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적은 사람아”(마태복음 14:31)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37:1-4, 12-28)
1.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몸 붙여 살던 땅 곧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2.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열일곱 살 된 소년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3. 이스라엘은 늘그막에 요셉을 얻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여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
4.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
12. 그의 형들은 아버지의 양 떼를 치려고, 세겜 근처로 갔다.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가 알고 있듯이, 너의 형들이 세겜 근처에서 양을 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너의 형들에게 좀 보내야겠다.” 요셉이 대답하였다. “다녀오겠습니다.”
14.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너의 형들이 잘 있는지, 양들도 잘 있는지를 가서 살펴보고, 나에게 와서 소식을 전해 다오.” 그의 아버지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그를 떠나보냈다. 요셉이 세겜에 도착하였다.
15. 어떤 사람이 보니, 요셉이 들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가 요셉에게 물었다. “누구를 찾느냐?”
16. 요셉이 대답하였다. “형들을 찾습니다. 우리 형들이 어디에서 양을 치고 있는지, 나에게 일러 주시겠습니까?”
17.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너의 형들은 여기에서 떠났다. ‘도단으로 가자’고 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서, 도단 근처에서 형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서, 그를 죽여 버리려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말하였다.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20. 자,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르우벤이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건져 내려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22. 피는 흘리지 말자. 여기 들판에 있는 구덩이에 그 아이를 던져 넣기만 하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자.” 르우벤은 요셉을 그들에게서 건져 내서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23. 요셉이 형들에게로 오자, 그들은 그의 옷 곧 그가 입은 화려한 옷을 벗기고,
24. 그를 들어서 구덩이에 던졌다. 그 구덩이는 비어 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다.
25. 그들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마침 이스마엘 상인 한 떼가 길르앗으로부터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낙타에다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27. 자,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 차라리 그 아이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자. 아무래도 그 아이는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피붙이이다.”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28. 그래서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갈 때에,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꺼내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스무 냥에 팔았다. 그들은 그를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시편 105:1-6, 16-22, 45b)
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생각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16. 그 뒤에 주님께서 그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시고, 온갖 먹거리를 끊어 버리셨다.
17. 그런데 주님은 그들보다 앞서 한 사람을 보내셨으니, 그는 종으로 팔린 요셉이다.
18. 사람들은 그 발에 차꼬를 채우고, 그 목에는 쇠칼을 씌웠다.
19. 마침내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은 그의 진실을 증명해 주었다.
20.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하였다.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고,
21. 그를 세워서 나라의 살림을 보살피는 재상으로 삼아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관하게 하며,
22.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게 하며, 원로들에게 지혜를 가르치게 하였다.
45... 할렐루야.
(로마서 10:5-15)
5. 모세는 율법에 근거한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6.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를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 말아라.(그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7. 또 ‘누가 지옥에 내려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도 말아라.(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8.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9.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0.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11.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1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4:22-33)
22.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23.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24.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25.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28.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32.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실마리는 ‘부끄러움’입니다.
구약, “자,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창세기 37:27)
시편, “사람들은 그 발에 차꼬를 채우고”(시편 105:18)
서신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로마서 10:11)
복음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마태복음 14:30)
오늘 요절은,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입니다.(마태복음 14:31)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창세기 37:1-4, 12-28 / 시편 105:1-6, 16-22, 45b)]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다’입니다.
요셉이 채색옷(“화려한 옷” 3, 23)을 되게 좋아했나봅니다.
북쪽으로, 여러 날 걸리는 상당히 먼 거리를 여행하는데도
채색옷을 입은 걸 보니 말입니다.
아무튼 이 옷이 아버지 편애의 상징이요,
형제 갈등의 상징이라는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 두드러집니다.
아버지 편애로 시작된 형제갈등이 형제살해 직전에 르우벤에 의해 멈춥니다.
그리고 유다에 의해 요셉은 목숨을 건져 이집트 노예로 팔려갑니다.
이스라엘 온 가족을 구원하실 하나님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부끄러운 역사조차 품으며 이어집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이스라엘 초기에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 찬양’입니다.
바로 앞 104편의 <창조주 하나님 찬양>에 이어
오늘 105편은 <구원의 주 하나님 찬양>입니다.
늘 백성과 동행하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역사 중에서도 특히,
오늘 구약본문인 요셉의 종살이(그리고 이어질 옥살이) 과정이,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이집트와 근처 온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요(2,5),
먹을거리를 의지하던 백성을(16, 개역개정)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역사임을 노래합니다.
오늘 “차꼬”와 “쇠칼”은(18) 부끄러움의 상징입니다.
그것에 매인 죄수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을 못 알아보고 거짓에 속아 그를 벌한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육에 속한 이 세상의 부끄러움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로마서 10:5-15 / 마태복음 14:22-33)]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만인이 구원에 이른다’입니다.
율법에 근거한 의(5, 레18:5), 그리고 믿음에 근거한 의(신30:1-14, 시107:26)를
두루 듣고 깨친다면,
구원은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이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13) 차별 없이(12) 누구에게나 가까이 있습니다.(8)
그리고 구원의 열매가 있기까지 복음(기쁜 소식)은(15)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제자들에 의해 전달되며) 결실합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물 위로 걸으시다’입니다.
본문은 <제자의 길>의 고단함을 미리 보여주는 듯합니다.
제자란 스승 예수의 길을 완전하게 따르는 자입니다.
그래서 제자에게는 스승에 대한 <꽉 찬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스승의 길에 수시로 나타나는 위험, 불편, 불안 때문에
믿음에 의심과 두려움이 스미고, 결국 제자의 믿음은 부실해집니다.
이 부끄러운 <불완전한 믿음>을 고백하고 다시 주님의 손을 꽉 잡을 때
부족하나마 제자의 길을 다시 갈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더디더라도 조금씩 꽉 찬 믿음으로 자라갈 것입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해설 일부 참조)
[정리]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온 땅이 맥을 못 춥니다.
개울가 청개구리처럼 개굴개굴 한없이 울어댑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디작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오들오들 떠는 꼴을 보십시오.
이런 우리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나약해서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우린 우리 육체가 약하다는 것을 이미 압니다.)
이런 재앙을 초래한 인류의 탐욕,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탐욕에 눈먼 인생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수많은 예언자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부동산에 혈안이 되어 땅과 강을 훼손하는,
창조질서를 훼손하는 난개발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물에 빠진 베드로가 예수님께 들은 핀잔은(31)
약속의 중심이신 예수님, 나를 살리실 그 말씀(29)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놓치고, 시선을 세상 풍파로 돌렸기 때문입니다.(30)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부르짖어 외칠 수 있었고(30)
마침내 예수님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지만,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 손을 붙잡았다고 표현하지 않고
예수님이 손을 내밀이 그를 붙잡으셨다고 합니다.(31)
어쩌면 그때 베드로는 손을 내밀 수도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을지도 모릅니다.
풍랑에 몹시 시달리는 위기의 배는(24) 지금 우리 교회를 보는 듯합니다.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에 주신 구약본문말씀이 아프고 아립니다.
한 핏줄 한 형제를 미움 때문에 죽이려 하다니요.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 한반도의 모습이라니요!
요셉을 향한 미움에도 종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르우벤과 유다 뿐 아니라, 요셉의 형들은 열이면 열 제각각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을 향한 미움과 분풀이의 정도가 달랐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군중심리는 저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이런 부끄러운 인간사조차
선한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잡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눈을 떠보면
우리는 주님의 크고 따스한 손에 잡혀 있습니다.
그걸 깨달은 사람은 결코 잘난 척 할 수 없습니다.
나보다 약한 자를 결코 업신여길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가 웅덩이에 빠졌거나 물에 빠졌을 때 그를 붙잡아 살려낼 뿐입니다.
하물며 그가 내 혈육이라면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야곱의 자식들 같고 물에 빠진 베드로 같았던 그동안의 부끄러움을 서로서로 다독이며
서로를 향한 의심과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믿음의 길로 한걸음 함께 내디뎌야 할 것입니다.
그게 우리 다함께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 배의 비유
성경에는 풍랑을 만난 배가 몇 차례 나옵니다. 요나가 탔던 배(요나 1장), 바울이 탔던 배(행전 27장), 그리고 예수님이 타고 주무시던 배(마태 8:26),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배(마태 14장) 등입니다.(특히 바울이 탔던 배의 경우, 난파직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가려는 선원들을 가로막는 등, 선장보다 뛰어난 바울의 지혜와 순발력이 놀랍습니다. 30-32절) 교회를 배(방주)로 비유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을 배로 비유하여 ‘대한민국호’라고 종종 부릅니다. 그것은, 배가 가진 한 가지 특징 때문일 것입니다. 배는 다른 운송수단에 비해서, 선장을 필두로 위계질서가 엄정한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그건 목숨을 걸고 항해해온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뱃사람들이 NQ(Network Quotient 공동체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 “주님 살려주십시오”
오늘 복음서본문의 무대는 풍랑 속 가랑잎 같은 배 안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세상의 모든 공포’에 휩싸여 있는 것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부터의 공포입니다.(어두움, 풍랑) 초자연으로부터의 공포입니다.(유령) 자기 목숨에 대한 공포입니다.(익사) 이런 공포들의 뿌리는 믿음 없음입니다.
공포에 휩싸인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달려가십니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최단거리로, 물 위로 달려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익사 직전의 베드로가 건져지고 난파 직전의 제자들 배가 구원받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 “우리의 피붙이이다”
위기의 순간에 다 드러납니다. 내가 수제자는커녕 제자축에도 들지 못하다는 사실이! 내 알량한 믿음밑천이 다 드러나 버립니다. 내가 목사는커녕... 내가 성도는커녕... 그럼에도 그렇게 한바탕 물에 빠져본 사람은 압니다. 베드로처럼 꼴깍꼴깍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압니다. 오직 내가 잡을 것은 예수님 손뿐이라는 것을, 오직 내가 잡을 것은 주님 말씀뿐인 것을! 오직 제자들의 생명을 구하시려는 사랑의 마음으로 최단거리, 지름길인 물위로, 그 골든타임의 길로 걸으신 예수님처럼 제자라면, 교회라면, 한국교회라면... 한민족의 생명을 구할 골든타임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제자라면, 교회라면, 한눈 팔지 말고 오직 생명의 참 주인만 바라봐야 합니다. ‘미움다툼시기질투’ 이 사망권세 다 버리고 형제애만, 평화통일의 길만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피붙이이다.”(창세기 37:27)
부디 이 말씀으로 백척간두 이 분단민족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늘어날 수 있기를, 동양평화를 넘어 세계평화의 길을 이어갈 수 있기를 빕니다.
(※ 예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오너라 (장은우 지음. 시냇물교회 초등부. 「성실문화」 103호)
믿음 작은 사람아
오너라
의심하지 말아라
믿음 작은 사람아
배 안에 있던 사람들
무릎 꿇고 말했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씀시조] 예수님 그 말씀이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03호)
예수님 그 말씀이 입에 있고 맘에 있어
그 이름 부르는 자 누구든지 구원 받네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활예수 이 복음
[말씀서예] 로마서 10:12 (오요섭 작품. 「성실문화」 103호)
[시편노래] 시편 10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 (이정훈 작사, 박승원 작곡. 「성실문화」 103호)
[본문] (시편 105:1-6, 16-22, 45b)
[노랫말]
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이름 부르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 소리 높여 전하여라 찬양하여라
2. 주님을 찾으며 사모하여라, 그의 얼굴 바라며 예배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 그 이적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라
3. 팔려간 요셉을 기억하여라, 놀라우신 주님 계획 기억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 그 약속 다 이루셨다 찬양하여라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월드뮤직그룹 ‘공명’ 단원이신 박승원 선생이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10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 (이정훈 작사, 박승원 작곡)
[시편 송서(誦書)] 시편 105:1-6, 16-22, 45b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03호)
(※아리랑 가락에 맞추어)
(뒷소리)[찬양대]
1. 여- -호 와께, 감- -사 하고, 그의 이- 름을, 불러 아뢰 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 에-, 알게 할지 어-, 다- -- --∼
(앞소리)[독창]
2. 그- 에- 게-, 노래 하- 며-, 그를 찬- 양-, 하- -- 며-,
그- -의 모든, 기이 한일 들을, 말- -할 지어, 다- -- --∼
[회중]
3.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5-6.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뒷소리)[찬양대]
16. 그- -가 또-, 그- -땅 에-, 기근 이- 들게, 하- -- 사-,
그- -들 이-, 의지 하고 있는, 양식 을((다))끊 으셨((도)), 다- -- --∼
(앞소리)[독창]
17. 그- -가 한-, 사- 람- 을-, 앞- 서- 보내, 셨- -음 이여,
요- -셉 이-, 종- 으- 로-, 팔- -렸 도-, 다- -- --∼
(뒷소리)[다함께]
아- -리 랑-, 아- -리 랑-, 아- 라- 리-, 요- -- --,
아- -리 랑-, 고- 개- 로-, 넘- -어 간-, 다- -- --∼
[회중]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뒷소리)[찬양대]
21. 그- -- 를-, 그- -의 집의, 주관 자- 로-, 삼- -- 아-,
그- -의 모든, 소- 유- 를-, 관리 하게 하-, 고- -- --∼
(앞소리)[독창]
22. 그- -- 의-, 뜻- 대- 로-, 모든 신- 하를, 다- -스 리며,
그의 지혜 로-, 장로 들- 을-, 교훈 하게 하였((도)), 다- -- --∼
(뒷소리)[다함께]
할- -- 렐-, 루- -- 야-, 할- 렐- 루-, 야- -- --,
할- -렐 루야, 할- 렐- 루야, 할- -렐 루-, 야- -- --∼∥
※ 가락은 아리랑가락이고, 장단은 세마치로 읊는다.
(뒷소리는 세마치로, 앞소리는 중중모리로 해도 좋다.)
※ 쉼표(‘,’)까지 세마치 한 장단 3박 이다.(중중모리일 경우는 한 줄이 한 장단)
(즉, 세마치 4장단이 중중모리 1장단이다.)
※ 세마치장단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편의상 1박을 3분박 대신 2분박으로 구분했다.
(예; 악보 세 번째 마디에 종종 나오는 셋잇단음표 식으로 표기한 것이 3분박의 맛을 살린 것이다.)
※ 뒷소리는 찬양대 합창으로, 앞소리는 독창이나 이중창으로 하면 좋겠다.
[말씀동화] 두 동강난 합죽선
옛날옛날 한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덩실덩실 부채춤 추던 시절 이야기예요.
우리 선생님은 덥지도 않나?
수업 마치면 에어컨도 선풍기도 싹 다 꺼버려요.
교실에 혼자남아 일하시며 창문 열고 부채질만 합니다.
우리 담임선생님 부채는 합죽선(合竹扇)이죠.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 빵빵한 교무실에 안 가고 교실에서 부채질로 버티세요.
선생님의 합죽선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하얀 한지 바탕 한 귀퉁이에 좋아하는 말을 붓글씨로 써두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성경말씀이었어요.
“우리의 피붙이이다”
도대체 어디에 나오는 무슨 뜻인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한바탕 합죽선 두 동강 사고를 치르면서야 알게 되었죠.
합죽선은 묘한 부채예요.
딱 30㎝ 자처럼 보이는 걸 쫙 소리 나게 펼치면
둥그런 반달이 됩니다.
합죽선은 중국에서도 부러워했던 고려시대 발명품이래요.
중국과 일본이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고려의 합죽선처럼 크고 가볍고 멋진 이런 부채는 못 만들었다죠?
선생님의 합죽선 자부심은 점점 사랑으로 발전했어요.
선생님은 뜨거운 지구를 식혀줄 보배라고까지 칭찬하십니다, 합죽선을!
양쪽 끝 두 개의 굵은 살 사이에 가득한 서른 개의 살을 펼치면
서른한 개 바람골짜기가 생깁니다.
아주 작은 힘만으로 시원한 골짜기 바람이 수십 개 만들어지는
과학의 극치! 우리 선생님의 합죽선 자랑은 끝이 없습니다.
언젠가 짤막한 합죽선 동영상들을 여러 개 편집해서 보여주시는데
조선시대 선비가 도포자락 휘날리며 학처럼 춤출 때
손에 든 합죽선이 되게 멋있었어요.
펼치지도 않았는데 멋있습니다.
얼마나 고수인지, 나쁜 놈들을 물리치는 데 칼 대신 합죽선 하나로 물리칩니다.
판소리꾼은 손에 딱 하나 합죽선만 들고 별의 별 연기를 다 합니다.
맹인용 지팡이도 되었다가 삼국지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되고, 장비의 장팔사모창도 되니,
손오공의 여의봉은 되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드네?
이렇게 아끼시는 우리 선생님 합죽선이
어느 날 두 동강 나버리는 일이 벌어졌어요.
선생님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우리 반 꾸러기들이 동영상에서 본 무술 흉내 내려고
서로 합죽선을 차지하려 다투다가 가운데가 쫙 찢어지며 두 동강 나버린 겁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사색이 된 꾸러기들이
풀로 붙여보려 애쓰는데 선생님이 들어오십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우물쭈물하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번갈아보며
우린 모두 쥐죽은 듯 조용했겠죠.
한동안 가만히 갈라진 합죽선을 바라만 보시던 선생님이
꾸러기들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들어가 앉으라고 하십니다.
우린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온통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선생님은 펼친 합죽선을 들어 보이십니다.
그렇게 멋지고 짱짱했던 합죽선이 저렇게 무기력할 수가!
시원한 바람골짜기는커녕
두 동강나서 덜렁거리는 합죽선은 보기조차 민망합니다.
두 동강난 합죽선을 들고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피붙이이다’ 이 붓글씨는 구약성경 창세기 37장 27절 중간에 나온 구절인데, 야곱의 여러 아들들이 요셉이라는 아우가 미워서 죽이려하다가 잠깐 정신 차리고 반성하며 한 말이란다. 나는 우리 남과 북이 같은 피붙이면서 원수가 되어 분단된 것이 안타깝고 부끄러워서 늘 이 성경구절을 보며 반성하지.”
아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릴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합죽선이 저렇게 약할 줄 몰랐어요.”
“맞아요. 쫙 소리 나며 펼쳐지는 짱짱한 합죽선이 저렇게 쉽게 찢어지다니!”
“그렇게 멋지던 합죽선이 두 동강나니까 저렇게 덜렁덜렁 너무 추해 보여요.”
“그나저나 이제 어쩌죠? 못 고치나요?”
선생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합죽선 수리를 시작하셨어요.
서랍에서 한지조각을 꺼내어 5㎝정도 폭으로 합죽선 종이 길이에 맞게 부채꼴로 오려서 풀을 발라
합죽선의 갈라진 부분을 맞추어 그 위에 붙여 이어줍니다.
순식간에 수리된 합죽선을 천천히 부채질하며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이제 덜렁거리지 않지? 예전보다 아주 조금 무게가 더해지니까 바람도 더 나은 것 같은 걸? 합죽선에 향기 나는 기름을 조금 바르면 부채질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단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붙일 때는 가운데 빨갛고 노란 작은 단풍잎사귀들을 넣어 붙이면 더 멋있어 지지!”
선생님의 마법 같은 솜씨에 모두 다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하고 있을 때
누군가 멋진 말을 합니다.
“원래 것 보다 더 멋있고 시원해진 합죽선이 딱 우리나라 같아요 선생님! 아직은 두 동강나 덜렁거리는 합죽선 같지만, 우리도 조금만 더 슬기를 모으고 힘을 합하면 원래보다 더 멋진 나라 만들 수 있겠죠?”
선생님 입이 합죽선처럼 활짝 펴졌어요.
그리고 그 멋진 말을 한 아이에게 다가가 애지중지 합죽선을 선물하십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니 너도나도 온 교실이 박수소리 가득합니다.
문득 합죽선 만드는 거 배우는 수업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 속에선 벌써부터
별의별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마구 솟구칩니다.
[이정훈 지음. 2020년 8월 8일 토요일 오후]
'성실문화 응용하기 > 본문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강림절 13주(성령강림 후 12주, 2020년 8월 23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0) | 2020.08.21 |
---|---|
성령강림절 12주(성령강림 후 11주, 2020년 8월 16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0) | 2020.08.14 |
성령강림절 10주(성령강림 후 9주, 2020년 8월 2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0) | 2020.07.31 |
성령강림절 9주(성령강림 후 8주, 2020년 7월 26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0) | 2020.07.24 |
성령강림절 8주(성령강림 후 7주, 2020년 7월 19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0) | 2020.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