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길 - 친밀하게, 치밀하게
[성서일과 4본문]
(예레 18:1-11)
1. 이것은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다.
2. "너는 어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너에게 나의 말을 선포하겠다."
3. 그래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더니, 토기장이가 마침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그런데 그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었다.
5.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6.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7.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8.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9. 그러나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10. 그 백성이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약속한 복을 거둔다.'
11. 그러므로 너는 이제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내릴 재앙을 마련하고 있으며, 너희를 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서, 각기 자신의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너희의 행동과 행실을 고쳐라.'
(시편 139:1-6, 13-18)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2.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5.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6.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13.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14.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16.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17.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빌레 1-21)
1.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인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4. 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나는 주 예수에 대한 그대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듣고 있습니다.
6. 그대의 믿음의 사귐이 더욱 깊어져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일을 그대가 깨달아 그리스도께 이르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7.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
8.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주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9.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대에게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울은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요, 이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또한 갇힌 몸입니다.
10.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13.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해서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14.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15. 그가 잠시 동안 그대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
18.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19. 나 바울이 친필로 이것을 씁니다. 내가 그것을 갚아 주겠습니다. 그대가 오늘의 그대가 된 것이 나에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20.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호의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마음에 생기를 넣어 주십시오.
21. 나는 그대의 순종을 확신하며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그대가 내가 말한 것 이상으로 해주리라는 것을 압니다.
(누가 14:25-33)
25. 많은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29.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며,
30.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서 자기에게로 쳐들어오는 그를 자기가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32. 당해 낼 수 없겠으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할 것이다.
33.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노트]
이번 성서일과 4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드는 느낌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치밀함’입니다.
그런데, 그 치밀함의 바닥에는 ‘친밀함’이 배어 있습니다.
아주 잔뜩 배어있어서 친밀(親密)-사랑의 엑기스가 뚝뚝 떨어질 정도입니다.
[구약과 시편]
오늘 구약본문은 유명한 ‘토기장이’ 이야기입니다.
요약하면, 토기장이가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원래 계획을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건 치밀했던 설계도면이 무색하게도 엉성한 꼴이 되어버리는 게 결코 아닙니다.
사실은 거기 훨씬 더 치밀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빗나간 유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다시 내 백성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치밀함의 정체는 ‘사랑’입니다.
오늘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친밀’한 느낌이 가득합니다.
마치 후렴처럼, ‘나를 다 아십니다(알고 계십니다)’를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1-4절)
‘모태에서’부터 (13, 15) ‘은밀’하고(15) ‘치밀’하게 나를 지으신 그분 생각(17)의 정체는 물론 ‘사랑’입니다.
시인에게 진정한 부모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13-18절 내내 구구절절 그걸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16절의 ‘주님의 책’은 마치 ‘태교일지(胎敎日誌)’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입니다.
아기가 나쁜 꿈 꾸며 울다 깨어나 보면 여전히 엄마가 내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18)
아기를 배고 낳고 키우는 엄마처럼, 주님의 사랑은 참 치밀한 사랑입니다.
오늘 구약과 시편은 ‘빚는다’는 단어가 짝을 이루며 어깨동무합니다.(렘 18:4 / 시 139:14)
(지난번 성서일과 사랑방 모임에서 주원남목사님이 발견해서 짚어주셨습니다.)
오늘 구약의 알맹이는, 내 백성 하나 얻으시려는 하나님 사랑의 치밀함입니다.
오늘 시편의 알맹이는, 내 자식 하나 얻으시려는 하나님 사랑의 치밀함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
오늘 서신서 본문인 빌레몬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바울이 오네시모를 얻기 위해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 구석구석에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은근하고도 노골적인 바울의 집요함과 치밀함이 가득합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오네시모를 얻기 위함입니다.
5-6절부터 바울의 치밀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7절의 “마음에 생기를∼”은 20절에서 다시 반복하며 대구를 이룹니다.
9, 10절에 “간청”을 반복하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고조됩니다.
11절에서는,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을 이용해서,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쓸모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킵니다.
그 이하 매 구절마다 바울의 오네시모 이야기는 촘촘하게 전개됩니다.
급기야 18-19절은 바울의 낯 뜨거운 치밀함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20-21절로 마무리하면서까지 바울은 치밀함의 끈을 결코 놓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상기(上記)했듯이, 오네시모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서 본문 역시, 치밀한 계산이 뼈대를 이루고 있네요.
“...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28절)
“...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31절)
이 '건축'과 '전쟁' 비유의 목적은 ‘치밀한 계산’을 요구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위한 치밀한 계산인가?
바로 ‘제자 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반복구절은 바로 이것입니다.
“...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 27, 33)
이 반복구절들 앞에 “누구든지(누구라도)”를 세 번 반복함으로써, ‘예외는 없다’를 암시하십니다.
제 작은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오늘 본문 예수님 말씀에서 ‘제자의 길’은 너무 어렵습니다.
예수님 제자가 되는 길은 답이 안 보입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산해도 답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더 치밀하게 계산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답이 무엇인가?
사랑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사랑을 깨친 사람만이, 바로 그 사랑 익어감에 따라 조금씩 제자 되어가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 ‘제자가 되는 길’,,, 치밀한 계산의 답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상만으로, 신념만으로, 고집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사랑 없이는 내 모든 소유를 다 버릴 수 없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의 공통된 알맹이는, 요약하면 ‘치밀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건 바로,
한 백성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치밀함,
한 사람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치밀함,
한 사람 오네시모를 얻기 위한 바울의 치밀함,
그리고 오직 한 분, 나의 참 스승, 참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치밀함입니다.
그 치밀함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뿐입니다.
그렇게 사랑한다면, 치밀해야 합니다.
그게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나머지]
오늘 구약, 렘 18:7절과 9절은 두주 전, 구약 본문과 짝을 이룹니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렘 1:10)
[말씀동화] 공장골 옹기가마에 불 들어가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원주 이씨, 이병춘이올시다.
여든이 넘은 노인이죠.
젊어서 시력을 잃어 앞을 볼 수 없지만, 이 마을 지리는 구석구석 환합니다.
저희 마을은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봉성리(鳳城里)라는 마을입니다.
봉황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이름이죠.
산 좋고 물 맑은 우리 봉성리에는 봄이면 제비도 찾아오고 꾀꼬리도 날아듭니다.
산에는 탐스러운 열매와 오색 약초들이 가득하고요.
마을 앞에는 흑천이라는 맑은 개울이 사시사철 신바람 나게 흐른답니다.
물이 시커매서가 아니라, 물속에 물개처럼 까만 돌들이 많아서 흑천(黑川)이라 부르는 거죠.
그리고 흑천 건너편에는 칠읍산이라는 우람한 산이 자리 잡고 있고요.
용문산 삿갓봉을 향해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비탈길 곳곳에 다랑이 논들이 즐비합니다.
편안하게 비스듬한 우리 마을 봉성리에는 여러 작은 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죠.
소리골, 가는골, 모골처럼 자그마한 골도 있고, 뵈이랑처럼 넓은 들도 있고요.
바로 그 가운데, 제가 사는 '공장골'이 있습니다.
공장골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낯설어하죠.
‘아름다운 시골마을에 웬 공장이람?’
이 이름의 유래는 오래 전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인적이 드문 산으로 숨어들게 되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질그릇을 굽는 가마를 만들고 옹기장이가 되어 살게 된 거죠.
잠깐 그 역사를 살펴볼까요?
먼저 조선 후기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납니다.
나라에서 천주교인들을 심하게 박해한 사건이었죠.
1800년 정조대왕이 돌아가시고 순조임금이 어린나이에 왕이 되고나서 정순대비가 정권을 잡고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것이 바로 신유박해입니다.
아마 반대파 인사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 때 다산 정약용선생의 형님인 정약종 선생이 순교하시고, 다산 선생도 귀양살이를 하게 되죠.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는 그뿐이 아니었어요.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의 병오박해가 헌종임금 때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천주교를 없애자는 핑계로 일어난 정치권력 다툼이었죠.
이어서 1866년 병인박해가 고종임금 때 일어나서 무려 13년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에서 천주교를 핍박할 때마다 천주교인들은 옹기터로 숨어들게 된 겁니다.
왜 대부분 천주교인들은 하고많은 직업 중에서 하필이면 옹기장이가 된 것일까?
그건 바로, 사람 많이 사는 마을을 떠나서, 사람들 눈치 안 봐도 되는 산에서 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커다란 옹기가마를 만들면 여러 가정이 한데 모여 살아도 의심받지 않는다는 점.
특히, 당장 돈 한 푼 없어도 흙이랑 물, 그리고 땔나무랑 노동력만 있으면 옹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 등이에요.
봉성리 공장골 옹기터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때는 몰라요.
하지만 공장골 토박이인 저의 4대조 할아버지께서 옹기를 굽는 천주교인이셨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봉성리 산비탈로 숨어든 제 할아버지는 가장 먼저 옹기가마를 지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옹기가마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자그마한 공장골을 이루게 된 거죠.
지금은 공장골에 집이 다섯 채 뿐이지만, 그 때는 스무 집도 넘었다고 합니다.
옹기가마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빽빽이 집을 짓고 모여 살았던 거죠.
할아버지께서 바로 여기 가마를 지으신 것은, 최고의 땔나무인 소나무가 지천이었기 때문이래요.
옹기를 굽기 위해서 1200도 넘게 불을 일주일 내내 지펴야 하죠.
그러기 위한 땔감으로는 소나무가 으뜸이랍니다.
게다가 옹기가마를 지으려면 경사진 곳이어야 했어요.
그건 바로 불길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바로 여기 공장골이 안성맞춤일 밖에요!
뿐만 아니라 공장골 바로 뒤 야트막한 산은 흙이 아주아주 좋았죠.
공장골 산은 어디서나 흙을 파면 좋은 흙이 나왔어요.
지금도 공장골 산을 파보면 50센티미터 정도까지는 주먹만 한 돌멩이들 투성이지만, 그 아래로는 매우 훌륭한 흙입니다.
밀가루처럼 고운, 붉은색, 황토색, 황금색, 분홍색, 흰색 등 오색빛깔 찬란하게 아주 메뉴도 다양한 흙산입니다.
할아버지는 식구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땀 흘려 가마를 지으셨어요.
좋은 흙을 주신 하나님께 매일매일 감사기도를 올리고 감사노래를 불렀죠.
그리고 흑천의 맑은 물을 길어 흙 반죽을 합니다.
정성을 다해 항아리와 김칫독을 짓습니다.
물론 작은 그릇도 짓습니다.
옹기를 500개도 넘게 잔뜩 만들어 그늘에 잘 말려서 한꺼번에 가마에 넣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낮은 불을 때면서 아직도 옹기에 남아있는 물기를 빼냅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강한 불을 지핍니다.
일주일 동안이나 1200도 넘게 1300도 가까이 매일 불을 땝니다.
이 때 흙 반죽에 섞여 있던 작은 나무가루, 작은 벌레 가루 등의 이물질들이 불기운에 녹아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옹기에는 눈에 안 보이는 작은 숨구멍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할아버지는 질그릇을 지을 때마다 늘 습관처럼 흥얼거립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은 첫 사람 아담도 흙으로 지으셨다네.
그 질그릇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겼다네.
나는야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질그릇이라네.
나도야 하나님 말씀을 담는 질그릇이라네!”
할아버지는 환하게 타오르는 소나무장작의 밝기와 옹기 색깔의 변화를 보면서 불의 온도를 느낍니다.
옹기 색깔이 점점 바알갛게 달아오르다가 최고조에 이르면 푸르스름한 빛을 띱니다.
이렇게 옹기빛깔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되면 1300도 가까이 된 것입니다.
이제 벽돌과 진흙으로 아궁이를 막습니다.
그리고 며칠만 있으면 늠름한 질그릇이 태어납니다.
불을 지핀 뒤 가마 곁을 지키실 때마다, 할아버지는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창세기 2:7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어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 어쩌면 바람만 나온 것이 아니라 불도 나와서 사람이 노릇노릇 질그릇처럼 잘 구워진 게 아니었을까?
언제부턴가 할아버지가 아주 좋아하는 성경말씀은 바로 예레미야 18:2-8절 말씀이셨습니다.
“너는 곧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일러줄 말이 있다.” 말씀대로 옹기장이 집에 내려가 보았더니, 옹기장이는 마침 녹로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옹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내다가 제대로 안 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빚는 것이었다. 마침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들려왔다. “진흙이 옹기장이의 손에 달렸듯이 너희 이스라엘 가문이 내 손에 달린 줄 모르느냐? 이스라엘 가문아, 내가 이 옹기장이만큼 너희를 주무르지 못할 것 같으냐?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는 한 민족 한 나라를 뽑아 뒤엎어 없애버리기로 결심하였다가도 벌하려던 민족이 그 악한 길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내리려던 재앙을 거둔다...”(공동번역)
비록 나라가 내 신앙생활을 핍박해도, 할아버지께서는 그런 나라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의지해서 어서 나랏님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빌었습니다.
그렇게 이 말씀을 의지하면 할수록 이 말씀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옹기장이(토기장이)로 비유한 것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이사야 64:8절 말씀을 특히 좋아하게 되셨죠.
“...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이사 64:8)”(새번역)
뜨거운 옹기가마 곁에서 평생을 지내시다보니 그 옹기가마를 닮아가는 것일까요?
제 할아버지의 신앙은 나날이 뜨거워만 갔습니다.
그 시절,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할아버지께서 가장 열렬하게 읊조리신 말씀은 바로 누가복음 14장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 14:26, 27, 33)” (새번역)
이 말씀만 읊조리면 늘 힘이 솟구칩니다.
이 무거운 말씀이 나를 새털처럼 가볍게 만드시는 겁니다.
급기야 할아버지는 이 말씀을 옹기 안쪽에 새기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가 볼까 두려워서 얼른 그 위에 흙을 덧붙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질그릇이 말씀을 담은 꼴입니다.
비장(秘藏)의 말씀!
질그릇이 복음을 담은 보배그릇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후 4:7)” (새번역)
공장골의 뜨거운 사랑은 이렇게 매일매일 타올랐습니다.
옹기가마에 불이 꺼져도 내 할아버지의 말씀 사랑은 꺼질 줄 몰랐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옹기가마가 되신 것처럼, 말씀그릇을 품으면 성령의 불이 떨어져 열두 밤낮을 활활 타오릅니다.
그렇게 구워낸 말씀 덩어리는, 질그릇이 장날마다 옹기점을 거쳐 팔려나가듯이, 질그릇에 담겨 나갑니다.
세월이 흘러흘러 왜정시대(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에도 옹기가마는 제자리를 지키며 연기를 뿜었습니다.
그러다 육이오 전쟁 때 가마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고 오해한 미군폭격기에 의해 옹기가마는 폭사하고 맙니다.
이제 옹기가마는 폭사하고, 말씀의 옹기가마이셨던 할아버지도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봉성리 공장골 끄트머리 산중턱에 언제부턴가 자그마한 옹기가마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계단식으로 둥글동글하게 가마를 짓더니 꼭대기엔 굴뚝까지 세웠습니다.
알고 보니 자그마한 예배당, 공장골 수도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앞을 오고가면서 그 옹기가마처럼 생긴 수도원에서 매일매일 성경 읊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도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지만, 저 옹기가마에서 들려오는 성경 읊조리는 소리 들을 때마다, 얼굴도 모르는 나의 4대조 할아버지가 떠오르곤 합니다.
불타는 옹기가마, 말씀의 옹기가마, 끝까지 신앙을 지키신 예수제자, 내 할아버지!
저기 공장골 수도원 옹기가마에서 그동안 읊조려 빚어진 말씀의 질그릇들이 아마 수백 개는 들어찬 것 같네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불이 들어갈 때가 차오를 것입니다.
소나무 장작은 넉넉히 준비해두었나 모르겠네요?
원주 이씨 내 조상님들이 일으키셨던 공장골에 새 옹기가마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새 옹기가마에 다시 불이 들어갑니다.
백 년 전 내 할아버지 안에서 활활 타올랐던 그 불입니다.
내 모든 소유를 다 버렸을 때 비로소 타오르던 그 불입니다.
옹기가마 불은 꺼졌어도 결코 꺼질 줄 모르던 그 불입니다.
그 불 열두 밤낮 활활 타오르면 어두운 내 눈도 다시 그 빛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정훈 지음, 2013년 9월 7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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