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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본문묵상

2014년 5월 11일(부활절 4주 - 어버이주일) 예배준비 노트

“내게 부족함 없어라”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2:42-47)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3.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24.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4.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의 주인공은 양(羊)과 목자(牧者)입니다.

특히 마음에 깊이 스며드는 구절은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입니다.(시편 23:1)

그래서 이번 주 제목을 “내게 부족함 없어라”로 정했습니다.

4본문 묵상한 것을 주인공(양과 목자)별로 정리해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때론 양으로, 때론 목자로 (그리고 ‘양의 문’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도 때론 양으로, 때론 목자로 역할을 합니다. 이건 무얼 뜻할까요?]

 

 

[양(羊)]

* 나는 예수님의 양(羊)이 맞나?

지난 화요일 밤 기도회 때 저희 집 둘째 진구가 날카로운 질문을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10:3∼5절에 보면 연거푸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셨는데, 왜 지난 주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도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나요?’

이것이 진구 질문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양으로서 2%(또는 20%) 부족했지만,

부활예수님 만난 뒤부터 점점 100%에 가까운 양이 되어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염소끼가 있었지만, 점점 염소끼가 빠지고 온전한 양이 되어 간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염소를 산양(山羊)이라고도 부릅니다. 양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염색체 숫자도 다를 정도로 차이가 많습니다. 양은 염소와 달리 맹수나 산불 등 위기상황에서 얼른 도망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목자가 어디 계시나 살피며 풀을 뜯는 편입니다. 그러나 염소는 양과 달리 풀보다 나뭇잎을 더 좋아하는 잡식성입니다. 목자를 살피는 것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염소는 독립심과 모험심이 강하고 생존능력도 양에 비해 강하기 때문입니다. 염소는 양에 비해 뭉치기를 싫어해서 숫자가 많아지면 금세 몇 마리씩 나뉘는 습성도 있습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서 참조)]

 

문제는 ‘내가 양이 맞나?’ 입니다.

돌아보면, 나는 양보다는 산양(염소)에 가깝습니다.

양처럼 풀(말씀)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염소처럼 이것저것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도 먹습니다.

그래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주님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말씀에 귀 기울이는 정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말씀을 통해서, 세상사를 통해서 내게 다급히 외치시는 그분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편입니다.

우리도 엠마오 제자들처럼, 어서 부활예수님 제대로 만나 진짜 양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이게 참 급한 문제라는 생각이, 더 미뤄둬서는 안 될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 양처럼 살기

오늘 사도행전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46-47)고 합니다.

매일 말씀 먹고 밥을 먹는 모습입니다.

영과 육의 양식을 먹는데, 눈에 띄는 것은 함께 몰려다니며 먹는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집집이 돌아가면서” 먹습니다.

 

딱 양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당으로 모이고 목장(속회, 또는 구역회 등)으로 모이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처음교회는 딱 예수님의 양떼들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양떼처럼 몰려다니며 함께 말씀 먹고 밥을 나눠먹는 모습이 가물어갑니다.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양처럼 살지 않으면 양(羊)의식이 희미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목자(牧者)를 바라는 마음이, 목자만 의지하는 ‘믿음’이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짜 양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습니다.

“따라”라는 시험지입니다.

시냇물처럼 졸졸졸 ... ‘따라’ 흐르는 지 확인해 보면 됩니다.

무엇을 따르는 거죠?

물론 목자(牧者)의 뒤를 따르는 것이고, 바른 길[正道]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에서는 이를 목자(牧者)와 양의 문(門)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목자(牧者)]

* 양과 목자를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감정이 격해지신 까닭은?

복음서본문에서 특기할 것은,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이 매우 격렬하시다는 점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門)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1)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10)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지금 ‘세월호 이후' 우리 모습에 비추어 이 말씀을 해석해 봅니다.

정도(正道)를 가지 않는 목자는, 겉보기에는 목자 비슷하게 보이지만, ‘목자 아님’을 넘어 그것은 도둑이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차라리 목자 코스프레를 하지 말고 그냥 일반인 차림으로 있는 편이 훨씬 나았습니다.

괜히 얼치기 목자 흉내 내다보니 위기 상황에서 십중팔구 양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입니다.

목민관(牧民官)이 아니라 탐관오리(貪官汚吏)였던 것입니다.

 

** 주님이 바로 나의 목자시니

오늘 시편본문은 양을 이끄시는 참 목자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이만큼 잘 표현한 노래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푸를 풀밭, 쉴만한 물가...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잔이 넘칩니다...’

구구절절이 은혜롭습니다.

그런데 내 가슴을 가장 강렬하게 두드린 구절은 1절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뭐가 그리도 궁색한지 늘 “더 주세요!”를 연발하는 요사이 나 자신을 무지무지 많이 반성하게 만든 말씀입니다.

 

“내게 부족함 없어라.”

 

이런 노래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부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심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답은 하나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주님의 양이라는 양(羊)의식, 그리고 그분이 바로 내 목자라는 양과 목자의 관계가 분명해 질 때 터져 나오는 고백!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양(羊)의식이 바로 섰다는 증거입니다.

이 노래를 늘 진심(眞心, 盡心)을 다해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목자를,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 교회가 (사도행전 2장)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하고(43),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고(45),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살 수 있었던 것은(47)...

 

공동체의 시스템 - 양(羊)의식과 목자(牧者)의식 -을 제대로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영혼의 목자”이신 그분께 돌아왔기 때문입니다.(벧전 2:25)

 

 

[정리]

지금 ‘세월호 이후’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자꾸만 목자와 양의 관계가 눈에 들어옵니다.

세월호에 참 목자가(선장이) 없었고, 이 나라 구석구석에 참다운 목자(책임자)가 없어서 벌어진 참상이라는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을 경영하는 각 부처의 지도자들에게 목자의 마음을 요구하는 것이 지나친 바램일까요?

 

매일성서일과 토요일 본문이 마침, 에스겔 34:1-16절이었습니다.

구구절절 지금 우리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시는 예언의 말씀이어서 소름이 돋습니다.

 

1.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여라. 너는 그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5. 목자가 없기 때문에, 양 떼가 흩어져서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모든 높은 언덕에서 헤매고, 세계 각처에까지 흩어지게 되었는데도, 그 양 떼를 찾으려고 물어 보는 목자가 하나도 없었다. 7.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8.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내 양 떼가 약탈을 당하고, 참으로 내 양 떼가 온갖 들짐승에게 공격을 당하고 살육당하여 그것들의 먹이가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다. 내 목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내 양 떼를 찾으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 목자들은 양 떼를 잡아서 자기들의 배만 채우고, 내 양 떼는 굶겼다...

 

그 가운데서 특히 눈에 띄는 구절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15.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16.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

 

보다 못한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목자들에게 맡기지 못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통령과 입법·사법·행정의 여러 책임자들뿐 아니라, 아니 그 이전에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버이주일입니다.

교회지도자인 목사, 교사 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어버이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믿음직한 목자가 되어 주어야 할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목자를 잃고 방황하는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 참 목자의 마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이 어려운 시절을 건너고 있는 대한민국에게 부어주시는 이 말씀을, 이 하늘의 위로를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

* 교회가 문제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지난 해 2013년 왕국절 마지막주일에 소개했던 『목자여』를 다시 소개합니다.

노랫말 때문입니다.

새 찬송가 개편 때 당연히 실려야 했던 한국인이 지은 최초의 찬송가입니다.

가사가 무거워서 싣기 어려웠다는 후문입니다.

 

목자여 (박재봉 작사, 장수철 작곡)

1.저목자여 깊은잠을 어서 깨어라 / 밤은벌써 사라지고 먼동이 터온다

   희미하던 지평선도 완연해오니 / 목자들아 양을몰아 가야하리라

2. 금빛같은 새벽놀이 비낀 저언덕 / 신기하게 이슬맺힌 푸른 저초원

    신선하고 거룩하다 내목장이니 / 목자들아 양을몰아 그리로 가자

3. 비탈길을 싸고돌제 다리 아프고 / 산마루를 올라갈때 숨이 막혀도

    주린양떼 생각하여 참고 갈지니 / 양을치는 참목자의 장한 뜻이라

4. 몸에걸친 단벌옷이 내게 족하고 / 짚고나선 지팡이가 넉넉하여라

    이제내게 다른염려 아주 없으니 / 이한날을 목장에서 양을 치리라

 

 

 

 

 

[말씀동시] 어느 목장 일꾼과 손자의 대화 (이선구 지음. 성실교회 고등부 1학년. 『성실문화』78호)

아이고 힘들다 / 요즘은 양치는 사람이 많아져서 / 할애비가 할 일이 많구나

그런데 저거 좀 보렴 / 저 양 많은 목장 좀 보라고 / 문이 버젓이 있는데 개구멍으로 양이 들어가잖아? / 허허 이제는 낡은 문보다 개구멍이 더 진짜 문 같네?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다, / 양도 적고, 목장도 낡았지만, 양은 지금보다 훨씬 순했어 / 목자가 문을 통해 목장으로 들어가면 그를 따라 졸졸졸 / 매∼ 하며 따라 들어가는 꼴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지 / 지금은 양 풀 먹이고 바로 들어가기 좋은 곳에 개구멍을 뻥뻥 뚫어놓으니 / 양들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구나.

얘야, 할애비가 부탁 하나만 하자. / 나중에 너는 절대로 목장에 개구멍을 뚫지 말거라. / 문으로 양과 함께 들어가는 목자가 되거라. / 많은 풀보다 건강한 풀을 먹이는 목자가 되거라. / 양을 재산이 아니라 가족으로 생각하는 목자가 되거라. / 부탁한다.

 

 

[말씀시조] (요한 10:1-10)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78호)

참목자 예수께서 양의문을 선포하니

그문을 통해서만 목자요 양이로다

양의문 예수를보라 참생명이 거기에

 

 

[말씀한시] 졸지 않고 문을 지키고 있다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78호)

視弱聽聞明(시약청문명) 양들은 시력이 약하지만

多怯本良順(다겁본양순) 듣는 귀는 밝고 양순하고 겁이 많다

突觀水中影(돌관수중영) 물가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도

自愕嗲嗦頻(자악다색빈) 깜짝 놀라 덜덜 떨고

曠野猛獸哮(광야맹수효) 맹수들이 으르렁거리는 광야에서

險峻岐嶇徑(험준기구경) 꾸불꾸불 험한 길을 뒤뚱뒤뚱 거리며

順從牧者呼(순종목자호) 목자가 부르면 졸졸 따라간다

不盹羊群門(목자불순문) 목자는 졸지 않고 양의 문을 지키고 있다.

 

 

[말씀서예]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78호)

 

 

 

 

 

[말씀노래] (이정훈 작사, 이석훈 작곡. 『성실문화』78호)

1. 나는 목자다 양먹이는 목자다 / 양의문 드나들며 양을치는 참목자다 /

    나는 내양이름 낱낱이 알고있고 / 양들은 내목소리 환하게 알고 있다

2. 나는 문이다 양이다니는 양문이다 / 양들이 드나들며 꼴을얻는 양의문이다 /

    누구나 나를통해 구원얻고 꼴을얻고 / 누구나 나를통해 참생명을 얻는다

 

 

 

 

[시편송서] (시 23편, 자장가 가락으로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78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부족함)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말씀동화] 양문리(羊門里) 이장님이 드디어 아프시대요!

 

벼슬도 싫다 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물방아 도는 내력’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우리 이장님이 오늘도 흥얼흥얼 노래합니다.

손로원 할아버지가 지은 ‘물방아 도는 내력’을 아주 구성지게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우리 이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죠.

이장이 무슨 벼슬이라고, 자꾸만 이장 그만하겠다며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종종 부르십니다.

 

우리 이장님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우리 양문리 이장이 되셨어요.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건 바로 마을을 지켜냈기 때문이에요.

어느 날, 마치 슈퍼맨처럼, 나쁜 사람들로부터 마을을 지킨 영웅이 되어버렸거든요.

 

예전에 우리 마을에 골프장이 들어서려고 했데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여서 온 마을사람들이 둘로 갈라져서 다투기도 많이 다퉜고요.

여차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큰돈 받고 다 이사 가서 아예 마을이 없어질 상황이었죠.

그러나 결국 마을을 떠나지 말고 지키자는 쪽으로 뜻이 모아졌습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이미 땅을 팔고 마을을 떠난 이들도 꽤 있어서 공사가 벌써 시작되고 있었데요.

 

결국 골프장 만드는 사람들과 우리 마을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했죠.

몸싸움까지 일어나고 마을 어르신들이 막 쓰러지고 피도 나고 우리 할머니들 엄마들은 막 울고 난리였어요.

바로 그 때 우리 동네 주먹대장이 썩 나섰던 거예요.

동네에서 별로 존경받지 못하던 사람 하나가 슈퍼맨처럼 나타나서 나쁜 아저씨들을 무찌른 거죠.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대다수인 우리 마을이 그 싸움에서 이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죠.

그런데 상상 밖의 일이 벌어진 거예요.

겁 없이 덤벼드는 한 사람이 그 어마어마한 포클레인들이랑 몽둥이들을 다 막아버린 거예요.

도대체 자초지종이 어찌 된 일이냐고요?

진짜 궁금하죠?

 

딱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들 질려버렸던 거예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짐승처럼 끝끝내 덤벼드는데 그만 모두들 질려버린 거죠.

저러다 한 사람 장례식 치르겠구나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렇게 머리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덤벼들더라네요.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내내!

나중엔 몰골이 거의 좀비 수준이 되어 달려들었다니까요?

마침내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질려버린 골프장 아저씨들은 싹 다 철수하고 맙니다.

 

며칠 동안 병원에 가서 누웠다가 돌아온 아저씨는 온 마을의 영웅이 되어버렸죠.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 만장일치로 우리 양문리 이장님으로 선출해버린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도대체 몽둥이를 든 그 수많은 장정들과 맞서서 어떻게 그리 겁 없이 싸울 수 있었던 걸까?

 

지금은 거의 다 알려진 비밀이지만요, 우리 이장님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어요.

그건 바로 우리 이장님이 앓고 있는 희귀병, 무통증이었죠.

무슨무슨 신경 라인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아무런 통증을 못 느낀다네요?

 

그런데 이게 꽤나 위험한 병이래요.

아무 통증을 못 느끼기 때문에 편할 것 같지만, 자칫 화상이나 동상을 입을 수도 있데요.

몸의 안팎이 다치거나 병에 걸려도 통증이 없기 때문에 얼른 치료를 못 해서 큰 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장님은 어렸을 때부터 그 병에 익숙해서, 늘 조심하고 그래서 사는데 별 지장은 없으시데요.

 

그런데 딱 하나 힘든 게 있데요.

그건 바로, 내 통증 못 느끼는 것만큼 남의 통증도 못 느끼는 거래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도 잘 못 느낀다네요?

한번은 마을회관 텔레비전 뉴스에, 테러사건으로 가족들을 잃고 울부짖는 엄마들의 모습이 나왔어요.

다른 먼 나라 사건이지만, 매우 참혹하고 슬픈 광경이었죠.

마을사람들은 모두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데, 우리 이장님만 멀뚱멀뚱 무표정 하시더라니까요?

 

그래서 이장님은 학교 다닐 때도 줄곧 괴물이라고 놀림을 받았었다나 봐요.

아무튼 우리 이장님에게 가장 불편한 점은 바로 이거예요.

좀 어려운 말로 공감력, 뭐 이런 감정이 부족한 거죠.

바로 그 때문에 마을을 대표하는 이장님으로서 가장 힘들다셔요.

그래서 이 노래,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를 시도 때도 없이 부르시는 거고요.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마을에 또 한 차례 작은 파도가 일어났어요.

조용하던 마을에 교회가 들어온다는 거예요.

얌전하게 생긴 전도사님 한 분이 우리 마을 입구에 땅을 사서 예배당을 짓겠다는 거였죠.

땅을 이미 샀기 때문에 이제 예배당을 짓겠다는 바람에 온 마을이 술렁거렸습니다.

아마 우리 마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그랬나 봐요.

 

이번에도 우리의 슈퍼맨 양문리 이장님이 썩 나서셨겠죠?

포클레인 앞에서도, 수많은 몽둥이들 앞에서도 위풍당당했던 우리 이장님이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분위기가 다르네요?

예배당 건축 현장은 아주 작았어요.

게다가 포클레인도 없고, 사람도 별로 없고, 전도사님 부부랑 대학생 같아 보이는 앳된 청년들 서너 명 뿐이었어요.

 

이장님이 무표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 이 마을 이장입니다. 우리 마을엔 교회 못 들어와요. 큰 돈 가지고 들어오던 골프장도 다 막아낸 마을입니다.”

 

괭이와 삽으로 땅을 고르던 청년들이 사모님이랑 함께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네요?

우리한테 싹싹 빌려고 저러나 했는데, 조용히 기도를 시작하는 거였어요.

전도사님만 대표로 우리에게 다가와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를 합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일전에 마을회관에서 몇 번 뵈었었죠? 저희가 여기 양문리에 예배당을 짓는 것을 너무 반대하지 마시고 그냥 마을에 한 가정 이사 온다고 생각해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교회가 들어오는 걸 어떻게 가정집 하나 들어오는 것처럼 생각하라는 거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이장님이 무표정하고 싸늘하게 얘기하시자, 전도사님이 발그레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합니다.

 

“저희는 여느 가정집처럼 작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여느 가정집에서 일하고 밥 먹고 책 읽고 노래 부르고 하며 살듯이 저희 교회도 그렇게 조용히 밥 먹고 성경말씀 읽고, 찬송 부르고 자그마한 텃밭을 일구며 그렇게 살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교회는 교회잖아요. 이집 저집 막 전도하고 시끄럽게 하고, 그러다 집안 식구들끼리 종교 때문에 싸움도 나고, 그렇게 되는 거 안 봐도 훤해요.”

 

“이장님, 그것도 편하게 생각하시면 안 될까요? 마을 사람들끼리도 이집 저집 다니며 밥도 해먹고 얘기도 나누러 마실 다니는 것처럼, 저희도 가끔씩 외로운 어르신들 찾아뵙고 말벗도 해드리고, 그러다 정들면 저희 집 교회도 놀러 오시고, 오셔서 밥도 같이 해먹고 성경책도 함께 읽고 그러시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요? 제 생각에는, 마을에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정다운 이웃 하나 더 생기는 것처럼 여겨주시면 될 것 같은데요?”

 

여전히 무표정한 이장님이 여전히 싸늘하게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왜 구태여 우리 마을에 들어오려는 거예요? 세상천지에 널린 게 시골마을인데, 왜 구태여 우리 양문리란 말이요?”

 

그 순간 전도사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지네요?

어둑어둑한 물위에 활짝 피어오르는 연꽃처럼 환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합니다.

 

“그건 바로, 이 마을 이름 때문입니다.”

 

“마을 이름? 우리 마을 이름이 뭐 어때서요?”

 

둘러선 마을 사람들도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호기심에 사람들 눈빛이 반짝거립니다.

전도사님 얼굴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양문리(羊門里) 바로 그 이름 때문이죠!”

 

“양문리가 뭐 어때서 그러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합니다.

갑자기 우리 마을 이름이 궁금해진 겁니다.

도대체 마을이름 양문리랑 저 교회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여러분, 저는 이제 막 신학교를 마치고 교회를 처음 시작하는 새내기 전도사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교회를 처음 시작할 곳을 찾다가 성경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받은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10장 말씀이었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우리 예수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목자요, 양의 문(門)이라고 밝히시죠.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나 양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나 찾았습니다. 그러다 바로 여기 이 마을을 찾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뛸 듯이 기뻤고요, 박수치며 감사했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 표정이 하나같이 얼떨떨합니다.

아마 마을 이름에 숨은 뜻이 예수님 정체, 예수님 별명하고 똑같아서 많이 당황한 것 같습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무슨 그런 궤변이 다 있어? 예전에 염소를 많이 칠 때 마을 뒷산에 염소 먹이러 오르내리던 길 입구라 그냥 양문(羊門)이라 부른 거여. 거기 왜 갑자기 예수님 어쩌구 갖다 붙이긴 붙이시나 원∼참∼내!”

 

그래도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전도사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돌아갑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잖아요?

이장님도 무표정하게 한참 바라보다가 그냥 가버리네요?

 

 

하루하루 큰 소리도 없이 시나브로 예배당이 지어졌습니다.

이리하여 별 탈 없이 양문리교회가 세워졌네요?

아마 마을 사람들은 골프장이랑 큰 싸움 싸워본 거랑 너무 많이 달라서 그냥 내버려 둔 것 같아요.

어쩌면 양문리라는 이름이 예수님이랑 인연이 깊다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져버린 것인지도 모르죠.

 

하루하루 양문리교회는 텃밭도 일구고, 조용히 마실도 다니면서 다정다감한 마을 식구가 되어갔습니다.

급기야 이장님도 전도사님이랑 가까워집니다.

무표정한 이장님이랑 발그레한 전도사님이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그건 참 희한한 일이라며 속닥속닥 합니다.

 

이장님의 숨은 사연을 알게 된 전도사님이 말합니다.

 

“이장님, 예수님이랑 좀 더 친해져 보세요. 이장님에게도 공감능력이 생길 거예요.”

 

“그럴까요? 그래도 이 나이에 새로 예수님 믿는다는 게 좀 거시기 하지...”

 

“새로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한번 친해진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편하게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여기 시편 23편을 매일 읽어보시고요.”

 

이장님이 더듬거리며 시편 23편을 읽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딱 하나 부족한 것 때문에 늘 고민하고 있는 이장님의 눈이 크게 열립니다.

 

“내게 부족함 없어라... 이게 참 거시기 하네...”

 

“맞아요 이장님, 주님을 목자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 분이 먹이시고 돌보시는 양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믿음이 생긴답니다. ‘내게 부족함 없어라!’”

 

그 뒤로 틈만 나면 이장님은 시편 23편을 읽었데요.

이젠 다 외워서 안보고도 줄줄 외우신다죠?

 

 

어느 날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났어요.

세월호라는 큰 배가 뒤집어진 거예요.

어린 고등학생들이 너무나 많이 숨졌고요.

그것도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람들 잘못으로 사고가 나고, 사고 난 직후에도 사람들 잘못으로 여러 시간 동안 구조를 하지 못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못할 이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침울합니다.

그리고 우리 이장님은 여전히 무표정하시고요.

마을 사람들처럼 겉으로는 구시렁거리고 책임자들을 욕하면서도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네요.

마음속에 분노도 슬픔도 거의 없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사건이 일어났어요.

큰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아니 세상에! 우리 이장님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식들 이름을 부르며 엄마들이 바다에 밥을 던져주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바닷가에 아이들을 위한 밥상을 차려놓고, 피자도 올려놓고, 게다가 햄버거를 바다로 던져주는 엄마도 보였습니다.

매일 암송하던 시편 23편에서 내게 차려주시는 주님의 잔칫상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마을회관에서 그 뉴스를 보던 우리 이장님 눈가에 그 순간 이슬이 맺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장님은 교회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세월호 사건과, 이 놀라운 눈물 사건에 대하여 전도사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세월호에서 숨진 우리 아이들이 이장님께 큰 선물을 하고 떠난 것 같네요. 눈물을 흘릴 겨를도 없이 떠나가면서 그 아이들이 자기 눈물을 이장님께 전해드린 것 같아요. 목자 없이 죽어간 그 아이들에게 이장님이, 우리가 목자가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무통증 병에 걸린 이 나라 책임자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나올 수 있게, 통증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줘야 합니다. 이 기나긴 무통증의 잠에서 깨워줘야 합니다.”

 

이장님은 전도사님을 붙들고 함께 엉엉 웁니다.

평생 못 흘린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아프게 웁니다.

양문리 마을 양문리교회가 눈물을 흘립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께서 흘리는 눈물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립니다.

 

한참이 지나 눈물을 닦고, 이장님과 전도사님이 세월아리랑을 부릅니다.

지금 이 눈물 다 흘려버리고, 우리 무통증의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을 기원하는 노래입니다.

 

[이정훈 지음. 2014년 5월 11일 주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