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나섰다”(마가복음 10:52)
[성서일과 4본문]
(욥기 42:1-6,10-17)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10. 욥이 주님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11. 그러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그를 아는 친구들이 다 그를 찾아와,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셨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그에게 돈을 주기도 하고, 금반지를 끼워 주기도 하였다.
12. 주님께서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욥이, 양을 만 사천 마리, 낙타를 육천 마리, 소를 천 겨리, 나귀를 천 마리나 거느리게 하셨다.
13. 그리고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14. 첫째 딸은 여미마, 둘째 딸은 긋시아,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고 불렀다.
15. 땅 위의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아버지는, 오라비들에게 준 것과 똑같이, 딸들에게도 유산을 물려주었다.
16. 그 뒤에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그의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
17. 욥은 이렇게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시편 34:1-8(19-22))
1.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 주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내 입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2. 나 오직 주님만을 자랑할 것이니, 비천한 사람들아, 듣고서 기뻐하여라.
3. 나와 함께 주님을 높이자. 모두 함께 그 이름을 기리자.
4.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
5. 주님을 우러러보아라. 네 얼굴에 기쁨이 넘치고 너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6. 이 비천한 몸도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들으시고, 온갖 재난에서 구원해 주셨다.
7. 주님의 천사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져 주신다.
8. 너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큰 복을 받는다.
19.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20.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21.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끝내 죽음을 맞고,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22.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서 7:23-28)
23. 또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어서,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24.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계시는 분이므로, 제사장직을 영구히 간직하십니다.
25.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
26. 예수는 이러한 제사장으로 우리에게 적격이십니다. 그는 거룩하시고, 순진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구별되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입니다.
27.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치셔서 단 한 번에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28. 사람들에게 약점이 있어도 율법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지만, 율법이 생긴 이후에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49.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50.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과 병든 세상 사이에서’입니다.
구약, “욥이 주님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욥기 42:10)
시편, “나와 함께 주님을 높이자. 모두 함께 그 이름을 기리자”(시편 34:3)
서신서, “그는 늘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히브리서 7:25)
복음서,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마가복음 10:49)
오늘 요절은,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나섰다”입니다.(마가복음 10:52)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욥기 42:1-6, 10-17 /시편 34:1-8(19-22))]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욥의 회개, 주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심’입니다.
욥이 소원대로(19:26-27)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5)
자기 경험과 이론을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만큼
하나님의 옳으심과 선하심을 깨치고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6)
온갖 탐욕으로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 병든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을 잘 아는 듯이 자기주장을 늘어놓던 친구들의 허물을 씻기 위해
하나님의 명대로(8) 욥이 기도드리니
하나님께서 욥의 재산을 갑절로 회복시켜주십니다.(1:2, 42:12)
그리고 갈라진 인간관계도 회복시켜주시고, 자식들도 많이 주십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 환골탈태한 욥은 세상 법과 관례에 매이지 않고
재산을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줍니다.(15)
고루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나라에 한 뼘 더 가까워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입니다.
이 시편은 각 절 첫머리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지은 시입니다.
시인은 나를 고난 중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체험이(4) 강렬하고 구체적이어서(5-8)
일생동안 찬양을 그치지 않습니다.(1) 그리고 자기처럼 비천한 자(6, 2),
오히려 고난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 이들에게 함께 찬양하자고 호소(號召)합니다.(2-3)
의로운 사람, 즉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은
이 탐욕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마련이지만(19)
신실하신 주님께서 그를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신다고
시인은 확신하며 찬양합니다.(19)
이 모든 고난, 그리고 구원하심을 온몸으로 겪은 시인의 찬양은
그만큼 생생하고 강렬하여서
마치 오늘 구약본문의 주인공 욥의 찬양처럼 여겨집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히브리서 7:23-28 /마가복음 10:46-52)]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그리스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입니다.
기자는 옛 언약에 따른 제사장 직무와 예수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대조하며
두 가지 근본적인 면에서 구별된다고 정리합니다.
첫째,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하고(24-25)
둘째, 예수의 희생은 단 한번으로 영원히 유효하므로
거듭 새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27)
즉 예수는 제사장으로서 영원하며 완전한 분이신 것입니다.(28)
이는 낡고 결핍한 옛 언약과(8:7, 13) 달리
새 언약에 따른 완전한 제사장,
하늘과 땅이 온전히 통하는 제사장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보여줍니다.(28)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눈먼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다’입니다.
벳새다의 맹인 치유에 이어서(8:22-26), 예수께서 여리고의 맹인 바디매오를 치유하십니다.
특히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꾸짖음을 무릅쓰고 (점점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을 부르짖자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52) 그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어쩌면) 조금 전까지 그를 꾸짖던 무리들이
오히려 바디매오를 예수님께 인도하며 격려합니다.(49)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소원대로 눈을 뜬 바디매오는
전무후무하게 (어쩌면 그 뒤에 눈멀었던 바울도 그러하였듯이)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당하실 수난의 길, 예루살렘 길을 따라나섬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뒤따를 제자의 길, 제자의 모범을 암시합니다.
[정리]
507주년 종교개혁주일에 읽는 성서일과 본문에서
하나님과 병든 세상 사이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 회개한 욥이 회개할 것투성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고 나니 병든 욥은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한국교회가
지금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어서 진리를 제대로 읽고 제대로 만나, 병든 한국사회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구석구석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위기들,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성도들을 직시하며
지금 한국교회는 오늘 시편의 시인처럼 먼저 내 비천함부터 고백해야 합니다.(6)
그리하여 다시금 신실하신 주님 만나 그분만 의지하는(8) 의로움을 회복함으로써(19)
나처럼 비천한 병든 세상에게 참 희망 참 기쁨이신(2) 그 이름을 선포하고 찬양할 때입니다.(3)
배고프다고 소리칠 기운도 없이 쓰러진 북극곰
소리 없이 죽어가는 후쿠시마 앞바다 생명들 먼 바다 생명들
가자지구 아니 가자지옥에서 학살당하는 사람들, 밥도 물도 없어 죽어가는 아이들
저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힘차게 외칠 수 있는 바디매오가 누구입니까?
비록 내 눈도 여태 제대로 안 열렸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살려주실 유일한 생명의 주인, 그 이름을 확실히 아는 바디매오처럼 그 이름 외칠,
예언자 이사야의 꿈처럼,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함께 사는 공존의 땅(사11:6, 65:25)
잃어버린 낙원 에덴처럼 창조질서가 살아 숨 쉬는 평화세상을 선포할 자 누구입니까?
[나머지]
* 욥의 회복(여미마, 긋시야, 게렌합북의 교훈)
회개한 욥이 모든 것을 회복하며 다시 열 자녀를 얻습니다. 그런데 일곱 아들의 이름, 장남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고, 세 딸의 이름만 나옵니다. 게다가 세 딸은 오라비들과 똑같이 유산을 물려받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풍습을 넘어서고, 21세기 관습조차 넘어서는 <완전한 회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욥과 바디매오, 눈으로 주님을 뵙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기42:5) 욥은 주님과 제대로 만나는 체험, 주님과 제대로 소통한 체험을,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건 딱 오늘 복음말씀의 바디매오가 눈으로 예수님을 보자마자 주님을 따라나서는 장면과 직통합니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마가복음10:52)
*** 말씀동시 한편 묵상
“바디매오” (마가복음 10:45-52)
앞을 못 본다고, 영의 눈도 감겼을까 / 몸은 비록 어두워도, 믿음의 눈 밝혀있다
빛되신 예수님을, 영으로 알아보고 / 예수님을 멈춰 세워, 고침 받고 눈을 뜨다
[한영은 (2012, 10. 26)]
성실문화 동인이셨던 한영은 전도사님께서 오래 전 보내주신 말씀동시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을 멈춰 세워”라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 보면 바디매오는 필사적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눈 먼 바디매오가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는 길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님”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표현은 아주 위험한 금기어였기 때문입니다. 로마 통치하에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리라고 식민지 백성들이 굳게 믿으며 기다리던 그 메시야를 가리키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그 이름을 연거푸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철저한 믿음입니다. 그분이라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내가 당장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가는 한이 있어도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멈춰 세웁니다. 길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웁니다. 나를 지나쳐 가시는, 나를 지나쳐버리시는 그분을 멈춰 세우는 굳센 믿음입니다. 그분을 만나야 한다는, 어떤 곤경이 닥쳐도 그분 만나야 내가 산다는, 세상에 아무 다른 것 말고 오직 그분 만나야 내가 산다는 필사적인 부르짖음, 바디매오의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마가복음 10:52)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목숨 건 외침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믿음’은 필사적으로 그분 만나야 내가 산다는 것이고, 지금 이 시대에 그분 만난다는 것은 말씀이신 그분, 바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다른 수많은 교리와 수많은 할 일들이 있지만, 여기 저기 다니며 해야 할 일 많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티끌과 잿더미 위에 주저앉아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것! 이게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일성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오백여 년 전 종교개혁가의 외침을 기억하며, 오늘 나의 개혁을 위해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지금 내 곁을 지나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눈으로 주님을 보며 그분 가시는 길 따라나섭니다.
**** 나는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
주님을 만나기까지 치열하고 간절했던 욥의 모습과 시편기자의 모습은 종교개혁가 루터를 연상시킵니다. 끝까지 고통스런 논쟁을 멈추지 않았던 욥처럼 끊임없는 고통과 번민 끝에 말씀으로 하나님의 진면목을 보게 된 루터! 말씀에 눈을 뜬 루터는 믿음으로 목숨을 건 개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가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논쟁하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기성교회, 그리고 공권력과의 논쟁을 피하지 않았던 것은, 부와 명예 권력 같은 이득과 편리보다는, 진실·진리를 향한 열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눈 뜨기 위한 루터의 열망은, 마치 오직 눈을 뜨기 위한 일념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부르짖은 바디매오의 그것과 같습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예수님을 뵌 것처럼 루터는 마침내 성경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만납니다. 그리고 바디매오가 예수님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던 것처럼 루터는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완전한 회복을 위한 교회개혁의 길을 나섭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완전한 회복, 완전한 개혁을 위해 가장 먼저 훌훌 벗어버려야 할 것,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거울 - 역사이야기]
* 10월 28일 (1992년, 윤금이씨 피살사건)
윤금이 피살 사건은 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시 기지촌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윤금이(尹今伊,당시 26세)씨가 주한 미군 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 Ⅲ) 이병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 및 그로 인한 과다 출혈이다. 발견 당시 시신의 상태는 말로도 글로도 옮기기 힘들 만큼 사악하고 참혹했다. 이로 인해 주한 미군의 범죄가 사회 문제로 제기되었고,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대한 개정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범인인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 Ⅲ) 이병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94년 5월 17일 천안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2006년 8월 14일 가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했다.
* 10월 28일 (1992년, 다미선교회 휴거소동)
다미선교회 휴거소동 사건은, 한국의 이장림 목사 등이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携擧)가 일어날 것이라는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란을 일으킨 종교 사기 사건이다. 신도들은 정상적인 일상에서 이탈하여 종말을 대비했으나 10월 28일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장림은 휴거예정일 이전인 9월25일에 신도들의 재산을 헌납 받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이후 관련자 다수는 사기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이장림의 주장에 동조했던 다베라선교회, 다니엘선교회, 성화선교회 등 다수의 시한부종말론자들은 휴거일이 연기되었으니 다시 다가올 종말을 예비하자고 변명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종교 사기사건이었음이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신념에 의한 잘못된 확증 편향에 빠져있던 상당수의 신도들은 기존의 믿음을 뒷받침할만한 논리가 제공되자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믿음을 고수하기도 했다. 휴거란 예수가 세상에 공중 재림하며 구원받은 신도들이 하늘로 들림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휴거’(携擧)라는 단어는 이장림이 1978년 어니스트 앵글리(Ernest Angley)의 예수 재림 소설 Raptured를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광희’, ‘황홀’이라는 뜻의 Rapture를 의역하여 만들어낸 단어이다. 이장림은 1987년에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는 예언서를 내면서 시한부 종말론을 적극 주장하기 시작했다.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휴거 현상이 나타나고, 1999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다. 신도들은 이 종말론에 세뇌되어 학업이나 생업을 그만두거나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일이 일어났다. 여러 가정이 분열되고 풍비박산한 것은 물론, 수많은 일터에서도 여러 종류의 사건사고가 일어났고, 종교적 신념을 꺾으려는 가족들 때문에 청소년이 음독자살하는 일도 일어났다.
* 10월 29일 (2022년, 이태원 참사)
2022년 10월 29일 22시 15분경, 대한민국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이태원로에서 발생한 대형 압사 사고이다. 당시 이태원에는 핼러윈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으며, 해밀톤호텔 앞 좁은 골목길 경사로로 인파가 밀리면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핼러윈데이’는 사고가 일어나기 12년 전부터 영어 학원 등을 시작으로 대중화되었다. 외국인 비율이 높은 장소에서부터 시작된 핼러윈 행사는 마케팅에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의 젊은 층에서는 핼러윈데이를 비공식 기념일처럼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태원에는 6.25 전쟁 이후 인근에 미 8군사령부가 위치해 있었으며, 점차 외국인 관광객의 관광과 쇼핑의 명소로 발전하였다. 미군사령부가 평택으로 이전된 이후로 미군 관련 고객은 줄어들고 젊은 한국인들의 비율이 높아졌다. 그렇게 이태원은 한국의 청년들이 핼러윈 축제 장소로 매우 선호하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코로나19로 핼러윈행사 방문객이 줄었다가, 2022년 거리두기, 영업시간 제한,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등의 해제가 가시화되면서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이태원에 몰릴 것이므로 이미 대형 압사 사고 가능성이 높아졌었다. 따라서 질서유지와 인파 통제를 위하여 미리 정복경찰들을 다수 배치했어야 했고, 특히 지하철로 직행하는 좁은 경사로인 사고지점에 경광봉을 든 정복경찰들을 집중 투입했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4시간 전부터 경찰 측에도 압사 위험에 대한 신고가 쇄도했는데, 첫 신고가 발생한 18시 34분으로부터 5시간 뒤인 23시 40분에야 첫 경비 기동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날 10만 명이 훨씬 넘는 인파가 몰린 이태원에 미리 안전요원들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용산경찰서는 물론 용산구청의 책임이 크며, 더 높은 지휘계통의 책임자들의 책임이 막중함에도 아무도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서 지금도 유족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 인터넷 위키백과사전 등 요약)
[말씀동시] 까막눈 할머니의 소원 (송영미 지음. 「성실문화」 120호)
팔십 하나 우리 할머니
한글학교 다니신다
한글 몰라 동네 사람 올 때까지 버스를 마냥 기다리셨다
한글 몰라 굽이굽이 눈물의 세월
이름과 달력 보는 건 배운 우리 할머니
할머니 소원은 예수님께 편지쓰기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시편시조] 시편 34, 낮은 자 부르짖음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20호)
낮은 자 부르짖음 어김없이 들으시는
주님만 자랑하고 내 주님을 찬양하리
모두들 깨달으시라 신실하신 주님을
[시편노래] 시편 34, 나 주님을 찬양하리 (이정훈 편사, 고승하 작곡. 「성실문화」 120호)
[본문] (시편 34:1-8(19-22))
[노랫말]
1. 나 주님을 찬양하리 끊임없이 노래하리, 오직 주만 자랑하리 낮은 자여 기뻐하라
함께 주를 드높이세 그 이름을 다 기리세, 나의 간구 응답하사 두려움이 사라지리
2. 주님을 우러르라 당당하게 기뻐하라, 낮은 자의 부르짖음 재난에서 구하시네
주님을 경외하라 천사들이 보호하리, 너는 알라 주의 신실 너를 감싸 복주시리
3. 고난 중의 의로운 자 주님께서 구하시고, 뼈마디 하나하나 주님께서 지키시네
악인들 끝내 죽고 마땅히 벌 받으니, 피난처 주님께서 당신의 종 살리시리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아름나라 이사장이신 고승하 선생이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34 (나 주님을 찬양하리) (이정훈 편사, 고승하 작곡)
[시편송서(誦書)] 시편 34:1-8(19-22)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20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 주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노랫-소-리) 내 입-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2. 나 오직 주님만을 자랑할 것이니, 비천한 사람들아, 듣고서 기뻐하여라.
3. 나와 함께 주님을 높이자. 모두 함께 그 이름을 기리자.
4.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
5. 주님을 우러러보아-라--, 네- 얼굴에- 기쁨이 넘치-고--,
너--는-- 수치-를--,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6. 이 비천한 몸도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들으시고, 온갖 재난에서 구원해 주셨다.
7. 주님의 천사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져 주신다.
8. 너희-는-- 주님-의--,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큰-- 복-을 받는-다--∼
19.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20.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21.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끝--내-- 죽음을 맞고-,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다함께]
22.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말씀동화] 허수아비와 싸울아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까닭은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빈들에서 허수아비랑 약속 대련하던 시절 이야기예요.
하늘나라 하늘곳간 앞에 천사 하나가 떡 버티고 서 있었어요.
하늘나라 천사들 중에서 제일 눈이 부리부리해서
그 생김새만으로도 하늘곳간을 기웃거리는 잡새들을 너끈히 쫓아버리죠.
땅에서 착한 일을 하면 그 열두 배가 쌓인다는 신성한 하늘곳간이니
잡새들은 절대 얼씬거리지 못한다고
밤이고 낮이고 부리부리 천사는 두 눈 부릅뜨고
예수님 십자가처럼 팔을 양쪽으로 쫙 벌리고 하늘곳간을 지킵니다.
그런데 부리부리 천사는 다리가 하나뿐이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 못하고
하늘곳간 문 앞에 붙박이로 서 있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 부리부리한 눈을 피해 몰래 곳간에 들어가지 못하죠.
그 철통같은 지킴이 천사의 이름은 바로 허수아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 허수아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땅으로 내려가게 되었어요.
“거짓의 아비 악마가(요한복음 8:44) 마구 나대는 바람에
세상이 너무 어두워졌다.”
하나님의 특명을 받은 허수아비는 빛의 속도로 땅으로 내려갔어요.
깜깜한 땅으로 내려가는 내내 허수아비는 부리부리 두 눈에 불을 켭니다.
그리고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허수아비가 다다른 곳은 지구에서 가장 어두운 나라 한국이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삼천리금수강산임에도
언제부턴가 악마의 밥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하루가 다르게 어둠이 깊어가고 있었거든요.
거짓아비 악마가 만지면 세상 누구라도 저 무시무시한 어둠의 속도로
악마의 자식이 되어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립니다.
박사님도 교수님도 심지어 목사님까지 그렇게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니
세상이 온통 깜깜해질 수밖에요.
그런데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악마의 유혹이 통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그게 바로 허수아비입니다.
지푸라기처럼 텅 빈 마음에는 아무런 탐욕이 없기 때문이죠.
거짓아비가 만져서 거짓말을 오염시키는 통로가 바로 탐욕이거든요.
하나님이 내려 보내신 하늘나라 비밀병기 허수아비의 비밀은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허수아비가 만지면 다시 하나님의 자식이 되어서
부리부리 빛의 속도로 거짓말쟁이 병이 싹 나아버리는 것입니다.
허수아비가 도착한 곳은 가장 어두운 한국, 그중에서도 한국교회 예배당이었어요.
예배당 앞에는 마치 허수아비가 곳간 앞에서 잡새들을 막듯이
‘이단 출입금지’ 스티커가 떡 붙어 있습니다.
오래전 휴거소동이라는 부끄러운 경험 뒤로
한국교회는 양치기소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왔죠.
그래서 이단에 물들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여전히 역부족입니다.
거짓아비 악마에게 물들어버릴 불쏘시개 같은 탐욕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허수아비의 노력으로 겨우겨우 한국교회의 거짓말 병이 조금씩 나아가지만
허수아비는 만족할 수 없었어요.
“내가 만져서 거짓말쟁이 병이 나았어도, 마음 속 탐욕을 씻지 않으면
언제라도 또다시 거짓아비의 자식이 되어버릴 텐데.”
허수아비의 근심은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거짓아비의 거짓말 오염은 한계가 없습니다.
정치인, 경제인, 대학교수, 군인과 언론인, 그리고 놀랍게도
가장 오염된 어둠의 세계는 법을 다루는 법원과 검찰이었죠.
권력이 클수록 탐욕도 커지고,
그렇게 곳곳마다 거짓아비에게 오염된 거짓말쟁이들 천지가 되어버리나 봅니다.
탐욕이 많을수록 어둠은 더 짙어서 저 새빨간 거짓말 수준에
허수아비의 입이 떡떡 벌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들이 어둠을 씻으러 교회로,
허수아비가 양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교회로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저들을 찾아다닐 수도 없는 붙박이 신세를 한탄하며
허수아비가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마가복음10:47)
하늘나라 예수님께서 허수아비의 울부짖음에 귀를 쫑긋 세우십니다.
허수아비는 예수님이 평소에 가장 아끼시던 천사거든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허수아비는 밤이고 낮이고 십자가모양으로 서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운답시고(빌립보서2:7) 몸속에 지푸라기만 남길 정도였죠.
예수님은 얼른 싸울아비를 내려 보내셨어요.
싸울아비는 하늘나라 특공무술 담당 천사인데요
허수아비의 날개가 되어주고 거짓아비와의 싸움에서도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싸울아비와 허수아비는 얼른 한국 땅 곳곳의 거짓말쟁이들을 찾아다녔지만
이미 거짓아비가 저지르고 다니는 어둠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꼬리를 물며 거짓말이 새끼를 치는 속도가
일찌감치 허수아비와 싸울아비의 이동속도를 따라잡은 겁니다.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십니다.
마침내 온 땅 가득 차오르는 거짓아비 바이러스를 단번에 태워버리시려고
유황불을 폭포처럼 퍼부으시려고 마음먹자
그 마음을 순식간에 느낀 허수아비가 다시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마가복음10:48)
허수아비의 간절한 기도에 예수님이 감동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유황불 천벌이 잠깐 연기됩니다.
한숨 돌린 허수아비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얼른 한국교회로 날아갔어요.
마지막 남은 필살기를 쓰기 위해서죠.
마지막 방법의 열쇠가 바로 한국교회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요.
여리고 맹인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나서 얼른 예수님 뒤를 따랐듯이
거짓아비에 감염되어 눈먼 한국교회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얼른 남은 탐욕을 싹 다 씻어내고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의 길을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아비의 온갖 유혹을 너끈히 이겨내는 텅 빈 허수아비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온 세상 어둠의 세력, 더러운 거짓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그래야 세상은 다시 밝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허수아비가 외칩니다.
오늘도 허수아비는 어둠에 젖은 한국교회를 어루만져 눈을 뜨게 해주고
눈이 열린 성도들이 너도나도 허수아비처럼 자기를 비우고
허수아비처럼 두 팔 쫙 벌리고
거짓과 싸울 싸울아비가 되게 합니다.
그 고된 일을 하면서도 허수아비의 기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20호 예배마당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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