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이사야 49:1-7)
1.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3.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4.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5.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7. 이스라엘의 속량자, 거룩하신 주님께서, 남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 여러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통치자들에게 종살이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왕들이 너를 보고 일어나서 예를 갖출 것이며, 대신들이 또한 부복할 것이니, 이는 너를 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신실한 나 주 하나님 때문이다."
(시편 40:1-11)
1. 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네.
2. 주님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진흙탕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3. 주님께서 나의 입에 새 노래를,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송을 담아 주셨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네.
4.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복되어라.
5.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하시며, 우리 위한 계획을 많이도 세우셨으니, 아무도 주님 앞에 이것들을 열거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널리 알리고 전파하려 해도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6. 주님께서는 내 두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사나 예물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번제나 속죄제도 원하지 않습니다.
7. 그 때에 나는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8.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9. 나는 많은 회중 앞에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아시듯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10.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의를 나의 가슴 속에 묻어 두지 않았고, 주님의 성실하심과 구원을 말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그 미쁘심을 많은 회중 앞에서 감추지 않을 것입니다.
11.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십시오.
(고린도전서 1:1-9)
1.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4.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9.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29-42)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31.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35. 다음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시니,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이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바'는 베드로라는 말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을 묵상하며 얻은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입니다.(고전 1:9)
지난주일 주현절 1주의 주제는 ‘연대(連帶)’였습니다.
만민의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연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낮은 사람(죄인들)과 연대하시고, 동시에 높으신 성부, 성령님과 연대하시는 모습!
(물론 이 연대의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알맹이는 구체적으로 ‘공의를 위한 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일 본문들의 알맹이는, 지난주의 바통을 이어 ‘친교’입니다.
주님과의 친교입니다.
이 ‘친교’를 눈으로 삼아 4본문을 다시 살펴봅니다.
① 구약(이사야 49:1-7)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1절)
이 구절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언자로 부르시는 장면인데 매우 친밀한 느낌이 듭니다.
“나를 부르셨”다는 구절은 오늘 서신서 첫 구절과 이어집니다.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는 구절은 오늘 복음서 끝 구절과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만난 시몬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모태에서부터”라는 구절이 지난 주간 매일성서일과 본문과 통합니다.
화요일 구약본문인 예레미야 1장 5절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비교하자면, 이사야 본문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친밀하고 강렬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튼 오늘 구약본문에는 나를 “귀한 종”으로(5절) 부르셨다, 나를 택하셨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심지어 야곱(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불러 모으시려고..”까지 하십니다.(5절)
무엇 때문인가?
이스라엘과의 친교를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5절)
나아가 “뭇 민족”과의 친교를 위해서입니다.(6절)
특히 마지막 7절이 인상적입니다.
멸시받고 미움 받는 왕따들, 종살이하는 낮은이들이 크게 대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주님과의 친교 때문입니다!
“... 이는 너를 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신실한 나 주 하나님 때문이다.”(7절)
이 구절에서 “신실한”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진정한 친교를 위한 기초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이 표현은 오늘 서신서본문 고전 1:9절에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시편본문에서는 10절과 11절에 반복해서 “미쁘신 분”, “한결같으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② 시편(40:1-11)
구약본문에 이어서 오늘 시편본문 7절에서도, 나를 택하셨음을 의미함직한 구절이 나옵니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예언자의 고백, 자기 선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0:5-10절에 보면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예언)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6.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8.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들입니다.
9.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 시편본문인 40:6-8절에 대한 해석입니다.
(참고로, 다음 주 화요일 매일성서일과 본문이 히브 10:1-4절이며, 그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다른 제물로가 아니라, 당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친교’를 다시 회복하시려고 오셨다는, ‘주현(主顯)의 목적’을 밝히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시편 40편은 읽으면 읽을수록 강렬한 시라는 느낌이 듭니다.
주님과의 친교를 회복하는 면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처음 1절과 2절을 다시 한 번 불러보십시오.
(이 부분을 잘 묘사한, 성서일과 사랑방의 홍의종 목사님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은성출판사에서 나온 『영성의 메아리』53장에 있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입니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 댁에 심방을 가서 이 시편을 읽고 풀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걱정스럽고, 사람 만나는 것이 싫어서 바깥출입도 하지 않으려는 분이었습니다.
이 시편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본래 찬양사역자셨던 이 분에게 3절을 풀어드릴 때 제 가슴이 격하게 뛰었습니다.
가족들도 그러했습니다.
‘새 노래’에 대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며 찬양하는 노래’라고 풀이한 주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새 노래란, 나를 꽁꽁 묶어둔 악한 사슬을 끊어버리고 다시 주님께 달려가 친교하게 되었을 때 부르는 노래일 것입니다.
그 때 그 노래는, 늘 부르던 찬송가여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 출렁이는 노래일 것입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주제를 잘 담고 있는 단어는, “기쁜 소식”(9절)입니다.
수렁에서 건져내심을 받은 자, 우상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주님과의 친교를 회복한 자의 마음입니다.
그 “기쁜 소식”을 쉬지 않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새 노래”(3절)로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수많은 종류의 제물이나 예물보다 이런 친교를 원하십니다.(6절)
이 노래를 통해 다시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나보다 주님께서 먼저, 나보다 주님께서 훨씬 많이 애쓰신다는 사실입니다.
빗나간 친구(親舊)들과의 친교 회복을 위해서!
“...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하시며, 우리 위한 계획을 많이도 세우셨으니...”(5절)
③ 서신서(고린도전서 1:1-9)
앞에서 구약본문처럼 ‘나를 부르시는’ 장면(고전 1:1)을 소개했습니다만, 이밖에도 서신서본문에는 주님께서 부르시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2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9절)
왜 부르십니까?
친교를 위해 부르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친교의 기초로서 ‘신실함, 믿음직함’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름 부르기’에 대해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불러주시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교는 서로 이름을 불러줄 때 깊어지는 법입니다.
오늘 서신서본문에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고전 1:2)
왜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웃고 울며, 함께 먹고 부대낄 수 있었던, 만져지는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의 친교, 그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8절)
그리고 본문의 끝 9절에, 오늘의 주제이며 제목으로 삼은 구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
④ 복음서(요한복음 1:29-42)
방금 서신서 7, 8절에서 살펴본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오늘 복음서본문에도 나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던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그런데, 복음서본문에는 세례자 요한이 두 번씩 반복하는 중요한 말들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촉구하는 장면이 두 차례 반복됩니다.(29절, 36절)
어린양은, 하나님과 빗나간 백성들 사이의 친교를 회복하기 위한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촉구하던 요한 자신이 보았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위에 비둘기 같이 내리시는 성령님입니다.
이 역시 두 차례 반복됩니다.(32절, 34절)
물론 이 장면은 지난주일 주제인 삼위하나님의 연대, 그 강렬한 친교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역시 두 차례 반복됩니다.(31절, 33절)
깊은 친교로 들어가기 직전 단계의 모습입니다.
마침내 그분을 알게 됩니다.
안다는 것은 깊은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자 요한의 주님과의 친교는, ‘증언’이라는 형식으로 열매 맺습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32절)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34절)
오늘 복음서본문에 나오는 주님과의 친교는, 세례자 요한의 친교를(증언을) 이어 첫 제자들과 예수님의 친교로 넘어갑니다.
예수님과의 친교를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모와 재산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마침 토요일 매일성서일과 본문에 비슷한 구절이 나와 여기 소개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왕상 19:20-21)과, 예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누가 5:1-11)입니다.
(열왕기상 19장)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버려 두고, 엘리야에게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고,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서 그 고기를 삶고, 그것을 백성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엘리사는 곧 엘리야를 따라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누가복음 5:11)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제자 안드레와 동료는, 첫 스승인 세례자 요한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겪습니다.(37절)
세례자 요한은 오직 제자들을 위하여,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오작교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오작교(烏鵲橋)는 헤어졌던 견우와 직녀의 친교를 위한 까막까치들 노력의 극적인 상징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에서, 요한복음에 처음 나오는 예수님의 세 가지 목소리가 무게 있게 느껴집니다.
첫 제자들과의 만남 과정이 점점 무르익어 마침내 깊은 친교로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38절)
“와서 보아라”(39절)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42절)
좀 더 깊이 있는 철학적이고 구도자적인 대화가 아니라, 그저 어디서 주무시고 잡수시는지를 여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그 숙식하는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친교를 나눕니다.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기 위한 동지들의 첫 친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친교, 코이노니아는 이렇게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말로 식구(食口)라는 말을 곰곰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식구(食口)’는 한 가족이라는 의미, 내 아내라는 의미, 내 조직원, 내 동지라는 의미 등 무수한 뜻을 갖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 친교의 대미는 예수님께서 시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름을 알고,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은 친교의 기본입니다.
(저는 사람 이름 기억 못하는 체질 때문에 늘 친교에 장애가 되고 있어서, 이 구절이 특히 절실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시몬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아호를 지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화 가운데, 스승께서 제자에게 호를 지어주는 것과 비교할 만합니다.
그런데, 스승은 아무에게나 호를 지어주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그 제자를 깊이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공부의 깊이가 깊어졌을 때 호를 지어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을 만나자마자 이름을 불러주시더니 호까지 지어주십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해, 그만큼 일찌감치 눈여겨보시고 깊이 새겨두셨음입니다.
문득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⑤ 정리
주현절의 대 주제는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으로 드러나심입니다.
지난주일 주현절 1주의 주제는, 예수님의 (주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한) 연대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현절 2주의 주제는, 주현의 목적,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친교입니다.
이 친교를 위해 성경의 주인공들은 많은 것을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오셨고, 마침내 목숨까지 버리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서 주인공들이 안 것은, 세월이 흐른 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의 친교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셨고, 목숨조차 버리고 가셨다는 것을 이미 잘 압니다.
그럼에도, 아직 나는 단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음을 오늘 새삼 느낍니다.
⑥ 나머지
*구약본문을 비롯해서 (시편도 그렇게 느껴집니다만) 서신서본문도 중심인물은 ‘예언자’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은 예언자의 포스(?)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2절)
이런 구절 때문일까요?
1절을 보니까, “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에게”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하고 외칩니다.
‘섬’이나 ‘먼 곳’은 불통의 상징 같은 곳들입니다.(지난 성서일과사랑방 모임에서 하늘꿈교회 주원남 목사님이 언급하셨습니다.)
예언자는 이 시대의 가장 불통지역, 고집불통 같은 이들에게까지 말씀을 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 그러다보니... 예언자는 언제 어디서나 고달프고 비장한 운명으로 걸어갑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주제로 예언자를 다시보니, 그들이 매우 행복한 사람들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세상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친교를 나누는 이들이 바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험한 인생,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기 일쑤지만, 그들의 인생은 늘 말씀 충만했던 임마누엘의 극치였습니다.
[말씀시조] (이정훈 지음)
요한제자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라가네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시몬형님도 함께갑시다 우리 소망 메시아께
[말씀 서예] 벽해(碧海) 오세주 목사님 작품 (『성실문화』 77호)
[말씀 노래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홍의종 지음, 『영성의 메아리』 53장)
[말씀 노래 2]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이정훈 작사, 이천진 작곡, 『성실문화』77호)
1. 보라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보아라 하나님의 아드님을, 성령으로 세례주는 하나님의 아드님을
2. 보라 보아라 성령이 내리신다, 하나님의 어린양께 비둘기같이 내리신다
보라 보아라 비둘기같이 내리신다, 하나님의 아드님께 성령이 내리신다
3. 랍비여 랍비여 어디에 계십니까, 메시야 주예수여 어디로 가십니까
와서 보아라 어서와 보아라, 내너를 보았노라 내가너를 아노라
[말씀 동화] 길고양이를 사랑한 킬러
나는 킬러다.
내 이름은 주봉숙
초등학교 4학년 4반!
죽을 4, 죽일 사(死), 죽이는 시절이지!
무얼 죽이느냐고?
그건, 그건 바로, 손톱... 내 손톱!
엄마가 붙여준 별명이야, ‘손톱킬러’!
그런 엄마는 또 어떻고?
엄마도 킬러다.
엄만 진짜 킬러야, 달리는 무법자, ‘로드 킬러’!
엄마는 초보운전자야.
빨리 달려야 할 곳에서는 한없이 느리게, 천천히 가야 할 곳에서는 빛의 속도로!
운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엄마가 해치우신 길고양이가 몇 마리인지 몰라.
아빠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일을 시작하시려고 운전부터 배우셨지.
아빠는 심한 우울증으로 모든 일을 멈추셨어.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갑자기 땅이 푹 꺼지는 싱크홀이라는 걸 보신 뒤로는 아예 바깥에 나가질 않으셔.
사람 만나는 걸 점점 싫어하시더니, 이젠 바깥에도 무서워서 못나가고, 결국 직장을 그만두셨지.
땅이 꺼질까봐, 그리고 사람들 시선이 싫어서, 아빤 교회에도 못 가신단다.
우리 교회 찬양대에서 목소리 좋기로 으뜸이셨는데...
아! 언제 다시 우리 아빠 멋진 노랫소리를 듣게 될까?
아무튼, 아빠 우울증 뒤로 엄마는 로드킬러가 되셨고, 내 손톱킬러 못된 버릇도 점점 심해져갔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편 40:1-3)
우리 엄마 노랫소리야.
아빠 우울증 때문에 더 좋아하시게 된 시편노래지.
나도 이 노래가 참 좋아.
그래서 요새 자주 흥얼흥얼 노래해.
잔인한 킬러, 손톱킬러도 노래를 부를 땐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법이지.
노래를 부를 땐 손톱 물어뜯지 말라는 엄마 잔소리가 없어서 좋아.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내 손톱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단다.
손톱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부어오른 살만 불그레했던 내 손가락 끝에 예쁜 손톱이 자라기 시작했어.
어찌된 일이냐고?
그게 다, 우리 베드로 덕분이야.
베드로 녀석, 우리 집에서 나보다 더 사랑받는 녀석!
베드로는 고양이 이름이야.
지난겨울부터 우리 집 식구가 된 길고양이!
지난해 가을이었나?
길고양이 한마리가 동네 입구에서 엄마 차에 치였어.
급할 땐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기 일쑤인 엄마가, 다행히 그날따라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으셨지.
덜덜 떨며 프라이드에서 내려 살펴보는데, 고양이 사체가 안 보이는 거야!
‘뭐지?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어리둥절...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어느새 그 녀석은 홀로 절뚝이며 뒷산으로 사라져가고 있었어.
노을빛 처연한 석양 속으로, 표표히!
그리곤 곧 겨울이 시작되었지.
폭설이 내린 어느 날 아침이었어.
엄마는 음식물찌꺼기 처리하는 퇴비장에서 다시 그 녀석을 만났어.
되게 배고팠는지 꽁꽁 얼어붙은 김치꼬투리를 핥아가며 녹여먹고 있더라나?
그리고 그 뒤부터 그 녀석에게 음식을 나눠주기 시작했단다.
개나 고양이를 싫어하셨는데, 엄마가 달라지신 거야.
그렇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시작한 길고양이 밥 주기가 이어지던 어느 날!
마침내 엄마는 큰 결심을 하시고 그 녀석을 집으로 들이셨단다.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지며 길고양이에 대해 살펴보신 끝에 내린 용기 있는 결정이셨어.
“길고양이에게 동정심에서 밥을 주다가 말면 큰일 난다네?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져서 사람과 친해진 길고양이는 사람에게 배타적인 길고양이보다 훨씬 생존력이 약해진데! 그래서 한번 길들여진 녀석은 꼭 집으로 들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구나?”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고양이를 좋아하는 내가 냉큼 그 녀석 이름을 붙여주었지.
“네가 바로 그 길냥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베드로라고 불러주마.”
얼마 전 교회에서 배운 예수님 말씀 패러디야.
고양이면 헬로키티나 톰과 제리, 아니면 가필드 같은 이름이 제격인데, 왜 하필 베드로냐고?
그건... 그냥 그 녀석이 베드로야 해서... 베드로여야만 해서, 그냥 자연스레 베드로가 된 거야.
무슨 말이 그러냐고?
그건... 아빠 때문이야.
우리 아빠는 땅이 푹 꺼지는 싱크홀 때문에 바깥에도 못 나가시더니, 이젠 우리 집 바닥도 언제 푹 꺼져버릴지 모른다며 안절부절 못하셨거든.
그래서 나는 그때마다 교회에서 배운 베드로가 떠오르곤 했단다.
베드로라는 이름이 바로 반석이라는 뜻이거든!
운동장만한 너럭바위처럼 든든한 반석, 베드로!
내 예상대로였어.
고양이는, 우리 베드로는 알고보니 우리 집 복덩어리였어.
고양이를 별로 안 좋아하시던 우리 아빠가 언제부턴가 베드로를 품어주기 시작하셨지.
베드로도 다른 식구들에게는 안가도, 아빠 무릎위에는 냉큼 잘도 올라간단다.
아빠랑 베드로랑 닮은 데가 있거든!
사람 만나기 싫어하는 거랑, 지나치게 조심성 많은 거랑, 땅이 꺼질까봐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거랑...!
나도 변했어.
나도 이제 더 이상 손톱킬러가 아니야.
베드로가 높은 나무를 타오르는 게 너무 너무 부러웠거든.
나도 잔나비 띠라서 그런지 나무 타는 걸 좋아하는데, 그게 좀, 많이 어려워!
내가 탈 수 있는 유일한 나무는, 우리교회 뒷동산 비스듬하게 드러누운 소나무뿐이야!
“주봉숙,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그게 다 그 유명한 그레비티, 중력 때문이란다!”
엄마가 아무리 위로를 해도 난 그 중력이라는 놈 때문에 대단히 속상했는데, 그런데 이게 뭐야?
베드로한테는 중력이 없다는 건가?
저녁석은 왜 저렇게 나무를 잘 타는 거야?
“손톱킬러 주봉숙! 그것도 몰라? 쟤는 발톱이 쌩쌩하잖아?”
그런, 대단한, 비밀이 있었다니!
그 뒤로 나는 결심했지.
절대 손톱을 기르기로!
물론 손톱이 길어져서 나무를 더 잘 타게 되지는 못했어도, 덕분에 난 손톱킬러라는 무시무시한 오명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되었단다.
엄마는 우리 베드로를 한없이 고마워 하셔.
베드로 덕분에 내 손톱 무는 버릇도 고치게 되고, 아빠 우울증까지 많이 좋아지셨거든!
아빠는 이제 바깥출입도 조금씩 시작하셨어.
무엇보다 좋은 건, 아빠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 거야.
노래도 흥얼흥얼 부르시거든.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편 40:1-3)
아빠는 이제 더 이상 침묵의 은둔자가 아니셔.
찬양도 하기 시작하셨고, 주일에 엄마랑 나 손잡고 교회에도 나가시기 시작했어.
여전히 두려운 표정이 좀 남아있긴 해도, 마음에 힘을 주시는 성경말씀도 종종 소리 내서 읽기 시작하셨지.
오늘도 주일 예배 때 받은 말씀들을 소리 내 읊조리시네?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고전 1:8)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십시오.(시편 40:11) 나는 많은 회중 앞에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아시듯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시편 40:9)”
엄마가 베드로를 고마워하고 예뻐하시는 이유는 또 있어.
엄마도 이제 더 이상 킬러가 아니시거든!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나 되니까 괜찮다는 둥 하는 그런 요상한 위안도 더 이상 안하시게 되었어.
이게 다 베드로 덕분이지.
베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생생해질수록 길고양이들에 대한 마음도 더 생생해지셨어.
길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길고양이들을 위해서라도 자동차 과속은 절대 안 하시게 되었어.
그래 맞아! 베드로는 우리 집 복덩어리야.
베드로는 우리 집을 든든하게 만들어준 반석 같아.
무엇보다도 고마운 건, 베드로 덕분에 우리 아빠가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과 더 친해지신 거야!
우리 고양이 베드로, 누가 지어주었는지 이름 참 잘 지었지?
“예수님 좋은 이름 힌트, 고맙습니다! 베드로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정훈 지음. 2014년 1월 19일 주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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