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일과 4본문]
(느헤 8:1-3, 5-6, 8-10)
1. 모든 백성이 한꺼번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학자 에스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청하였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에스라 제사장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왔다. 거기에는,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나와 있었다.
3. 그는 수문 앞 광장에서,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에게 새벽부터 정오까지, 큰소리로 율법책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4. 학자 에스라는 임시로 만든 높은 나무 단 위에 섰다. 그 오른쪽으로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가 서고, 왼쪽으로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 섰다.)
5.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6.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7.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는,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8.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9.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다.
10.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돌아들 가십시오. 살진 짐승들을 잡아 푸짐하게 차려서, 먹고 마시도록 하십시오. 아무것도 차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몫을 보내 주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의 거룩한 날입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
(시 19)
1.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2.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3.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해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5.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제 길을 달리는 용사처럼 즐거워한다.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니, 그 뜨거움을 피할 자 없다.
7.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안겨 주고, 주님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9. 주님의 말씀은 티 없이 맑아서 영원토록 견고히 서 있으며, 주님의 법규는 참되어서 한결같이 바르다.
10. 주님의 교훈은 금보다, 순금보다 더 탐스럽고,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
11. 그러므로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
12.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잘못을 낱낱이 알겠습니까? 미처 깨닫지 못한 죄까지도 깨끗하게 씻어 주십시오.
13.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고전 12:12-31a)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14. 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18.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19. 전체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20.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22. 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그리고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 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24.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28.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몇 일꾼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예언자요, 셋째는 교사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요, 남을 도와 주는 사람이요, 관리하는 사람이요, 여러 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29. 그러니, 모두가 사도이겠습니까? 모두가 예언자이겠습니까? 모두가 교사이겠습니까? 모두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겠습니까?
30. 모두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통역하는 사람이겠습니까?
31.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가 4:14-21)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15.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참고]
(왕하 22장)
8. 힐기야 대제사장이 사반 서기관에게, 주님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그 책을 사반에게 넘겨 주었으므로, 사반이 그 책을 읽어 보았다. 9. 사반 서기관은 그 책을 읽어 본 다음에, 왕에게 가서 "임금님의 신하들이 성전에 모아 둔 돈을 쏟아 내어, 작업 감독관, 곧 주님의 성전 수리를 맡은 감독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10. 사반 서기관은 왕에게, 힐기야 대제사장이 자기에게 책 한 권을 건네 주었다고 보고한 다음에, 그 책을 왕 앞에서 큰소리로 읽었다. 11. 왕이 그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는, 애통해 하며 자기의 옷을 찢었다. 12. 왕은 힐기야 대제사장과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사반 서기관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였다. 13. "그대들은 주님께로 나아가서, 나를 대신하여, 그리고 이 백성과 온 유다를 대신하여, 이번에 발견된 이 두루마리의 말씀에 관하여 주님의 뜻을 여쭈어 보도록 하시오. 우리의 조상이 이 책의 말씀에 복종하지 아니하고, 우리들이 지키도록 규정된 이 기록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진노가 크오."
(왕하 23장)
1. 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소집하였다. 2. 왕이 주님의 성전에 올라갈 때에,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어른으로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이 그와 함께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 때에 왕은, 주님의 성전에서 발견된 언약책에 적힌 모든 말씀을, 크게 읽어서 사람들에게 들려 주도록 하였다. 3. 왕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를 것과, 온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과, 이 책에 적힌 언약의 말씀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언약을, 주님 앞에서 세웠다. 온 백성도 그 언약에 동참하였다
21. 왕이 온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유월절을 준비하십시오." 22.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로부터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에도 이와 같은 유월절을 지킨 일은 없었다. 23. 요시야 왕 제 십팔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기리는 유월절을 지켰다.
네 말씀을 펼쳐라!
[본문 얼핏 보기]
지난 주 본문 주제가‘혼례’, 혼례를 통한 구원의 기쁨 넘치는 잔치, 포도주 ∼ 어린양 혼인잔치를 앞당겨 맛보는 성찬의 잔에 이르기까지... 혼인잔치의 ‘신나는 포도주’가 지난 주 본문의 주제를 담은 단어였다면, 이번 주일 본문을 통해 미리 얻은 감동, 네 본문이 어깨동무할 수 있을 주제어는 '말씀'이라고 꼽아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주의 말씀을 펼치시니>, <감추었던 말씀이 펼쳐지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구약 느헤 8:5에 에스라가 두루마리를 펴는 모습이 나오고, 복음서 누가 4:17에도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편 19:3-4절도 그런 감동을 더해 줍니다.
3.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지난 며칠 동안, 주일본문 묵상하는 내내 참으로 주현절의 기운을 담뿍 느꼈습니다.
잃었던 말씀이 드디어 등장하는! 잊었던 약속의 말씀(그리스도)께서 드디어 나타나시는 (주현 主顯)!!
그런데 구약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데자뷔(기시감)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요시야 왕 이야기가 떠오른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두 본문이 뒤섞여 헛갈릴 정도였습니다. (왕하 22-23장, 대하 34장)
(1) 감추어져 있던 두루마리를 찾아 서기관 사반이 봉독하는 말씀을 듣고 통곡했던 요시야로부터 180년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기관 에스라가 봉독하는 말씀을 듣고 통곡합니다.
(2) 성전을 보수하며 발견한 두루마리였고, 성벽을 재건하고 재발견한(간청한) 두루마리였습니다.
(3) 서기관 사반도 큰 소리로 읽었고(왕하 22:10c), 서기관 에스라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3b)
(4) 요시야도 말씀을 들은 뒤에 처음으로 절기를 지켰고(유월절, 왕하 23:21-23), 에스라의 백성들도 말씀을 들은 뒤에 처음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초막절, 느헤 8:13-18)
성전보수 뒤에 받은 말씀 앞에서 흘린 요시야의 눈물과, 성벽 재건 뒤에 받은 말씀 앞에서 흘린 백성들의 눈물은, 시대의 차이를 넘어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그리고 시공간을 넘어 지금 여기까지 같은 감동을 줍니다.
포로지를 떠나 귀향 후의 곡절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느라 잊었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생존투쟁의 저 너머에 감추었던 그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간 온 백성은 기립하고, 온 백성의 눈길이 바로 그 두루마리를 향합니다.(느 8:5) 복음서는 어떻습니까? 감추어져 있던 그분이 나타나셔서 두루마리를 펼치시고 선포하시니 모든 사람의 눈이 그분께로 쏠립니다.(눅 4:20c) 예수님 자신이 바로 감추어져 있던 ‘그 말씀’ 아니십니까? 주현절 여섯 고개 산마루에서 받은 이 말씀의 기운이 참으로 신묘막측합니다. 오늘 주님의 몸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 지체인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분신답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를 펼쳐 저 신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습니까? ‘네 말씀을 펼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오랜 세월 포로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백성들이 두루마리 말씀을 들으며 웁니다. 백성들은 듣도보도 못한 두루마리의 새로운 말씀을 듣는 감격, 그리고 그 율법에 비친 내 모습이 송구하여 통곡을 합니다. 말씀에 목말라 있던 건 500년 세월이 흘러 갈릴리 여러 회당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듣던 말씀이었으나 성령의 능력을 입은 예수님 말씀에 저들은 듣도보도 못한 말씀의 진수를 느끼고 예수님께 열광합니다.(눅 4:15b)(cf, 나사렛 회당) 다시 2천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바야흐로 스마트폰시대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열어볼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지금 교회는 감추었던 그분을 펼쳐 보여야 할 때가 아닙니까? 이건 스마트폰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이 바로 주현절입니다. 몸을 입고 오신 말씀, 그 말씀을 펼쳐 보여야 하는 계절, 주현절기입니다.
[본문 한 뼘 더 꼼꼼히 보기]
[구약]
* 이번 주일 설교 때는 앞에 2-3분 정도, 느헤미야기 처음부터 8장까지를, 아이들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짧게 요약해야겠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기의 알짬을 나눌 좋은 기회입니다. (느헤미야라는 인물로부터 얻는 교훈이 참 많습니다.)
* 오늘 구약의 자리는 지난주에 이어, 역시 포로지에서 귀환했을 때의 일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여곡절 끝에 성전과 성벽을 재건한 직후의 상황입니다.
* 율법을 듣고 울지 말고 기뻐하라는 뜻은? 율법의 목적,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그 가르침을 따를 때 뒤따르는 진복(眞福)을 내다보며 오히려 기뻐하라는 것입니다.(오늘 시편 19편의 분위기가 딱 그겁니다.)
* 오늘 본문은 여러모로 요시야 때 상황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초막절을 지키라는 말씀을 처음 발견하고 부랴부랴 순종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느 8장) 13. 이튿날에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각 가문의 어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함께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자 에스라에게로 갔다. 14.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축제에는 초막에서 지내도록 하라는,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명하신 말씀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15. 또한 그들은 책에, 산으로 가서 올리브 나무와 들올리브 나무와 소귀나무와 종려나무와 참나무의 가지를 꺾어다가 초막을 짓도록 하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 그래서 백성은 나가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지붕 위와 마당과 하나님의 성전 뜰과 수문 앞 광장과 에브라임 문 앞 광장에 초막을 세웠다. 17.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모든 사람이 초막을 세우고 거기에 머물렀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렇게 축제를 즐긴 일이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즐거워하였다. 18. 에스라는 첫날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규례대로 성회를 열었다.
오늘 본문의 자리가 바로 초막절 직전이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초막절 준수와 더불어 일러준 모세의 육성으로부터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 31:10-13) 10.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일곱 해가 끝날 때마다, 곧 빚을 면제해 주는 해의 초막절에, 11. 온 이스라엘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뵈려고 그분이 택하신 곳으로 나오면, 당신들은 이 율법을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읽어서, 그들의 귀에 들려주십시오. 12. 당신들은 이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만이 아니라 성 안에서 당신들과 같이 사는 외국 사람도 불러모아서, 그들이 율법을 듣고 배워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13.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하는 땅에 살게 될 때에, 이 율법을 알지 못하는 당신들의 자손도 듣고 배워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시오."
사람취급 받지 못하던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외국인까지 말씀을 듣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자리 역시 성인 남자만이 아니라, 여성과 (말귀를 알아들을만한) 아이들까지 모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어찌보면, 바벨론 포로기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성전의 번제 중심의 제사로부터 회당의 말씀 중심의 예배로 움직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포로기 처음 회당을 연 사람이 바로 에스라라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아이들까지 함께하는 예배! 시종일관(始終一貫) 말씀이 가득 넘실넘실 흐르는 예배! [초대교회 예배가 딱 이랬습니다. 말씀이 몇 시간이고 강물처럼 흐르는 예배... 이에 비하면 지금 우리 예배 구조는 철두철미하게 말씀과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이 계속되면... 아이들이 못 알아듣고 지루해한다고요? 사실 아이들이 더 잘 알아듣습니다. 머리로 논리적 이해력은 부족하지만, 아이들은 말씀을 몸으로 영으로 흡수합니다. 말씀은 아이들에게 더 잘 스며듭니다.
3.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시편]
* 회남자(淮南子), 제속훈(齊俗訓)에, ‘사방상하위지우(四方上下謂之宇)요 왕고래금위지주(往古來今謂之宙)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宇宙)라는 말의 뿌리가, 우(宇)는 공간(space), 주(宙)는 시간(time)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 같지만, 시편 1절은 ‘우(宇)’, 2절은 ‘주(宙)’를 느끼게 하여, 1, 2절 노래가 딱 우주(宇宙)에 가득한 ‘말씀’이 느껴지게 합니다.
* 구약 본문에서 에스라가 ‘큰소리로’(3b) 말씀을 선포했다면, 시편 본문에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도 널리 퍼져나갑니다.(3, 4) 어떤 식으로든 말씀은 퍼져나갑니다. (상기했듯이)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 것 같아도 그 말씀 아이들 가운데 구석구석까지 스며드십니다. 그 말씀 아이들을 참 사랑하십니다.
* 시 19편은 119편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말씀’에 대한 노래로 가득합니다. ‘주님의 교훈(X 3)', '주님의 증거’, ‘주님의 계명’, ‘주님의 말씀’, ‘주님의 법규’ 등.
[서신서]
* 오늘 서신서의 자리는 ‘분열된 몸’입니다. 먼저 짚어볼 것은, 은사로 인한 분열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인데, 교회가 하나되고 무럭무럭 자라게 하시려고 주시는 ‘선물’, 즉 은혜의 선물인데 그 은사로 한몸이 분열된다? 오늘 4본문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조명해본다면... 어느새 말씀이 숨겨진 것입니다. 닫힌 말씀, 선포되지 않는 말씀, 꽉 막힌 말씀... 말씀이 퍼져나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몸 바깥으로는 물론이고 몸 안에서도 말씀의 기운이, 혈액이 돌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은 지체들이 제자리를 건강하게 지킬 때 흐를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인기있는 지체만 비대해지고 나머지 인기 없는? 지체들은 왜소해지는 기형적인 몸에서는 말씀의 기운은 흐를 수 없습니다. 막힙니다. 기(氣)가 막힙니다.)
* 서신서 1, 2절에 ‘한몸’, ‘한 성령’이라는 단어가 각각 두 차례씩 반복됩니다. . . 그리고 오늘 서신서 본문은 삼위일체의 신비만큼 어렵고 신비한 ‘한몸’에 관한 말씀입니다.
(12c)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전(殿)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담는 집이며, 말씀이 흐르는 집이며, 말씀이 흘러넘치는 원천(源泉)입니다.
* 용어정리 ; ‘은사’라 하면 신비로운 느낌이 더 들고, ‘직분’이라 하면 좀 무미건조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 은사를 주시는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 교회에서 ‘직분’이란 곧 ‘은사’와 직통합니다. 그리고 ‘지체’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각 교우들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지만,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는 은사, 곧 직분과 같은 뜻으로서, ‘몸’이라는 상징어와 관련한 상징어, 즉 비유어(比喩語)입니다. 즉, 이 본문에서 ‘직분’과 ‘은사’와 ‘지체’는 동격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이런데, 실제로 바울은 가끔 ‘지체’를 이중의미로 혼용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조차 그 논리에 껴맞출 수도 있지만...)
* (31)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를테면, ‘더 큰 은사’에 대한 시기, 질투, 욕심으로 분열된 고린도교회에게 오히려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는 것은???
(22)‘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 (23)‘볼품없는 지체’, (24)‘모자라는 지체’ 등을 묵상해보면, 이건 다 고린도교회, 즉 지금 우리들 식의 표현이라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지체(직분, 은사)들을 내리신 그분께서 보시는 기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론으로, ‘더 큰 은사’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다고 할 때, 그 ‘더 큰 은사’라는 표현은 고린도교회, 즉 우리들 눈높이의 표현이고, 바울이 31절에서, 열심히 구하라고 말한 그 ‘더 큰 은사’란 ‘장로’, ‘목사’, ‘감독’, 혹은 ‘슈퍼파워 카리스마’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이어지는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그리고 이어지는 13장의 주제 ‘사랑’으로 봐서 ‘더 큰 은사’가 곧 ‘사랑’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은사(직분, 지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분의 본질이요, 뜻이요, 존재방식, 즉 그분이 거하시는 나라(천국)의 주소, 그분이 거하시는 몸(교회)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해놓고도 너무 어렵네.. 좀 쉽고 간단하게 뭐라 하면 좋을까요? 그러고 보니 바울도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참 길게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더 큰 은사’란, 교회를 명실상부 ‘한몸’되게 하는 은사, 즉 사랑이라는 원리[道도]로 온전한 ‘한몸’이 되게 하는 그런 지체, 그런 직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뭐지? (사랑의)말씀, (진리의)말씀, (복음)말씀이 힘차게 운행하시고 흘러넘치시게 할 수 있는 몸, 그런 건강한 몸 - 어느 한 기관만 크게 부풀어 오르는 기형적인 몸이 아니라 꼭 필요한 각 지체들이 딱 그 크기에 맞게, 딱 그 자리에서 건강하게 제 기능하는 그런 - 생기발랄한 몸, 기쁜 몸, 즉, 지극히 ‘조화로운 몸’이라는 대의(大義)를 품은 지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대의를 품으려면 뭐니뭐니해도 사랑과 말씀, 한마디로 ‘사랑이신 말씀’-‘사랑말씀[愛言]’을 깨쳐야 할 것입니다. 사랑말씀을 깨친 지체, 사랑말씀에 젖은 지체는 몸의 어느 구석에 있는 지체일지라도 한몸을 이루기 위해 섬기는 지체가 됩니다. 몸의 건강한 조화를 위해 자기를 낮출 줄을 압니다. 다른 지체가 아프면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다른 지체가 기쁘면 함께 기뻐할 줄을 압니다.
[복음서]
광야로부터 돌아온 예수, ‘성령의 능력을 입고’(14) 돌아온 예수님은 가는 곳(회당)마다 말씀잔치를 일으키십니다. 평범한 촌부로 살던 예수님이 드디어 주(主)로 나타나기[현(顯)] 시작하신 겁니다. ‘말씀’으로!
그리고 드디어 고향 나사렛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두루마리 가운데서도 특히 61장 1, 2절을 찾아 선포하십니다. 그 본문은 마침 지난주일 본문 바로 앞 구절로서 오늘 구약본문의 자리와도 통하네요.
중요한 것은 이 본문이 가리키는 ‘나’는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장수가 출전하며 올리는 출사표처럼, 그리스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처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성서일과에 따른 ‘말씀동화’, 너무 늦게 올렸습니다. 정신없이 지내다가 마구마구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어요. 15분은 걸릴 것 같아요. 이번주 본문을 읽고 공부하지 않은 어린이들에게는 너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올립니다. 다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말씀동화] 행복한 머릿돌
(나사렛 예수님 시절에서) 나는 호박돌. 난 내 나이도 잘 몰라. 그런데 내 어깨동무 돌들은 다들 머릿돌 할아버지라고 부른단다... 내 엄마 돌산에서 태어난 게 언제였더라? 아주 오래 전이지. 며칠 전에 나를 긴 잠에서 깨웠던 예수라는 청년보다도 한 1,000살 정도 더 많은 다윗 왕 시절 나는 태어났단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벽을 지을 때 나는 내 엄마 돌산에서 떼어져서 성벽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편히 쉬고 있었지. 그리고 세월이 한 4백년 정도 흘렀을까?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성벽이 무너지고 나도 따라 무너졌어. 커다란 호박처럼 판판하게 잘생긴 내가 그날 무너질 때 이리저리 귀퉁이가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그만 못난이 호박돌이 되어버렸단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린돌이 된 거지. 그러다가 여차저차 해서 지금 여기 나사렛 회당의 머릿돌이 되어 행복하게 살게 되었어. 못난이 호박돌이 과연 어떻게 해서 행복한 머릿돌이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니? 자 이제부터 나와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보자꾸나. 1,000년 전은 너무 멀고, 오늘은 반 뚝 잘라서 한 500년 정도만 뒤로 거슬러 올라갈거야. 자 그럼, 출발해볼까? “돌돌돌 호박돌∼ 둥글둥글 호박돌∼ 돌아돌아 호박돌아∼ 얍!”(함께)
(예루살렘 느헤미야 시절로) 와글와글하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어요. ‘에잇, 새벽부터 웬 소란이람?’ 눈을 부비며 어둑어둑한 새벽마당을 더듬어보았죠. ‘우왓! 세상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지? 줄잡아 5만 명은 되겠네!’ 온 세상사람 다 모인 것처럼, 수문 앞 광장이 사람들로 꽉 찼어요. 여기는 예루살렘 성이예요. 한동안 사람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붙들고 부산스럽게 뚝딱거린다 했더니, 와! 두 달 만에 뚝딱 해치웠네! 이런저런 훼방꾼들도 많았는데, 어떻게 저리 기다란 성벽을 다 쌓은 거지? 해냈네, 해냈어! 결국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은 거예요. 참 대단한 사람들이죠?
가만, 가만, 내가 누구였더라? 아! 맞아 기억났다. 나사렛 회당의 머릿돌 할아버지였지. 여러분, 내가 아까 얘기한 거 기억나죠? 1,000년 전 다윗왕 시절, 솔로몬이 쌓은 예루살렘 성벽이 되었던 나는 400년 세월이 흘러 바벨론이 쳐들어와 무너지는 바람에 자그마치 150년 동안이나 폐허 속에 누워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이 을씨년스러운 예루살렘 성에 올라온 거예요. 느헤미야는 나를 무너뜨린 바벨론을 쳐부순 큰 나라 페르시아의 왕이 예루살렘 총독으로 보낸 사람이었어요. 아마 느헤미야는 원래 페르시아 사람이 아니었나봐. 허물어진 고향의 성벽이 너무 안타까워서, ‘어서 저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벽이 느헤미야 덕분에 다시 멋지게 되살아나게 되었는데... 허물어진 채로 땅바닥을 뒹굴던 나는 어찌 되었을까? 함께 뒹굴던 내 동무들은 모두 다시 멋진 성벽이 되었는데... 휴∼ 나는 아직도 땅바닥에 누워있네요. 이유가 뭐냐고? 그거야 뻔하지, 내가 너무 울퉁불퉁 못난 거예요. 성벽을 쌓기에는, 울퉁불퉁해도 너∼무 울퉁불퉁!!
그건 그렇고, 도대체 오늘이 무슨 날이지? 무슨 날인데 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인 걸까? 사람들이 뚝딱거리며 광장에 높다란 단을 쌓았네. 그리고 단 위로 멋진 사람들이 하나하나 오르기 시작하네?. 그리고 마침내 하얀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선비 한 사람이 아름다운 두루미처럼 훨훨∼ 날듯이 높은 단에 올라 두툼한 두루마리를 펼쳤어요. 두루두루 두루마리를 펼치자, 앉았던 사람 누웠던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벌떡 일어섰어요. 과연 저 두루마리 안에 뭐가 들었기에 사람들이 벌떡 일어섰을까?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 두루마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선비가 두루마리를 읽기 시작합니다. 아주아주 큰 목소리로 읽습니다. 곁에 있던 멋진 사람들도 두 손을 모아 마치 마이크처럼 입에 대고 소리통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선비가 읽는 두루마리를 한마디 한마디 힘차게 따라 외치네요. 잠이 확 달아난 나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어요. 가만 들어보니 성경말씀이었어요. 두루마리를 힘차게 읽는 선비는 바로 제사장 겸 학자였던 에스라였어요. 그런데 에스라는 배도 안 고픈가? 새벽부터 점심때까지 저렇게 큰 소리로 두루마리를 읽고 있네? 나는 슬슬 졸리기 시작하는데... 사람들도 졸릴 텐데, 다리도 아프고... 어? 저 사람들 좀 봐요! 졸기는커녕, 지루하기는커녕,,, 엉? 울기 시작하네? 울어도 아주 많이 우네.. 엉엉 소리내어 우네... 왜 울까? 분위기를 보니까 배고파서 우는 건 아닌 것 같고... 원래 저런 걸까? 성경말씀을 들으면 눈물이 나는 걸까? 500년 뒤 나사렛 회당에 살 때 나는 늘 두루마리 읽는 소리 들으며 살았지만, 저렇게 사람들이 말씀 들으며 크게 우는 건 처음보네요... 누구 아는 사람 있나요?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말씀을 들으며 울고 있는 걸까? 가만, 두루마리 읽는 소리가 이제 그쳤어요. 그리고 에스라가 다시 외치네요. 울지 말라고 타이르네요. 그리고 거룩한 날이니까 이젠 모두모두 잘 먹고 힘을 내라고 하네요. 그 때였어요.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아름다운 노래였어요.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따라 부르기 시작하네요.
7.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기쁨을) 안겨 주고, 주님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10. 주님의 교훈은 금보다, 순금보다 더 탐스럽고,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 (더 달콤하다).
가만 들어보니 시편이었어요.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시편 19편! 아니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누구야, 나사렛 회당 머릿돌 할아버지잖아!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 내가 회당 돌 몇 년째인 줄 알아? 아무튼 시편 19편은 언제 들어도 참 멋진 노래예요. 난 그중에서도 제일 끄트머리 노랫말이 좋더라. ‘나의 반석이시오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아멘! 왜 이 가사가 좋으냐고? 나의 반석!! 주님이 반석이시라잖아... 주님은 큰 바위, 우리처럼 돌이시라고, 큰돌, 왕돌! 나뿐 아니라 우리 회당 어깨동무 돌들 모두 좋아하는 노래예요. 시편 19편!
(다시 나사렛 회당으로) “돌돌돌 호박돌∼ 둥글둥글 호박돌∼ 돌아돌아 호박돌아∼ 얍!”
자, 다시 나사렛 회당이다. 이제 끝으로, 내가 어떻게 머릿돌 할아버지가 되었는지 알려주지. 500년 전, 너무 울퉁불퉁해서 느헤미야의 성벽에 다시 끼지도 못했던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단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내 꿈속에는 종종 학자 에스라가 나타나 두루마리를 큰소리로 읽었단다. 오만명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들으며 울고, 시편 19편을 부르며 힘을 내는 장면이 꿈결 따라 흐르곤 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나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번쩍 잠이 깼지. 그는 나를 번쩍 들어 나귀 등에 싣고는 며칠을 걸어 여기 나사렛으로 데려왔단다.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 성전에 왔다가 수문 앞 광장 구석에 버린 돌처럼 뒹굴고 있는 나를 발견했던 거지. 그는 집짓는 목수였어. 해마다 유월절이면 어김없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아주 신앙심이 깊은 목수였어. 그날도 고향 나사렛 회당 보수공사로 바쁠 때였지만, 그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을 찾은 거지.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동안 멋진 생각 하나가 번쩍 떠오른거야. 나사렛 회당에 예루살렘 성전 돌을 사용하는 것! 목수아저씨는 이런 멋진 아이디어를 주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했단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는 마음껏 가져가도 될 만한 돌이 눈에 띄지 않았어. 그래서 이리저리 살피던 중에 성전에서 가까운 수문 앞 광장 구석에서 나를 발견한 거야. 못생기면 어때, 예루살렘 돌이면 되지, 암! 그렇게 해서 나는 머나먼 이곳 나사렛에까지 오게 되었고, 울퉁불퉁한 덕분에 아귀가 딱 맞는 머릿돌이 되어 마침내 편안히 안식할 수 있는 내 집을 얻게 된 거란다. 세월은 흘러흘러 바로 며칠 전, 나는 또 한번 번쩍 잠이 깨고 말았어. 그날도 누군가 두루마리를 두루두루 펼쳐 성경말씀을 읽기 시작했고, 나는 평소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비몽사몽간에 듣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아주 강렬한 감동이, 아주 오랜 기억을 타고 흘러나오는거야. 나는 눈을 번쩍 떴어. 바로 바로 500년 전 예루살렘 성 수문 앞 광장에서 두루마리를 큰 소리로 읽었던 에스라의 기억이었어. 이게 꿈인가 생신가? 비록 에스라처럼 멋진 두루마기는 입고 있지 않았지만 그날 예수님이 독경하는 목소리에는 에스라의 큰 목소리보다 더 큰 기운이 담겨 있었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그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난생처음, 1,000년 만에 내가 울기 시작한 거야. 600년 전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내 몸 여기저기 부서져 나갈 때도 결코 울지 않았던 내가, 이 천하의 호박돌이 울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나만 우는게 아니네? 회당 안의 모든 어깨동무 돌들이 함께 우는 거였어. 예수, 그분이 두루마리를 읽는 목소리가 회당 안 가득 울리고 있었던 거야. 정말 신기하고 신비로운 일이었지. 그런데 더 이상한 건, 회당 돌들은 소리내어 우는데, 사람들은 울지를 않는 거야. 에스라가 읽은 두루마리는 오만 명을 울렸는데, 예수님이 읽는 두루마리는 왜 한 사람도 울리지 않은 것일까? 그런데 그런데, 우리 회당돌들은 왜 그렇게 웅웅거리며 울었던 걸까? 사람들이 울지 않아서 돌들이 대신 운 것일까? 그리고 며칠이 지났어도 지금 우리 안에 예수님 목소리는 아직도 웅웅 울고 있어. 사람들 귀에는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그 말씀소리 우리 안에 가득 울려퍼지고 있는 거야. 특히 멋진 건, 바로 이 말씀이야,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세상에 어떤 신비로운 마법사의 주문(呪文)도, 세상 어떤 위대한 대장군님의 명령(命令)도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이 신비롭고 기운찬 이 짤막한 말씀!!!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아무튼 이 신비로운 느낌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걸? 계속해서 내 안에 울리고 있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지금도 들을 수 있는 나는, 나는 참 행복한 머릿돌이야! 그리고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아주 어처구니없는 나사렛 망신사건인데, 그건 다음 주에 들려줄게. 갑자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부르고 싶네... 바로 아까 수문 앞 광장에서 울던 사람들이 불렀던 시편 19편이야. 오늘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작별하는게 어때?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이정훈 지음, 2013년 1월 26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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