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성서일과 4본문 올립니다.
(여호 5:9-12)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10. 이스라엘 자손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 달 열나흗날 저녁에 여리고 근방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11. 유월절 다음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 날에,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시편 32)
1. 복되어라! 거역한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 사람!
2. 주님께서 죄 없는 자로 여겨주시는 그 사람! 마음에 속임수가 없는 그 사람! 그는 복되고 복되다!
3.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
4.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 가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셀라)
5.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거역한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님께서는 나의 죄악을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셀라)
6. 경건한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에, 모두 주님께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쳐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7.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를 재난에서 지켜 주실 분!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니, 나는 소리 높여 주님의 구원을 노래하렵니다.(셀라)
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 주마. 너를 눈여겨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
9. "너희는 재갈과 굴레를 씌워야만 잡아 둘 수 있는 분별없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말아라."
10. 악한 자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사랑이 넘친다.
11. 의인들아, 너희는 주님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정직한 사람들아, 너희는 다 함께 기뻐 환호하여라.
(고후 5:16-21)
16.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누가 15:1-3, 11b-32)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25.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26.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27.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29.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32.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잔치잔치 열렸네’ (또는 ‘잔치의 왕’, 또는, '잔치, 색다른 맛!'...)
이번 주일 4본문의 주제는, 지난주일 4본문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저는 지난주일 4본문 가운데서 주제어를, 시 63:3절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 으로 잡았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는 아직 회개할 기회가 있다! 이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 4본문의 주제 역시 회개입니다.
‘아! 사순절의 대의(大意, 大義)가 바로 회개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번 주 본문들은 ‘회개’의 빛깔과 그 맛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제가 여기서 ‘맛’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는, 조금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맛] ; 잊을 수 없는 만나의 맛
여호수아 5:9∼12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먹었다’입니다.
11∼12절에, “...먹었다∼먹었다∼먹었다”가 반복됩니다.
(각각 다른 먹을거리를 통해서 출애굽의 역사와 그 배신과 회개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처음 먹기 시작할 때가 마침 유월절이었습니다.(10절)
출애굽의 첫 기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하십니다.
* 그리고 약속대로 그 가나안 땅 소출을 먹으면서부터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 때 그들은 기억했을 것입니다. 민수기 11장에서 만나를 놓고 밥투정하던 기억 말입니다.
그들의 부모들이,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와 생선, 샐러드를 그리워하며 툴툴거리던 기억!(민 11:4-5)
일용할 양식 만나,
약속의 양식 만나,
생명의 양식 만나가 아주 밥맛없다고까지 하던, 그렇게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들던 기억!
4.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5.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6.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 저는 이게 궁금합니다. 40년 동안이나 매일 먹던 만나가 그치고 새로운 음식을 먹기 시작하니 참 행복했을까? 혹시라도 만나가 그립지는 않았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만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가 해주시던 이유식이요, 밥이요, 김치요, 된장찌개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와 생선과 샐러드 맛을 그리워하던 그들의 부모와는 달랐을 것이란 말입니다. 가나안의 새로운 음식이 한동안 행복했을 수는 있어도, 어떻게 그 만나의 맛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엄마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그 첫 음식을 말입니다. 아무튼, 더 이상 만나를 맛볼 수 없게 된 사건 속에, 우리의 상상을 넘는 많은 느낌과 기억이 담겨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만나에는 40년 깊은 맛, 하늘엄마의 손맛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서도, 진노하시면서도 끝내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가장 생생했을 것 같습니다.
진노하시고 회초리로 때리면서도 밥은 차려주시는 엄마!
40년 만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편과 서신서의 맛] ; '화해', 그 달고도 진한 맛
시편과 서신서 역시 ‘회개’라는 주제와 관련이 깊습니다.
* 시 32:1∼11 가운데서 특히 전반부는 회개에 대한 내용으로 꽉 차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맛으로 묘사하자면, 아주 쓰고 텁텁한 맛에서, 시원하고 톡 쏘는 듯 짜릿한 사이다 맛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탕자’의 노래일 것 같습니다.)
3.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
4.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 가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셀라)
5.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거역한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님께서는 나의 죄악을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셀라)
특히 10절에 나오는, ‘한결같은 사랑’은 그대로 지난 주 시편 63:3절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이어집니다.
** 고후 5:16∼21에는 ‘회개’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다른 맥락입니다만) 이미 여러 걸음 전진했습니다. 이미 환골탈태(換骨奪胎)했습니다. 더 이상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18∼20절에 ‘회개’와는 느낌이 다른 ‘화해’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맛으로 표현할 때, ‘회개’가 쓴맛이라면, ‘화해’는 단맛입니다.
그리고 진한 맛입니다.
생소한 맛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화해란 처음 만난 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상관하던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 분열이 극복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좀 비약하자면, 첫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화해’는 ‘달고도 진한 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사절’(20)로서 ‘화해의 직분’(18)을 수행하려면, 먼저 나부터 ‘달고도 진한 맛’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에게서 그런 달고도 진한 맛이 우러나야 합니다.
내가 품은 생각, 내가 하는 말, 내가 짓는 표정, 내가 하는 행동들은 과연 그렇습니까?
[복음서의 맛] ; 오미자 맛
* 누가복음 15:1∼3, 11b∼32, 오늘 복음서의 맛은 그야말로 오미자(五味子)의 맛입니다. 시고, 달고, 맵고, 쓰고, 짠맛!
억지로 갖다 붙여보자면, 초반 긴장감의 신맛, 허랑방탕 시절의 단맛, 이방인의 종처럼 돼지를 치던 시절의 매운맛, 그리고 아버지께 가면서 수없이 되뇌었을 회개의 쓴맛,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와 화해의 입맞춤과 잔치 내내 흘리는 회개와 감사, 그 눈물의 짠맛...
** 앞부분부터 먹는 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2c)
*** 방탕하게 살면서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던 작은 아들이, 먹을거리가 떨어지자 깨닫기 시작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집 떠나던 시절 작은 아들은 거의 사이코패스 수준이었습니다.
공감력이 바닥인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에는 아랑곳 않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배가 고파지니까 비로소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몸이 고달프니 자기의 허물이 기억납니다.
빗나간 자식을 향한 사랑이 깊을수록 몸을 치시는 까닭입니다.
이 과정에서 ‘쥐엄 열매’가 등장합니다.
예상과 달리 쥐엄 열매는 돼지들만의 먹이가 아닙니다.
달고 영양가 풍부한 콩입니다.
사람들도 즐겨 먹는 영양식품입니다.
광야의 세례요한이 이것을 먹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쥐엄열매와 메뚜기의 철자가 거의 같습니다.)
보석 무게의 단위인 캐럿이 쥐엄열매에서 나왔습니다.
쥐엄 열매 씨앗의 무게가 거의 일정해서 그것으로 다이아몬드 무게를 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음악의 기본음을 잡는 황종관으로 이런저런 도량형을 삼았습니다.
이 때 쓰인 것은 기장쌀이었습니다.
『성실문화』 56호, 150∼151쪽에 실린 임봉대목사님의 글을 인용합니다.
쥐엄나무는 성경에 비록 한 번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분포되어 있는 나무 중 하나이다. 쥐엄나무는 넓은 그늘을 제공하고, 열매로는 단백질이 함유된 콩이 열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많은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중략) 크고 가지가 무성한 푸른 나무인 쥐엄나무의 열매는 완두콩과 비슷하게 생긴 콩과의 식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콩과 식물들과는 달리 쥐엄열매의 꽃은 아주 작고, 빛깔이 엷으며, 단성이다. 열매는 길쭉한 것이 6인치 정도의 껍질 속에 대략 10개 정도의 콩을 갖고 있다. 이 콩들은 크기나 모양이 작은 옥수수알 같다. 쥐엄열매가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오래된 나무일뿐만 아니라, 널리 사용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에는 전혀 언급이 없고 신약성경에서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에 딱 한번 돼지들의 사료(눅 15:16)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 놀랍다. 콩은 다량의 당분과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상업적으로 많이 거래되고 있으며, 코코아 대용으로 사람들이 먹기도 한다.
성경과 달리 유대인들의 미슈나(장로들의 유전)이나 탈무드에는 쥐엄열매가 자주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은 쥐엄열매를 요한의 빵(Johannisbrot)이라고 부른다. 탈무드에 따르면, 지혜로운 랍비 시몬 바-요하이가 한 말에 따르면, 요한이라는 사람이 로마인들의 지배에 항의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갈릴리의 한 동굴에 들어가 12년 동안 쥐엄열매만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빵을 만들 때 설탕이 흔하게 쓰이지만, 2세기 전만 해도 단맛을 내는데 쥐엄열매 가루가 사용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쥐엄나무를 초콜렛 나무라고 불렀으며, 쥐엄열매 가루로 만든 빵은 “St John's Bread"(세례요한의 빵)이라고 했다. 마가복음 1:16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나와 있는데, 유럽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쥐엄열매를 먹었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 1930년대의 스페인 전쟁 때 양식이 없어 쥐엄열매를 먹은 아이들은 영양결핍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에도 지중해의 말타 섬과 그리스에서 전투를 하던 군인들과 말들이 쥐엄열매를 먹고 버텼다고 한다.
쥐엄열매는 고대 보석상들에 의해 무게를 재는 척도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재는 척도인 “캐럿”(Carat)이라는 말이 쥐엄열매인 “캐롭”(carob)에서 나왔다. 그래서 쥐엄열매의 학명이 Ceratonia siliqua라고 주어졌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의 유산을 갖고 세상에 나간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모든 재물을 다 탕진하고 돼지를 치는 일을 하며 쥐엄열매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오죽했으면 돼지들이 먹은 음식을 먹을까” 하고 탕자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쥐엄열매를 먹었다는 표현에서 아들이 그동안 죄책감도 없이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쥐엄열매를 무게를 재듯 자신의 죄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하략)
**** 아버지께서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가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20)
이 대목에서 우리 삼강오륜, 특히 오륜 가운데 가장 앞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생각납니다. (군신유의(君臣有義) 보다도 앞에 나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한 글자 ‘친(親)’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좀 지나친 상상이지만, 저는 이 글자를 볼 때마다-눅 15장과 연결하여- 나간 자식 기다리는 아버지가 해질녘까지 동구 밖 언덕 위 나무 위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며 자식 기다리는 것이 연상됩니다.
아들은 예행 연습했던 회개의 말씀을 아버지께 올립니다.(21)
그런데 연습했던 마지막 말-‘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을 하지 않습니다.
할까말까 망설였을까?
그래서 21절과 22절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이미 입맞춤으로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참고 창세 45:15 - 독일성서공회판 해설성경 참조)
15. 요셉이 형들과도 하나하나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제야 요셉의 형들이 요셉과 말을 주고받았다.
***** 이어서 가장 좋은 옷과 가락지, 그리고 신발을 받습니다.(22)
이것은 완전히 망가졌던 아들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독일성서공회판 해설성경 참조)
오늘 서신서 고후 5:17절에 나오는 “새로운 피조물”이 보입니다. 아버지의 용서로 이루어진 회복입니다.
****** 그리고 이어지는 잔치와 큰아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납니다.
저는 오늘 2013년 사순절 4주, 4본문에서, 큰 주제로 ‘회개와 용서’를 보았으며, 그 과정을 이루는 중요한 상징으로 ‘잔치’를 보았습니다.
죄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즉 예수님의 잔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잔치가 얼마나 풍성하고 흥청망청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음식의 종류와 양과 질이 많고 적음,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잔치의 핵심은, 지극한 의와 지극한 죄가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어울림', 이게 알맹이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용서의 과정이요, 혹은 절정입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부대끼고, 흔들리고, 불안했던 것입니다.
큰아들이 못마땅한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표현대로만 설명하자면, 그건 ‘탕자’를 위한 ‘살진 송아지’ 때문이었습니다.
살진 송아지 잔치!
(화목제물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그 제물을 준비할 능력없는 자식을 위해 아버지께서 손수 마련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주신 제물이 기억납니다. 어린양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저는 여기서 잔치의 알맹이를 보지 못하는 큰아들을 봅니다.
그게 살진 송아지건, 비쩍 마른 코다리 하나건, 중요한 것은 잔치의 알맹이입니다.
회개∼용서∼감사∼화해의 잔치, 화목잔치 말입니다.
추측컨대, 큰아들은 평생 잔치다운 잔치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 같습니다.
풍악이 울리는 잔치소리를 듣고는, 자초지종을 알기 전부터, 처음부터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25, 26)
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못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집인데도 못 들어갑니다.
탕자도 돌아온 제집입니다.
‘염소새끼 한 마리’ 타령을 들어보아도 그렇습니다.(29)
스스로 왕따시키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참 엉뚱하지만, 30절 말씀에서 큰 아들이 힐난하는 작은 아들의 '방탕잔치' 행동과 예수님의 '화목잔치' 행동이 연결되는 건 참 이상한 연상입니다. 작은 아들이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것(개역개정과 새번역, KJV, RSV 등은 ‘삼켰다’고 번역했습니다.)과 예수께서 창녀, 세리 등과 잔치를 벌이신 것은 아주 다른 것인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 비유의 말씀을 처음 듣던 종교지도자들은 이상한 기시감(旣視感)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리 투덜거리는 큰아들의 말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을까?
(이 대목에서 좀 더 많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만...)
오늘 복음서의 맛은 참 다양한 잔치의 맛입니다.
오미자의 맛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일생이 딱 오미자의 맛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조차, 춤을 추는 예수님으로 묘사한 ‘춤의 왕’이라는 노래는, 그대로 ‘잔치의 왕’이라는 제목으로 이어질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성찬식의 잔을 오미자 효소로 하기를 권하곤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 우리 인생의 맛이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잔치답지 않습니다.
잔치 알레르기 큰아들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고, 용서할 줄 모르고, 화해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고, 화해할 줄 아는 이들만이 진정한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돈 없어도, 콩 세알만 가지고도 잔치의 알맹이를 맛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라면 모두 일생 동안 내내, 예수님 잔치를 맛보며, 맛내며 살아야 합니다.
그걸 맛본 사람은, 그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절대 거절 못하는 법입니다.
[말씀동화] 쥐엄나무는 알지요 (으뜸 잔치 화목잔치!)
얘들아 안녕? 나는 쥐엄나무야. 나이는 환갑을 넘겼지만, 나무 나이로는 이제 한창 청춘이란다. 그래서 철만 되면 맛있는 열매를 다섯 가마나 거두지. 내 열매는 콩처럼 생겼는데 달고 영양가도 높아서 가축의 사료로도 으뜸이고, 가루를 내어 설탕처럼 쓰기도 하고, 사람들 비상식량으로도 사용하는 아주 고급 열매란다. 사실 나는 아주 유명한 나무야. 그런데 성경에는 66권 중에 딱 한 곳에만 나오지. 어디 나오게? 아는 사람??
그런데 내가 왜 유명한 줄 아니? 바로 다이아몬드 같은 진귀한 보석의 무게를 잴 때 나를 사용하기 때문이야. 내 (열매) 이름을 '캐롭(carob)'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캐럿(carat)’이라는 무게 단위가 나온 거지. 그건 바로 희한하게도 수많은 내 열매들이 거의 일정한 무게를 지녔기 때문이란다. 열매 한 개의 무게가 거의 완벽하게 0.2그램이야. 그래서 보석(다이아몬드)의 무게 1캐럿이 딱 0.2그램이 된 거지. 내 콩꼬투리는 아주 크단다. 한 개가 폭이 3센티미터가 넘고, 길이는 20센티도 넘어! 그 안에 콩이 10개 가까이 들었는데, 그 무게가 거의 일정하게 0.2그램이란 말이지. 어때, 참 희한하지?
나는 키가 7미터도 넘고 그늘도 깊어서 우리 마을 광장의 정자나무로 사랑받는 나무야.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내 밑에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정자나무로 살다보니까 나는 대단한 이야기꾼이 되었단다. 물론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이야기나무야. 그런데 그냥 듣기만 하는 게 아냐. 하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다보니까, 어떤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1급 이야기 감정사’가 된 거야.
오래 전 우리 마을에 최고의 이야기꾼 할아버지가 계셨어. 언제나 그 할아버지가 내 곁에 와 앉기만 하면,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렸단다. 그날도 할아버지가 내 그늘에 와 앉으셨고, 자연스레 동네 아이들과 아줌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지. 그런데 바로 그날 할아버지는 아주 소중한 비밀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어. 이 비밀이야기는 한 아이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단다.
“할아버지, 그런데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할아버지는 키도 작고 몸도 빼빼 말랐는데, 어떻게 할아버지 작은 몸 안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나요?”
“허허, 그래, 그게 굉장히 궁금하지? 이 할아버지 몸 안에는 수천, 수만 개도 넘는 아주 많은 옛날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건 아주 중요한 비밀인데,,, 오늘 내가 그 비밀을 알려주마. 사실 할아버지의 가슴 안에는 이야기보따리 한 개가 들어 있어요. 그 보따리는 수만 개, 수십만 개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속이 아주 넓단다. 마치 램프의 요정이 들어갔나 나왔다하는 그 요술램프 비슷한 거지. 이 이야기보따리 덕분에 할아버지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도 까먹지 않고 다 기억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과연 이 요술 이야기보따리는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걸까? - 이게 중요하단다 - 요술램프를 사용할 때 슬슬 램프를 문지르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이, 내 이야기보따리도, 보따리를 여는 비법이 있지. 그게 뭔지 아느냐? 그건 바로바로, ‘설렘’이야. 내 가슴 속 설렘과, 너희들 가슴 속 설렘이 바로 내 이야기보따리를 활짝 열 수 있는 열쇠란다. 나는 이야기보따리를 열 때마다 늘 가슴이 설렌단다. 만약 가슴이 설레지 않으면, 그날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이야기를 하나도 해줄 수 없게 되지.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는 설렘,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둘러앉아 군침을 꿀꺽 삼키는 너희들의 설렘, 너희들의 표정이 변화무쌍해지고, 눈이 쟁반만큼 커지고, 입이 벙글어질 것을 기대하는 설렘,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너희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게 될 이야기나무들이 과연 앞으로 어떤 열매를 거둘게 될까 하는 설렘... 이런 설렘으로 내 이야기보따리는 활짝 열리는 법이고, 뭉게뭉게 저 흰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법이지. 자 어때, 이제 알겠느냐? 사람이 몸이 크고 작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란다. 정말 중요한 건, 내 안에 이런 이야기보따리가 들어 있느냐 없느냐야. 자 이제부터 너희도, 이 할애비처럼 늘 옛날이야기 들을 때마다 설렘을 가지고 들어보렴. 그러면 너희 안에도 요술이야기보따리 하나가 만들어지게 되고, 그 안에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듯이, 그 보따리가 무럭무럭 자라게 될게야.”
어때, 대단한 이야기지? 난 그날 할아버지의 그 비밀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아! 이 옛날이야기가 바로 내 밥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여태 몰랐는데, 내 안에는 이미 요술 이야기보따리가 생겨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늘 가슴이 설레었고, 그 때마다 내 이야기보따리가 든든해지면서, 내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지고, 또 내 몸이 부쩍부쩍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단다. 어쩐지, 사람들이 다른 쥐엄나무보다 특히 내 열매가 맛있다고 칭찬했는데, 다 까닭이 있었던 거지!
그런데 얘들아. 바로 어저께 나한테 아주아주 신나는 일이 벌어졌단다. 무슨 일인가 하면,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옛날이야기꾼들 가운데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 ‘초절정 고수’를 만난거야. 그야말로 옛날이야기의 종결자라고나 할까? 그 이야기꾼의 이름은 바로 예수! 알고 보니까 이웃 고을 갈릴리에서는 이미 소문이 자자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꾼이더라고! 사람들의 병도 고치고, 목숨도 살려주고, 희한한 기적도 막 일으키고 그런 슈퍼 파워, 슈퍼 히어로라는데, 사실 난 그런 거는 별로 관심 없고, 내게 영양가 있는 바로 그거,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그거, 그게 궁금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 그분의 이야기는 정말 대단했어...
예수님은 우리 마을에 며칠 전에 들어오셨단다. 갈릴리에서 오래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잠깐 우리 마을에 들르신 거야. 소문대로, 예쁜 사람 미운사람 가리지 않고 만나주시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러셨어. 그날도 저 앞에 있는 우리 동네 소문난 말썽쟁이네 집에서 불량배들과 함께 밥을 잡숫고 있었단다. 그 불량배들은 다름 아니라 악덕 세금쟁이들이야.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죄인 중에 상 죄인들이지. 그래서 그 집 대문 앞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서성거리며 집 안을 가리키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어. 좋은 옷을 차려입었는데도 얼굴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어.
“저것 좀 봐, 저 예수라는 사람, 과연 소문대로구먼!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게다가 저들과 음식까지 같이 먹고 있잖은가? 소문대로 먹보요 술꾼인게야. 저런 게 무슨 선생이람!”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집 밖으로 나왔어. 그리고 궁시렁거리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문득 나를 바라보시겠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두근, 두근, 두근, 내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단다. 이윽고 뚜벅뚜벅 내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내 등을 다독다독 어루만지시더니, 내 그늘 아래 앉으셨지.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윽고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시작하셨단다. 자 이제부터 내가 예수님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 귀를 쫑긋 세워보렴. 너희들 설레는 마음이 느껴져야 내 이야기보따리가 활짝 열리는 거 알지? 그런데 이야기하다보면 약간 내 스타일로 하게 될지도 몰라. 바로 난, 쥐엄나무 스타일!
옛날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지. 어느 날 작은 녀석이 참 당돌하게도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아빠, 나 어디 좀 급히 쓸데가 있어서 그런데요, 유산의 내 몫을 줘요” 했다지?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유산을 나눠주고, 그 아들 녀석은 아빠의 무너지는 마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몫을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해버렸단다. 그 모든 재산을 탕진했을 때, 때마침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차마 유대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더러운 일까지 하게 된 거야. 바로 돼지 치는 일이었지. 더구나 그 몰인정한 주인은, “당신 끼니는 셀프예요” 했다지? 알아서 챙겨먹으라는 거야. 아무리 흉년이라지만 좀 너무했지..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려고 돼지와 경쟁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들은 먹은 게 없으니 돼지와 경쟁할 힘도 없어서, 그만 다 포기하고 터덜터덜 쥐엄나무 밑으로 걸어갔단다. 자존심도 상하고, 몸도 상하고, 말이 아니었지. 마침 쥐엄나무 추수철도 다 지나버려서 나뭇가지에는 열매 꼬투리가 몇 개밖에 달려있지 않았어. 그래도 큰 바람이 한번 불어서 그 열매가 떨어지길 바라면서, 그는 쥐엄나무 그늘 아래 털썩 주저앉았단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한참을 기다렸지. 이윽고 한바탕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이 지나가자 꼭대기에 달려있던 남은 쥐엄나무 꼬투리들이 투두둑 떨어졌어. 허겁지겁 달려들어 급히 쥐엄나무 꼬투리를 몇 개 까서 입에 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나머지 쥐엄 콩들을 다 털어서 손에 가득 담고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너무 힘이 없어서 그런지 수십 알 쥐엄콩이 그리도 무겁게 느껴진 순간,
“아! 내 죄가 이렇게 무겁구나! 그래도, 콩이 많으면 많을수록 배는 부르듯이... 죄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은혜는 깊어지지 않을까?”
허겁지겁 쥐엄콩을 다 먹고 난 아들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어. 한참 지나니 등이 따뜻해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문득 집 생각이 난거야. 어릴 적 나를 업어주시던 아버지의 든든하고 따뜻한 등이 생각 난거야. 그는 와락 나무를 끌어안았단다. 그리고는 마치 정말 아빠를 만나 아빠에게 말하듯이 나무껍질에 볼을 비비면서 이렇게 말했어.
“아빠 미안해. 난 정말 아빠 자식도 아니야. 하나님과 아빠한테 너무 큰 죄를 저질렀어. 이제부터 나를 종으로 삼아주세요. 열심히 일할게요. 밥만 먹여주시면 되요. 아빠, 나, 배가 너무 고파요”
이렇게 속에 있는 말을 쏟아내고 나니까 정말이지 마음속에 꽉 차있던 아주 무겁고 더러운 것들이 한꺼번에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이 시원해졌어. 그리고 불현듯 어릴 적 부르던 시편 노래가 기억나기 시작하는 거야.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 가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셀라)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거역한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님께서는 나의 죄악을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셀라)(시 32:3∼5)
이 시편을 읊조리고 나니까, 더욱 용기가 났겠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는 쥐엄나무 열매의 무게, 즉 내 죄의 무게와 시편 노래의 은혜를 번갈아 생각하며, 마침내 용기를 내서 죽을 각오를 하고 길을 떠났어.
바로 그 때 고향에서는, 아버지가 동구 밖 쥐엄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단다. 아들이 떠난 날부터 아버지는 이렇게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 쥐엄나무에 올랐단다. 마치 망대처럼 나무줄기에 바짝 붙여서 계단을 쌓아, 든든한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거지.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바라보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거야. 그런데, 이런 아버지의 마음이 쥐엄나무에게 통했던 것일까? 그리고 쥐엄나무끼리 서로 통한 것일까? 수백 리 밖 이방 땅 빈들에 있는 쥐엄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던 아들에게 아버지의 체온이 느껴졌으니 말이야.
여기서 내가 좀 유식한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한국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게 있단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다섯가지 기본적인 윤리를 가리키는 오륜, 그 오륜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이 있지.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친(親)’이라는 한 글자가 아주 중요하다는 건데... 이 글자 모양이 딱, 나무 위에 서서 멀리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내가 어제 예수님 옛날이야기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 정말 딱이야 딱! 대단하지 않니?
아무튼, 아들이 쥐엄나무를 껴안고 아버지를 느끼면서, 엉엉 아버지께 드리고 싶었던 말 다 쏟아내고 나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아버지 집을 향해 출발한 그 순간부터, 쥐엄나무 위에서 아들을 그리던 아버지의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어. 수백리 떨어져있어도 쥐엄나무끼리는 통하는 게 있거든. 물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통하는 게 좀 있었겠지? 그날부터 며칠 동안 아버지는 더 정성을 다해 아들을 기다렸고, 아들은 사력을 다해 아버지 집을 향해 걸어갔어. 마침내 아버지는 저 멀리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오는 아들을 발견했지. 그리고는 나무에서 냅다 뛰어내려 아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어.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에게 저런 힘이 있었다니? 아니지? 아까 내가 뭐랬어? 환갑은 청춘이야, 새파란 청춘!!
아버지는 봉달이 이봉주처럼 달려가서 아들을 얼싸안았어. 그리고 볼을 부비고 뽀뽀도 하고 그랬어. 유대인들이 뽀뽀하는 것은 반갑다는 뜻도 있고, 또 때론 모든 것을 다 용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단다. 아들이 뭐라뭐라 모기소리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버지는 순식간에 아들을 들쳐 업었지. 수수깡처럼 가벼워진 아들을 업고 뜨거운 눈물을 뿌리며 아버지는 또 달렸어. 마을 입구에서 만난 종에게 소리쳤어.
“얘 칠복아! 어서 가서 VVIP용 최고급 옷 한 벌이랑, 가락지랑, 깨끗한 신발 한 켤레 가져와라, 어서 서둘러!”
아들은 아빠의 따뜻한 등에 업혀서 뭐라뭐라 중얼거리다 말았어. 이미 다 용서한 아빠의 마음이 체온으로 느껴졌거든. 드디어 집에 도착한 아들은 일단 배를 채우고, 깨끗이 씻고 나서 멋진 옷을 갈아입고 잔치의 주인공이 되었지. 살진 송아지를 잡을 정도로 큰 잔치를 벌였단다. 우리 예수님은 역시 잔치가 뭔지 아시는 분이야. 살진 송아지는 원래 하나님께 바치는 화목제물로 으뜸인건데, 잔치 중의 잔치는 뭐니뭐니해도 화목잔치라는 거 아니겠어? 아들이 울며 말했어.
“아빠, 참 이상해요. 내가 거기서 매일매일 방탕잔치 할 때는 암만 마셔도 목마르고, 암만 먹어도 배가 안 불렀는데, 아버지 집 잔치, 화목잔치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배부르고 조금만 마셔도 시원해져요. 참 이상해요. 그러니까 우리 이제 종들에게도, 이웃에게도, 특히 배고픈 이웃사람들에게 이 음식 다 나눠드려요 아빠”
우리의 이야기꾼 예수님의 옛날이야기가 끝나자, 온 동네 사람들이 우레와 같이 크게 박수를 쳤어. 특히 세리쟁이들과 동네 왕따 창녀 아줌마들은 아주 펄쩍펄쩍 뛰면서 환호를 했지. 성질 급한 세리들은 냅다 집으로 달려갔어. 왜 갔을까? 가서 있는 돈 다 털어서 잔치 음식을 차리겠지? 그리고 가난한 동네사람들에게 일일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떡을 돌리겠지? 세리와 창녀들이 서로 맞장구치며 떠들어댔어.
“맞아 맞아! 예수님이 아까도 말씀하셨잖아? 잃은 양 한 마리, 빗나간 양 한 마리가 돌아오면, 얌전한 양 아흔아홉 마리 보다 더 기쁘다. 그러셨잖아!”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아직도 뭐가 남았는지 또 작은 소리로 궁시렁거렸어.
“아냐 아냐, 저 얘기는 궤변(詭辯)이야, 앞뒤가 하나도 안 맞아. 그럼 큰 아들은 뭐가 돼? 얼마나 착실하게 일했는데? 왜 큰 아들에게는 송아지 안 잡아주는 거야? 형평에 안 맞잖아”
지체 높은 종교인들의 궁시렁거리는 소리는 이내 마을 사람들의 환호에 묻혀버렸고, 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느낄 수 있었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유월절이 오고, 이어서 오순절이 올텐데, 그 때 내 안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열매가 열리게 될 거라는 예감이야. 여태 경험하지 못한 영양가 높고 달콤하고 아주 고소한 열매가 내 안에서 함박눈처럼 쏟아지게 될게 틀림없어. 어때? 너희도 예수님 옛날이야기 들으면서, 너희 속에 있는 이야기보따리가 느껴지지 않니? 그럼 너희도 나처럼 머지않아 오늘 예수님 이야기 열매, 화목잔치 열매 가득 추수하게 될 게 틀림없어.
나는 쥐엄나무야. 옛날이야기를 먹고사는 이야기나무지. 60살 환갑은 우리 같은 이야기꾼들에겐 한창 팔팔한 청춘이란다. 우리 안에는 늘 이야기 설렘이 있기 때문이지. 오늘 이야기 가운데 알맹이가 뭔지 기억하니? 그건 바로 잔치야. 잔치 중의 최고 잔치 화목잔치! 화목잔치는 나눠먹어야 제 맛이야!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의인이나 죄인이나, 예쁜사람 미운사람, 우리 편 너네 편,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함께 나눠먹어야 제 맛이 나는 게 바로 화목잔치야. 내가 알기로 예수님은 평생을 매일매일 화목잔치를 즐기며 사는 멋진 분이야.
얘들아 내가 누구지? 나는 쥐엄나무야 다이아몬드보다 옛날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이야기나무야. 얘들아 나를 꼭 기억해줘, 안녕∼!
[이정훈 지음, 2013년 3월 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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