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에 대한 지식도 짧고, 주석도 없습니다.(원어의 뜻을 살피기 위해 독일성서공회판 성경에 달린 주석을 종종 참고합니다.) 가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막히면, 저는 원뜻을 이메일로 물어보는 벗들이 몇 분 있는데, 이번에는 그럴 여유도 없었습니다. 잘못된 것이 보이면 곧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묵상 중에 떠오른 단편들을 모아두었다가 나름대로 주제를 잡아 다음과 같이 엮어보았습니다. 먼저 성서일과 4본문을 옮깁니다.
[성서일과 4본문]
2013/2/10 주현절 마지막 주(주님의 산상변화주일)
(출 34:29-35)
29.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30.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32.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33.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34. 그러나 모세는, 주님 앞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다. 나와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35.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시 99)
1.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뭇 백성아, 떨어라. 주님께서 그룹 위에 앉으시니, 온 땅아, 흔들려라.
2. 시온에 계시는 주님은 위대하시다. 만백성 위에 우뚝 솟은 분이시다.
3. 만백성아, 그 크고 두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거룩하시다!
4.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
5. 우리의 주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발 등상 아래 엎드려 절하라. 주님은 거룩하시다!
6. 그의 제사장 가운데는 모세와 아론이 있으며,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 가운데는 사무엘이 있으니,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그분은 응답하여 주셨다.
7. 주님께서 구름기둥 속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이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과 율례를 모두 지켰다.
8. 주 우리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한 대로 갚기는 하셨지만, 주님은 또한,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9. 주 우리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을 경배하여라. 주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고후 3:12-4:2)
3장
12.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
13.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14.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15.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4장
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눅 9:28-36(37-43))
28.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29.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30.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을 보고, 또 그와 함께 서 있는 그 두 사람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에게서 막 떠나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34.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 세 사람을 휩쌌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35.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36. 그 소리가 끝났을 때에, 예수만이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그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37. 다음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니, 큰 무리가 예수를 맞이하였다.
38. 그런데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소리를 크게 내서 말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보아주십시오. 그 아이는 내 외아들입니다.
39. 귀신이 그 아이를 사로잡으면,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또 귀신은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40.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청하였으나, 그들은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42. 아이가 예수께로 오는 도중에도, 귀신이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43.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다.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서 감탄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가볍게 훑어보기]
<구약>은 모세가 두 번째 증거판을 가지고 하산할 때 일입니다.
얼굴에서 빛이 나고, 그걸 가리고 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여기서 ‘증거판’과 ‘빛’에 관심이 갔습니다.
<시편>을 구약에 대한 응답찬송으로서 볼 때, 눈에 띄는 구절은 1절의 ‘그룹’과 4절의 ‘정의’와 ‘공평’, 7절의 ‘계명’ 등입니다.
<서신서>는 구약에 대한 재해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는, ‘그리스도의 향기’ (2:15), ‘그리스도의 편지’(3:3), ‘돌비’, ‘심비’(3:3) 등 유명한 구절들이 즐비합니다.
바울이 전도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오늘 구약본문에 비추어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얼굴의) 광채’, ‘너울’, ‘(주님의) 영광’,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 등이 핵심적인 단어로 보입니다.
<복음서> 역시 구약본문의 사건이 연상되는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본문의 바로 앞과 바로 뒤에 연이어지는 1, 2차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영광∼변모’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하반부인 산 아래에서 일어난 일들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 아래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산 위에서 있었던 일이 그냥 신비한 변화산이 아니라 매우 간절한 변화산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더불어, 구약 본문의 산 위와 산 아래의 모습 역시 그런 눈으로 보게 됩니다.
[4본문을 뭉뚱그려 한 뼘 더 깊이 살피기]
“어리버리 제자들아, 마음너울 훌훌벗어, 너울너울 자유롭고, 주님처럼 거룩하라”
좀 길죠? 저는 주현절 마지막주일, 주님의 산상변화주일 4본문을 묵상하며 전체 주제를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저희는 매일 ‘밤기도회’ 때 한 주간 내내 같은 본문을 반복해서 읽습니다. 가능하면 매일 질의응답을 합니다. 같은 본문에 대한 저희 아이들의 질문이 매일 조금씩 달라지며 발전하는 것을 느끼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제는 선구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복음서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졸고, 졸다 깨어나 엉뚱한 이야기나 하고, 산 아래서도 귀신을 쫓지 못하는 등! 질문의 핵심은, 왜 예수님께서 이런 한심한 자들을 제자로 삼으셨을까?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딱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결정적인 순간, 간절해야 할 순간에 졸고, 알맹이가 빠진 신비나 좇고, 결국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고... 그래서 ‘변화산’이라는! 주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그것이 오늘 서신서와 복음서의 주제라는, 그런데 그 ‘변화’의 앞에는 ‘간절함’이 있다는...주님의 목숨을 건 간절함이!
※ 구약과 시편을 함께 보니, 시편에 세 차례 반복되는 후렴구 같은 “주님은 (하나님은)거룩하시다”(3, 5, 9)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 거룩한 빛을 띄는(하나님 영광의 빛이 반사되고 스며드는) 것이 느껴집니다.
①두 증거판을 들고 있는 모세의 빛나는 얼굴(←출 34:29,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②‘구름기둥 속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시 99:7 → 출 33:9 이하 회막에서 대화),
③‘주님께서 그룹 위에 앉으시니’(시 99:1→말씀, 즉 언약궤(시은좌)를 연상시킵니다.),
④언약궤의 알맹이는 정의, 즉 공평입니다.(시 99:4→이를 지키는 백성들[7절])
결론으로, 구약과 시편의 핵심은, ‘말씀 앞에서 변화되다’(하나님 거룩하신 영광의 빛을 받아)
※ 시편에서 또 하나 특기할 구절은 바로 6절 입니다.
모세에 대한 언급,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그분은 응답하여 주셨다’
(출 14:15 홍해 앞에서, 출 15:25 마라에서, 출 17:4 므리바 앞에서 등)
이 느낌이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 우선 먼저 서신서를 봅니다.
서신서의 바울은 모세가 썼던 너울(수건)을 인용하여 복음 전도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밝힙니다.
이 때 고후 3:13에서 자신의 당당함과 모세의 당당하지 못함을 비교한 대목은, 추측컨대, 출 34:33에 착안한 것 같습니다.
33.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즉 그 뒤에 모세가 계속 주님과 말씀을 나누고 백성에게 가서 말씀 전하는 일을 반복할 때는 이미 말씀에 익숙해지고 성숙해져서 백성 앞에서 빛을 가릴 줄 알 만큼 성숙해졌지만, 그러기 전인 처음 빛나는 얼굴일 때에는 오히려 그 빛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 때문에 백성들의 신비감, 존경심, 기대심 등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백성에게 말을 다 마친 뒤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틈새와 같은 짧은 찰라를 바울이 붙잡아서 인용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 ‘너울’이라는 번역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너울’은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만 나옵니다. 그리고 구약(출 34장)에서는 개역, 새번역, 공동번역 모두 ‘수건’이라 번역했습니다.(영어 성경들은 출애굽기와 고린도후서 전부 veil이라 번역했습니다. (KJV, RSV, NIV, TEB 등) 가리는 용도로서 ‘veil’은 적절한 번역입니다만, 수건이나 너울은 모두 부족한 번역 같습니다.(너울에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도 수건보다는 너울이 더 낫습니다.
※※※ 아무튼 서신서의 핵심은, 마음너울은 주님(말씀)과 대면할 때 벗겨져야 하는 것, 벗겨지게 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세의 수건 사건을 매우 적절하게 인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나아가 진리(복음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주님처럼 ‘변화’하게 된다는, 완전하게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 18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대담함(12)’, ‘자유로움(17)’, ‘떳떳함(4:2)’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게 오늘 서신서의 전반적인 분위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주님)을 닮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너울입니다. 지금 내게 너울은 무엇입니까?
끝으로 복음서를 살펴봅니다.
※ 먼저 복음서 본문 전반부의 느낌은 꿈꾸는 것 같은, 정말 꿈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꿈꾸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꿈이었으면 좋겠네’ 오늘 본문 앞 뒤에서 두 차례 이어지는 수난과 부활 고지... 무슨 말씀인지도 잘 모르겠고, 무서워서 여쭤보기도 그렇고... 그냥 꿈이었으면 좋겠네. 제자들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본문 기록자(누가 공동체)가 증언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면, 산 위에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사람의 증언이었을텐데, 그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 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보았더라도 비몽사몽간이었을 것입니다. 깨어나서도 얼떨떨한 상황에서 주님의 얼굴이 변하고 옷이 빛나고 있습니다. (주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변하신 것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게다가 구름까지 뒤덮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인지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얼굴 본 적도 없고, 이름표를 달고 있지도 않았고, 예수께서 모세, 엘리야의 이름을 언급하신 장면도 없습니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꿈같은 분위기입니다. 꿈이라는 말이 아니라 꿈같은 분위기라는 것이며, 이는 신비롭다는 뜻과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뜻, 그리고 묘한 기대감(꿈)을 품게 한다는 여러 의미를 갖습니다.
※※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가시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이런 모습이 몇 군데 나옵니다.
①야이로의 딸 살리실 때(눅 8:51),
②변화산에 오르실 때(눅 9:28),
③감람산에서 성전 바라보시며 재난징조 말씀하실 때(막 13:3, 이때는 안드레도 함께 했다.)
④겟세마네 기도하실 때(막 14:33)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어부였으며 첫 제자그룹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간절한 상황에서 주님 가까이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복음서 본문 분위기의 핵심을, 신비로움 보다는 ‘간절함’으로 보았습니다.
※※※ 상기(上記)했듯이, 오늘 복음서 본문의 자리는 딱 1, 2차 수난예고 사이에 있습니다.
28. 이 말씀을 하신 뒤에,...
43. ... 놀라서 감탄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인자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 뜻이 숨겨져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그에게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더 간절한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모세와 엘리야는 무슨 상징일까요? 생각해보니,
①‘말씀’의 상징입니다.(율법과 예언자!)
②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이들입니다.
(신 34:6-7, 6. 모압 땅 벳브올 맞은쪽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7.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31)
③ (시 99:6절) 간절히 기도하고 응답받는 이들의 상징입니다. (엘리야도, 왕상 18:36-37의 갈멜산에서의 간구와, 왕상 19:4의 로뎀나무 아래서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 37절 이하, 산 아래 상황은 더욱 간절한 느낌입니다.
외아들이 악귀에게 고초를 겪는 모습은, 좀 과장하자면, 딱 골고다에서 겪을 하나님의 외아들, 당신의 고난을 미리 보는 것 같습니다. 악귀 같은 인간들에게 희롱당하시고 매맞으시며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
그런데 아무도 악귀 들린 불쌍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주님은 매우 속상하십니다.(41)
그리고 아이를 낫게 하시고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십니다.(42)
그리고, 사람들이 감탄하는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고초를 당하실 것을 두 번째로 예고하기 시작하십니다.(43)
지금까지 살펴본 4본문들의 느낌은, ‘간절함’, ‘말씀’, ‘변화’ 등으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이 안에 예수님의 죽음 준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일부터 본격적으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죽음 준비 중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아직 멀었습니다. 어리버리한 제자들...!
앞에 소개한 저희 아이 선구의 질문, 왜 주님은 이렇게 어리버리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이들이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리버리한 제자들을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제자 산석(山石) 황상입니다. 아래 예화로 소개합니다.
지난 민들레음악회 때, 아리랑 이야기를 하면서, 열수(洌水) 선생이 산석(山石)에게 보내는 글을 공부했습니다. 열수는 한강의 옛 이름인데, 다산 선생님의 또 다른 호입니다. 옛 사람들은 호를 지을 때, 자기가 나고 자란 곳 이름을 호로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산 선생님도 한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자라나셔서 한강(열수)이라는 호를 붙인 것입니다. 산석은 황상의 호입니다. 황상은 다산 선생님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귀향살이 하실 때, '사의재'라는 자그마한 서당을 열고 가르치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호가 산석인 것을 보면, 산에 있는 돌처럼 앞뒤가 꽉 막힌 답답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동네 아이들로부터 동네 바보 소리, 돌대가리 소리 많이 들었었나 봅니다.(이건 그냥 갖다붙인 제 추측입니다)
어느날 다산이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며칠 동안 한 아이가 밖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답답하게 여기던 다산 선생이, 그만 머뭇거리고 어서 들어와 공부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스스로가 꽉 막히고 아둔하고 어리버리해서 공부할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다산은 빙그레 웃으며 그 아이를 거두어 제자로 삼았고, 낮은 신분 때문에 아무리 공부해도 과거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황상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선비가 되었습니다. 다산 선생이 황상을 거두던 그 때를 회상하며 지은 글을 아래 소개합니다.
내가 산석에게 문사(文史)를 익힐 것을 권했다, 산석이 머뭇거리며 부끄러운 낯으로 사양하며 말하기를, 선생님, 제게는 세 가지 병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디고, 둘째는 꽉 막혔고, 셋째는 어리버리한 것입니다.(그래서 공부할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학자들에게는 큰 병 3개가 있는데 네게는 오히려 그게 없어서 좋구나. 첫째, 기억하고 암송하는데 있어서는 민첩하지만, 소홀한 병이다. 둘째, 글짓기에는 예리하지만(날래지만), 들떠있는 병이다. 셋째, 깨닫는 데는 민첩하지만, 거칠다는 병이다. 대저 둔하지만 (부단히) 파는 자는 그 구멍이 넓어지게 되어 있고, 막혔지만 그것이 한번 터지면 그 흐름이 세차고, 어리버리한 데도 갈고닦는 자는 그 빛이 윤택하니라...(하략)
내 주변의 어리버리한 사람들을 홀대하지 말고, 그 어리버리한 이들과 함께 하는 정신! 학교에서, 마을에서, 교회에서, 어리버리한 이들을, 마치 보물찾기 하듯이 찾아서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는 일! 어리버리한 아이들을 ‘돌’이라고 놀리지 말고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자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원래 어리버리할 알은, ‘창 알(戞)’입니다. 완전 반대의미 같습니다. 바로, 어리버리한 사람이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 창처럼 예리해진다는 교훈이 담긴 글자입니다.
다산은 황상을 제자로 삼으면서, 나의 제자로서 지켜야 할 세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이게 유명한 ‘삼근계(三勤誡)’입니다. 십계명이 아니라 딱 세 개뿐인 계명입니다. 그런데 그 세 개가 똑같습니다. 삼근계에서 ‘근’은 부지런할 근(勤)입니다.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삼근계입니다. 삼근계를 지키면, 네 어리버리함이 날카로운 창보다 빛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황상은 다산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름난 제자가 됩니다. 너의 그 어리버리함이 오히려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 다산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리버리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 말씀을 온몸으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저들을 택하시고 끝까지 데리고 다니신 예수님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말씀동화] “꿈 사세요, 변화산 꿈!”
모두들 안녕? 내 이름은 몽구야. 꿈을 잘 꾼다고 몽구란다. 꿈쟁이 몽구! 나는 매일 밤마다 가족들과 함께 성서일과 말씀독경을 하고 있지. 그런데 어젯밤 아주 묘한 꿈을 꾸었어. 정말 대단한 성경말씀 꿈인데, 누구 내 꿈 살 사람 없니? 내 꿈은 말야, 마치 좋은 옹기항아리 속에 성경말씀들이 잘 담겨서 숙성된 그런 꿈이야, 맛 좋고 영양 만점! 누가 내 꿈 안 살래? 옳지 그래 우리 교회에서 제일 슬기로운 소현이가 내 꿈 사가렴. 꿈 값은 그리 비싸지 않아. 딱 500원! 그래 소현이가 내 꿈을 샀으니까, 이제부터 내 꿈 이야기를 들려주지. 잘 들어봐, 귀 쫑긋 세우고!
난 산길을 오르고 있었어. 혼자였지. 산에는 흰 구름이 가득해서 산꼭대기가 잘 보이지 않았어. 그래도 난 열심히 오르고 또 올랐단다. 점점 숨이 차고 땀이 비오듯 했지. ‘아휴 힘들어 여기서 좀 쉬어야겠네.’ 난 넓적한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단다. 그런데 문득 언젠가 아빠께서 해주신 말씀이 기억나지 뭐야. 산을 타다가 힘들어서 쉴 때에는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다시 오를 때 더 힘들다는 말씀이지. 그래서 난 얼른 일어나서 큼지막한 참나무에 등을 기대고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단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이니? 저기 50미터 쯤 아래 내가 잘 아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거였어. 모세 할아버지가 두 팔에 십계명 돌 판을 들고 백성들에게 뭐라뭐라 말씀을 전하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 지난 한 주간 내내 성서일과 독경하면서 읽은 출애굽기 34장 말씀이거든. 아주 이젠 거의 외울 지경이야.
아니나 다를까 모세 할아버지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있었어. 백성들은 눈이 부셔서 처음엔 가까이 가지도 못했단다. 하나님께 큰 죄를 짓고 난 뒤라 가뜩이나 하나님이 무섭고 모세도 무서웠는데, 모세가 산에 가서 한참 있다가 내려온 거거든. 자그마치 40일이나 물도 안마시고 금식하고 내려왔는데(출 34:28) 저렇게 멀쩡하니 얼마나 놀라웠겠어. 그것도 그냥 멀쩡한 게 아니야, 얼굴이 해처럼 눈부시게 빛나더라니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아마 내 생각에는 하나님을 만나서 깊이 대화하는 사람은, 마치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듯이, 40일도 하루처럼 금세 지나가는 걸 거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내 얼굴에 스며들어서 하나님처럼 얼굴에서 빛이 나는 거지.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닮는다잖아? 그렇게 서로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나저나, 와 대단한 걸? 내가 모세를 만나다니, 그것도 십계명 말씀을 두 팔에 가득 안아들고 하나님처럼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모세를 보다니, 나보다 무려 3,500살이나 많은 할아버지를 만나다니! 나는 가슴이 쿵덕거리고 숨이 가쁠 지경이었단다.
나는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어. 내 생각에 조금만 더 오르면 산꼭대기에 도착할 것만 같았지. 그래서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올랐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마 15분은 지난 것 같았어. 가만, 근데 여기가 어디지? 산꼭대긴가? 구름이 가득해서 앞이 안보이네? 아까 저 아래서 보았던 산꼭대기 흰 구름인 게야. 맞아 여기가 산꼭대기로구나? 그런데 바로 그 때였어. 하늘에서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렸지. 무슨 소리였게? 궁금하지? 잘 들어봐 바로 이 말씀이었어.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헐∼! 이게 웬일이람? 어디서 많이 들은 말씀같다 했는데, 바로 하나님 말씀이었잖아? 그럼 여긴 바로 그 예수님의 변화산? 지난 주간 내내 독경하느라 거의 외울 지경이 된 바로 그 말씀, 그 중에서도 알짜배기 말씀, 하나님 말씀이었어. 그래서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 더구나 내가 아빠한테 여쭤봤었거든. 왜 마태복음하고 마가복음에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하셨는데, 누가복음에만 ‘사랑하는’ 이란 말이 빠졌을까? 이렇게 대단한 질문도 하고 그랬거든. 이 말씀이 예수님 세례받으시는 순간에도 들렸었는데, 변화산에서도 희한하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 그 이유에 대해서도... ...
가만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럼 조금아까 15분 전에 모세 할아버지 만났는데, 어떻게 같은 산에서 거의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거지? 모세 할아버지랑 예수님이랑은 아마 1,500년이나 다른 시대일텐데? 와, 정말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씀이 실감나네. 15분밖에 안 흐른 것 같은데, 무려 1500년이 흘렀다니 말이야. 그 때 난 느꼈지. 아! 이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로구나! 꿈꾸면서 그게 꿈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나이 먹어봐. 다 알게 돼! 아무튼 나는, 바로 이곳이 예수님의 변화산이란 것을 알아차린 순간 바짝 긴장했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몸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단다.
이윽고 흰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나자. 내 눈앞에는 바로 그 성경말씀이 펼쳐지고 있었어. 예수님과 제자 세 명이 눈에 들어왔지. 아쉽게도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지만 말야. 베드로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중얼거렸어.
“예수님 죄송해요. 제가 잠이 좀 많아서 아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주님께서 제 별명을 '베드(bed)로'라고 지어주신 다음부터는 틈만 나면 자꾸 자러가고 싶답니다.”
난 그만 깔깔 웃고 말았어. 베드로라는 뜻이 그게 아닌데 말이야. 어쩜 저렇게 능청맞을 수가! 내 웃음소리에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어. 베드로 아저씨가 “넌 누구냐”하고 물어보셔서 나는 어디어디서 온 몽구예요 하고 대답했지. 잠결에 모세도 보고 엘리야도 봐서 그런지, 제자들은 나를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어.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이런 높은 산에 올라왔느냐 하시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단다. 정말 대단하지 않니? 예수님 얼굴과 옷이 아주아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단다. 아까 15분 전에 멀리서 바라본 모세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빛이었지. 원래 예수님은 햇빛에 그을린 거무튀튀한 얼굴빛에 머리도 자주 감지 못하셔서 더럽고 옷도 가난뱅이처럼 남루하다고 배웠었는데, 역시 변화산이라 그런가? 아주 말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법인데, 내게 예수님 첫인상은 정말 짱이었단다. 그리고 난 예수님 눈을 계속 뚫어져라 바라보았지. 그때였어. 곁에 있던 다른 제자 아저씨가 나에게 말씀하셨어.
“이 녀석아. 왜 그리 주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니? 그러다 예수님 얼굴 닳을라. 그만 좀 봐라”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말리셨지. 어린아이가 내 얼굴 바라보는 걸 막지 말라고 하셨어. 천국은 이런 어린아이들의 나라라고도 하셨지. 그리고 내게 물으셨어. 왜 그렇게 나를 빤히 쳐다보느냐고. 그래서 대답했지. 예수님 얼굴 한참 보고 있으면 내 얼굴도 예수님처럼 환하고 멋지게 변할 것 같아서 그런다고!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껄껄 웃으셨단다. 우리는 모두 하하 웃으며 행복하게 산에서 내려왔어. 그런데 저 산 아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 바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지. 우리가 사람들 앞에 도착하자. 제자들이 먼저 반겨주었어. 바로 그 때, 한 아저씨가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와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말했어.
“예수님, 제발 제 아들 좀 살려주세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바로 악귀 들린 아이의 아버지였어. 아이의 모습이 정말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단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어린 아이를 저렇게 망가뜨릴 수 있을까? 저건 참으로 사람의 짓이 아니었어. 아이는 너무 아파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단다. 몸은 온통 퍼런 멍투성이였고 붉은 피투성이였지. 제자들은 물론 아무도 어떻게 손쓰지도 못하고 있는 걸 보시고 예수님은 크게 한탄하셨어. 그리고 아이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지. 나는 그 때 예수님 얼굴을 계속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수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단다. 그 때 예수님 표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아주 분노하시면서, 아주 외로우시면서, 아주 슬프신 표정이라고 할까? 그리고 큰 소리로 악귀를 쫓아내시고는 떨고 있는 아이를 어루만지시며 상처를 닦아주셨지. 멍투성이, 피투성이 상처 위로 눈물을 뚝뚝 떨구시며 상처를 닦으시자 상처들이 금세 깨끗이 아무는 신비로운 장면도 나는 목격했단다. 아직도 떨고 있는 아이를 꼭 껴안으시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어.
“얘야. 이젠 다 되었다. 안심하거라. 내가 악마를 이겼으니, 너는 이제부터 사랑하는 네 아버지의 집에서 편히 쉬려무나.”
쥐죽은듯이 조용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어. 예수님의 놀라운 표적을 보고 모두 놀란 거야. 크게 감탄하며 난리가 났지.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단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바로 이 아이처럼 크게 고통을 당하고 돌아가실 것이라고, 그리고 이 아이가 멀쩡히 회복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환하게 부활하실 거라고! 제자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었지만,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예수님과 눈을 맞추었어. 그런 나를 바라보시고 예수님은 내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셨지. 눈물을 글썽이던 예수님 얼굴이 나를 바라보시면서 다시 환해지셨고, 내 마음도 따라서 환해졌단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랑스런 눈으로 내게 말씀하셨어.
“몽구야, 너는 정말 내 마음을 잘 아는구나. 지금 네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늘 사랑의 눈으로 성경말씀을 보거라. 그러면 너는 나를 쏙 빼닮게 될 거야. 이게 내 제자들을 향한 나의 소원이란다.”
“걱정 마세요 예수님! 꼭 그럴게요. 매일 성경말씀 읽을게요.”
어때 얘들아. 정말 멋진 꿈이지 않니? 소현아! 네가 이 꿈을 샀으니까. 예수님께서 내 머리 쓰다듬어주신 게 바로 네 머리 쓰다듬어주신 거랑 똑 같아. 내가 예수님 얼굴 닮으려고 예수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것도 이젠 네 몫이야. 앞으로 네 얼굴이 예수님 얼굴 닮아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이걸 꼭 기억해야 한단다. 정말 예수님을 쏙 빼닮으려면, 매일 예수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봐야해. 그런데 매일 이렇게 멋진 꿈을 꿀 수는 없겠지? 그래도 방법은 있단다. 지난 주 말씀독경하면서 아빠한테 배운 건데, 우리도 시내산의 모세처럼, 변화산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날 수 있으려면, 매일 ‘말씀’을 열고 말씀과 대화하면 된데. 그런데 이건 좀 어려운 말이지만, 말씀이 뭐냐하면, 첫째, ‘성경말씀’이고 둘째, ‘성찬말씀’이야. 매일 성경책 열고 읽으며 기도하고, 매일 사랑의 도시락을 들고 못 먹고 외로운 이웃들 찾아가 예수님 뵌 듯 인사하는 거야.
내 이름이 몽구야. 꿈 잘꾸는 몽구. 다음에 또 멋진 꿈 꾸면 내 멋진 꿈 팔러 올게. 그 때까지 우리 매일매일 열심히 말씀과 함께 대화하며 예수님 닮아가자꾸나. 그럼, 모두들 안녕!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새해 예수님 사랑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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