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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왕국절 10주 (2014년 11월 2일 주일) 예배준비 노트

“튼튼하게 서 있었다.”

 

[성서일과 4본문]

(여호수아 3:7-17)

7.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바로 오늘부터 내가 너를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고,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

8. 이제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의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강에 들어가서 서 있으라고 하여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였다. "이 곳으로 와서, 주 당신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10.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이루어질 이 일을 보고, 당신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당신들 가운데 계셔서,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히위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당신들 앞에서 쫓아내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1. 온 땅의 주권자이신 주님의 언약궤가 당신들 앞에서 요단강을 건널 것입니다.

12. 이제 이스라엘의 각 지파마다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뽑으십시오.

13. 온 땅의 주권자이신 주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강 물에 닿으면, 요단 강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끊기고, 둑이 생기어 물이 고일 것입니다."

14.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진을 떠날 때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 앞에서 나아갔다.

15. 그 궤를 멘 사람들이 요단강까지 왔을 때에는, 마침 추수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물가에 닿았을 때에,

16.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다. 그리고 멀리 사르단 근처의 아담 성읍에 둑이 생겨, 아라바의 바다 곧 사해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완전히 끊겼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17. 온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서, 온 백성이 모두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주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었다.

 

(시편 107:1-7, 33-37)

1. 주님께 감사드려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아,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아, 모두 주님께 감사드려라.

3. 동서남북 사방에서, 주님께서 모아들이신 사람들아, 모두 주님께 감사드려라.

4. 어떤 이들은 광야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으며,

5. 배고프고 목이 말라, 기력이 다 빠지기도 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셔서,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33. 주님께서는 강들을 사막으로 만드시며, 물이 솟는 샘들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옥토를 소금밭이 되게 하신다.

35.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막을 연못으로 만드시며, 마른 땅을 물이 솟는 샘으로 만드시고,

36. 굶주린 사람들로 거기에 살게 하시어, 그들이 거기에다 사람 사는 성읍을 세우게 하시고,

37. 밭에 씨를 뿌리며 포도원을 일구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데살로니가전서 2:9-13)

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10. 또, 신도 여러분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이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증언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증언하십니다.

11.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우리는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합니다.

12. 우리는 여러분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경고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1-12)

1.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4.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6.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7.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9.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이번 주일 성서일과 본문에서 마음에 감동을 준 구절들을 요약하면,

‘생생하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 다음주일이며, 종교개혁일(10/31) 다다음 날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중심축이었던 ‘말씀’의 결기가 생생합니다.

종교개혁주일도 지났으니까 이제 좀 느슨해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의 주인공은 말씀, 그리고 말씀을 받은 예언자입니다.

 

구약과 복음서본문은 예언자 모세의 뒤를 잇는 서로 다른 두 모델을 보여줍니다.

구약은 여호수아(수 3:7),

복음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마태 23:2)

 

이번 주 요절은 두 개입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한 가운데...) “튼튼하게 서 있었다.”(수 3:17),

(하나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살전 2:13)

 

 

[구약과 시편 (여호수아 3:7-17 / 시편 107:1-7, 33-37)]

오늘 구약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왜 압권(壓卷)이냐 하면,

앞장서 가던 제사장들이 요단강 중간에 “튼튼하게 서 있”는 모습 때문입니다.(17)

 

물론 여기서 중심은 제사장들이 아니라 그들이 멘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저는 저 이름 없는 제사장들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 때문에 힘차게 변화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오랜 시간 동안 저렇게 강 한 가운데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장들은 공포심을 꿀꺽 삼켜버립니다.

‘말씀’에 힘입어 요단강 한 가운데 튼튼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17)

 

말씀을 받으면,

말씀을 어깨에 짊어지면,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무서워지는 게 아니라

험한 세상 한 가운데서도 당당해 지는 법입니다.

 

모세에 이어서 하나님 말씀을 직접 받는(→ 예언자) 여호수아!(7)

그리고 여호수아로부터 다시 하나님 말씀을 전달받은(→ 예언자) 제사장들입니다.(8)

 

저 제사장들은 말씀만 전달받은 게 아니라(청각)

그 말씀의 상징인 언약궤를 멥니다.(시각)

언약궤(를 멘 제사장(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무려 7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9) 봅니다.(11)

그리고 마침내 ‘그 말씀’ 때문에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봅니다.(13, 16)

모세는 떠났지만,

하나님 말씀은 이리 생생하게 우리 가운데 움직이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시편본문은 출애굽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의 모습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듯합니다.

33절 이하의 말씀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대비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과(이주민)

말씀의 반대쪽, 물질 풍요(우상)만 추구하는 사람들(원주민)의 차이입니다.

(뒤에 [나머지]에서 좀 더 깊이 살펴볼 것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 (데살로니가전서 2:9-13 / 마태복음 23:1-12)]

오늘 서신서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복음)”입니다.(x 4)

예언자 바울로부터 전달받은 하나님 말씀을,

마치 직접받은 말씀처럼 생생하게 여기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돋보입니다.(13)

 

그리하여 ‘그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마치 구약본문의 언약궤가 요단강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이 연상됩니다.

 

말씀은 천국 길의 장애물(요단강) 한 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말씀은 천국 길의 길동무들(교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11절의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는

지난주 본문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살전 2:7)와 짝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음으로 양으로 교회를 먹이시고 운동시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예언자가 되어갑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은 모세를 잇는 사람들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나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마태 23:2-3)

말씀이 머리에만 입에만 있고 행실, 삶에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말씀의 체온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 눈에 멋지게 보이려고만 애씁니다.(5)

높은 자리만 좋아합니다.(6)

 

그러나 말씀의 도(道), 말씀이 가는 길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입니다.(11-12)

 

 

[정리]

오늘 구약과 신약에는

예언자(預言者) 모세, 영도자(領導者) 모세 이후 두 가지 풍경이 대조를 이룹니다.

구약에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를 이으며

제사장들에게 모세의 역할을 맡깁니다.

 

홍해를 갈랐던 모세(출 14:21-22)처럼! (요단강을 가르고)

목숨을 건 전장에서 안테나처럼 손을 들고 있던 모세(출 17:9-12)처럼! (요단강 가운데 우뚝 서있습니다.)

 

오늘 구약본문 구석구석에는 모세를 이어받은

예언자(말씀을 받은(맡은) 자)의 결기가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모세의 대를 잘못 잇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옵니다.

저들에게는 예언자의 결기는커녕 아무 향기가 없습니다.

 

 

엊그제 종교개혁일이었습니다.

요사이 한국사회에는 종교개혁 이후 두 가지 풍경이 대조를 이룹니다.

500년 전 천주교와 개신교가 지금 완전 역전이 되어버렸습니다.

낮은 곳을 향하려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높은 곳을 지향하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대조를 이룹니다.

 

나는 그렇게 안 보려고 하는데,

세상사람들은 완전히 그렇게 보인다고 소리 지릅니다.

한국교회가 딱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 비슷한가 봅니다.

 

말씀으로! 믿음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신교!

500년이 지난 지금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의 길[道] 따라 낮은 곳을 향해야 할 때입니다.

 

 

[나머지]

 

*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처럼 말씀을 맡은 예언자들이 튼튼하게 서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 일부가 욕먹고 흔들린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내 가족, 내 직장 동료들에게 여호수아 같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정 가운데 튼튼히 우뚝 서 있어야 할 말씀의 일꾼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천국길을 가로막는 요단강은

교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한국사회의 흘기는 눈입니다.

더 커지고 높아지려고만 하는 한국교회의 욕심입니다.

점점 더 늘어만 가는 내 안의 온갖 탐욕입니다.

 

이 명량의 거센 물줄기 같은 요단강 급류를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는 내게 맡겨진 말씀을 언약궤처럼 메고

여럿이 함께 말씀을 메고, 거기 이순신처럼 의연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부끄럽지 않게, 말씀이 부끄러워지지 않게, 말씀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게

오늘의 요단강 가운데서 말씀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은 한국교회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려 하십니다.

세상논리, 경제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세상맛들인 교회,

돈맛에 물든 교인들이 아무리 아우성치며 엉뚱한 길로 가자고 외치더라도,

이천 규빗(1㎞) 거리를 두고(수 3:4),

주의 말씀이 인도하시는 대로 먼저 앞서 갑시다.

너무 앞서간다고 비꼬는 소리 들려와도

그냥 말씀 따라 신나게 행진합시다.

 

그리고 멈추라하신 그 자리에 멈추어 섭시다.

쓰나미 같이 몰려드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아귀 같은 돈의 횡포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말씀이 붙드시는 대로 거기 튼튼하게 서 있읍시다.

 

내가 그 위태로운 자리 정 가운데서

오직 말씀 하나만 붙들고 튼튼히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내 가족은, 내 동료들은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진정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종교개혁의 남은 숙제 - 약한 자 편들기

1517년에 벌여졌던 종교개혁의 또 하나의 알맹이는,

종교귀족, 종교재벌들 때문에 허리가 휘는 약자들의 발견입니다.

지금 말씀으로, 믿음으로 다시 선 교회에게 남은 일은

약자의 편에 서는 일입니다.

그게 종교개혁의 핵심, 하나님의 뜻!

그게 바로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편드시는 분이라는 사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예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약자 중의 약자인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 하신 말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편드시는 하나님, 약한 자 편을 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강한 자나 약한 자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그러나 어느 부모나 다 그러하듯이,

많은 자식들 가운데서도 특히 약한 자식에게 더 마음이 가는 법입니다.

 

더구나 강한 자식이 약한 자식의 목을 조를 때는...

강한 자식이 제 것 다 먹고도 더 먹으려고 약한 자식의 몫을 빼앗으려 할 때,

정상적인 부모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매를 들고 강한 자식을 때리고 벌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빼앗겨서, 억울해서 울고 있는 약한 자식을 달래고,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고, 먹을 것을 줄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게 부모의 사랑입니다.

 

강한 자식을 사람 만들기 위해 더 때릴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게 편드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고기를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라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정반대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논리로 무장한 자본주의와 진화론을 저는 싫어합니다.

그게 아무리 과학이고 순리라 해도 저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망가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흐름을 내 목숨을 걸고라도 막으려 발버둥 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험한 길이지만, 그게 예언자의 길, 그게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가나안 7부족을 쫓아내신 까닭은

이런 맥락에서 오늘 구약본문의 알맹이는,

가나안 7부족이 강자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자가 아니라

사람이 강자이고 땅이 약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 말씀 몇 곳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레 25:23)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시 49:6-11) (공동번역) 6. 한갓 돈 많음을 자랑하며 재물을 믿는 그들이거늘, 7. 하느님께 돈을 바친다고 죽을 목숨을 살려주시랴? 8. 목숨값은 엄청난 것, 그 값을 치르기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 9. 저승길을 가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고는 생각도 마라. 10. 지혜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 우둔한 자 모두 죽는 법이다. 두고 가는 재산은 결국 남의 것, 11. 그들이 땅에다가 제 이름 매겼더라도 그들의 영원한 집, 언제나 머물 곳은 무덤뿐이다.

(새번역 11.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둘째, 하나님의 땅을 오염시킬 때, 창조질서를 무너뜨리고, 탐욕으로 오염시킬 때

땅은 그게 어느 민족이건 모두 토해버린다는 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고 우리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탐욕은, 돈을 추구하는 과정,

즉 그 당시 풍요의 신을 숭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온갖 음란한 행위들로 표현되었습니다.

 

(창6:12-13 ) 12.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레 18:24, 25, 28) 24.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25.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 28.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

(레 26:34) 34. 그 때에야 비로소, 땅은 안식을 누릴 것이다. 땅이 그렇게 폐허로 버려져 있는 동안, 곧 너희가 원수들의 나라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비로소 땅은 쉴 것이며, 제 몫의 안식을 누릴 것이다.

(민35:34) 34.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 주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함께 머물고 있다."

 

그리고 오늘 시편 본문말씀입니다.

(시 107:33-34) 주님께서는 강들을 사막으로 만드시며, 물이 솟는 샘들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옥토를 소금밭이 되게 하신다.

 

그렇습니다.

오늘 구약본문말씀 가운데 가나안 일곱 부족을 몰아내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땅을 탐욕으로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땅은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착각은 땅을 망가뜨리고 그렇게 땅을 망가뜨린 자들은 그것이 원주민이건 이주민이건 간에 누구라도

그 땅에서 쫓아낸다는 것이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뜻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고, 우리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엉터리 국토개조론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땅을 제 것인 양 착각하고

4대강 강바닥을 파헤치고,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를 깨부순 지 오랩니다.

이것은 아주 상징적이면서도, 아주 실제적인 상황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 결과를 볼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살지 맙시다.

그것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맙시다.

그것은 아무리 발버둥해도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나의 것, 즉 우리의 것입니다!

 

그것을 내 이름으로 등기하기 위해 몸부림하며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간 이들의 비극을 성경은 아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내 이름으로 등기하기 위해 돈 벌려고 애쓰지 말고,

우리 남은 인생을 ... 오직 약자를 편드는 일을 위해 삽시다.

그것이 슬기로운 일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주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 내 천국을 이루어가는 길입니다.

 

 

**** 욕위대자(欲爲大者) 당위인역(當爲人役)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배재학당 교훈입니다.

마태 20:25-27절 말씀인데, 오늘 본문 마태 23:11절 말씀과도 통합니다.

 

물론 여기서 ‘크고자 하거든’의 큰 사람[大者]이란,

크게 성공한 사람,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마태복음 20장 본문의 앞뒤 문맥만 보아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보물찾기로 비유한다면,

천국의 열쇠는 절대 높은 자리에 없습니다.

천국의 열쇠는 낮고 낮은 자리 저 아래 숨어 있습니다.

 

 

 

 

[말씀동시] 거울 (이진구 지음. 성실교회 교회학교 6학년. 『성실문화』80호)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게으름과 욕심에 대해

말씀하시네

그것을 들은 제자들의 게으름과 욕심이

거울에 비추어지네

 

 

 

[말씀시조] 마태복음 23:1-12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80호)

게으른 욕심쟁이 종교인을 닮지마라

예배당 잔치자리 높은자리 앉지마라

자기를 낮추는사람 으뜸자리 오르리

 

 

 

[말씀한시] 주인이 머슴을 섬겼다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80호)

人人慾上座 (인인욕상좌) 사람마다 높은 자리를 욕심내는데

耶穌天下降 (야소천하강)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셨다

宗吏習不行 (종리습불행) 바리새인들은 실천하지 않고

每事願貴堂 (매사원귀당) 매사에 귀한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金山選長老 (금산선장로)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임할 때

落下趙班鄕 (낙하조반향) 양반인 조공(趙公)이 낙선되고

先任李奴僕 (선임이노복) 머슴인 李씨가 장로로 선출되었더니

主人事僕從 (조공사복종) 주인 양반은 머슴을 장로로 섬겼다.

後日奉牧師 (후일봉목사) 훗날 목사가 된 머슴을 주의 사자로 섬겼으니

自卑者高升 (자비자고승)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서예] 시편 107:6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80호)

 

 

 

 

 

 

 

[말씀노래] 너희는 익을수록 고개 숙여라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80호)

[본문] (마태복음 23:1-12)

[노랫말]

1.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하시네, 바리새 서기관들 말은들어라

   그러나 그들행실 따르지말라, 너희는 익을수록 고개숙여라

2. 멋지게 보이려고 애쓰지말고, 윗자리 앉으려고 떼쓰지말고

    장터에서 인사받기 즐기지말고, 너희는 익을수록 고개숙여라

3. 선생님 선생님 불리고싶냐, 지도자님 소리도 듣고싶으냐

    자기를 낮출수록 높아지리니, 너희는 익을수록 고개숙여라

 

[해설]

마태복음 23:1-12절 말씀을, ‘너희는 익을수록 고개 숙여라’를 후렴구로 삼아서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7.5조로 풀었고, 찬양사역자 이석훈목사가 곡을 붙였다.

[악보] 너희는 익을수록 고개 숙여라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2014년 7월 18일)

 

 

 

 

 

[시편 송서(誦書)] 시편 107:1-7, 33-37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80호)

(*전래자장가-천자문 독송-가락으로)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그들이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33.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35.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 주-린 자들로 말미-암아-,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다함께]

37. 밭-에 파-종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셨∼도∿다∼)∥

 

 

 

 

[말씀동화] ‘학생의 날’이 뭐하는 날이에요?

 

“요새 애들은 진짜 애들이야, 어린애야 어린애!”

 

“맞아 맞아, 우리 때만해도 저러지 않았는데...”

 

둥글레수도원 수사, 수녀님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이야기꽃이 한창입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청소년문제 토론프로그램을 듣다가 말문이 터진 겁니다.

 

“무슨 고등학생들이 저래?”

 

“그죠? 덩치만 컸지 속은 초등학생 같다니까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커녕 자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도 아예 없어요. 완전히 자기만 아는 어린애예요. 아이들이 저렇게 공동체의식이 없이 자라서, 우리 사회가, 우리 교회가 나중에 어떻게 될까 걱정이네요.”

 

가만히 듣고 있던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한마디 거드십니다.

 

“요새 청소년들은 우리 때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사회풍토가 너무 많이 변했잖아요.”

 

그러자 베네딕도 수사님이 맞장구칩니다.

 

“맞아요. 지금 교육환경이 정말 문젭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점점 대학입학에 목을 매는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고요.”

 

테레사 수녀님도 거드십니다.

 

“아니 아니, 고등학생 때만이 아니에요. 요즘 대학생들 보세요. 저게 무슨 대학생인지... 학생 자치활동은 점점 없어지고, 역사를 공부하고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동아리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 동아리 같은 건 아예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예요. 대학생들이 학점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니까요? 너무 비싼 등록금 때문에 장학금 받아야 하니까, 그리고 아무데라도 취직해야 하니까, 저렇게 학점에 목을 매는 거죠.”

 

“맞아요. 요새 아이들, 생각해보면 미안하고 정말 불쌍해요.”

 

그 때 마침 동네 아이들이 지지배배 지지배배 재잘거리며 둥글레수도원으로 올라옵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활짝 엄마 미소를 지으며 묻습니다.

 

“한 주간 잘들 지냈니? 아침은 먹었고? 엄마 아빠 두루 안녕하시지?”

 

“예, 수녀님! 수녀님도 아침진지 드셨어요?”

 

“그래. 나도 잘 먹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웬일들이냐?”

 

“저희 밴드 만들기로 했거든요. 지난 주일에 뜻은 모았는데요,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의논도 하고 악기도 한번 만져보려고요.”

 

“멋지다! 나도 밴드 하고 싶었는데, 나도 끼워줄 수 없겠니?”

 

“수녀님은 다른 수녀님, 수사님들이랑 따로 하나 만드세요. 저희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랑 어른들이 좋아하시는 음악이랑 좀 다르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 밴드랑 탑밴드 경연대회도 하고 그러면 재밌지 않을까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래 나도 우리 수도원 사람들하고 한번 의논해봐야겠다.”

 

그 때 아이들 중에서 제일 키 큰 맹구가 질문합니다.

 

“근데 수녀님, 혹시 학생의 날이 뭔지 아세요? 내일이 11월 3일, 학생의 날이라고 하는데,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에 꽃 달아 드리는 것처럼, 저희 학생들에게 꽃 달아주시는 날인가요? 저는 꽃보다는 차라리 초코바나 초코 다이제 같은 게 더 좋은데...”

 

곁에 있던 아이들도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테레사 수녀님을 바라봅니다.

나팔꽃처럼 활짝 웃으시던 테레사 수녀님이 반짝반짝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십니다.

 

“너희 3.1절 알지? ‘학생의 날’은 3.1절이나 4.19랑 비슷한 날이란다.”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거립니다.

테세사 수녀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을 이어갑니다.

 

“3.1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뭐지?”

 

“유관순 누나요!”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그래 맞아 유관순 언니가 제일 먼저 떠오르지?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 같은 고등학생들이 큰 활약을 한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역시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했었지. 이처럼 예전 우리 고등학생들에게는 어른들보다 더 큰 애국심과 정의감, 그리고 용기가 있었단다.”

 

“그럼 수녀님, 학생의 날이 유관순 언니 추모하는 날인가요?”

 

“아니, 학생의 날은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으로부터 딱 10년 뒤인 1929년 11월3일 벌어진 학생운동을 기념한 날이야.”

 

이번엔 영구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합니다.

 

“선생님, 아니아니 수녀님, 그날 11월 3일에 고등학생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이들은 일제히 테레사 수녀님의 입만 바라봅니다.

이윽고 수녀님이 조금씩조금씩 이야기보따리를 펼치시네요.

 

“삼천리 방방골골에서 3.1만세가 터져 나왔을 때 일본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아니? 그건 섬나라 근성으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거든? 일본인들은 전투에서 지면 할복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그냥 무조건 복종하는 게 상식인데, 조선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던 거야. 일본에 무릎을 꿇은 지 10여년이나 흘렀는데도 만세 만세하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태극기물결에 일본인들은 아연실색했던 거지. 그래서 일본인들은 방법을 바꿔서 조금 부드럽게 조선을 다스리는 척했단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조선 사람들을 어리버리한 족속으로 타락시키는 작업을 해나갔지. 장장 10년에 걸쳐 조선팔도를 이 잡듯 뒤지며 조선의 민속문화를 수집하고 연구를 했단다. 조선사람들을 속속들이 알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해서 조선 사람들 속에서 용기와 정의감, 애국심을 빼내버리고 얼빠진 사람들, 자신의 출세만 생각하는 속물들로 만들어간 거야. 가장 중요한 나이인 중고등학생 때부터, 모든 역사 교육과 토론수업을 못하게 하고 좋은 학교 진학이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길도 아주아주 좁게 만들어버렸단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서 점점 힘센 일본인들이나 지주들에게 굽실거리게 되고 조금씩 조금씩 일본사람들 말을 잘 듣는 친일스타일로 변신해갔단다. 그래야만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었겠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곁에 있던 수사님들도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이때 바오로 수사님이 한마디 거드십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우리 얼을 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사이에도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골골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예수님 말씀이 열매맺어가고 있었단다. 너희 오늘 복음말씀에 희한한 구절 기억하지?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말씀 말이다. 낮아져야 한다고 가르치신 말씀 기억하지? 또 이런 말씀도 있었지?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8-9)”

 

그 때 나리가 방글방글 웃음기를 머금고 종알거립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건 홍길동인데요?”

 

나리의 유머에 모두 꺄르르 꺄르르 웃음보가 터집니다.

그러자 맹구가 거들고 나섭니다.

 

“그럼 아버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면 되지 않았을까요?”

 

아이들의 재치에 빙그레 웃으시며 바오로 수사님이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으스대고 막 높은 사람 되어서 낮은 사람 깔보려 하고, 이런 속물근성은 신앙생활을 해치는, 천국건설을 가로막는 아주 나쁜 독약 같은 거라는 예수님 말씀이야. 천국은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나라거든. 예를 들면, 보물찾기를 하는데, 최고의 보물인 천국의 열쇠는 절대로 높은 곳에 숨겨둘 수 없고 낮고 낮은 곳에만 숨길 수 있는 이치 같은 거야. 그러니까 천국의 열쇠를 찾으려면 사람은 일평생 몸을 굽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한다는 거지! 내 비유가 좀 어려우냐?”

 

아이들은 조금은 알아듣겠다는 듯 끄덕끄덕합니다.

 

“예수님의 이 평등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종교개혁, 교회개혁을 해야 하는 것이란다. 아무튼,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한국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바로 이 말씀을 고스란히 받들고 순종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지.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일이 강화도에서 벌어졌단다. 강화도 북부 해안가 홍의 마을, 그리고 섬마을인 교동마을 사람들은 1890대 말 복음을 받아들인 뒤부터 모두 새로 태어났다면서 이름을 새로 지었는데, 그런데 모두 같은 돌림자를 쓴 거야. 부모자식 항렬을 따지지 않고 모두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니까 같은 돌림자를 쓴 거지. 예를 들면,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성(姓)은 그대로 두고 돌림자를 한 일(一), 또는 믿을 신(信)으로 고정시켰단다. 그러니까 나머지 가운데 한 글자만 지으면 되니까, 좋은 글자 하나씩 적은 종이를 모아 바구니에 담아 놓고, 지극히 성경적인 방법으로 제비를 뽑아서 자기 이름으로 붙인 거지. 그래서 강화도 홍의마을 초대 교인들은 모두 ‘일(一)’자 돌림이었는데,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박능일(朴能一)을 비롯하여 권신일(權信一), 김경일(金敬一), 주선일(朱先一), 종순일(鍾純一), 정천일(鄭天一), 황양일(黃良一), 윤희일(尹希一), 최족일(崔足一) ... 이런 식으로! 또 강화도 교동 섬에서는 믿을 ‘신(信)’ 자를 돌림자로 정했단다. 그 결과, 방달신(方達信), 방족신(方足信), 방도신(方道信), 방합신(方合信), 서씨 집안에서 서중신(徐重信), 서풍신(徐豊信), 인사리 황씨 집안에서 황복신(黃復信), 황초신(黃初信), 황한신(黃韓信), 교동읍 안씨 집안에서 안낙신(安樂信) 등이 나왔지. 문제는 이들 중에는 부모자식 숙부조카 사이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 안 믿는 동네사람들로부터 되게 욕먹었겠지? 아래 위 장유유서(長幼有序)도 없는 ‘검정개’라는, 개쌍놈들이라는 욕을 먹었단다.”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성경말씀,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려고 이름까지 그렇게 바꾸다니!”

 

“그래, 어디 이름뿐이었겠니?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의 얼을 빼내려는 탄압이 심해질수록 교회는 더욱 굳세게 믿음을 지켰어요. 아무리 탄압이 거세도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내 몸 구석구석에, 내 주변 구석구석에 성경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며 얼을 지켜나갔지. 1902년 감옥살이를 하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께서는 원래 크리스천이 아니셨지만, 감옥 안에 있는 작은 틈 속에 누군가 몰래 숨겨둔 종이쪽지에 새겨진 예수님 말씀을 발견하고는 읽고 또 읽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단다. 바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의 한 구절이었지. 그 뒤 이상재선생님은 연동교회 교인이 되셔서 YMCA 총무를 지내시고 일흔이 넘은 연세에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을 맡으시기까지 했단다. 바로 이 신간회 운동이 나중에 저 유명한 광주학생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가는데 큰 역할을 했지.”

 

그 때 영구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합니다.

 

“광주학생운동은 또 뭔가요? 아까 나온 학생의 날이랑 다른 건가요?”

 

“우리 영구 좋은 질문이다. 아니 똑 같은 거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날이 바로 11월 3일이었어. 뒷날 광주 조선대학교 학장을 지내신 박준채 선생이 고등학생이던 시절, 1929년 10월 말, 통학 기차 안에서 일본 학생들이 박기옥이라는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 다니며 희롱을 한 거야. 마침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 학생이 사촌누나를 희롱하던 일본학생 후쿠다 슈조를 후려치면서 사건이 시작된 거지. 여학생 희롱이 일본학생들과 조선학생들의 패싸움으로 번지자, 당시 경찰은 조선 학생들만 붙잡아 가서 벌을 주었지. 그러k 이에 항의하면서 광주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고 이상재선생님의 신간회 등의 지원으로 전국의 학생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던 거야. 3.1만세운동 이후 가장 큰 항일운동이었지. 그 직후인 1932년 초에 이봉창, 윤봉길 의사들이 거사를 일으킨 것도 이 광주학생의거의 용감무쌍한 기운과 무관하지 않겠지?”

 

곰곰이 경청하던 테레사 수녀님이 한 마디 더 거드십니다.

 

“그 때 11월 3일은 마침 주일이었어요.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하는 날이었는데 그날 학생들은 강제로 학교에 동원되었지.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일본 왕이었던 메이지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메이지데이, 즉 명치절(明治節)이었거든. 그런데 1929년 11월 3일 바로 그날이 또 마침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이랑 딱 겹친 거야. 지금은 양력 10월 3일이 개천절이지만, 원래는 음력 10월 3일이 개천절이었거든! 주일인데다가 조선 민족의 명절인 개천절임에도, 이 날이 일본 왕의 생일이라고 학교에 동원되어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야 하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진 거지. 그 때 바로 며칠 전에 민족적 자존심을 크게 다친 광주학생들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침묵시위를 했단다. 그리고는 학교를 나서자마자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거야. 이를 시작으로 서울 지역 고등학생들까지 다 들고 일어난 거야. 경신학교를 비롯해서, 보성고등학교, 중앙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지. 전국적으로 수만 명의 고등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시위를 벌였고 그 결과 수많은 학생들이 감옥살이를 하고 퇴학을 당하게 되었단다.”

 

수녀님, 수사님 역사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하나 아이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와, 옛날 어른들은 참 대단하셔요. 저희랑 비슷한 나이에 어떻게 그런 큰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요? 어른들도 못하는 일을... 정말 용감하고 애국심이 짱이에요. 지금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예능 프로에서 기미가요가 흘러나올 정도인데, 그 때 일제강점기 때인데도 기미가요 안 부르고 침묵시위를 했다는 것도 참 대단해요.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게 너무너무 많네요.”

 

“그렇지? 광주학생의거, 즉 학생의 날은 우리 어른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는 날이란다. 안타깝게도 부도덕하고 부패한 정권이었던 유신정권, 친일파에 뿌리를 둔 유신정권이 1974년 경 학생의 날을 폐지한 적이 있었지만 10년이 흘러 다시 부활하게 되었지. 순수한 학생들의 정의감와 용기는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려지는 것이 아니니까!”

 

“내일 ‘학생의 날’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단다. 우린 이 날을 맞이하며 많은 걸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까 마침 학생의 날은 종교개혁일 직후로구나!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 점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져가는 천국정신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니?”

 

그 때 조용히 경청만 하시던 김대건 수사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회복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친일파 청산이 매우 시급한 과제죠. 이승만 대통령 때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결국 친일파와 그 후손들에게 진정한 회개의 기회 박탈한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지금 우리나라는 구석구석에서 갈등과 다툼의 요인들이 점점 많아져가고 있습니다.”

 

맹구가 두근두근 가슴 설레는 얼굴로 한마디 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역사동아리를 하는데요, 오늘 수녀님, 수사님들 말씀을 들으면서, 학생의 날 역사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우리나라에서 친일청산을 해야 할 과제들이 뭔지에 대해서도 공부해보자고 동아리에 제안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그런 공부를 바탕으로 저희 밴드 노래도 짓고 싶어요. 학생의 날은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지만, 특히 저희 학생들의 몫이니까요!”

 

수녀님과 수사님들이 맹구의 불그레한 얼굴을 환한 미소로 바라보십니다.

두근두근, 삼천리금수강산이 용솟음쳤던 ‘학생의 날’이 코앞입니다.

 

[이정훈 지음. 2014년 11월 2일 주일 아침]

* 인터넷 백과사전 및 이덕주‧조이제,『강화기독교 100년사』강화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1994)등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