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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4년 2월 23일 (주현절 7주) 예배준비 노트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일과 4본문]

 

(레위기 19:1-2, 9-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9.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10.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11. 도둑질하지 못한다. 사기하지 못한다. 서로 이웃을 속이지 못한다.

12.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13.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

15.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

16.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17.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18.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시편 119:33-40)

33. 주님, 주님의 율례들이 제시하는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언제까지든지 그것을 지키겠습니다.

34.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법을 살펴보면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지키겠습니다.

35. 내가, 주님의 계명들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기쁨을 누릴 길은 이 길뿐입니다.

36.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37. 내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주님의 길을 활기차게 걷게 해주십시오.

38.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맺으신 약속, 주님의 종에게 꼭 지켜 주십시오.

39. 주님의 규례는 선합니다. 내가 무서워하는 비난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40.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새 힘을 주십시오.

 

(고린도전서 3:10-11,16-23)

10.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20.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마태복음 5:38-48)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4본문을 하나로 꿰어주는 알맹이 단어를, 저는 ‘어리’라고 보았습니다.

‘어리’란, 어리석다는 뜻으로서, ‘어리다’, ‘어리석다’, ‘어리숙하다(어수룩하다)’는 식으로 쓰입니다.

이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내는 본문이 서신서본문 고린도전서 3:18절의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입니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띄는 대구(對句)는,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다음 말씀들입니다.

구 약(레위 19:8)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서신서(고전 3:17) “...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복음서(마태 5:48) “...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종합해보자면,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고 완전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어리숙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에서, 참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구약본문의 반복구는, “나는 주다”(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레위기 19:10,12,14,16,18)입니다.

또한 구약본문에는 “안 된다”, “못 한다”가 17회나 반복됩니다.

개역개정판 번역으로는 “...말며”, “...말라”가 도합 21회나 반복됩니다.

서신서본문에서 눈에 띄는 반복구는, “아무도”입니다.(고전 3:11, 18, 21)

복음서에서는 “... 해주어라”는 식의 말씀이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이상의 반복구들로 볼 때,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은 상당히 강력한 명령으로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상당히 강력하게 나를 향해 어리숙해져라, 어리석어지라고 하시는 겁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요?

 

 

① 구약(레위기 19:1-2, 9-18)

오늘 구약본문의 주제를 요약하면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입니다.(2)

곧 이어지는 9절과 10절 말씀의 요지는, 곡식과 과일을 추수할 때 적당히 남겨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과 이방 나그네들을 위해서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거룩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이게 하나님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리사욕에 민감한 세상살이에서 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는 일입니다.

이어지는 나머지 본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손해 보는 장사 절대 안 하는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오늘 하나님 명(命)은 어리석고 어리숙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 지키기 힘든 명(命)이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시편은 구약본문과 매우 긴밀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② 시편(119:33-40)

오늘 시편본문을 구약본문의 주제와 짝을 맞추어서 다시 읽어봅니다.

 

주님, 주님의 율례들이 제시하는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언제까지든지 그것을 지키겠습니다.(33)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36)

 

그러나 이 길은 참 쉽지 않은 길입니다.

구약본문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어리숙하게 살다가는 세상 동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이 뻔합니다.

호구라고 손가락질 받기 딱 좋습니다.

 

주님의 규례는 선합니다. 내가 무서워하는 비난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39)

 

그러나 주님말씀을 사랑하는 제자라면, 자녀라면, 견딜 수 있습니다.

오히려 큰 기쁨으로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계명들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기쁨을 누릴 길은 이 길뿐입니다.(35)

내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주님의 길을 활기차게 걷게 해주십시오.(37)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새 힘을 주십시오.(40)

 

 

③ 서신서(고린도전서 3:10-11, 16-23)

오늘 서신서본문은 세상 헛똑똑이들 때문에 분열되는 세상과 교회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고전 3:19, 욥기 5:13)

 

그래서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18)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어리석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어리석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나도 머리가 있는데, 어디까지,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④ 복음서(마태복음 5:38-48)

오늘 복음서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음의 끝을 보여주십니다.

이른바 어리석음의 ‘종결자’입니다.

 

전반부, 39-42절에서는 그냥 어리숙한 사람처럼 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오늘 구약본문의 ‘추수 때 적당히 남겨두고, 적당히 손해보는 것처럼 살아라’하시는 명(命)보다는 좀 더 셉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의 결론은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였는데, 예수께서는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44)

 

물론 이건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 말씀이시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원수를 사랑하라시는 것일까요?

바로 다음 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45)

 

자녀라면, 그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조금 앞, 3주전 본문과 비교해보자면, “하나님의 자녀”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과 오늘 말씀을 종합해보니, ‘원수사랑’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태 5:9)

 

그리고 오늘 예수님 말씀의 끝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자녀란 부모를 쏙 빼닮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동기간에도 닮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큰 형님이신 예수님을 닮는 것 말입니다.

어리석음의 대명사 십자가 말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원수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 우리 예수님 말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이런 예수님을 고스란히 닮은 사람이 바로 손양원 목사입니다.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사형 직전에 살려서 양아들로 맞아들인 사람입니다.

세상눈으로는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바보라고 부릅니다.

이런 호구 같은, 바보 같은 삶은 구멍 숭숭 뚫린 것 같으면서도 알찬 인생입니다.

오늘 예수님말씀 “너희도 완전하여라”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함이란, 꽉 차서 꽉 막힌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바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서 확 통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의 길입니다.

이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게 하나님 자녀의 길, 평화의 길입니다.

 

 

⑤ 나머지

* 저는 다른 건 다 참아도 남이 나의 진심을 오해하는 건 못 참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그럴 때마다 말이 많아지곤 합니다.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온다는 말도 듣습니다.

 

그래서 오늘 구약본문의 ‘공정한 재판’(15절)이 마음에 쏙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 『하늘양식』을 읽다가 다른 감동을 받았습니다.(2014. 2/21 금요일, 안양교회 임용택 목사)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고전 6:7)

 

때론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을 멈추고, 바보처럼...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는 것!

제가 정말 잘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하늘 아버지처럼 완전하려면, 거룩하려면, 가야할 길, 또 하나의 어리석은 길입니다.

 

** 오늘 구약본문은 오늘 우리 부끄러운 모습을 환히 비춰주시는 거울 같습니다.

10절 말씀은, 최근 불거진 ‘아프리카 박물관 사태’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아프리카에서 초청한 흑인 예술가들을 홀대하는, 해도 너무하는 우리 모습 말입니다.

이건 절대 손해 보는 장사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참 비인간적인 부끄러운 행위입니다.

 

13-14절 말씀은, ‘염전 노예 사건’을 다시 보게 하십니다.

몸도 성치 않은 어리숙한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이 비인간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15절 말씀은, 딱 요새 이상한 재판 사태들을 다시 보게 하십니다.

백번 양보해도,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한 사회의 재판관(또는 심판)만큼은 절대 권력과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적당히 속아주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바보의 길, 어리석은 길을 가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문득 출애굽기 18:21-22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드로가 모세에게 한 말입니다.

 

21.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 그리고 그들을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으로 세워서, 22. 그들이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재판하도록 하게. 큰 사건은 모두 자네에게 가져 오게 하고, 작은 사건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하도록 하게. 이렇게 그들이 자네와 짐을 나누어 지면, 자네의 일이 훨씬 가벼워질 걸세.(새번역)

   

 

[말씀 동시] 나무처럼 살기 (이선구 지음. 『성실문화』 77호에서 퍼옴)

한 나무가 있었다

어릴 때는 제일 작아 누구보다 햇빛을 늦게 받았고

자라서는 온몸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딱따구리가 쪼거나 멧돼지에게 받혀도

딱따닥, 쿵, 신음소리 외엔 아무소리 없었고

 

탐욕스런 설치류와 무자비한 인간이 열매를 가져가도

다음 해, 더 풍성하게 열매 열릴 뿐 아무 반응 없었다

 

늙어서는 베어져 자리 내주고

몸뚱어리는 잘라져 땔감 되었는데

 

땔감이 타고 있을 때 너는 보았나?

소리 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한줄기 연기를!

 

 

[말씀 시조]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7호에서 퍼옴)

오른뺨 때리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고 그 위해 기도하라

평화 이루는 자여 천부자녀 되리니

 

 

[말씀 한시] 네 집 개 만큼만이라도 사랑하라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 77호에서 퍼옴)

近來一名師 (근래일명사)근래의 한 명사는

肥肉養猛犬 (비육양맹견)맹견에게 좋은 고기 먹이며 기르면서

飢餓乞丐敲 (기아걸개고)걸인이 구걸하러 문 두드리면

薄待逐門前 (박대축문전)문전에서 박대하며 내쫓았다.

模倣孫牧士 (여수손목사)원수를 아들로 받아들인

納子猶讐怨 (납자유수원)손 목사를 배우라

爾往從耶穌 (이왕종야소)이웃을 네 집 개 만큼만이라도 사랑하라

愛人如家狗 (애인여가구)그 후에, 가서 예수를 좇으라.

 

 

[말씀 서예]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 77호에서 퍼옴)

 

 

 

 

[말씀 노래] 오른뺨을 때리거든 (이정훈 지음. 새야새야 가락 『성실문화』 77호에서 퍼옴)

1.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 네속옷을 탐하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사랑많은 천부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2.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위해 기도하라, 천부처럼 사랑하라 사랑해야 자녀니라

완전하신 천부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사랑많은 천부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말씀 동화] 왕십리 박바보네

저는 소치에요, 박소치(朴小痴)!

작을 소, 어리석을 치, 작은 어리석음이란 뜻이죠.

그래서 아이들이 종종 바보라고 놀린답니다.

 

그런데 저는 공부도 좀 하는 편이고, 그림도 꽤 잘 그려요.

리코더도 잘 불고요, 사물놀이도 잘한다고 칭찬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왜 애들이 바보라고 놀리느냐고요?

그건 이름 때문만은 아니에요.

가끔 제가 하는 행동 때문일거에요.

 

학교에서 급식을 먹다가, 아이들이 맛있는 반찬 한 개만 달라고 하면, 꼭 두 개를 주죠.

어제도 오리고기 한 점만 달라는 친구에게 두 점을 집어줬어요.

지우개 빌려달라면 아예 필통을 통째로 빌려주죠.

통이 커서 그러냐고요?

그건 아니고, 뭐, 다 사연이 있죠.

어른들은 이런 걸 ‘집안내력’이라고 부른답니다.

 

저희 집 가훈(家訓)이 ‘5리를 가자거든 10리를 가주어라’거든요.

저희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가훈이에요.

저희 집안은 원래 조상 대대로 인천이 고향이었어요.

그런데 고조할아버지께서 이 가훈을 지으시면서 왕십리로 이사하셨죠.

왕십리(往十里)라는 뜻이 딱 ‘십리를 가라’는 뜻이라네요?

 

고조할아버지께서는 왕십리 정착하시면서 채소농사를 지으셨대요.

그런데 채소를 추수할 때는 언제나 십분의 일은 밭에 남기셨대요.

감자나 고구마를 캐도 그만큼 남기셨고요.

가난한 동네 고아들이랑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뜨내기들이 굶지 않기를 바라신 거죠.

 

처음에는 이웃 농부들이 바보라고 수군거리더래요.

그러나 할아버지의 부지런하고 철저한 생활모습을 보면서 사람들 눈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죠.

더구나 나눠줄수록 점점 더 풍년이 드는 할아버지 농사를 지켜보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사람까지 생길정도였대요.

 

맞아요, 저희 집은 교회에 다녀요.

고조할아버지께서 인천 사실 때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셨답니다.

인천에서도 농부의 아들이셨던 할아버지께서는, “내 아버지는 농부시라”는 예수님 말씀(요한 15:1)을 처음 들으시고는, ‘어? 울 아버지도 농부신데?’ 이러면서 그냥 교회에 등록하고 주일학교에 출석하기 시작하셨대요.

어른들께서는 할아버지의 교회등록 사건이야말로 우리 가문 역사상 가장 빛나는 일이었다고 자부하시죠.

그리고 밤이고 낮이고 틈만 나면 성경말씀을 외우시려고 애쓰셨죠.

 

신분이 낮고 가난해서 서당에도 못나가게 늘 한(恨)이셨대요.

그러던 차에 귀한 복음서 책을 구해서 열심히 읊조리신 거죠.

선비들보다 더 열심히, 밤이고 낮이고 틈만 나면 성경말씀을 읽고 외우려 애쓰셨답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어요.

원래 글 외우는데 소질이 없으셨는지, 성경말씀이 영 안 외워지시더래요.

 

그래서 어느 날 크게 마음먹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셨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참으로 오묘한 지혜를 주시더라죠?

그래서 마침내 마태복음을 통째로 외우시게 되었답니다.

그 비법이 무어냐고요?

정말 궁금하죠?

 

저희 할아버지께 처음 복음을 전해주신 분은 조원시라는 선교사님이셨대요.

영어 이름 존스를 우리 식으로 조원시라고 불렀다네요?

저희 할아버지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지도해주신 분인데, 나중에 조 목사님이 서울로 이사하시는 바람에 저희 할아버지도 서울로 이사 오신 거래요.

그러던 어느 날 고조할아버지께서 잔뜩 흥분해서 조원시 선교사님을 찾아가신 거예요.

그 당시 조 목사님은 서울에 있는 감리교 신학당에서 교장선생님으로 계실 때였죠.

 

“조 목사님, 제가 드디어 마태복음 산상수훈을 다 외웠습니다.”

 

“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외워보렴”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한 줄도 안 빼먹고 끝까지 다 외우셨대요.

그러자 조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래요.

 

“와! 정말 놀랍다. 그 긴 내용을 하나도 안 틀리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인걸?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정말 중요한 건, 성경말씀은 외우는 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거, 그 말씀을 실천하는 거란다!”

 

“예 목사님, 바로 그거예요! 제가 바로 그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니까요!”

 

“어? 그게 무슨 뜻이지?”

 

“아,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제가 원래 외우는 데는 아예 소질이 없었어요. 그래서 한 절을 외우면 그 전에 외웠던 말씀은 까맣게 잊어먹을 정도였죠. 그래서 하나님께 제발 말씀 잘 외울 수 있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드렸더니 지혜를 내려 주셨거든요. ‘말씀을 실천하면 자연히 외워지느니라’ 이런 음성이 들려왔어요!”

 

“뭐라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래? 굉장히 궁금하네?”

 

“예, 예,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오른뺨 왼뺨’ 말씀 있잖아요? 얼마 전에 제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저희 동네 술주정뱅이 하나가 비틀비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제 따귀를 때리는 겁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서 그 사람 멱살을 잡았죠. 그런데 갑자기 불현 듯 그날 새벽기도 마치고 외우려고 끙끙거리던 말씀이 기억나는 거예요. 바로 그 말씀이었거든요. ‘오른뺨, 왼뺨!’ 그런데 그 정신없는 상황 중에도 가만 생각해보니까 제가 오른뺨이 아니라 왼뺨을 맞은 겁니다.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냥 멱살 잡은 손을 슬며시 풀면서 그 술주정뱅이의 왼손을 붙잡고 제 오른뺨을 툭 쳤죠. 그랬더니 그 사람 표정이 좀 이상해지더군요. 술이 확 깨는 것 같았어요. 평소 제 밭농사가 잘되는 걸 질투하던 이웃이었거든요.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사람이 마을에서 제일 농사를 잘 지으니까 심술이 나서 그랬나 봐요. 아무튼 정말 신기한 건 그날 온종일 이 말씀이 제 마음과 몸 안에서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겁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말씀을 머리보다 몸이 더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저는 본격적으로 말씀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밭 끄트머리 한 평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옆 땅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두 평을 더 가지라고 했죠. 그랬더니 영 안 외워지던 이 말씀이 또 송두리째 외워지는 겁니다.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저희 할아버지의 증언을 넋을 놓고 듣고 있던 조원시 선교사님 입이 딱 벌어지더래요.

해물탕 큰 조개 입처럼 아주 딱 벌어지더래요.

할아버지께서는 아주 더 신바람이 나서 오토바이처럼 연달아서 다다다다 다 털어놓으셨대요.

 

“또 ‘오리, 십리’말씀 있잖아요? 이튿날 제가 밭에서 땀나게 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일본 순사가 저를 부르더니 무 한 자루를 던져주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걸 짊어지고 따라오라는 겁니다. 자기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저더러 그 무거운 걸 메고 따라오라는 거였어요. 오리 만 가면 수레가 있으니 거기 실으면 된다나 뭐라나? 땀 흘려 일하고 있는 사람을 이렇게 부려먹다니, 아무리 식민지 백성이라지만 해도 너무 하네, 제 마음 속에 부아가 막 치밀어 올랐죠. 그러다 또 순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떠오른 거예요.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그래서 제가 그 밉살스런 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사님 걱정 마세요. 제가 순사님 댁까지 짊어지고 가드릴게요. 저희 동네 이름이 왕십리잖아요? 오 리만 가면 저희 동네 망신이거든요, 십리는 가야 합니다. 십리를 가드리는 게 기본이거든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뒤로 이 말씀은 완전히 제 몸에 박혀서 제 말씀이 되어버렸어요. 목사님, 제가 너무 흥분해서 말이 많았네요. 제가 중요한 결심을 하나 했거든요. 그걸 말씀드리려 했던 건데... 아무튼 제가 말씀을 실천하면서 외우기로, 그렇게 마태복음 28장 끝까지 통째로 외워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처럼 기억력 나쁜 사람이 마태복음을 통째로 외울 수 있다면, 아마 가문의 영광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겠죠?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 뒤로 조원시 목사님은 나이가 아들뻘 되는 저희 할아버지를 더 각별히 아끼고 사랑해주셨대요.

그러나 조목사님은 안타깝게도 이듬해 미국으로 떠나셨죠.

21년 동안이나 한국에서 선교를 하시다가 노부모님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저희 할아버지를 아들처럼 아끼고 격려해주시던 조 목사님은 떠나셨지만, 할아버지의 말씀 외우기, 말씀 실천하기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답니다.

 

그렇게 10년을 말씀과 씨름하고, 말씀과 춤을 추시던 할아버지 연세가 어느덧 서른이 되던 해였어요.

이젠 누군가 툭 치면 자동적으로 툭하고 쏟아져 나올 정도로 마태복음 박사가 되셨을 무렵이죠.

그런데 바로 그 해, 기미년 삼월 일일, 전국적으로 광복(光復)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벌어진 겁니다.

동네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가슴이 조마조마 했대요.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서셨답니다.

동네사람들을 모아 놓고 마태복음 말씀을 외치셨대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저 원수 같은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내야 할 때입니다.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저 원수들을 진짜 사랑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저들에게 천년만년 굽실거리며 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저 원수들을 제대로 사랑하는 길은 저들이 더 죄짓지 않도록 이 조선 땅에서 몰아내는 길, 그게 최선의 길입니다. 자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모두 조선의 광복을 외치러 나갑시다. 힘차게 만세를 부르러 나갑시다, 여러분!”

 

가만 보니까 제 이름이 작은 바보, 소치(小痴)라면, 우리 고조할아버지는 대치(大痴)가 아니었을까요?

큰 어리석음! 큰 바보!

자기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무작정 광복을 외치러 뛰어나가신 분!

성경말씀이 시키시는 대로 그냥 뛰어나가신 분!

 

그러고 보니까 박대치, 박바보는 우리 할아버지뿐이 아니었어요.

온 동네, 아니 온 나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두 큰 바보들이었어요.

유관순 할머니처럼 감옥에서도 만세를 외치시는 바보들 말이에요.

 

삼일절만 되면 우리 아버지가 그러세요.

 

“소치야, 네 이름을 평생 잊지 말거라. 네 할아버지처럼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원수에게 굽실거리지 말고 진정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거라. 지금 대한민국에는 원수를 진정 사랑하는 바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구나. 원수를 진정 사랑하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나를 망가뜨리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저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거라. 그리고 내 재산, 내 목숨을 아끼지 말고 정의와 평화를 외치거라. 그게 저 원수들이 더 이상 죄짓지 않게 하는 길이다. 그게 저 원수들과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어두컴컴하게 살지 않고 참 빛을 되찾아 빛나게 사는 광복(光復)의 길이다. 그게 바로 말씀대로 사는 바보의 길, 십자가의 길, 예수님의 길이란다.”

 

여러분, 제 이름 소치(小痴), 어때요?

여러분은 바보가 되는 게 두려우세요?

성경말씀대로 사는 바보의 길이 아직도 힘들어 보이세요?

 

 

[이정훈 지음, 2014년 2월 23일 주일 아침]

(* 소치의 이름은 소치(小痴) 허련 선생에게서 따왔습니다. ** 성경을 실천하며 외우는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이덕주, 『이야기 한국감리교회사』 감리교신학대학교, 102-105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