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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4년 2월 16일(주현절 6주) 예배준비 노트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同役者)”

 

[성서일과 4본문]

(신명기 30:15-20)

15.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16.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17.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18.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20.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땅에서 당신들이 잘 살 것입니다."

 

(시편 119:1-8)

1. 그 행실이 온전하고 주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2. 주님의 증거를 지키며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다.

3. 진실로 이런 사람들은 불의를 행하지 않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4.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법도를 주시고, 성실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5. 내가 주님의 율례들을 성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내 길을 탄탄하게 하셔서 흔들리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6. 내가 주님의 모든 계명들을 낱낱이 마음에 새기면, 내가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7. 내가 주님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

8. 주님의 율례들을 지킬 것이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고린도전서 3:1-9)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4.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6.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7.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8.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마태복음 5:21-37)

21.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25.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2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27.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31.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어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

33.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가 또한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큰 임금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4본문을 하나로 꿰어주는 공동 알맹이는, <말씀>입니다.

구약과 시편은 그 말씀을 청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신명 30:16,19 / 시편 119:1,2)

서신서와 복음서는 그 말씀의 알맹이를(핵심을) 제대로 먹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주현절 6째 주일 성서일과 4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얻은 가장 감동적인 구절은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입니다.

이 말 표현이 매우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각 본문들의 주인공인 모세, 바울, 예수님, 그리고 익명의 시편기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 바울, 예수님... 이 분들이 모두 엄마아빠의 마음으로 자식들에게 남기시는 말씀 같습니다.

유언 말입니다.

그래서 안쓰러운 마음과 애절한 마음이 묻어납니다.

 

 

① 구약(신명기 30:15-20)

오늘 구약본문의 주제를 요약하면 <말씀 청종(聽從)>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눈에 띄게 반복하는 단어는 “당신들”입니다.

이 짧은 본문 가운데 자그마치 19번이나 나옵니다.

미리 얘기지만, 서신서는 “여러분”이 11번 나옵니다.

복음서는 “너희”(11), “너, 네”(14)가 합쳐서 25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엄마아빠의 간곡한 느낌이 더 듭니다.

 

구약본문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앞부분 15-16절의 내용이 뒷부분 19-20절에 반복됩니다.

그런데 한층 강화된 느낌입니다.

 

앞부분에 없었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라고 강조합니다.(19)

앞부분과 뒷부분 반복된 알맹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 청종(聽從)하라’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고 잘되고 복 받는다고 거듭 가르치는 것입니다.

중간부분 17-18절은, 만약 그 말씀 청종하지 않으면, 자연히 우상숭배와 멸망으로 흘러가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말씀을 점층법을 써가며 거듭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신명기(申命記)란 하나님의 명(命)을 거듭[申]해서 남긴 책입니다.

오늘 본문의 자리는, 모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습니다.

못난 자식과 같은 백성들, 어리버리하고, 헛똑똑이 투성이 저 백성들이 하도 안쓰러워서 거듭거듭 명을 내리는 것입니다.

 

 

② 시편(119:1-8)

오늘 시편본문의 주제는 <‘말씀 청종(聽從)하는 자세’>입니다.

“행실이 온전하고”(1),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찾고”(2), “불의를 행하지 않고”(3), “말씀을 낱낱이 새기”고(6),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하”는(7)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4, 5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성실하게” 그 말씀 지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성실하게∼! 반복하는 이 구절을 반복해서 읽다보니 문득, ‘삼근계’가 떠오릅니다.

다산 선생이 어리버리한 제자 황상에게 내린 계명과 같은 말씀공부 자세입니다.

“부지런하라, 부지런하라, 또 부지런하라”는 ‘삼근계(三勤戒)’입니다.

‘⑥나머지’에서 자세히 소개합니다.

 

 

③ 서신서(고린도전서 3:1-9)

오늘 서신서본문에서 바울은 엄마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단단한 음식(밥)”을 감당하지 못해서 젖만 먹였다고 합니다.(2)

“인간의 방식대로” 살며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3) “어린아이”(1)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젖만 먹는다는 것은 말씀의 알맹이를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맹이를 들려줘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사람”(x4, 1,3,4)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제 아무리 성경박사 할아버지라도, 바울의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방식대로”(“세속적인 인간의 생활”로, 공동번역) 사는 한 말입니다.

시기와 싸움... 언제 나는 이런 멍에로부터 훨훨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언제라야 ‘말씀’의 알맹이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부분, “육에 속한 사람”이 “인간의 방식대로”살아가는 모습을 바로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낱낱이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다투고 시기하며 무시하는(마태 5:22), 간음하는(28절, 32절), 그리고 탐욕, 과욕(過慾)한(37절) 우리의 모습입니다.

 

 

④ 복음서(마태복음 5:21-37)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온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말씀의 알맹이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 과정입니다.)

먼저 말씀의 껍데기(형식)을 하나하나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곧이어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x4, 22,28,32,34)를 반복하며 말씀의 알맹이를 선포하십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알맹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흐릿해질 때, 우리 사이에 다툼(시기와 무시)가 일어납니다.

그 사랑이 흐릿해질 때, 형제자매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이 변질하여 간음죄가 들끓습니다.

(27-30절과 31-32절은 한 주제로 보았습니다.)

그 사랑이 흐릿해질 때,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하고, 돈, 권력, 내 신념을 더 의지하는 과욕의 사람으로 변질합니다.

그 사랑이 흐릿해질 때, 이렇듯 우리는 “인간의 방식”,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알맹이 맛을 제대로 살린, 바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제대로 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여러분은 이 밥상을 받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오늘 메뉴, 예수님의 레시피가 마음에 드십니까?

 

 

⑤ 정리

오늘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9절)

아직도 젖만 먹는 어린아이 같은 상태로는 어림없는 말입니다.

젖만 먹는, 젖만 찾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장성한 사람, 세속적인 인간의 방식에서 한걸음 벗어난 사람이 받을만한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 에수님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 주님의 제대로 된 제자가 되려면, 주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청종의 자세를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청종이란, 말씀의 껍데기만 핥고만 있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말씀의 알맹이를 제대로 맛있게 먹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속맛을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상-탐욕스레 물질을 즐기는 맛입니다.

세상 온갖 조미료 맛에 길들여진 혀는 재료의 본디 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내 혀가 말씀의 본디 맛을 느낄 수 있으려면, 세상 조미료 맛에 길들여진 혀를 닦아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간 내가 즐기던 돈맛, 권력맛, 이런저런 세상맛들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⑥ 나머지

*책 소개글 [정민.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문학동네(2011)]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전남 강진에 유배하던 18년 동안 적지 않은 이들이 배움을 청하러 그의 처소를 찾곤 했다. 다산은 서당을 열기도 했는데, 유배 이듬해인 1802년 다산의 서당을 찾은 15살 소년이 있었다. 지방 하급관리인 아전의 아들 황상(1788∼1870)이었다. 스승의 이름에 견줄만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었기에 그간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인물이다. 이해타산의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 미미할 수도 있는 황상이란 캐릭터를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새롭게 복원해냈다. “부지런하라 부지런하라 부지런하라”던 스승의 ‘삼근계(三勤戒)’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담아 실천했던 우직한 산림의 선비로 다시 태어났다.

이 책은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양반도 아니고, 집안도 가난하며, 머리도 남보다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소년 황상이 다산을 만난 이후 변모해가는 과정을 풀어냈다. 처음 다산을 만나던 날 황상은 자신이 너무 둔하고, 앞뒤가 꽉 막혔으며, 답답한 아이라고 고백한다.

이 때 황상이 사용한 한자는 둔할 둔(鈍), 막힐 체(滯), 어근버근할 알(戛)이었는데, 스승은 재빠를 민(敏), 날카로울 예(銳), 빠를 첩(捷) 세 글자로 대구를 맞추면서 재빠른 천재보다 미욱한 둔재의 노력이 훨씬 더 무섭다고 일깨워주었다.

황상은 스승의 이 말씀을 명심누골(銘心鏤骨), 마음에 새기고 뼈에 아로새겼다고 한다. 다산이 끊임없이 부지런하라며 독려한 공부는 과거에 합격해 출세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변화시키는 공부를 중시한 유학(儒學)의 본령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황상이 76세이던 어느 날,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한참 책을 베껴 쓰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물었다. “그 연세에 무슨 영화를 보시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하십니까.” 황상의 대답은 이랬다.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께서는 이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그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이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베껴 쓰는 초서(抄書) 공부를 다산은 중시했다. 황상도 이 공부를 죽을 때까지 한 것이다. 다산은 “공부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초서를 통해 그 요령을 익힐 수가 있다. 처음 보는 내용은 따로 적어두어야 한다”고 자식과 제자를 가르쳤다.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이 남긴 글에 의하면 황상은 다산이 가장 아낀 제자였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의 도탑고 질박한 정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이기에 200년 전 사제의 만남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중앙일보 배영대 기자)

 

 

 

[말씀 동시] 암울한 세상 [이선구 지음, 『성실문화』77호]

마태복음을 읽다가 요즘 세상을 보았다

 

형제간에 만든 상처 피가 끝없이 흐르고

법정은 초만원으로 변호사가 배가 불렀다

인터넷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음란물에

날로 커져가는 가정의 풍파

진실한 맹세는 둘째 치고 거짓약속이 판을 친다

 

이건 세상 살다보면 그려지는 지옥풍경

어디서 많이 보듯 친숙하고 친근한데

지옥에 가더라도 두려울 것 하나 없겠다.

 

 

 

[말씀 시조]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77호]

형제자매 향하여 바보라 모욕하고

마음속 음욕품고 번드르르 말만할 때

아뿔싸 회개하여라 지옥문이 가까워

 

 

 

[말씀 한시] 바보가 없다면 무척 심심할 꺼야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77호]

高驕天生愚 (고교천생우)하도 잘난척들을 해대서 하늘이 바보를 내셨다

老聃祝痴僕 (노담축치복)노자는 바보를 축하했다

無愚世無聊 (무우세무료)“세상에 바보가 없다면 무척 심심할 꺼야”

辱者當投獄 (욕자난면옥)바보라고 욕하는 자는 지옥에 가리라.

 

 

 

[말씀 서예]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77호]

 

 

 

 

 

[말씀 노래] 하나님이 지어주신 어여쁜 사랑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77호]

(‘아리랑’에 맞추어) 

1. 하나님이 지어주신 어여쁜사랑, 형제사랑 자매사랑 거룩한사랑

    형제자매 모욕하고 바보라하면, 살인자처럼 떨어질곳 지옥이란다

2. 하나님이 지어주신 어여쁜사랑, 형제사랑 자매사랑 거룩한사랑

    형제자매 바라보고 음욕품으면, 간음죄로 떨어질곳 지옥이란다

3. 하나님이 지어주신 고운사람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맑은사람아

    천지간의 형제자매 사랑하거라, 진심으로 지성으로 사랑하거라

 

 

 

 

[시편송서(詩篇誦書)] 시 119:1-8)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77호]

(‘자장가’ 가락, ‘천자문 독송’ 가락에 맞추어)

 

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5.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다함께]

8. 내-가 주-의 율례-들을-,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말씀 동화] 산석(山石)이가 다산(茶山)선생님 제자가 되었어요!

 

산석(山石)이는 시골어린이에요.

지금으로부터 226년 전인 1788년 어느 날, 한반도의 끝자락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죠.

진짜 이름은 황상(黃裳)인데, 아기 때부터 그냥 산석이라고 불렸답니다.

산에 가면 흔하게 있는 돌덩어리, 너무 흔해서 귀하지 않은, 그런 이름이네요?

 

산석이는 한양에서 1천 리 길이나 되는 까마득한 시골구석 관청에서 일하는 아전의 자식이었어요.

물론 부자도 아니었죠.

그런데 아전이 뭐지?

시골 오지마을 9급 공무원쯤 되나?

 

아전을 너무 얕잡아 본 걸까요?

아니에요. 어쩌면 아전은 그보다도 더 낮을 수도 있어요.

요사이 9급 공무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세요?

게다가 열심히 공부만 하면 직급이 점점 올라갈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그 당시 아전은 아무리 공부 잘해도 양반이 될 수는 없는 시절이었죠.

왜냐하면 지금의 공무원 시험과 같은 과거시험 볼 수 있는 자격조차 없었거든요.

 

가난한 시골 아전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산석이는 늘 씩씩했습니다.

산 돌멩이처럼 씩씩하게 이리저리 잘도 굴러다니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산석이네 마을 앞산에는 절대 굴러다니지 않는 든든한 산석(山石)이 하나 있었어요.

마을에서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바위인데 그 모양이 딱 사람 얼굴처럼 생겼답니다.

뉘엿뉘엿 해질 무렵이면 그 큰 바위얼굴은 석양빛을 받아 인자한 할아버지 얼굴로 빛나기 시작합니다.

산석이는 매일 매일 그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자기 이름이 산석(山石)이라 더 친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석이네 동네가 온통 시끌벅적해지는 커다란 일이 벌어졌어요.

옆집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동구 밖 주막집에 한양에서 큰 선비 한분이 오셨다네요?

산석이는 동무들과 함께 냉큼 주막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주막집 울타리 밖에는 이미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웅성웅성 기웃 기웃거리고 있었어요.

 

이미 열다섯 살 청소년이었던 산석이는 어른들 뒤에서도 발돋움만 하면 주막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어요.

까치발을 하고 자세히 보니, 처음 보는 선비님 한 분이 거기 계셨어요.

한양에서 귀양살이 오신 분이라 비록 행색은 초라했지만, 멀리서도 그 분의 눈빛은 밝고 맑았어요.

그런데 선비님 얼굴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던 산석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네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더라? 분명히 처음 보는데, 도대체 어디서 보았지?’

 

그 순간 번뜻 기억이 났어요.

그건 바로 산석이네 앞산 큰 바위얼굴이었어요.

 

‘맞다 맞어, 큰 바위얼굴하고 똑 닮았는걸?’

 

그날부터 산석이는 틈만 나면 동구 밖 주막집으로 달려가 선비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기 시작했죠.

큰 바위얼굴을 닮아서일까? 왠지 선비님이 낯설지 않고 점점 정답게 느껴졌어요.

큰 선비님이 오시자 인근 고을 잘사는 양반집 자식들이 하나 둘씩 글공부를 배우러 오기 시작했어요.

마침내 선비님께서 주막집에 서당을 차려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죠.

천자문 읊조리는 소리가 주막집 울타리밖에 울려 퍼지면 산석이는 밖에서 흥얼흥얼 따라 읊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도 울타리밖에 쭈그리고 앉아 천자문 독송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던 산석이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어험∼”하는 헛기침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아뿔싸, 선비님이 산석이 앞에 서 계시네?

정신없이 일어나 머리를 조아려 꾸벅 인사를 드렸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산석이라고 하옵니다.”

 

“산석이라... 무슨 뜻이더냐?”

 

“산에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는 뜻입죠.”

 

“산석이라... 듣기 좋은 이름이구나. 그런데 너는 왜 여기 쭈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느냐?”

 

“아, 그건, 저∼ 주막집 음식냄새가 하도 좋아 가까이 왔다가 그만 깜빡 졸았나봅니다요.”

 

“예끼 이 녀석! 능청스럽기가 딱 능구렁이 같구나. 너 요사이 매일 찾아와 서당을 기웃거리는 걸 내 모를 줄 알았느냐?”

 

산석이가 무안해서 머리를 긁적이자, 선비님께서는 산석이에게 들어와 공부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너무너무 고맙고 신나는 말씀이었지만, 산석이는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리네요?

 

“선비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제가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그럴 수 없다? 무엇 때문이냐? 글공부가 싫어서 그러느냐?”

 

“아니옵니다. 글공부는 좋은데, 저는 매사에 둔하고 앞뒤가 꽉 막히고 어리버리하거든요.”

 

“허허, 그 녀석 걱정도 팔자로구나. 아니다. 오히려 그 점이 네게는 장점이 될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매사에 재빠르고 예리한 아이들은 오히려 공부를 끝까지 못하기 십상이란다. 너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아느냐? 토끼가 훨씬 빠르지만, 결국 달리기 경주에서 거북이가 이기는 이야기 말이다. 글공부에서는 꾸준하고 끝까지 달리는 자가 최고란다.”

 

산석이는 선비님 말씀에 귀가 번쩍 열렸어요.

그뿐 아니라 눈도 번쩍 열리고 마음도 활짝 열렸습니다.

그날부터 산석이는 선비님의 서당에 들어가 글공부를 시작했죠.

비록 다른 양반집 자식들처럼 과거시험을 볼 자격은 없었지만, 9급 공무원, 7급, 5급, 3급 공무원까지 출세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을 닦고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선비님 이름은 정약용 선생님이셨습니다.

나중에 더 좋은 곳으로 서당을 옮길 때 호를 다산(茶山)이라고 지으셨죠.

이미 많은 호를 가지고 계셨지만, 정약용 선생님은 다산이라는 호를 아끼셨습니다.

다산이란 차나무가 많은 산이라는 뜻입니다.

워낙 차를 좋아하셔서 그리 이름 지으셨겠죠?

그런데 가만 보면, 가장 아끼는 제자 산석(山石)이 이름에 들어있는 산(山)이 좋아서 그리 이름 지으신 건 아닐까요?

 

산석이는 다산 선생님을 따라 새로운 서당으로 갈 수는 없었지만, 매일매일 앞산 큰 바위얼굴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 특별히 산석이에게만 내리신 삼근계(三勤戒)를 마음에 새기며 글공부를 했습니다.

삼근계란, 석 삼, 부지런할 근,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는 뜻입니다.

느리고 막히고 어리버리해도, 부지런히 성실하게 공부하면 참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산석이는 매일매일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며, 그리고 스승님의 삼근계를 기억하며 공부했습니다.

공부 잘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닦고 인생을 행복하게 즐기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그래서 매일 초서를 하고 시를 지었습니다.

 

초서(抄書)란, 훌륭한 글을 베껴 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매일 시를 지었습니다.

시를 지으면 사람의 마음은 풍성해집니다.

팍팍한 세상에 사느라 강퍅해진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이 기름지고 부드러운 옥토로 변하는 법입니다.

언젠가 스승님께서 산석이에게 문득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산석아, 너는 딱 게바를 닮았구나.”

 

“게바요? 그게 누구죠?”

 

“아주 먼 옛날, 멀리 살던 사람이란다. 베드로라고도 하지. 그 이름 뜻이 바로 산석(山石)이란다. 산에 있는 너럭바위 말이다.”

 

“아, 정말요? 그럼 그분도 저처럼 좀 둔하고 꽉 막히고 어리버리하셨나요?”

 

“허허, 맞다 맞어, 그분도 좀 덤벙거리고 둔해서 선생님께 야단도 맞고 그랬지. 그러나 죽을 때까지 끝끝내 스승님 말씀 따르는 수제자가 되었단다. 남들처럼 출세하려고 공부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 말씀만 굳세게 믿고 가난해도 매일매일 그 말씀 붙들고 사셨단다.”

 

산석이는 베드로가 누군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어요.

스승님께서 귀양살이 오신 것이 예수교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죠.

스승님의 형님이신 정약전 선생님도 예수교를 열심히 믿어서 흑산도에서 평생을 귀양살이하셨다네요?

산석이는 비록 예수교에 대해 잘 몰랐지만, 베드로라는 인물이 제 이름 뜻하고 같다는 말씀에 왠지 호감이 갔습니다.

스승님 말씀 붙들고 바위처럼 굳세게 그 말씀 따라 살다 죽었다는 산석 베드로!

그 뒤로 산석이는 앞산 큰 바위얼굴을 볼 때마다 다산 선생님과 베드로를 함께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습니다.

산석이는 이제 나이 일흔 다섯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날도 산석이, 아니 산석 할아버지는 경전을 베껴 쓰는 초서(抄書)를 하시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느 젊은이가 묻습니다.

 

“아휴, 어르신. 그 연세에 무슨 과거시험 보실 일도 없는데, 뭘 그리 열심히 공부하세요?”

 

“허허, 그 사람 참, 공부가 무슨 시험보고 출세하기 위해 하는 건가?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님은 여기 귀양살이 오셔서 스무 해나 계셨다네. 그 긴 세월 동안 글 읽고 글쓰기에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우린 그걸 가리켜 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 부르지. 당시 불혹의 나이를 넘기신 스승님께서는 열다섯 어린 나에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면서 ‘너도 나처럼 이렇게 곰같이 거북이같이 공부하거라.’ 하셨지. 이렇게 온몸으로 가르치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이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를 듣던 젊은이는 점점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눈이 크게 열렸어요.

큰 깨달음이 온 거죠.

그리고 문득 눈을 들어 앞산을 바라보니 석양빛에 빛나는 큰 바위얼굴이 보입니다.

그 순간 젊은이는 소리쳤겠죠?

 

“앗! 어르신, 저기 좀 보세요. 저 큰 바위얼굴이 딱 어르신 얼굴하고 똑같아졌네요?”

 

“허허, 그 사람 참, 세상에 바위가 변하다니? 자네 허풍이 대단하군!”

 

마침 가까이 있던 동네 사람들이 큰 바위얼굴과 산석 할아버지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봅니다.

그리고 젊은이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웅성웅성 합니다.

산석 할아버지는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새로 배운 글을 베껴 쓰시느라 여념이 없으시거든요.

 

오늘 초서는 사서오경이 아닙니다.

간밤 꿈에 오랜만에 나타나신 스승님 다산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또 다른 경전의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뒤에도 스승님은 이렇게 사랑하는 제자의 꿈속에서도 나타나 가르침을 주십니다.

늘 산석이를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아끼시던 스승님이십니다.

스승님은 왜 산석이를 유독 아끼고 사랑하신 걸까요?

경전의 껍데기만 달달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말씀의 알맹이를 맛볼 줄 아는 제자 산석이었기 때문입니다.

배운 말씀을 매일매일 성실하게 새기고 실천하는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법도를 주시고, 성실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시편 119:4)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신명기 30:20)”

 

이 구절을 들려주시던 스승님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말씀 쓰고 또 쓰면서 산석 할아버지 마음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깜깜하던 밤하늘에서 환한 은하수가 쏟아지듯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이정훈 지음, 2014년 2월 16일 주일 아침]

* 오늘 말씀동화, ‘산석이가 다산(茶山)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어요’는, 정민 선생의 책 『삶을 바꾼 만남』에서 줄거리의 대부분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 이야기와 성경말씀을 비빔밥처럼 버무렸습니다. 물론, ‘큰 바위얼굴’과 ‘베드로(너럭바위)’는 산석(山石)이라는 이름과 연관해서 이어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