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3년 2월 3일, 주현절 5주 (또는 4주) 예배준비 노트

[성서일과 4본문]

 

(렘 1:4-10)

4.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5.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7.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8.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9.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10.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시 71:1-6)

1. 주님,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보호하여 주시고,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2. 주님은 의로우시니, 나를 도우시고, 건져 주십시오. 나에게로 귀를 기울이시고,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3.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이시니, 주님은, 내가 어느 때나 찾아가서 숨을 반석이 되어 주시고, 나를 구원하는 견고한 요새가 되어 주십시오.

4. 나의 하나님, 나를 악한 사람에게서 건져 주시고, 나를 잔인한 폭력배의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

5. 주님, 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주님, 어려서부터 나는 주님만을 믿어 왔습니다.

6.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에 나를 받아 주신 분도 바로 주님이셨기에 내가 늘 주님을 찬양합니다.

 

(고전 13:1-13)

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8.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12.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눅 4:21-30)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22.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24.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26.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구약]

오늘 구약의 주인공은 예레미야입니다. 주님께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우시는 예레미야!

지난 주 구약 본문 기억나죠? 말씀이 ‘닫힌’ 시절 에스라가 그 말씀을 ‘펼치는’ 감동적인 장면!

예레미야 때도, 성경책이 넘쳐나는 현대에도,, ‘말씀이 부재(不在)한 시대에 예언자(預言者)란 무엇인가?

 

신학생 시절, 목사는 제사장이며 동시에 예언자라고 배웠습니다. 공부를 더 해보니, 목사 뿐 아니라 성도들도 마찬가지인 걸 알았습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벧전 2:9), 주일공동예배에서 말씀[言]을 받아 맡아서[預] ‘파송’을 받았으니, 모두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제사장’이 되는 것은 좋아해도 ‘예언자’되기는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에게는 권력이 있고 화려함이 있지만, 예언자에게는 왕따와 핍박, 궁핍과 죽음이 있을 뿐이니...

 

예레미야에게도 이런 고민이 있었을까?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예레미야.. 역시 거기 안주하고 싶었던 것일까? 예언자로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예레미야는 떨고 있습니다. 어린 예레미야는 두렵기만 합니다.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예언자 예레미야, 그래서 그는 오늘 목사인 나에게 더 친근하고, 더 안쓰럽고, 더 두렵습니다.)

 

성서일과 사랑방 벗님들과 함께 독경하고 묵상하며 나눈 몇 가지를 정리해봅니다.

 

* (6c)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 (7b)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 서신서와 통하는 구절 ; (고전 13:11 ‘내가 어릴 때에는 ... ...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 ‘부분적인 것’, ‘어린 것’, ‘희미하던 것’이 하나님말씀을 받을 때, 사랑이신 하나님이 임하실 때 비로소 온전해지고 환해지듯이!

 

* (7c-8절) 매우 강력하고 든든한 말씀 ; “...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 저는 이 구절을 이번 주 구약, 시편, 복음서를 이어주는 주제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 예언자로서 첫 소명을 받는 구약의 주인공 예레미야는, 복음서의 주인공 예수, 갈릴리 예언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당당한 선포와 위기, 그리고 위기를 뚫고 나가시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통합니다.

 그러고 보니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수님과 아주 많이 닮은 예언자네요. 특히 오늘 복음서 본문의 예수님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 고향사람들에게 암살당할 뻔 했던 상황(렘 11:18-23), 성전 예언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는 모습(렘 26:1-3, 7-8, 24)...

 

 

[시편]

오늘 시편은 71편입니다.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주겠다”(렘 1:8b)에 대한 응답찬송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태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있는 내가, ‘보호해주겠다’시던 그 약속의 말씀[언약(言約)] 붙잡고 “기억하소서!” 하며 탄원하는 노래입니다. 1절부터 “보호해 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 그런데 이 시편 노래를 오늘 구약본문과 함께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노래가 오늘 구약에 대한 응답찬송일 수 있으려면, 이 시편 기자는 예언자(預言者=豫言者)여야 한다는...! 왜냐하면, 상기(上記)한 렘 1:8b절의 언약(言約)은 예언자로서, 예언-말씀선포 하기를 두려워할 것 없다는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개군교회 최요셉 목사님이 이 대목에서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시편의 전체 분위기에서, 지금 대한민국을 울리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끝 장면이 떠오른다는!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이 불의한 시대에, 성경책은 넘쳐나지만 말씀이 희미해진 시대에, 온 몸을 내던지며 정의를 사랑을 노래하는 저들은, 바로 말씀을 환하고 온전하게 밝혀주는 예언자가 아닌가...

 

 

[서신서]

지난 주 본문 고전 12장에 이어서 오늘 13장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이 다시 한 번 듭니다.

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모든 은사(직분, 지체)들을 하나로 온전히 이어 완전한 ‘한몸’으로 묶어 세워주는, 은사의 알짬이요 은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 (8a)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를 읽으며 주원남 목사님이 이런 느낌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 이 느낌이 복음서 마지막 장면의 예수님 모습과 이어집니다.

 

 

[복음서]

*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이 부분에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복 있는 사람)에는, ‘떠나가셨다’를 ‘자기 길을 가셨다[(He) was on his way.]’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13장 33절 말씀이 강력하게 떠오릅니다.

 (눅13: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 (22c)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대답)이 너무 예민하고 성급하고 지나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너무 앞서 가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즉 저들의 궁금증과 섣부른 예단(豫斷)이 더 어긋나기 전에, 빗나가기 전에, 좀 더 부드럽고 친절하게 풀어주시고 잡아주실 수는 없었을까? 그랬더라면 나사렛 회당의 선포가 더 빛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시 젊은 혈기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었습니다.

 

(1) 좀 더 묵상하면서, 예레미야가 연상되었습니다. 이어서 수행자(修行者), 출가자(出家者)로서의 예언자가 다시 느껴졌습니다.

 

예언자는 반드시 출가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언약(言約)을 입으로 선포하시고(기억나게 하시고), 온몸으로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따뜻한 내 집, 추억이 담긴, 날 뒷받침해줄 집, 가문, 벗들이 있는 곳, 그 ‘내 고향(故鄕)’과의 강력한 단절을 시도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동시에 (이번 주, 말씀 주제에 비추어) 나를 보호해줄 것은, 내가 의지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십니다.

그리고 생각이 이어집니다. 보호란 무엇인가? 내 일신과 내 가족의 안녕인가? 그래서 예수님과 예레미야는 혼인을 하지 않은(못한) 것이었을까? 생각은 이어지고, 오래전 구상했던 글 제목, ‘예언자 놀이’가 떠오릅니다.

이번 주는 말씀과 더불어 좀 더 눈시울이 무거울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2) 한 가지 더 드는 생각은, 좀 비약 같지만, 예수께서 가실 길을 미리 보여주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화를 통해, 저 고절적인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뛰어넘고, 유대인들의 하나님 의식을 뛰어넘는, 이방인, 이방세계를 향한 구원선포 말입니다. 바로, 앞서 선포하신 이사야서 61장 1, 2절 말씀으로 당신을 밝히신 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시는 모습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어쩌면 백척간두(百尺竿頭)진일보(進一步)와도 같은 결연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동화] 행복한 머릿돌 2

 

나는 돌, 나사렛 회당 머릿돌이야. 모두들 안녕? 나 기억하지? 벌써 한 주가 흘렀네! 지금 여긴 나사렛 회당이야. 오랜만에 우리 예수님이 오셔서 회당 안이 모처럼 환하게 밝아졌어. 그리고 예수님이 힘찬 선언을 하셨어. 이사야 예언자가 쓴 두루마리, 61장의 첫 머리를 읽으시고, 이렇게 선포하셨지.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이 말씀이 얼마나 힘차고 멋졌는지 아마 사람들은 잘 모를거야. 이봐이봐 아직도 그 소리가 우리 안에서 이렇게 생생하게 울리고 있잖아.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 예수님 목소리 정말 짱이야. 예수님 목소리, 어릴 땐 정말 귀여웠는데,, 변성기 목소리도 멋진 건 아마 우리 예수뿐이었을걸? 그런데 지금 저 늠름한 청년 예수님의 음성은 아주아주 더 환상이야!

 

(예수님 목소리 흉내내며)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어때? 회당 안이 좀 더 환해진 것 같지 않니? 어?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좀 뒤숭숭하네? 우리 회당 식구들이 왜 저런다지? 우리 나사렛 회당을 늘 향기롭게 만들던 소문난 효자 예수가 왔는데 말이야. 나사렛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엄친아! 예수님은 우리 나사렛 회당의 보배였어. 아빠 요셉을 닮아서 나무를 다루는 솜씨도 대단했지. 우리 회당 구석구석 우리 예수 손길이 가닿지 않은 곳이 없었어. 낡고 상한 곳을 매만지면 언제나 튼튼하고 빛나게 되살아났단다. 어디 그뿐인가? 율법이면 율법, 시편이면 시편, 도대체 모르는 게 없었지. 아! 우리 예수 시편찬양은 정말 대단했어. 두루마리를 펼치지도 않고 그 많은 시편을 시원시원 참 청아하게 노래했단다. 맞아맞아, 예수는 우리 나사렛의 소문난 가수야! 이렇게 나사렛의 짱, 우리 예수가 오랜만에 왔는데, 왜 사람들 표정이 저렇게 애매∼하지?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이 좀 무거웠나? 내가 듣기엔 좋기만 한데? 그런데 말야, 가만히 보면 저 애매한 표정들 속에 크게 감탄하는 느낌이 역력해. 내 눈은 못 속인다고! 암! 내가 벌써 회당 돌 몇 년짼데, 말씀에 은혜받은 사람은 눈빛만 봐도 척 알아맞힌다고, 아무렴! 근데 저기 동네 아저씨들이 뭐라뭐라 수군거리네?

 

“저 사람 예수 맞지? 요셉의 아들이 분명한데... 뭔가 예전하고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좀이 아니라 많이 달라졌어! 예전에도 똑똑하고 목소리도 매력적이긴 했지만, 지금은 차원이 달라. 매력이 아니야, 이건 무슨 마력처럼 우리 가슴을 쿵쾅 쿵쾅 두드리고 있어. 이건 뭐지? 도대체 이건 뭐지?”

 

“자네들 소문 들었나? 벌써 갈릴리 바닥에 예수 소문이 파다하다던데? 저 친구가 지금 갈릴리 곳곳에서 어마어마한 표적을 일으키고 다닌데. 예수가 손만 얹으며 천하없는 불치병자들도 벌떡벌떡 다 일어난다더라고.”

 

“그 소문은 나도 듣긴 들었는데, 글쎄 소문이 전부 진짜일리는 없잖은가? 괜히 말 퍼뜨리기 좋아하는 허풍쟁이들 입에서 나온 부풀고 부풀려진 소리를 어떻게 다 믿을 수 있겠어? 그리고 예수 저 친구는 우리가 뻔히 다 아는 사람 아닌가? 쟤 코흘리개시절부터 우리가 다 알잖아?”

 

“맞아. 난 예수 아우들도 훤히 알아. 둘째 아우는 우리 옆집 사위고, 셋째 누이는 우리 사촌형님네 며느리라니까! 저 집안 속은 내가 속속들이 다 알지. 암”

 

회당사람들이 전부 속으로는 크게 감탄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척, 그리 달갑지 않은 척 하는 이들도 꽤 있네? 그건 그렇고 우리 예수님 분위기가 아까보다 좀 무거워 보이지 않니? 아니 왜 저럴까? 한참 눈을 감고 사람들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더니 허공을 바라보며 뭐라뭐라 중얼거리네. 귀 기울이고 잘 들어보자. 대체 뭐라는 거지? 가만가만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아니, 왜 저럴까? 왜 갑자기 스스로 왕따를 시키는 거야? 저러면 안 되는데? 그리고 또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네? 엘리야 얘기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저건 그 사렙다 과부 얘기고. 또 엘리사가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나병 고친 얘기도 하네? 그런데 뭐지? 왜 이스라엘 사람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전부 이방인들만 구원받았다는 얘기를 강조하는 걸까? 고향사람들이 살갑게, 달갑게 여기지를 않아서 삐친 걸까? 예수 저 양반이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닌데? 왜 저렇게 좌우에 날선 검처럼 날카로워진 걸까? 아니 그런데, 잠깐, 저거 보여? 예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네? 눈가가 젖어 있어. 아까 동네 사람들 수군거릴 때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저리 대범한 사람이 고향 사람들 반응에 삐치거나 상처받았을 리는 없고...? 저 눈빛 좀 봐. 뭔가 단단히 결심한 것 같은 눈빛이야. 도대체 무슨 결심을 한 것일까?

어라? 그런데 갑자기 회당사람들이 왜 저렇게들 갑자기 벌떡벌떡 일어서고 난리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얼씨구? 우리 예수를 일으키더니 멱살을 잡고 막 밀치고 있네? 무언가 단단히 화가 났나봐. 엘리야 엘리사 얘기 때문인가? 아주 완전 앵그리버드네. 앵그리버드가 떼를 지어 난리법석이야. “화가 난다∼!” 어쭈쭈? 회당 뒤 낭떠러지로 몰려가잖아? 저거 저긴 위험한데? 어떡하지? 난 잘 안 보여, 어때 잘 보이니? 어떻게 됐니? 혹시 저 무례한 놈들이 예수를, 우리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려는 거 아냐? 아! 저기 보인다. 이제야 보인다. 아휴 다행이다. 예수가 저 친구들 한 가운데를 가르고 빠져나가는구나.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네. 어머니 마리아가 계시는 집으로도 가지 않고 그냥 떠나가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북쪽으로 가나? 저긴 가버나움 쪽으로 가는 길인데... 아휴, 한숨이 절로 나오네. 우리 멋진 나사렛 짱 예수, 저 사람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과연 다시 나사렛 회당에 오기는 올까?

 

우리 예수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어. 회당에 살면서 가끔 듣는 옛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이미 오래전에 여러 차례 만났던 사람이기도 해. 내가 누구랬지? 회당 머릿돌 말고 그 전에 말이야. 그래그래 예루살렘 성 수문 근처 성벽 돌이었다고 했지? 다윗 왕 시절에 지은, 우리 예수님보다 1,000살 정도 더 많다고 했잖아. 나는 지금 바로 예레미야라는 사람 얘기를 잠깐 하려고 해. 우리 예수님보다는 한 600살 정도 나이 많은 사람인데, 그는 참 눈물을 많이 흘린 예언자였단다. 딱 지금 우리 예수님처럼, 제 고향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막 벼르기도 했었고, 유대나라가 구원이 아니라 망할 것이라는 당찬 예언을 전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할 뻔도 했었지. 우리 예수님이 방금 고향사람들에게 당차게 예언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을 뻔한 것을 보는 순간 바로 그 예레미야가 떠오른 거야.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인생을 내가 낱낱이 아는데... 문득 우리 예수님이 그처럼 눈물 많이 흘리며 살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

그리고 예레미야가 떠오른 덕분에 중요한 걸 몇 개 깨달았어. 아까 예수님이 왜 그렇게 날카로운 칼날 같은 말씀을 퍼부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저 정신없이 화난 회당사람들 정 가운데를 가르고 과감하게 갈 길을 가실 수 있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소문을 듣자하니 예수님은 바로 얼마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금식하며 큰일을 치르셨다고 하더라고. 분명히 성령충만한 능력을 받고 예언자로 사시려는 것 같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사명을 받으셨는지도 몰라. 아무튼 분명한 건, 예수님이 일부러 정을 떼려하신 거야! 고향사람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담뿍 든 정을 떼어 내야지 그 험한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의 길을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또, 정만 떼는 게 아니라, 그건 앞으로 저들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당찬 선언과도 같은 거야. 나를 보호하는 건, 예언자의 삶을 보호해주는 건, 가족들이 아니라, 고향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천하에 보여주신 거라고! 그리고 아까 봤잖아? 저 아찔아찔한 낭떠러지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저 무례한 녀석들의 정 가운데를 가르고 자기 갈 길을 가는 모습 말이야.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절대 저럴 수 없는 거지. 암! 그리고 이건 회당 머릿돌만이 느낄 수 있는 건데 말야, 난 아까 예수가 저 앵그리버드 떼거리 같은 녀석들을 홍해처럼 가르고 뚜벅뚜벅 걸어갈 때 시편 한 구절이 번쩍 떠올랐어. 바로 시 71편이야. 우리 시편박사 예수님도 분명히 이 노래를 속으로 부르고 있었을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아휴 참 너희는 기억력이 나쁘구나. 내가 누구야? 내가 회당 돌 몇 년 째인지 벌써 잊었어? 그리고 이 노래 3절을 봐, 주님께서 반석이시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하잖아. 나처럼 돌이시라고, 큰 돌, 왕돌!

 

1. 주님,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보호하여 주시고,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2. 주님은 의로우시니, 나를 도우시고, 건져 주십시오. 나에게로 귀를 기울이시고,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3.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이시니, 주님은, 내가 어느 때나 찾아가서 숨을 반석이 되어 주시고, 나를 구원하는 견고한 요새가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아까 예수님의 저 좌우에 날선 칼처럼 날카로운 말씀은, 어쩌면 예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고스란히 보여주신 것일지도 몰라. 앞에 읽으신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말씀의 비밀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신 것 말야! 즉, 예수님은 나사렛도 아니고, 유대나라도 아니고, 더 멀고 더 넓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우와! 내 가슴이 막 뛰네? 그 때가 되면 아마 나사렛 사람들도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 유대나라 사람들도 회개하고 늦게나마 예수님을 따르겠지.

여러분. 벌써 우리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 두 주 동안 정들었는데... 오늘은 내가 좀 우울했지? 그래도 이제 지금 좀 괜찮아졌어. 여러분하고 이런저런 예수님 이야기 하다보니까 다시 행복해졌어. 맞아맞아, 아무리 무거운 말씀도 이렇게 조근조근 나누다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야! 행복덩어리 말씀! 그래서 늘 회당에서 말씀 듣는 나는 참 행복한 머릿돌이란다! 여러분도 늘 말씀 가까이 하고 예배당에 자주자주 가도록 하렴. 여러분이 언제 또 나사렛 회당에 놀러 올까? 우리 그 때까지 예수님 그 청아한 음성 자주 들으면서 서로를 기억하기로 하자. 자 그럼, 오늘도, 샬롬! 언제나, 샬롬!

[이정훈 지음, 2013년 2월 2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