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길”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2:14a, 22-32)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22.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23.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나는 늘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기 때문이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은 기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체도 소망 속에 살 것이다.
27. 주님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 버리지 않으시며, 주님의 거룩한 분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28.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으니, 주님의 앞에서 나에게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29. 동포 여러분, 나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 무덤이 이 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이므로, 그의 후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그의 왕좌에 앉히시겠다고 하나님이 맹세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지옥에 버려지지 않았고, 그의 육체는 썩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시편 16)
1.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2.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3.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
4.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더욱더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피로 빚은 제삿술을 그 신들에게 바치지 않겠으며, 나의 입에 그 신들의 이름도 올리지 않겠다.
5.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6.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7.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8.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9.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10.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4.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7.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9-31)
19.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성서일과 4본문을 한 주간 묵상하다보니, 이번 주는 유달리 본문 구석구석에 눈에 띄는 구절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시편에 많았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시 16:5)
“빛나는 유산”(시 16:6)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시 16:11)
“생명의 길”(시 16:11)
그런데 이 “생명의 길”은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도 나옵니다. (행 2:28)
알고 보니, 사도행전 오늘 본문 25∼28절이 오늘 시편본문인 16:8∼11절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의 주제를 “생명의 길”로 잡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오늘 4본문 가운데서 주요한 인물 하나를 꼽자면 단연 베드로입니다.
오늘은 주제와 인물, 이 둘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제 ; 생명의 길]
그런데 오늘 시편 본문에는 “복”, “행복”, “기쁨”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띕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8), ‘내 오른쪽에 계시는 분’이라는 묘사가 자주 눈에 띕니다.(8, 11)
급기야 시편기자는, 주님은 바로 “내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라고까지 고백합니다.(5)
종합하면,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시 16:2) 이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온갖 복과 기쁨의 알맹이가 바로 “생명”인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 “죽음의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는 주님!(시 16:10) (행전 2:24)
심지어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시”는 주님!(11)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편본문을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인용한 것입니다.
이 주제는 오늘 복음서본문 끝에도 나옵니다.
“...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역시 생명의 길은 예수 이름, 주님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몸소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인물 ; 베드로]
베드로는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꽁꽁 문을 닫아걸고 있었던 그 자리, 도마만 빠진 그 자리에 여러 동료들과 함께 있었겠지요.
그러나 베드로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지난주일 본문인 빈 무덤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와 비교했을 때 지극히 미미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상처는 공관복음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닭 울음 보다 크고 비통하게 몹시 우는 베드로!
그리고 지금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져있는 베드로의 상처를 씻어주시려는 듯, 부활예수께서 세 번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께서는 새벽 물가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시며 세 차례 질의응답시간을 갖습니다.
그의 상처의 근원을 기억나게 하시고 어루만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서서히 변합니다.
스승의 멱살까지 잡았던 왈패 같던 베드로였습니다.(마가 8:32)
그렇게 골목대장 같던 베드로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합니다.(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참조)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벧전 5:6)
그러나 주님의 몸 교회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외치는 베드로!
겸손하면서도 담대한 베드로!
베드로는 진정한 교회의 지도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본문은 오순절 베드로의 힘찬 설교입니다.
이 설교 바로 뒤에 3천여 명이 등록하여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를 우리는 봅니다.(행전 2:;41)
그리고 오늘 서신서본문은 소아시아 여러 교회를 향한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교회를 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핍박받는 교회들에게 굳센 믿음을 불어넣기 위해 끝까지 애쓰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죽음의 세력 앞에서 떨고 있는 교회들에게 베드로가 준 말씀은 무엇입니까?
“산 소망”입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긴 부활의 산 증거이신 예수님! 바로 그분께서 주신 그 ‘산 소망’입니다.
‘생명 전도사!’ 오늘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운찬 생명 전도사입니다.
[나머지]
* 예수님을 못 보고도 사랑하고, 믿고, 기뻐하다
오늘 복음서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한 20:29)
도마에게 하신 말씀인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2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20)
주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미리 당신의 상처, 즉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셨을까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것이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다고 믿음이 더 잘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져본다고 더 믿음이 제대로 생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것이 콘크리트 아집, 도그마, 우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히 기억할 것은, 위의 29절 말씀이 오늘 서신서본문인 베드로전서 1:8절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이 권면의 말씀은 바로 오늘 복음서본문의 자리에서 베드로가 받은 감동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벧전 1:8)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지금도 못 보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기뻐하는 우리!
이게 바로 “믿음의 목표” 곧 “영혼 구원”의 증거라는 사실입니다.(벧전 1:9)
** 성령과 천국의 열쇠, 그리고 용서
오늘 복음서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이 말씀의 구조와 내용을 묵상하며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참고로, 마태복음 18:17-18절을 보면 용서에 관한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7-18)
한 가지 특기할 것은, 4복음서 가운데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딱 두 군데 나오는데, 바로 여기 마태복음 18:17절과 바로 위에서 살핀 마태복음 16:18절입니다.(독일성서공회판 해설성경 참조)
이야기인즉, ‘교회’에서 ‘용서’가 차지하는 의미입니다.
‘천국의 열쇠’와 ‘교회(용서)’, ‘성령’과 ‘교회(용서)’가 차지하는 의미입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용서’가 차지하는 의미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 목적은 같습니다.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용서의 집입니다.
지성소 언약궤 위에 있던 속죄소(시은소)가 떠오릅니다.
[말씀동시] 복 받는 사람 (성실교회학교 4학년 이소현. 『성실문화』 78호)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그럼 나도 복을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도 도마처럼 예수님을 봐야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고 싶다.
복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께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어서!
[말씀시조]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8호)
쌍둥이 도마 너는 만져봐야 믿겠느냐
잠긴 문 닫힌 마음 거침없이 드시올 때
나의주 나의하나님 부활하신 예수여
[말씀한시] 옆구리와 손의 상처를 만져 보거라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 78호)
門徒閉門畏恐裏 (문도폐문외공리)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을 때
已葬耶穌出顯現 (이장야소출현현) 장사 지낸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셨다
多馬疑訝吾不恃 (다마의아오불시) 도마가 의아하게 ‘나는 믿을 수 없소’ 말하니
觸痕脅手賴宜信 (촉흔협수뢰의신) 옆구리와 손에 찢긴 상처를 만져 보거라 신뢰하며 마땅히 주를 믿으라.
[말씀서예]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 78호)
[말씀노래] (이정훈 작사, 최지혜 작곡 『성실문화』 78호)
1. 무서워 무서워라 유대사람 무서워라 /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을 모두 닫아거네 /
무서워 무서워라 온세상이 무서워라 / 겁쟁이 제자들이 마음문을 꽁꽁닫네
2. 무서워 무서워서 열두대문 닫았는데 / 예수께서 오시어서 평화를 불어넣네 /
무서워 무서워서 꽁꽁닫힌 마음속에 / 부활예수 오시어서 성령을 불어넣네
3. 쌍둥이 도마야 내 상처를 만져보렴 / 나의 주 내하나님 내가 주를 믿나이다 /
보지않고 믿는자 큰 복을 받으리라 / 예수이름 믿는자 생명을 얻으리라
[시편송서] 시편 16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8호)
(천자문 독송가락, 즉 전래 자장가 풍으로)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다함께]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말씀동화] 예배당에 연꽃이 피었어요
“세상에 별일이네 별일이야! 무슨 예배당에서 연꽃을 그린데?”
“누가 아니래? 무슨 절간도 아니고, 예배당에 연꽃 그림을 걸어 놓았네?”
“그뿐 아니야, 잘 봐, 연꽃 위에 십자가를 올려놓았어요! 근데 저래도 되나?”
“되긴 뭐가 되? 안 되지, 당연히 안 되지, 저러면 안 되는 거라니까?”
“나라가 어수선하니까 교회에도 별일이 다 생기네!”
“시골교회라고 우습게보고 저러는 거 아닌가?”
교회가 술렁술렁합니다.
새로 오신 목사님께서 오신지 얼마 안 되어서 교회 주보에 연꽃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거든요.
그리고 이젠 제단 드림천에 새겨진 십자가 밑에 연꽃그림까지 붙여 넣으신 겁니다.
교회 집사님 권사님들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네” 하면서 수군거립니다.
교인들의 얼굴 표정들이 어스름 저녁 산 그림자처럼 어둡고 무겁습니다.
목사님은 보름달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교인들을 바라보십니다.
술렁거리는 교인들 마음을 다독이며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건 우리도 알주, 누구나 다 알주!”
“하나님은 김 집사님을 사랑하세요!”
“아멘, 저도 알아요. 하나님은 아마 목사님도 사랑하실 거구요.”
교인들이 힐끔힐끔 목사님의 눈치를 살핍니다.
목사님은 잠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시다가 이윽고 입을 여십니다.
“여러분! 사랑은 마치 작은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은 생명을 품고 있는 작은 알갱이죠. 그런데 씨앗은 흙과 물을 만나야 한답니다. 그래야 생명이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랑은 마음속에 품고만 있으면 생명을 피워낼 수 없습니다. 입으로 전하고 손과 발로 행동으로 전해야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죠. 이렇게 사랑의 마음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행동이 바로 씨앗이 흙과 물을 만나게 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성도들이 갸우뚱 갸우뚱 합니다.
“쪼금 재미는 있는데 쫌 어렵네요 목사님!”
목사님 얼굴이 조금 발그레해지면서 눈빛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입에 침이 고이는지 조금씩 침도 튀기기 시작하네요?
아마 우리 목사님이 조금 흥분하기 시작하신 것 같아요.
“여러분, 1970년대 초에 제가 서울서 대광국민학교라는 곳엘 다녔어요. 그런데 마침 그 때 전라남도 완도의 어느 초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었죠. 그 때 제가 6학년 3반이었는데, 그 학교 6학년 3반과 편지를 몇 번 교환했었답니다.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친구에게...’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처음 받았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받은 모든 편지가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걸 발견하고는 우리 모두 깔깔 웃었던 기억도 나네요... 같은 반 같은 번호끼리 편지를 몇 차례 주고받는 식이었는데요, 그 때 저희는 학용품과 간식거리를 사서 예쁘게 포장해서 보냈죠. 우정의 선물이었어요. 그랬더니 완도 친구들이 답장과 함께 김이랑 조그마한 편지봉투를 하나씩 접어서 보내준 거예요. 그 봉투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느냐하면, 바로 여러 종류의 씨앗들이었어요. 완도 친구들이 여기저기 산과 들에서 구한 들꽃 씨앗들인 게 틀림없었죠. 저는 한 번도 씨앗을 뿌려본 적이 없어서 그냥 제 책상 서랍에 그 꽃씨 봉투를 아무렇게나 넣어두었어요. 가끔씩 그 씨앗 봉투를 보면서도 씨앗을 심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간직만 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서랍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봉투 빛깔이 누렇게 바랠 정도로 세월이 흘렀고, 씨앗도 마를 대로 바짝 말라서 그냥 버릴까 하다가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야말로 얼굴도 모르는 섬 친구들이 정성스럽게 보내준 선물이었는데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다가 그냥 버리려니 미안했던 거죠. 그래서 봉투를 들고 밖에 나가서 뜰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흙을 덮어줬죠. 그리고는 잊고 있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날 문득 뜰에 나가보니, 세상에! 우리 뜨락이 형형색색 꽃천지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름도 모를 예쁜 꽃이 활짝활짝 다 살아난 거예요. 저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신비를, 생명의 힘을 온 몸으로 느낀 거죠. 씨앗 하나에 담긴 그 끈질긴 생명력!”
교인들의 눈빛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하네요?
아마 목사님 말씀이 조금씩 재미있어지나 봅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마주보며 수군수군거립니다.
“이제 좀 알아듣겠네, 아깐 좀 어려웠는데...”
아마 이렇게들 수군거리는 것 같아요.
교인들의 눈빛을 살핀 목사님이 더 신이 나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순간, 박권사님이 끼어듭니다.
“그런데요 목사님, 목사님이 그 때 연꽃을 심어보셨나 보죠?”
“아, 아뇨. 권사님, 연꽃은 피지 않았어요. 뜰에 연못도 없었고, 아마 그 때 그 봉투에는 연꽃 씨앗은 없었던 것 같아요. 연꽃은 물에서 피잖아요?”
“그런데 왜 하고 많은 꽃들 중에서 유독 연꽃만 우리 예배당에 피어났을까요?”
“참 멋진 질문입니다. 박 권사님, 그건 제가 연꽃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박 권사님도 연꽃 좋아하시죠?”
목사님의 느닷없는 질문에 박 권사님이 잠시 멈칫하십니다.
“예, 저도 연꽃은 좋아하죠. 그런데 교회에서 연꽃은 좀 거시기 하지 않나요?”
그러자 교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며 웅성웅성 박 권사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칩니다.
여전히 목사님은 연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그렇죠? 교회에서는 연꽃 그림을 잘 사용하지 않죠? 그런데 왜 그런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시 질문을 받은 교인들은 서로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갸우뚱거립니다.
그 때 우리교회에서 가장 젊은 집사님인 최 집사님이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합니다.
“아마 성경책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목사님?”
목사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십니다.
“땡∼이에요 집사님, 안타깝게도 성경에 연꽃이 등장한답니다. 욥기 40:21-22절에 나오죠. 나중에 한번 꼭 찾아보세요.”
최 집사님 얼굴이 잠깐 시무룩해졌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말합니다.
“그래도 목사님, 교회에서 보다는 절간에서 사용하는 게 연꽃이잖아요? 부처님 앉은 의자도 연꽃의자 아닌가요? 아니 의자가 아니고 방석인가? 연꽃 방석???”
“맞아요 집사님, 절에 가면 불상 아래 연화대(蓮花臺)라는 게 있죠. 그밖에도 절간에서는 연꽃이 매우 인기 있는 꽃이랍니다. 그런데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어요. 그건 바로 우리 이웃이나, 우리랑 사이가 좋지 않은 경쟁자, 심지어 우리 철천지원수 같은 적군들이 애지중지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걸 다 더럽고 추한 것으로 여기고 버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절에서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다고 우리는 절대 밥은 안 되고 빵만 먹어야 한다거나, 절간에서 엽차를 마시니, 우리는 절대 엽차 말고 커피만 마셔야 한다거나, 또는 다른 종교 예배 때 가야금을 사용한다고 우리 교회에서는 가야금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죠? 물론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피아노나 풍금을 다른 종교에서도 사용합니다. 여러분 다 알고 계시죠?”
목사님 이야기에 교인들이 조금씩 고개를 끄덕입니다.
눈빛들도 조금씩 조금씩 순해지고 진지해집니다.
목사님 눈빛도 점점 더 밝아집니다.
“혹시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제가 기도할 때 자주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거 기억하시죠?”
그러자 교인들이 모두 눈빛을 반짝이며 크게 끄덕입니다.
평소 그게 굉장히 이상했었다는 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또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목사님의 입만 바라봅니다.
목사님은 군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바로 말을 이어갑니다.
“대자대비라는 말은 주로 절에서 부처님한테 붙이는 표현이지만, 제 생각에는 우리 주님께도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절에 다니시는 분들이 들으면 섭섭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제 생각엔 대자대비라는 말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우리 주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대자대비(大慈大悲), 큰사랑 큰 슬픔이라는 뜻이죠. 친히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셔서, 세상 오만가지 고통을, 세상 누구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몸소 경험하신 주님! 외아들을 십자가에 다실만큼 그 큰 사랑, 십자가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부르짖는 외아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던 하늘 아버지의 저 큰 슬픔, 저는 세상 어디에서도 그런 대자대비를 본적이 없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우리 기독교보다 먼저 시작한 종교인 불교에서 먼저 개발해서 사용한 표현이지만, 우리에게 잘 어울린다면 거리낄 것 없이 사용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저작권 문제나 지적 재산권 문제로 시비 걸지는 않겠죠?”
교인들이 점점 크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네요.
의기양양해진 목사님께서 내친김에 서울까지 가시려는 듯 신바람 나게 말씀을 이어갑니다.
“이제 연꽃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제가 연꽃을 좋아하는 것은, 연꽃이 우리 예수님을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세상 어느 꽃보다 맑고 향기로우면서도 아주아주 더러운 물에서 자라고 피어나는 꽃이죠. 참 안 어울려 보이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연꽃의 이런 특성이 얼마나 우리 예수님을 많이 닮았는지! 욕심꾸러기 인간세상을 멀리서 바라만 보며 나무라기만 하시는 게 아니라, 직접 몸을 입고 오셔서 한데 어울려 사신 예수님과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요! 그런데요 연꽃이 피어나면 그 더러운 물에서 풍기는 악취가 연꽃의 은은한 향기에 감싸여 점점 변하게 된다는 사실 아시나요? 또 한 가지, 연꽃은 주변의 더러운 물과 어울려 살면서도 제 몸까지 더러워지지 않는답니다. 즉, 세상 모든 더러운 욕심들 구린내에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오염된 것들을 가려주고 덮어주고 맑게 변하게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연꽃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닮아 생명력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연꽃 씨앗을 한번 보세요. 그 곱고 향기로운 생명을 감싸고 있는 연꽃 씨앗은요 얼마나 단단한지 쇠망치로 내리쳐도 끄떡없다고 하네요? 심지어 중국에서 발견된 천년이 넘은 연꽃씨앗이 물을 만나자 멋지게 꽃을 피웠다는 일화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심지어 지난 1951년엔가 일본 지바현 게미가와의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연꽃 씨앗은 무려 2천년이나 된 것이었는데 그것도 물이 껍질 속으로 들어가자 꽃을 피웠다네요.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에 700년 전 연꽃 씨앗을 발아시키는데 성공했다는 뉴스가 있었죠. 2009년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굴한 연꽃씨앗이었어요. 고려시대의 연꽃씨앗을 지금 발아시킨 겁니다. 대단하죠?”
교인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웅성합니다.
연꽃에게 그런 대단한 생명력이 있었다니!
목사님의 연꽃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어때요 여러분, 이만하면 제가 왜 연꽃을 좋아하는지, 연꽃을 왜 예배당에서 사용하려고 했는지 이해하시겠죠?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정보를 알려드릴게요. 사실 연꽃문양이 교회에 전혀 없었던 게 아니었어요. 교회 예배당에서 연꽃문양을 사용한 흔적은 오래전부터 여기저기 많이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1900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의 강화도 성공회 성당 십자가죠. 자세히 보면 연꽃문양을 응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그리고 감리교회에서 만든 신학월보라는 책이 있는데요. 역시 1900년에 창간호를 낸 잡지예요. 그런데 그 신학월보 표지그림에도 귀퉁이에 연꽃을 그려 넣었죠. 그 뿐 아닙니다. 홍콩의 도풍산이라는 곳에 있는 크리스쳔 센터는 약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그 곳 십자가가 유명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아래 연꽃이 있기 때문이에요. 딱 우리 교회 제대 드림천 모양하고 비슷하죠. 그런데 교회와 연꽃의 인연이 이렇게 100여년 정도의 역사만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 당나라 당태종 때 기독교가 들어와서 파사교(페르시아교, 메시아교)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기록으로 남긴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보면 그 비석 꼭대기에 십자가 그림이 있는데 그 십자가 아래 연꽃 연화대(蓮花臺)가 있다는 사실! 대단하죠? 알고 보면 연꽃과 기독교의 관계는 이렇게 역사가 오래답니다.”
교인들이 입을 모아 “우와∼!”하고 탄성을 지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의기양양하던 목사님 표정이 좀 어두워지네요.
목소리도 좀 더 무거워진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많이 울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세상이 아무리 더럽고 시궁창 같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책임하고 더러울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까지 기업들이나 행정관청들까지도 속속들이 썩어빠질 수 있는 걸까? 그러다 그러다 저는 또 연꽃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세월호를 두고 울며 기도하다가 갑자기 연꽃을 생각하게 된 건 이렇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 숨진 단원고등학교 학생 친구 하나가 남긴 글을 보았습니다. 아무개야 난 너를 짝사랑했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너를 좋아한다고 진작 말할 걸... 어서 돌아와라 친구야...! 이런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다가 문득 이 아이들 나이 또래인 춘향이와 이몽룡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역시 비슷한 또래였던 심청이까지 떠올리게 된 겁니다. 심청이는 눈먼 아빠 눈을 뜨게 해드리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가 연꽃을 타고 되살아나 큰 나라 황후가 되어 온 세상 맹인잔치를 열어 마침내 아빠 눈을 열어드리고, 심지어 세상 모든 맹인들의 눈까지 다 열어 준 옛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맹골수도 못지않게 위험한 곳으로 유명한 장산곶 인당수 바다에 빠져 죽었던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되살아났다는!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 연꽃, 온 세상 더러운 욕심 진흙탕 같은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타고 되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연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 죽은 아이들을 다 되살려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저 아이들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지금 저 아이들이 우리 대한민국의 기억 속에,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 속에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 삼천리 방방곡곡 구석구석 구린내 투성이 대한민국이 연꽃의 향기, 되살아난 이 세월호 아이들의 기억으로 회개하고 변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조용히 목사님 말씀을 경청합니다.
숙연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던 목사님 눈빛이 다시 빛나기 시작합니다.
목소리도 더 밝아지기 시작하네요?
“교우 여러분, 이번 주일은 부활절 둘째주일입니다. 본문말씀 곳곳에 ‘생명의 길’이라는 구절이 눈에 선명하네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 도마가 당황하는 모습도 참 인상적이죠? 도마랑 쌍둥이처럼 똑같은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해서 그런지, 부활의 기쁨, 부활의 신비, 부활의 능력을 만끽하며 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오늘 베드로전서 1장 말씀을 보세요. 얼마나 힘찬 말씀입니까?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본문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며 부활예수님께서 선물해주신 이 생명의 길을 힘차게 걸읍시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발견한 사람들답게, 십자가를 떠받친 저 생명력 강한 연꽃처럼 우리 모두 세월호와 함께 숨진 학생들이 심청이처럼 되살아나도록 떠받쳐 줍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눈먼 어른들 눈 다 뜨게 해 줄 수 있도록 합시다.”
마침내 온 교인들이 박수를 칩니다.
예배당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박수를 칩니다.
“그렇다면 연꽃이 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세월호의 우리 심청이들을 우리 안에 되살려 내고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림으로, 어떤 분은 글로, 또 어떤 분은 연극과 영화와 같은 예술 작품으로 연꽃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지난밤에 기도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피웠답니다. 작은 노래를 하나 지었죠. 제목은 세월아리랑입니다. 한번 들어보실래요? 여러분도 함께 익혀서 오래오래 세월호의 우리 아이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기억하고 가슴으로 기억하고 온 몸으로 기억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세월 아리랑 (중모리)
(뒷소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앞소리)
아리랑 아리랑 세월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가누나
세월아 네월아 어디 가느냐,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났느냐
춘향이 몽룡이 이팔청춘아, 심청이 따라서 어디 가느냐
차가운 바닷물 세상 구정물, 피눈물 마시고 연꽃 피느냐
아버지 어머니 울지 마소서, 심청이 소리에 눈을 뜨소서
세월아 눈물아 흘러 가거라, 사랑아 사랑아 잠을 깨어라
[이정훈 지음. 2014년 4월 27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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