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시편 13:3)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22:1-14)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5.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6.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9.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14.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시편 13)
1.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3.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4.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5.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6.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12-23)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마태복음 10:40-42)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주님께 집중하여, 점점 주님의 것 되어가다’입니다.
구약, “예, 여기 있습니다”(창세기 22:1,11)
시편,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시편 13:3)
서신서,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로마서 6:13)
복음서,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태복음 10:40)
오늘 요절은,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입니다.(시편 13:3)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창세기 22:1-14 / 시편 13)]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시다’입니다.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 다 버리고 떠나라고 하신 뒤(12:1)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모든 것 버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을 내리십니다.(2)
지난주 본문에 이어서 보면,
이스마엘을 버린 뒤 이삭까지 버리라는 명이신데, 이번엔
그 방법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 방법이라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힙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그저 묵묵히 그 명을 따릅니다.
히브리서 11:17-19절의 해석과 로마서 8:32절을 교차해서 볼 때,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입장이 묘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을 거두시더니 당신에게서 이루십니다.
외아들 예수님을 죽게 하시고 마침내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구약본문의 알맹이는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집중력>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하나님 집중력은 <하나님 두려워함>(12)과 통합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니라) 스스로를 온통 하나님께 바쳐가고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어갑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시련을 겪는 자의 구조요청’입니다.
“언제까지”를 5번이나 반복할 정도로(1-2)
답답하고 절망적인 시인의 질문에서,
오늘 구약본문 아브라함의 소리 없는 절규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의 후반부는 크게 반전(反轉)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에 찬 기쁜 찬송이 가득한 것입니다.(5-6)
그래서 더욱 이 시가 오늘 구약본문의 응답찬송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로마서 6:12-23 / 마태복음 10:40-42)]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그리스도인은 의의 종이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아 깨친 사람이라면
그 삶이 더 이상 죄, 불법, 불의에 가까울 수 없고,
반대로 점점 의에 가까워져서 거룩하게 되어가며(19)
마침내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마땅합니다.(13)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예수 때문에 영접함’입니다.
천하에 빛나는 의인도 예언자도 아닌,
아주 작고 이름 없는 자일지라도 교회에 속한 예수제자이기만 하면,
그가 예수이름으로 가는 곳에 반드시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함께 가십니다.(40)
그러므로 작고 보잘 것 없는 예수제자 영접함은
하나님을 영접하여 그분께 속하게 되고 그분 것이 되어가는
복스러운 일입니다.(42)
예수님은 이렇게 작은 제자들까지 챙기시고 당신과 일체시키십니다.
마치 실핏줄처럼,
온몸 구석구석 눈에도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지체들까지 일일이
남김없이 장악하시고 하나 되십니다!
[정리]
그 옛날 이방신 몰록에게 제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치던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지금도 물질적 풍요와 무한권력을 위해서라면 상상을 초월할 짓도 서슴지 않는 이 탐욕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여주십니다.
그 아브라함의 입에서 피비린내가 납니다.
아무 말 없이 며칠째 입술만 깨물고 또 깨물던 아브라함의 입!
그 많은 장작을 혼자 다 짊어지고 산을 오를 만큼 씩씩한 장정임에도
이스마엘은 늙은 아비의 뜻에 따라 순순히 묶여 장작더미 위에 오릅니다.
이삭의 이 모습에서 십자가에 오르시던 예수님이 떠오르고,
아브라함 입의 피비린내에서는,
끝내 십자가 처형을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아들의 어린양 절규를 견디시던
하늘아버지의 소리 없는 피눈물이 연상됩니다.
경외심 가득한 아브라함의 <하나님집중력>이
하루하루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하나님과 점점 일체가 되어가게 했듯이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주님의 몸 교회의 작은 지체들인 우리는
예수님 말씀에 힘입어 내가 주님과 이미 일체라는 사실을 각성합니다.(마태 10:40)
그럼에도 여태
끝없는 탐욕과 죽음의 공포, 악마의 거짓말과 이간질에 멱살 잡힌 이들에게
미망(迷妄)에서 어서 깨어나라고,
너희는 몰록의 자식, 맘몬의 자식이 아니라 나의 자식이라고,
너희는 나의 것임을 어서 깨치라고
계속해서 보내시는 하나님아버지의 경고신호를
오늘도 흘려버리는 눈먼 세상을 위하여,
오늘도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시편 13:3)
[나머지]
* 또 하나의 징검다리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를 소개합니다.
“여호와이레”(창세 22:14), “하나님의 선물”(로마 6:23), “받을 상”(마태 10:41, 42)
** 매일성서일과 6월 25일(목) 갈라디아 5:6절 말씀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개역개정)
믿음은 무감각한 로봇(기계적) 같은 맹종이 아닙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 안에는 두려움(경외심)이 즉 하나님 사랑이 있었습니다!
(※ 여러해 전 예배준비노트에 올린 글을 다시 다듬어 올립니다.)
*** 지난주 구약본문과 이어지는 대구(對句)
청소년 이스마엘을 버리고, 청소년 이삭까지 버리게 되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살리고(샘을 발견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살리다(숫양을 발견하다).
**** 거짓말과 믿음 사이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보입니다.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5절과 8절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그 거짓말(?)대로 되었으니, 이걸 믿음이라고 봐야 할지 은혜라고 봐야 할지 궁금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래전 아브라함이 했던 거짓말들(12:13, 20:2,11-13)과는 결이 다른 거짓말이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말씀동시] 열매 (이소현 지음. 성실교회 고등부. 「성실문화」 103호)
외롭게 헤엄치는 검은 고니와
함께 헤엄치는 자는
그 어미와도 함께 헤엄치는 것이고
메말라 죽어가는 나무에게
물 한 모금 적셔주는 농부는
추수 때가 오면 탐스런 열매를 얻을 것이다
[말씀시조] 죄의 삯은 죽음이요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03호)
죄의 삯은 죽음이요 주님 선물 영생이라
정욕을 멀리하여 죄의 지배 깨뜨리라
의의 종 순종의 길이 거룩함에 이르리
[말씀서예] 로마서 6:19 (오요섭 작품. 「성실문화」 103호)
[시편노래] ‘시편 13, 오 주님 언제까지’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 103호)
[본문] (시편 13)
[노랫말]
1. 오 주님 언제까지 저를 잊으시렵니까, 내 영혼 언제까지 이 고통을 견디리까,
굽어 살펴 주옵소서 응답하여 주옵소서, 죽음의 잠 깨우시고 눈을 뜨게 하옵소서
2. 오 주님 언제까지 저를 잊으시렵니까, 우쭐대는 저 원수들 다스려 주옵소서
한결같은 주 사랑을 제가 의지하나이다, 구원하신 주 사랑을 기뻐 찬송하나이다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찬양사역자이신 이석훈 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13 (오 주님 언제까지)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시편 송서(誦書)] 시편 13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03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 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함께]
6. 내가- 여-호-와를 찬--송--,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말씀동화] 동막골, 도두리, 강정마을에 꽃이 피는 날!
옛날옛날 한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곰이랑 전쟁놀이 하다가 재미없어서 다시 쑥이랑 마늘 먹던 시절 이야기야.
너희들 동막골 이야기 들어보았니?
동막골은 강원도 평창 심심산골에 숨어있는 마을이란다.
얼마나 꽁꽁 숨어있었으면
평창사람들조차 그 이름도 모를 정도였지.
동막골 사람들은 다른 마을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어.
밭을 망가뜨리는 멧돼지를 잡아도 고기를 먹지 않고 그냥 묻어준다니까.
70년 전에 6.25 전쟁이 났을 때도
동막골 사람들은 아무도 전쟁이 났는지도 몰랐었데.
스미스라는 연합군 조종사가 몰던 비행기가 산마루에 추락하는 바람에
전쟁이 났는지 조금 눈치 챘으려나?
아무튼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조종사가 살아난 것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 마을이야, 거긴!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야.
어찌어찌하다가 남한 국군 패잔병과 북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슬금슬금 동막골에 들어와 서로 어울리게 되었단다.
그야말로 연합군 스미스를 비롯해서 남과 북 병사들이 어울리는
꿈같은 마을이 되어버렸지.
처음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아주 사납게들 굴더니만,
이내 군복도 다 벗어버리고 동네사람들 옷을 빌려 입고 보니
너도나도 모두모두 어느새 딱 동막골 사람들이더라니!
동막골에서 가장 동막골 같은 아이가 있었단다.
그 아이 이름은 여일이야.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닐 정도로 생각이 모자란 아이라고 비웃는 애들도 있었지만,
실은 동막골의 신비롭고 선한 기운은 여일이에게서 나오는 거였지.
그 기운을 환히 느끼는 것은 바로 꽃동네 동막골의 많고 많은 나비 떼였고!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나운 군인들이 쳐들어오는 통에 여일이는 숨을 거두고
수많은 전투 비행기들의 폭격으로 동막골이 영영 사라질 위기가 닥쳤지.
바로 그때 남과 북의 패잔병들은
전쟁으로부터 동막골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친단다.
그들 덕분에 지금도 강원도 평창 산속에 동막골은 숨 쉬고 있지.
마치 에덴동산처럼, 술래가 모르도록 어딘가에 꽁꽁 잘 숨어 있을 거야.
한반도에 가득한 6.25 전쟁의 상처가 전부 치유되어서 우리 눈이 환히 열린다면
아마 동막골 가는 그 숨은 길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하겠지.
1. 나비야나비야 청산가자 호랑나비 너도 가, 비행기재 고개고개로 넘실넘실 넘어가. 2. 두메산골 아무 골짜기 마을 하나 보인다, 아이들처럼 마구 살아라 당실당실 동막골. 3. 착한할머니 고운어머니 든든하신 아버지, 함께 일하고 같이 밥 먹자 금실금실 동막골. 4. 머리에 꽃 꽂은 착한아이는 어깨동무 내 동무, 욕심쟁이들 착해지거라 방실방실 동막골. 5. 나비야나비야 청산가자 호랑이 너구리 너도 가, 아픈 동무들 새살 돋아라 덩실덩실 동막골. 6. 아리랑고개는 열두 고개 동막골은 한 고개, 아이들처럼 마구 좋아라 둥실둥실 동막골 (‘동막골아리랑’ 이정훈 지음)
동막골을 빼닮은 마을이 있었어.
경기도 평택에 있는 도두리라는 마을이야.
언제나 누구나 마실 수 있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산에는 사철 먹을거리 가득한 평화로운 마을이란다.
도두리에는 동막골 여일이처럼 해맑은 아이가 살았지.
그 아이는 여일이처럼 머리에 꽃을 꽂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사시사철 꽃이 피듯 아름다운 노래가 피어났단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피어난 멋진 노래 한번 들어볼래?
1. 저 들 밭에 뛰놀던 어린 시절, 생각도 없이 나는 자랐네, 봄 여름 가을 겨울 꿈도 없이 크며, 어린 마음뿐으로 나는 보았네, 도두리 봄 들판 사나운 흙바람, 장다리꽃 피어있는(문둥이 숨었는) 학교길 보리밭, 둔포장 취하는 옥수수 막걸리, 밤 깊은 노성리 성황당 돌무덤, 달 밝은 추석날 얼근한 농악대, 궂은 밤 동구 밖 도깨비 씨름터, 배고픈 겨울 밤 뒷동네 굿거리, 추위에 갈라진 어머님 손잔등을∼ 2. 이 땅이 좁다고 느끼던 시절, 방랑자처럼 나는 떠다녔네, 이리로 저리로 목적지 없이, 고단한 밤 꿈속처럼 나는 보았네, 낙동강 하구의 심난한 갈대 숲, 희뿌연 안개가 감추는 다도해, 호남선 지나는 김제 벌 까마귀, 뱃놀이 양산도 설레는 강마을, 뻐꾸기 메아리 산골의 오두막, 돌멩이 구르는 험준한 산 계곡, 노을 빛 뜨거운 서해안 간척지, 내 민족 허리를 자르는 휴전선을∼ 3. 주변의 모든 것에 눈뜨던 시절, 진실을 알고자 난 헤매였네, 귀를 열고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설프게나마 나는 듣고 보았네, 서울로 서울로 모이는 군중들 (길 잃고 헤매는 교육의 현장과), 지식의 시장에 늘어선 젊은이, 예배당 가득히 넘치는 찬미와, 정거장마다엔 떠나는 사람들, 영웅이 부르는 (압제의) 노래와, 젖은 논 벼 베는 농부의 발자국, 빛바랜 병풍과 무너진 성황당, 내 겨레 고난의 반도 땅 속앓이를∼ 4. 얼마 안 있어 이제 내 아이도 낳고, 그에게 해 줄 말은 무언가, 이제까지도 눈에 잘 안 띄고, 귀하고 듣기 어려웠던 얘기들, 아직도 풋풋한 바보네 인심과, 양심을 지키는 가난한 이웃들, 환인의 나라와 비류의 역사, 험난한 역경 속 이어온 문화를, 총명한 아이들의 해맑은 눈빛과, 당당한 조국의 새로운 미래를, 깨었는 백성의 넘치는 기상과, 한뜻의 노래와 민족의 재통일을∼(정태춘, ‘얘기2’)
그 아이의 이름은 정태춘이야.
자기 고향 도두리를 누구보다 사랑해서
몇몇 노래를 지을 때 거기 도두리 이름을 넣기도 했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두리는 동막골처럼 군인들에게 위협을 당했고
동막골처럼 목숨을 걸고 지켜주는 남북연합군이 없어서일까, 결국 미군부대마을로 변해버렸단다.
도두리 사람 정태춘은 동막골 여일이처럼
고향마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
그러나 결국 마을을 빼앗겨버린 뒤로 몸도 마음도 망가져서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 했어.
천만다행인 것은 도두리 아이 정태춘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거야.
몸은 어느새 노인이 되었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아이처럼 맑은 노래가 꽃처럼 들꽃처럼 한없이 피어오르니
어찌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어.
동막골을 빼닮은 또 하나의 마을이 바로 강정마을이야.
강정마을은 제주도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란다.
붉은발 말똥게가 사는 <구럼비 바위>로 유명했어.
강원도에 동막골이 있다면, 바다건너 제주도에는 강정마을이 있었던 거지.
그런데 평택 도두리가 그랬듯이
제주 강정마을도 군인들 마을이 되어버렸어.
커다란 군함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구럼비 바위조차 깨뜨려버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강정마을 벗들은 오늘도 구럼비를 추모하며 노래를 부른단다.
제주바다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천년만년 철썩철썩 하늘빛 높은 숨을 쉰다, 푸른바다 평화의섬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수억만년 철썩철썩 바닷빛 깊은 숨을 쉰다∼ 회색빛 시멘트 어서 걷어라, 갑갑한 콘크리트 옛다 치워라, 무거운 군함 어서 떠나라,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맑은 강물 은어떼 춤추고 푸른바다 돌고래 달려가는, 붉은 발 말똥게와 숨바꼭질 벌거숭이 아이들 뛰어 노는∼ 제주바다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천년만년 철썩철썩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푸른바다 평화의 섬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수억만년 철썩철썩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회색빛 시멘트 어서 걷어라,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갑갑한 콘크리트 옛다 치워라,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무거운 군함 어서 떠나라,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맨발로 얼싸안자,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제주바다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푸른바다 평화의섬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구럼비 바위가 숨을 쉰다’ 김수형 시, 김연수 곡)
중국의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평택 도두리에 미군부대와 미 공군 기지까지 만들었듯이,
제주 강정마을에는 해군기지를 만든 거였어.
그래서 평화의 섬 제주가 싸움의 섬이 될까봐,
또다시 6.25 전후로 불었던 4.3 광풍 같은 미친바람에 휩싸일까봐,
많은 벗들이 걱정하며 강정마을에 모여들었단다.
그 벗들 가운데 송강호가 있었어.
머리에 꽃 꽂은 동막골의 여일이처럼,
마음속이 꽃동산인 도두리의 정태춘처럼,
그 마음속이 온통 평화의 꽃 천지인 아이 같은 사람 송강호!
비록 해군기지로 가로막혔지만,
틈만 나면 헤엄쳐 구럼비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군인들이 아무리 감옥에 가두어도
송강호의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단다.
혹시 송강호는 지금 꿈을 꾸고 있지 않을까?
감옥에 갇혀서도 오직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꿈을 꾸었던,
꿈동이 문익환 할아버지가 노래했던 이런 꿈 말이야.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 바다로 서해 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 지음)
언젠가 마치 바벨탑처럼 허물어져, 미군기지도 해군기지도 총칼도 다 사라지고
다시 풀이 나고 물이 흐르고 새들이 날아오고
바위마다 붉은발 말똥게가 기어 다니는 꿈.
동막골의 진정한 벗 남북연합군을 닮은
제주 강정마을의 벗, 구럼비 바위의 벗 송강호는
오늘도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한 송이 고운 꽃처럼
시편을 노래하고 있을 거야.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시편 13:3)
우리 남과 북의 모든 사람들을 70년 내내 아프게 하는 저 6.25 전쟁 상처가 어서 아물고
마침내 닫힌 눈이 열리기를!
그래서 동막골로 가는 길이 보이고,
도두리와 강정마을이 되살아나는 길, 꽃처럼 아름다운 그 길이 환히 보이기를!
오! 그 길이 열리는 날,
그 꽃길을 따라 동막골 나비들이 날아오겠지.
나비들이 날아와 너울너울 춤추면,
동막골 여일이를 닮은 꽃처럼 맑고 고운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 거야.
너도나도 다함께 덩실덩실 춤출 거야.
얼∼쑤!
[이정훈 지음. 2020년 6월 27일 토요일 오후]
(박광현 감독의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감동, 그 기억을 바탕으로 지었습니다. 특히 여일이의 머리에 꽂은 꽃을 기억했습니다. 그 꽃을 정신 나간 것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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