네요.

 

“은동아, 너무 급히 먹지 말아라. 빨리빨리 먹으면 더 많이 먹고 싶어져서 못써요. 몽이 형처럼 천천히 먹으렴. 그래도 넌 참 훌륭한 강아지야. 너는 네 몫, 일용할 양식이면 족한 줄 알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단다. 내일 먹을 것, 모레 먹을 것, 평생 먹을 것 미리 만들어 움켜쥐려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단다. 나도 말씀으로 욕심을 닦아내는 수사(修士)지만 아직도 멀었어. ‘일용할 양식’이 잘 안 돼. 그러고 보니 네가 나보다 낫구나. 네가 진짜 수사로구나. 할∼”

 

  수사님은 종종 내 가까이 와서 성경말씀을 독경하시고, 시편도 읊조리셔요. ‘우리 은동 수사도 말씀을 알아야 한다’시면서 낭랑한 음성으로 독경(讀經)하시고, 시편 송서(誦書)도 하시고 그러세요. 그래서 나는 나이는 어리지만 우리 동네 강아지들 중에서 성경을 제일 많이 안답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요? 나도 벌써 수도원 개 3개월이거든요. 특히 시편은 거의 박사 수준이죠. 그래서 저 건너편 산자락 암자에 사는 절집 강아지 순둥이보다 더 똑똑해요. 우리 순둥이는 얼굴은 잘 안보여도 자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리에 살고 있는 정다운 이웃사촌이죠. 나보다 나이는 한 살 더 먹었지만 머리는 내가 더 총명한 게 분명해요. 순둥이는 불경도 제대로 못 외우거든요. 불경은 어려워서 잘 안 외워진다나 뭐라나? 그런데 그런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편이 뭔지 아세요? 바로 84편 3절이에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워,워우∼♬)

 

  딱 내 얘기잖아요. 하나님의 집에 붙어사는 참새처럼, 제비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셈이거든요. 이번 주도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매일매일 나 들으라고 기도실 창문을 활짝 열고 성서일과를 읊조리셨어요. 그런데 이번 주 시편은 좀 가슴이 찡하네요. 가슴이 섬뜩하기도 하고, 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하고, 그런 노래예요. 2절을 한번 들어보세요.

 

(시 27:2)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나는 저 2절이 가장 무서웠어요. 세상에! 개를 잡아먹으러 다가오다니! 그런 놈들은 모두 다 비틀거리며 저렇게 넘어지는 게 마땅하죠. 시편 27편은 참 현명하고 똑똑한 시예요. 순둥이에게 이 노래를 들려줬더니, 자기는 절집 개라서 아무 걱정 없다고 자랑질이에요. 절에서는 절대 개를 잡아먹지 않는다나 뭐라나? 그리고 개는 특히 여름을 조심해야 한다고 나한테 겁을 주지 뭐예요. 그래서 저는 오들오들 떨며 몽이 형에게 물어봤어요. “형, 여름이 뭐예요? 그런데 왜 개는 여름을 조심해야 하죠?” 그랬더니 몽이형은 꾸벅꾸벅 졸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 프란치스코 수사님도 고기를 안 먹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나 뭐라나?

 

(시 27:4)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 27:10)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바로 이 구절이에요. 이 구절이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어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사료포대에 싸여 버려진 내 신세 때문인지, 이 노래는 딱 내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며칠 안됐지만 나는 벌써 시 27편을 거의 다 외웠답니다. 내 소원도 딱 하나예요. 평생 여기 살면서 우리 수사님들과 함께 말씀 읊조리면서 사는 그거!

 

  그런데 이번 주 구약말씀은 굉장히 흥미롭고 진지한 느낌이 드네요? 왜 그럴까? 저 유명한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조금씩 조금씩 믿음의 조상이 되어가는 장면이었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랑 말랑 하는 모습이 왠지 재미있었어요. 사람들은 우리 강아지들과 달리 머릿속이 좀 복잡한가 봐요. 내가 보기에는 하나도 안 어려운 건대, 그냥 쉽게 믿기가 어려운가 봐요. 참 안됐어요. 그런데,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어쩌면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 약속을 잘 못 믿는 습관 때문에 성경책이 더 재미있어 진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덕분에 아브람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겠죠? 그리고 아주 희한한 것도 보았죠. 아브람이 하나님 명으로 여러 짐승들을 잡아서 반으로 뚝 갈라놓으니까 한 밤중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덕과 불타오르는 횃불이 그 계곡처럼 갈라진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이 대목을 처음 들을 때 몽이 형이 꾸벅꾸벅 졸던 두 눈을 번쩍 뜨며 말했어요.

 

“어? 어? 이건 바로 흑천에서 봤던 그 장면? 내가 오래 전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 수사님이랑 흑천 물가에 산책 갔던 적이 있었어. 멀리서 보니까 이상한 냄새랑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거야. 가까이 가서 보니 서울서 온 사람들이 개 두 마리를 잡아서 저렇게 갈라놓고 불에 굽는 중이었지. 나는 새파랗게 질려서 거의 기절할 뻔 했다니까?”

 

  몽이 형이 저렇게 눈을 크게 뜨면서 말하는 걸 보니 저건 틀림없는 사실일거에요. 그 뒤로 나는 며칠 동안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이 대목을 반복해서 읽어주실 때마다 꼬리를 내리고 조마조마 조용조용, 쥐죽은 듯 듣기만 했었죠. 그런데 바로 오늘 수사님이 그 뜻을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뜻밖에도 이 말씀은 내 상상과는 정 반대였어요. 이건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불살라 바치는 제물을 잘 구운 스테이크로 잡수시는 게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해주신 걸 지키지 못한다면 바로 이렇게 이 짐승들처럼 죽을 수 있다는, 그렇게 목숨 걸고 약속 지키시겠다는 표시라는 거예요. 연기와 불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짐승의 몸 갈라진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서로 목숨 걸고 약속할 때 하는 행동이라는 거예요. 아! 이건 뭐지? 이건 도대체 뭐지?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 거지? 아니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지?

 

  바로 그 순간, 똑똑한 내 머릿속에 몇 개 그림이 번쩍 떠올랐어요. 그건 바로 우리 수도원 회랑에 나란히 걸려있는 그림들이었어요. 성소 휘장이 둘로 갈라지는 그림,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떡을 둘로 갈라 주시는 장면이에요. 수사님이 그 그림들을 설명해주셔서 나는 이 그림이 무슨 뜻인 줄 조금 안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이 찢기며 돌아가시는 순간 성소 휘장이 둘로 갈라졌고, 바로 그 전 날 밤 제자들에게 떡을 찢어 나누어주시면서 그 떡이 예수님 몸이라고 하신 말씀, 바로 그 그림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보여주신 이 해괴망측한 장면은 성경말씀 중에서 아주 드문 모습이지만, 어쩌면 아주 익숙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바로 예수님 십자가 약속과 아주 닮은 약속이었기 때문이죠.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그 그림을 보여주시며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은동아. 우리가 왜 이렇게 자주자주 하나님 말씀을 읊조리고 또 읊조리는 줄 아느냐? 그건 하나님 말씀에는 거룩한 기운, 어마어마한 힘이 서려 있기 때문이란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말씀으로 온 우주 삼라만상을 지으셨지. 그런 하나님이 우리 죄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 한 말씀만으로 다 용서하실 수 없었을까? 아니 분명히 다 용서하실 수 있으셨을 거야.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용서하지 않으시고 온 몸으로 용서하셨어. 웬 줄 아느냐? 그건 바로 약속, 즉 언약 때문이지. 피 흘림 없이는 용서함이 없다는 약속을 목숨 걸고 지키신 거야. 아니 목숨 바쳐 지키신 거야. 천사를 대신 보내 피 흘리게 하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몸소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 다 씻으시고 우리 모두 참 생명으로, 온생명으로 다시 살 수 있게 해주신 거란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목숨 걸고, 아니 목숨 바쳐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바로 이렇게 사랑이 듬뿍 담긴 언약, 이렇게 믿음직한 ‘목숨언약’이신 성경말씀을 우리는 그래서 매일매일 읊조리는 것이란다. 은동아 하나님 말씀 안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담겨 있어. 바로 사랑의 힘이야. 그 사랑 내 안에 스며들도록, 내 옆의 모든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 속에 속속들이 스며들도록 오늘도 우리는, 저 아씨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처럼 그 말씀 읊조리고 또 읊조리는 거란다.”

 

  아! 수사님이 또 독경하시는 소리가 들리네? 무슨 말씀이지? 이건 이번 주 복음서 말씀이네요. 누가복음 13장 말씀이에요.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제도 느꼈지만, 이 말씀은 아주 힘차면서도 아주 짠한 말씀이에요. 그런데 오늘 구약 창세기 15장 말씀의 의미를 알고 나니까,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약속 말씀, 그 목숨언약을 알고 나니까, 오늘 복음서 말씀이 아주아주 더 힘차고 더 짠해지네요. 정말이지, 우리 주님은, 우리 예수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세요. 그 사랑의 약속 지키시려고, 그 아픈 죽음의 십자가를 지시려고,,, 죽어도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거잖아요. 그리고 바로 저 말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저 말씀이 내 마음을 너무너무 아프게 해요. 엄마가 날 품어주시려고, 보호해 주시려고, 맛있는 거 먹이시려고 애타게 부르시는데 그걸 듣지도 원하지도 않다니... 아! 도대체 사람들은 왜 저러는 걸까? 나처럼 버린 강아지 머리로는, 엄마가 눈물나게 그리운 버린 강아지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납득이 안돼요, 어떡하지? 만약 지금 내 엄마가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목숨 걸고 달려갈 거예요. 죽어도 달려갈 거라고!! 나를 살려주시려고 부르시는 엄마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못들은 척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저기 흑천 건너 칠읍산, 저 코끼리 산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예요. 엄마 코끼리와 그 뒤에 쫄래쫄래 따라가는 아기 코끼리 모습이 안보일게 분명해요.

  아무튼 나는 오늘부터 매일매일 사랑가를 부르려고 결심했어요. 이 노래는 얼마 전 이웃 마을 전일교회 홍의종목사님이 우리 수도원에 놀러오셔서 가르쳐주셨죠. 아! 이 노래는 가물가물한 엄마 얼굴이 기억나게 하는 노래예요. 가물가물한 주님 마음, 주님 목소리 들리게 하는 노래예요. 가물가물한 주님 품이 그리워지게 하는 노래예요. 그래서 저는 이 노래를 사랑가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왜 사랑가인줄 아시겠죠? 자 이제 우리 함께 사랑가를 불러봐요. 그럼 여러분도 눈이 열려서 저 칠읍산 코끼리 가족이 보이기 시작할거예요.

 

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새끼를 모으듯, 내가 너희 모으려 하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2. 주님 우리 부르실 때에 귀를 열어 듣게 하소서, 주님 우리 모으실 때에 주 품에 안기게 하소서.

[이정훈 지음, 2013년 2월 23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