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시편 23:6)
[성서일과 4본문]
(사도행전 2:42-47)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5)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3.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24.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4.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관통하는 알맹이는 ‘양들이 목자에게 와서 꼴을 얻다’입니다.
사도행전,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사도행전 2:42)
시편,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시편 23:1)
서신서,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베드로전서 2:25)
복음서,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요한복음 10:9)
오늘 요절은,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입니다.(시편 23:6)
[사도행전과 시편본문 정리 (사도행전 2:42-47 / 시편 23)]
오늘 사도행전본문의 소제목은 ‘신도의 공동생활’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벌어진 제자들의 방언과 베드로의 설교 이후
많은 이들이 세례 받음으로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 본문은 이 첫 교회의 모습을 짤막하게 보여줍니다.
교회는 부자와 빈자의 차별 없이 모두 물질을 고루 나누는 평등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나눠먹으며 기도하고 찬양했는데
이 모습이 참 아름다워서 날마다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는 사도들의 가르침과(42) 기사와 표적 때문이며(43),
더 근본적으로는 성령의 감동과 그 열매 때문이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종말의 때를 맛보는 기쁨(46)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첫 교회의 나눔과 표적은 4:32-35절과 5:12-16절에 더 자세히 나옵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선한 목자’입니다.
본문은 주님과 나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묘사한 대표적인 노래로서
오늘 복음서본문과 짝을 이룹니다.
시인이 겪은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려 애쓰시는 목자처럼, 참 선한 목자이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일생동안 “나를 따르리니”가 그것을 잘 드러냅니다.(6a)
여기서 <따른다>는 말의 뜻은, 마치 5절의 원수들이 나를 붙잡으려고 뒤쫓듯이,
주님이 행여 나를 놓칠세라 안절부절 애지중지하며 나를 뒤쫓는 것을 뜻합니다.
객지에 나간 자식을 챙기려 애쓰는 부모의 마음이 이에 비길 수 있을까요?
이 선한 목자 주님의 나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깨달은 시인은
마침내 주님의 집으로 돌아갑니다.(6b)
문득 주님 집을 떠난 것은 그 둘째 아들뿐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베드로전서 2:19-25 / 요한복음 10:1-10)]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종들에 대한 권고들’입니다.
본문 직전에 기자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 참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길로서
<하나님의 종으로 살라>고 권면하였습니다.(16)
바로 이어서 오늘 본문은 실제로 남의 집 하인(종)으로 사는 인생에게(18)
그 고달픈 현실만 바라보고 매몰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만 바라보면서 그 모범을 따를 때에(21)
우리의 모든 상처는 온전히 회복되고(24)
참 목자이신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25)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선한 목자’입니다.
본문은 지난 사순절 4주 본문이었던 요한복음 9장에서 이어져,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공공의 적으로 떠오르게 되시는 과정의 앞부분입니다.
(이미 7장 이후로 그러기 시작해서 10:31-33절에서 신성모독 운운하며 그 절정을 보여줍니다.)
오늘 시편본문인 23편이 하나님을 선한 목자라고 깨닫고 노래한 것처럼,
오늘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알려주십니다.
거짓 메시아가 오르내리고, 거짓 예언자, 거짓 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선한 목자이심을 강조하시고
‘나’를 통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을 <양의 문>까지 말씀하십니다.(9-10)
양들이 알아듣고 따르는 “목자의 목소리”(4)는
예수님의 진실하고 성실하신 가르침, 그 말씀과
그 말씀대로 사시는 모습을 묶어서 보여주는 좋은 상징입니다.
[정리]
부활절 4주 성서일과 본문은, 주님과 나 사이의 거리가
한 뼘 더, 한발 더 가까워짐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짤막한 본문 속에 “모든”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그 바람에 “믿는 사람”과 “모든 사람”이 섞이고 겹칠 지경입니다.(45)
그렇게 처음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그렇게 “믿는 사람”은 점점 늘어갔습니다.(47)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 보여준 처음교회의 모습에서 얼핏
재가(在家)수도회의 모습이 보입니다.
수녀, 수사들의 수도원, 그리고 봉쇄수도원, 그보다는 느슨하게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혼인도 하여 가족까지 있으면서도 모이기에 더 힘쓰고
최대한 소유를 줄여가고 물질을 공평하게 나누려 애쓰는 재가수도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비록 담을 둘러 안팎을 성속(聖俗)을 나누었어도, 수도원은, 수도원의 꿈은
점점 온 세상에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나눔이 흐르고 차오르는 것입니다.
수도원의 알맹이는 주님과 나입니다.
오늘 시편본문인 시 23편을 읽다보니, 문득 1절부터 6절까지 모든 절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모습으로 꽉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23편이야말로 수도원의 노래요,
수도원이 꿈꾸는 처음교회의 노래이며,
지금 우리가 꿈꾸는 노래입니다.
온통 나를 홀대하고 늑탈하는 걸림돌과 거친돌 투성이 세상에서도
온통 나를 환대하고 상 차려주시는 주님의 집 같은 교회!
악한 걸림돌들이 차차 디딤돌과 노둣돌로 변화되어갈,
주님의 집처럼, 나도 나도 돌아가 함께 살고 싶은,
나보다도 더 약한 자들에게 몰두하면서 점점 주님과 가까워져가는 교회!
그러려면...
애대적소(愛大積少)!
오래 전 고 박재봉 목사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어주신 문장입니다.
복음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압축한 경구(警句)입니다.
사랑은 많이, (돈) 소유는 적게!
처음교회 그분들처럼!
[나머지]
* 내게 차려주신 잔칫상(시편23:5)
오늘 부활절 4주 본문에는 목자와 양의 비유가 많습니다. 특히 시편과 복음서의 소제목이 똑같이 “선한 목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주님의 몸 교회로 가는 까닭은 거기 선한 목자 주님께서 우리를 먹이려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방주가 항해 중에 종종 풍랑을 만나지만 뜻밖의 암초 같은 코로나19시대를 만나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오늘 사도행전본문처럼 “모두 함께 지내며”(44)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46)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사는(47) 이 아름다운 역사를 코로나19시대에 가장 잘 계승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길은 무엇일까요? 그 첫 걸음이 “말씀”이라고 오늘 본문들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행 2:42), “푸른 풀밭...”(시 23:2), “그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요 10:3,9) 분주한 마음, 부산한 관계들을 잠깐 내려놓고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할 절박한 시기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길 잃은 양”처럼(벧전 2:25) 다른 소리에 내 귀를 팔아온 것을 돌이켜, 다른 소리에 중독된 내 귀를 다스리고 또 다스려서 주님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요 10:3,5) 그렇게 교회의 기초체력, 내 영혼의 기초체력을 다질 때입니다. 고개만 들면, 이 위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특별히 내게 차려주신 잔칫상이(시 23:5) 저렇게 푸짐한데, 어찌 주님께 몰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 어린이 날을 앞두고 다시 보는 ‘야누슈 코르착’
소아과 의사였다가 유대인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원장이 된 야누슈 코르착은 나치가 유대인 고아들 모두를 가스실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자신은 몇 차례 살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고아들을 버리지 않으려고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마치 소풍을 가듯 노래 부르며 행진합니다. 행진하면서 자신의 열 손가락을 펼쳐 나이 어린 아이들이 하나씩 붙잡게 했습니다.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요한 10:15)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인 히틀러 나치는 고아들을 죽이는 늑대가 되고, 유대인인 코르착은 오히려 참 목자 예수를 닮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몸 교회에 참 좋은 목자 예수님의 향기가 남아있을까요?
*** 나는 예수님의 양(羊) 맞나?
지난 화요일 밤 기도회 때 진구가 날카로운 질문을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10:3∼5절에 보면 연거푸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셨는데, 왜 지난 주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도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나요?’ 이것이 진구 질문의 핵심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양으로서 2%(또는 20%) 부족했지만, 부활예수님 만난 뒤부터 점점 100%에 가까운 양이 되어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염소끼가 있었지만, 점점 염소끼가 빠지고 온전한 양이 되어 간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염소를 산양(山羊)이라고도 부릅니다. 양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염색체 숫자도 다를 정도로 차이가 많습니다. 양은 염소와 달리 맹수나 산불 등 위기상황에서 얼른 도망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목자가 어디 계시나 살피며 풀을 뜯는 편입니다. 그러나 염소는 양과 달리 풀보다 나뭇잎을 더 좋아하는 잡식성입니다. 목자를 살피는 것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염소는 독립심과 모험심이 강하고 생존능력도 양에 비해 강하기 때문입니다. 염소는 양에 비해 뭉치기를 싫어해서 숫자가 많아지면 금세 몇 마리씩 나뉘는 습성도 있습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서 참조)] 문제는 ‘내가 양이 맞나?’입니다. 돌아보면, 나는 양보다는 산양(염소)에 가깝습니다. 양처럼 풀(말씀)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염소처럼 이것저것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도 먹습니다. 그래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주님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말씀에 귀 기울이는 정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말씀을 통해서, 세상사를 통해서 내게 다급히 외치시는 그분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편입니다. 우리도 엠마오 제자들처럼, 어서 부활예수님 제대로 만나 진짜 양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이게 참 급한 문제라는 생각이, 더 미루면 안 될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 ‘목자여’
교회는 참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양이면서, 동시에 주님을 머리로 한, 이 시대의 목자입니다. 한국교회를 위해 애대적소(愛大積少)를 지어 남겨주신 박재봉 목사님이 쓴 이 찬송시는 새 찬송가 개편 때 당연히 실려야 했던 한국인이 지은 최초의 찬송가입니다. 한국교회 목사와 교사들에게 가사가 너무 무거워서 싣기 어려웠다는 후문입니다.
목자여 (박재봉 작사, 장수철 작곡)
1.저목자여 깊은잠을 어서 깨어라 / 밤은벌써 사라지고 먼동이 터온다
희미하던 지평선도 완연해오니 / 목자들아 양을몰아 가야하리라
2. 금빛같은 새벽놀이 비낀 저언덕 / 신기하게 이슬맺힌 푸른 저초원
신선하고 거룩하다 내목장이니 / 목자들아 양을몰아 그리로 가자
3. 비탈길을 싸고돌제 다리 아프고 / 산마루를 올라갈때 숨이 막혀도
주린양떼 생각하여 참고 갈지니 / 양을치는 참목자의 장한 뜻이라
4. 몸에걸친 단벌옷이 내게 족하고 / 짚고나선 지팡이가 넉넉하여라
이제내게 다른염려 아주 없으니 / 이한날을 목장에서 양을 치리라
(※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단 하나의 길 (김현서 지음. 세움교회 청년부. 「성실문화」 114호)
이 세상에 죄의 종이었던 우리
하나님께 닿을 수 없던 우리
그런 내 손을 잡아 구하시려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셨네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이 길을 파고
저 길도 파보지만
허무만이 쌓여감을 느껴
그러던 나에게
하나님 친절히 말씀하시길
이 길을 보렴
진리는 이것이란다
예수님을 통해
이 문으로만 들어오렴
그러면 구원을 얻는단다
영원한 만족을 얻는단다
[시편시조] 시편 23, 주 나의 목자시니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14호)
주 나의 목자시니 넉넉하고 든든해라
내 원수 눈앞에서 내 잔칫상 차리시네
나는야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시편노래] 시편 23, ‘주 나의 목자시니’ (이정훈 편사, 박승원 작곡. 「성실문화」 114호)
[본문] (시편 23)
[노랫말]
1. 주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 없네, 푸른 풀밭 맑은 물 가 인도하시네
나에게 또다시 새 힘 주시어, 주 이름 빛나는 길 인도하시네
2. 나 비록 죽음골짝 다닐지라도, 함께 가는 내 주님이 지켜주시고
든든한 지팡이로 보살피시니, 두려움이 연기처럼 사라져가네
3. 주님이 차려주신 나의 잔칫상, 내 원수 눈앞에서 차리신 밥상
내 머리에 귀한 기름 부어주시니, 오 주여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4. 진실로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 평생토록 나와 함께 동행하시리
나는야 주님의 집 돌아가오니,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나이다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월드뮤직그룹 ‘공명’ 단원인 박승원 선생이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23, 주 나의 목자시니 (이정훈 편사, 박승원 작곡)
[시편송서(誦書)] 시편 23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14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말씀동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애대적소(愛大積小) 레시피
옛날옛날 한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꼬랑지 털을 뽑아 붓을 만들어 무릎 꿇고 서예 연습하던 시절 이야기예요.
“애·대·적·소(愛大積小)!”
예배당을 장식할 서예작품을 지으려고
무릎 꿇고 정성스레 붓글씨를 쓰고 있는 형 곁에서
진구가 또박또박 공손한 목소리로 읽었어요.
“우리 진구 한자 잘 읽네?”
으쓱해진 진구가 콩자반처럼 까만 눈을 반짝이며
형에게 물었어요.
“근데, 애대적소가 뭐야?”
“사랑은 많이 하고 소유는 적게 하라는 말씀이야.”
세 번째 글자 적(積)이 쌓을 적, 그러니까 적소(積小)란,
돈을 많이 쌓아두지 말고 적게 가지라는 뜻이라고 형이 설명해줬어요.
진구는 동그란 눈이 가느다래지며 다시 물었어요.
“그럼, 작을 소(小)가 아니라 적을 소(少) 아닌가?”
순간 진구를 바라보는 형의 눈이 하트눈이 되었어요.
“우리 진구 대단하다. 한자실력이 언제 이렇게 늘었지?”
형은 ‘애대적소’라는 말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압축해서 지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어른이셨던 박재봉 목사님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다(多)에는 소(少)가 맞지만, 대(大)에는 소(小)가 어울린다는 것까지,
그래서 목사님이 애대적소(愛大積小)라고 지으신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줬어요.
“우리 같은 소년소녀(少年少女)는
작을 소가 아니라 적을 소가 맞을 걸?”
언제 왔는지 오빠들 곁에서 소구가 아는 척을 합니다.
진구오빠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는둥마는둥
소구는 동그란 입으로 연달아 종알거렸어요.
“그래도 내 이름 소구는 적을 소 아닌 작을 소가 맞고!”
풍물놀이 할 때 쓰는 소구가 한자로는 소고(小鼓)라 쓴다는 사실을
소구네 식구들은 누구나 다 알죠.
그러자 선구오빠가 빙그레 웃으며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최남선 선생님이 「소년」을 낸 뒤에, 마침내
우리의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를 내셨지”
일제강점기 최고의 잡지 「어린이」가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니
어느새 어린이날이 코앞입니다!
“너흰 좋겠다. 어린이날이 가까워서!”
어느새 코밑이 거뭇거뭇한 청소년이 되어버린 선구가
부러운 눈빛으로 아우들을 바라봅니다.
진구가 소구를 힐끗 곁눈질 하며 느릿느릿 의젓하게 말합니다.
“어린이날엔 어린이도 애대적소 해야 해.”
선구와 소구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진구가 더 느릿느릿 의젓하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소구가 먼저 빛의 속도로 아이디어를 터뜨립니다.
“이번 어린이날엔 친구들이랑 예배당에서 과자잔치하면 어떨까?”
학교에서 받은 거랑, 집에서 받은 거랑, 이모들이 주신 거랑
그렇게 바리바리 모두모두 모은 거랑
철수랑 영희랑 친구들이 가져오는 과자까지 합하면,
알록달록 수북수북, 진구와 소구는 벌써 군침이 돕니다.
“물론 과자 없는 애들도 같이 먹어야 해. 그래야 애대적소니까!”
진구가 검지를 치켜들며 씩씩하게 외치고
아우들의 늠름한 상상력에 선구는 문득 교회학교 단톡방에 오른
이번 주일 성경말씀이 떠오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사도행전2:44-47)
선구가 흥얼흥얼 시편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나도질세라 진구도 소구도 명랑한 목소리로 따라부릅니다.
“주님은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시편23:1,6)
문득 선구의 마음속에 애대적소(愛大積小)할수록 더 맛있고 더 풍성해지는
보름달처럼 크고 둥근 밥상이 떠오르고
언제나 그 밥상 차려진 곳이 바로 주님의 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정훈 지음. 2023년 4월 29일 토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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