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성서일과 4본문]
(호세 11:1-11)
1.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2.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3.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5.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6. 전쟁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 성문 빗장이 부서질 것이다. 그들이 헛된 계획을 세웠으니 칼이 그들을 모조리 삼킬 것이다.
7. 내 백성이 끝끝내 나를 배반하고, 바알을 불러 호소하지만, 그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것이다.
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9.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10. 주님께서 사자처럼 부르짖으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의 뒤를 따라 진군한다. 주님께서 친히 소리치실 때에, 그의 아들딸들이 서쪽에서 날개 치며 빨리 날아올 것이다.
11. 이집트 땅에서 참새 떼처럼 빨리 날아오고, 앗시리아 땅에서 비둘기처럼 날아올 것이다. "내가 끝내 그들을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시편 107:1-9, 43)
1. 주님께 감사드려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아,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아, 모두 주님께 감사드려라.
3. 동서남북 사방에서, 주님께서 모아들이신 사람들아, 모두 주님께 감사드려라.
4. 어떤 이들은 광야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으며,
5. 배고프고 목이 말라, 기력이 다 빠지기도 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셔서,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8.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9. 주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실컷 마시게 하시고, 배고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주셨다.
43.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냐? 이 일들을 명심하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아라.
(골로 3:1-11)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6.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누가 12:13-21)
13.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1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16.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18.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21.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노트]
오늘 성서일과 4본문의 공통주제는 ‘탐욕(貪慾)경계(警戒)’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경계하시는 주님 마음의 뿌리는 ‘인자하심’, 그 한없는 사랑입니다.
[구약]
구약본문 호세아는, 지난주, 고멜에게서 난 세 아이들의 이름풀이를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의 이름 뜻을 살폈었습니다.
<주께서 도우신다! 주께서 구하신다!>
오늘 구약본문 호세아는, 그 이름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저런 배은망덕하고 배신을 밥먹듯하는 백성들을, 그럼에도 끝내 사랑하시리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2절)
‘그렇다면 안 부르면 될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가 금세 후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독한 어버이가 못 되신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빗나가고 배은망덕한 짓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품에 안아서 기르고, 포대기로 싸서 업고 다니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3-4절)
아무리 해도 ‘끝끝내 배반하고 마는’(7절) 저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분노’가 아니라 ‘애타는 어버이 마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그 마음’을, 호세아는 8-9절에서 절절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9.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저는 이 호세아 11:8-9절이야말로 주님 마음의 알맹이라고 봅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호세아를 (그 이름을) 통해 기어이 전하시는 주님의 마음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두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1) 이렇게 하루에도 열두 번씩 빗나가고 배신하는 저 배은망덕한 백성이 누구인가?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건 바로 한국교회가 아닌가?
그 가운데서도 교회 지도자들이 아닌가?
2) 이스라엘 백성들, 즉 한국교회가 저지른 배신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알 숭배(2, 7절) 즉, 우상숭배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게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마침 오늘 서신서 본문인 골로새서 3:5절 끝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고 선포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기리라는 약속을 어기고 바알을 섬긴 까닭이 무엇인가?
풍농! 풍요! 즉, 돈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호세아를 통해 우리 한국교회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물신숭배(物神崇拜), 즉 돈에 대한 탐욕입니다.
[시편]
오늘 시편 본문은 구약 본문에 대한 응답찬송입니다.
주제는 ‘주님의 인자하심’입니다.(1, 8, 43절)
이는 시 107편의 후렴구처럼 종종 나옵니다.(15, 21, 31절)
아무리 배은망덕해도, 집나간 아들을 끝내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누가 15장)
그 마음을 시편 기자는 ‘인자하심’이라 묘사한 것입니다.
집나가서 기갈(飢渴)에 빠진 자식(5절), 그 자식들을 향하신 주님의 저 마음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실컷 마시게 하시고, 배고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주셨다.”(9절)
저는 이 구절을 반복해서 노래하면서, 문득 거룩한 식탁, 성찬이 떠올랐습니다.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는 바로 그 ‘성찬’ 말입니다.
억만금을 주고 차린 대기업 총수의 생일 잔칫상 같은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찬’말입니다.
되찾은 아들을 위해 차린 잔칫상이라면 비교가 가능할 것입니다.(누가 15:23-24)
다음 주일 본문(누가 12:37)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실 그 밥상이라면 성찬과 가깝습니다.
시편 23편 기자가 노래했던 바로 그 밥상 역시 그렇습니다.(시 23:1, 2, 5절)
지난 주 저희 교회 교회학교에서
여름성경학교 1부 격으로, ‘쳐치스테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템플스테이라고 하려다, ‘따라쟁이’ 소리 들을 것 같아서 조금 바꾼 것입니다.
다른 교회 어린이들도 있었고, 교회 경험이 전혀 없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들도 함께 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마태 19:19)가 주제였습니다.
교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말씀서예, 세족식과 같은 예식을 체험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천국체험1’이라는 뜻으로 애찬식도 했습니다.
그 때, 모두 함께 김밥을 직접 말아 먹는 애찬식 때, 먹기 직전에 팔을 구부리지 못하는 장치를 해주었습니다.
혼자서는 먹을 수 없는, 그래서 서로 서로 먹여주어야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애찬식이었습니다.
유치한 방법이지만, 아이들이 조금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에게 한국교회가 이런 천국을 이뤄가는 현장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예쁜 아이들끼리만 끼리끼리 나눠먹는 것이 아니라 미운 아이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애찬식, 그 정신의 기초는 바로, 오늘 구약본문과 시편에 나오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 그 '인자하심'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애찬식을 가리켜 “아가페(Love Feast)”라고 불러왔습니다.
[서신서]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위에 있는 것’과 ‘새 사람’!!!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고 생각하라고 강조합니다.(1, 2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강조합니다.(9, 10절)
그런데 ‘위에 있는 것’과 ‘새 사람’의 근원은 하나 -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것’과 ‘옛 사람’의 근원 역시 하나 - 탐욕 -입니다.(5, 8, 9절)
그래서 사도바울은 “탐욕을 죽이”라고까지 강조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강조합니다.(5절)
[복음서]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멀리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15절)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서신서 본문에서 바울은, 탐욕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탐욕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탐욕이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생명을 죽이기 때문에 탐욕을 멀리하라고 하십니다.(15, 20절)
결국 같은 말씀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이고, 우상숭배는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죽게 합니다.
본문 전반부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청을 합니다.
공정한 재산분배를 예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랍비들이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의 관심, 주님의 임무는 천국선포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 4:17)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요청은 예수님의 관심과 정반대 지점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재산소유를 위한 공정한 분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공정한 분배(나눔)을 위한 재산 무소유에 가깝습니다.
무엇을 위한 무소유입니까?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복음서 본문의 하반부는 같은 주제로 이어집니다.
어떤 부자가 더 부자가 되게 생겼습니다.
밭농사가 잘 되었을 수도 있고, 좀 비약이지만, 땅값이 올라 돈을 많이 벌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부자는 재산 무소유에는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길에 대해 무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21절)
돈(재산)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제 생명(영혼)이 자기 것 인줄로 착각하니, 당연히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전무합니다.
한국교회의 평균치 눈높이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오늘 가르침이 좀 과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격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못 알아듣는 우리에게, 기어이 생명을 주시려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 그 인자하심의 절정입니다.
이 어려운 오늘 말씀에 대한 친절한 해설은, 오늘 본문 바로 뒤이어지는 22-24절, 29-31, 그리고 다음 주 본문인 33-34절에 담겨 있습니다.
22.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23.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
24.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
29.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30. 이런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1.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3.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34.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재물은 거름과 같아서 쌓여 있으면 악취가 나지만, 뿌려지면 땅을 기름지게 한다.”
생명을 위해 탐욕을 멀리해야 하고, 나아가 무소유 근처에라도 가야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실천이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 가르침을 알긴 알겠는데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처럼, 죽어봐야 실감한다는 겁니까?
죽어봐야 깨닫게 된다는 겁니까?
어쩌면 그게 정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이미 교훈을 얻은바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눅 16:31)
그 어떤 신비로운 방법을 통해서도, 돈에 대한 탐욕이 생명과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느낄 수 없습니다.
그 유일무이한 방법이 바로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말씀”이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 꾸준히 말씀을 먹으면서, 내 안에 말씀을 채우면서, 내 안의 탐욕을 씻어낼 수 있기를 빕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은 불편한 법인데, 그 가난을 오히려 편안하게 느끼면서 말씀[도(道)]을 즐긴다는 뜻입니다.
안빈낙도를 일생을 통해 몸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끝으로, 참고될만한 성경말씀들을 몇 개 정리해 봅니다.
“부자들은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여러분의 옷가지는 좀이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그 녹은 장차 여러분을 고발하는 증거가 될 것이요, 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날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야고 5:1-3)
“남에게 나누어주는데도 더욱 부유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 곡식을 저장하여 두기만 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그것을 내여 파는 사람에게는 복이 돌아온다.” (잠언 11:24-26)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 14:33)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 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딤전 6:7)
“17.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하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18.또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하십시오. 19.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딤전6:17-19)
[말씀동화] 방아타령 좋을씨고!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오늘도 성실교회 애벌레속회 어린이들은 구호를 외칩니다.
그중에서도 진구와 소현이 목소리가 제일 크네요?
원덕초등학교 사물놀이반에서 배운 ‘별달거리’장단 장구 구음하고 비슷하기 때문인가 봐요.
장구 입장단과는 좀 달라도 아주 많이 닮아서 신기하고 신이 납니다.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애벌레 속회에서 드디어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선생님은 이방실선생님이세요.
이방실 선생님은 국립국악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분이시죠.
성실교회 민들레음악회 둥근마당에도 자주 오셔서 연주해주시는, 성실교회의 오랜 벗이랍니다.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슬기둥’이라는 말은 거문고의 대표적인 구음(口音)이에요.
옛 어른들은 도레미파도 아니고 황태중임남도 아니고 이렇게 재미있는 구음으로 악보를 외우셨데요.
그런데 거문고의 ‘거’자도 모르는 우리 애벌레 어린이들이 슬기둥의 ‘둥’자가 딱 장구나 북소리를 닮아서 거문고가 타악기인줄 알고 이런 입장단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이방실 선생님이 방실방실 웃으며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거문고는 현악기지만 타악기의 맛이 가장 많이 나는 재미있는 현악기란다. 술대로 현을 '치는' 맛도 그렇고, 이렇게 오동나무 울림통을 ‘따그락’ 하고 두드리며 연주할 때는 딱 타악기 맛이지.”
아이 간지러워!
방실선생님이 술대로 내 몸통 위에서 따그락거리실 때는 깜짝 놀라기 일쑤랍니다.
술대는 딱 '153 볼펜'보다 조금 더 큰 녀석인데, 아주 단단하고 가느다란 대나무로 만들죠.
그 술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거문고의 줄과 몸통을 치며 연주하는 거예요.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여러분 저는 거문고예요.
전라북도 거문고 명장이신 최동식 선생님께서 만드신 작품이죠.
최선생님은 교회 장로님이시기도 합니다.
성실교회와 인연이 깊으신 최장로님께서, 양평에 예배당 건축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친히 정성을 다해 만드신 저를 교회 건축헌금으로 바치신 거였죠.
그리고 건축헌금을 바쳐진 나를 이방실선생님이 성실교회로부터 구입하셔서 옥보고대회라는 거문고 대회에 나가서 명인부 장원을 하셨을 정도로, 저는 꽤 역사와 관록을 자랑하는 거문고랍니다.
그래서 국악원에 있는 수많은 거문고 동무들 사이에서도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죠.
제가 동무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받고, 연주자들께 사랑받는 까닭이 뭔지 아세요?
그건 바로 제 몸통 때문이랍니다.
거문고는 현(絃)도 중요하고 모양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몸통을 만드는 오동나무예요.
최동식 장로님은 거문고를 만들기에 앞서서 언제나 좋은 오동나무를 찾기 위해 전국 팔도강산을 여행하시죠.
오동나무는 원래 전국 산천에 흔하디 흔한 나무에요.
그런 오동나무 중에서도 큰 바위틈에서 자란 녀석을 특히 좋아하세요.
게다가 그 나무 위에서 저절로 죽어서 고목이 된 녀석을 가장 좋아하시죠.
웬 줄 아세요?
그래야 나무속에 있는 진이 다 빠져나가기 때문이랍니다.
그뿐이 아니에요.
그런 오동나무를 구해 오셔서 거문고의 울림통 크기의 널빤지로 잘라서 그 널들을 기와지붕 위에 올려놓고 7년 가까이 더위와 추위를 견디게 하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천둥번개 치는 밤에도 저희는 지붕 위에서 잠을 자야 한답니다.
아무리 춥고 아무리 더워도 꼬박 7년을 그렇게 견딥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희 오동나무 널들은 뒤틀릴 대로 다 뒤틀려서 이젠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더 이상 나무가 변형되지 않을 만큼 한결같은 악기재료로 거듭나게 되는 거랍니다.
어때요? 이제 좀 거문고에 대한 느낌이 오시나요?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비록 애벌레 꼬마들이 만든 구음이지만, 왠지 중독성이 있네요?
자꾸자꾸 읊조리다보면 왠지 슬기로워질 것도 같은...??
그런데 여러분,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어보세요.
이건 아직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비밀 이야기예요.
제게는 한 가지 신비로운 남다른 힘이 있답니다.
그건 바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여섯명이 나를 중심으로 둘러앉아서, 줄을 하나씩 잡고 한목소리로 슬기둥 구음을 외치면 거문고와 관련한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되는 아주 신비로운 힘이죠.
아참, 거문고 줄이 여섯 개인 건 다 알고 있죠?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힘이 생기게 된 것일까?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제가 태백산 중턱 바위틈에서 50년 가까이 자라던 어느 날, 천둥번개 치던 한밤중에 벼락을 맞아 버렸죠.
그렇게 장렬한 죽음 이후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최동식 선생님께 발견되어 이렇게 멋지고 신비로운 거문고로 거듭나게 된 것이랍니다.
아무튼 정확한 원인은 몰라도,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제게 이런 신비로운 힘이 생겨버렸어요.
제가 가진 이 신비로운 힘에 대해서는 최동식선생님도 모르고 이방실선생님도 모르세요.
오늘도 애벌레속회 여섯 명이 모였습니다.
마침 이방실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산책을 나가고 안계셨어요.
선구와 영원이, 영훈이와 진구, 그리고 나리와 소현이, 이렇게 여섯 명이 저를 둘러앉았네요?
모두 두근두근 거리는 표정으로, 문현, 유현, 대현, 그리고 괘상청, 괘하청, 무현 이렇게 여섯줄을 한명씩 붙잡았어요.
그리고 한목소리로 외칩니다.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둥둥∼ 두둥둥∼" 시간이 소리를 내기 시작하네요?
그러더니 슬쩍슬쩍, 슬금슬금 시간이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두둥둥∼ 둥∼둥∼" 하고 흐르던 시간이 멈춥니다.
어? 여기가 어디지?
저기 사랑방에서 희한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거문고를 타고 있네요?
‘쿵더쿵 덩더쿵, 궁더쿵 궁덕∼♬’
담 안쪽에서는 어떤 아줌마가 거문고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담 바깥에서는 동네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딱 방아 찧는 소리네요?
아니 그렇다면? 저분이 바로 그 유명한 백결선생(百結先生)?
하도 가난해서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어 백결선생이라 불리시던, 그 선비?
왕궁에 살던 사람이, 청렴하게 살고 싶어 민가로 나와 일부러 평생 가난하게 살며 공부에 재미를 붙이셨다던 바로 그분?
명절이 되어 집집마다 떡방아를 찧어도, 백결선생 댁은 하도 가난해서 떡은 커녕 밥해먹을 쌀도 찧을 수 없어 아내가 슬피 울자,
“여보 마누라, 울지 마세요, 내가 거문고로 방아 찧는 흉내를 내 볼 테니 잘 들어봐요.”
그리고 연주를 시작하자 정말 방아 찧는 소리와 하도 똑같아서 울던 아내도 그 가락에 신바람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온 동네 사람들도 춤을 추었다던 그 전설의 방아타령?
백결선생은 신라시대 사람이죠.
박제상이라는 유명한 충신의 아들이에요.
박제상은 일본에 잡혀갔던 동포를 구해내고 대신 잡혀서 모진 고문 끝에 숨졌던, 그래서 그 부인은 바닷가에서 남편을 그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던, 그 유명한 분이세요.
“백결선생은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청렴결백하신 분이셔!”
흥분한 목소리로 영원이가 말했어요.
“그리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시고 불편해 하지도 않으시며, 가난을 즐기며 일생을 공부하신 선비의 표상이시지”
선구가 거들었어요.
“그런 걸 가리켜서 바로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지. 가난을 오히려 편안하게 느끼면서 도를 즐거워하는 선비라는 뜻이야!”
영훈이가 예리한 눈을 번득이며 멋지게 거들었어요.
그 때 진구가 어리둥절하며 한마디 하네요?
“가만, 이건 어쩐지 지난주일 예수님 말씀과 비교가 되는 걸? 풍년이 들어 더 부자가 된 어느 부자 얘기 말이야. 넉넉해졌으면서도 없는 사람들이랑 나눠먹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곳간만 크게 지으려 하던,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날 밤 데려가시겠다던 바로 그 어리석은 부자 말이야. 백결선생은 완전히 정반대네? 가진 거 없어도 쫌 즐길 줄 아네? 전혀 주눅 들지도 않는구먼?”
진구가 씩씩하고 재미나게 얘기하자, 나리와 소현이가 박수를 치며 깔깔 웃었어요.
“얘들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선생님 기다리실라, 어서 돌아가자!”
선구의 제안에 따라 여섯 아이들은 모두 저를 둘러앉아 다시 여섯 줄을 하나씩 잡았어요.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둥둥∼ 두둥둥∼" 시간이 다시 소리를 내며 세차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슬쩍슬쩍, 슬금슬금 시간이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두둥둥∼ 둥∼둥∼" 하고 흐르던 시간이 멈춥니다.
어라? 아직 교회가 아니네?
여긴 어디지?
게다가 이상한 말을 쏼라쏼라하는 저 외국인들은 뭐지?
그리고 갑자기 거문고 비슷한 악기를 가지고 와서 연주를 시작하네요?
바로 그 때 성경에 대해 가장 해박한 선구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어요.
“저들의 옷차림이랑 분위기를 종합해 본 결과, 저 대머리 아저씨는 예언자 엘리사고, 나머지 세 사람은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에돔 왕들이야. 지금 저들은 모압과 전쟁을 벌이려는데 질 것만 같아서 전전긍긍하며 예언자의 예언을 구하고 있는 중이야.”
바로 그 때 영원이가 순발력 있게 스마트폰으로 성경구절을 찾아 읽었어요.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왕하 3:15, 개역성경)
“저 봐,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걸 좀 봐! 과연 거문고는 말씀과 아주 잘 어울리는 악기야. 생김새도 진짜 거문고랑은 전혀 다른 악기인데, 우리 옛 어른들께서 성경의 저 악기를 '거문고'라고 번역한 걸 보면, 공부하는 선비들의 악기 거문고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을 때 가장 안성맞춤인 악기라고 여긴 것이지!”
“그럼, 우리도 앞으로 예배 때마다, 시편송서하고 말씀독경할 때, 거문고를 타면 어떨까? 그리고 말씀노래 부를 때는 꼭 거문고를 타자!”
“그러려면 우리 좀 더 열심히 거문고를 배워야겠어! 자 이제 우리 어서 돌아가자!”
흥분한 아이들이 순서도 없이 신나게 말했어요.
그리고 다시 저를 둘러싸더니 여섯 줄을 한가닥씩 잡았어요.
“둥둥 슬기둥, 슬기슬기 슬기둥∼♬”
"둥둥∼ 두둥둥∼" 시간이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슬쩍슬쩍, 슬금슬금 시간이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두둥둥∼ 둥∼둥∼" 하고 흐르던 시간이 멈춥니다.
드디어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이방실 선생님이 두 눈이 동그랗게 되셨네요?
우리끼리 비밀로 간직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선생님께는 비밀을 알려드려야겠네요.
아무튼 오늘 우리는 정말 대단한 여행을 했습니다.
1,600년 전 신라시대를 거쳐, 2,800년 전 엘리사 시대까지 다녀왔습니다.
백결선생님의 거문고 방아타령 덕분에, 우리 선비들의 안빈낙도 정신을 다시 배웠어요.
돈을 움켜쥐고 나누지 않으려는 탐욕을 품고서는 결코, 안빈낙도 못합니다.
절대로 도(道)를, 말씀을 즐기지[락(樂)] 못하는,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거문고는 말씀과 참 잘 어울리는 악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이제 애벌레 어린이들은 부지런히 거문고를 배우고 익혀서, 백결선생의 방아타령을 멋지게 연주할 게 틀림없어요.
콩 한 쪽이 있어도 방아타령을 하면서 나눠먹을 거예요.
성서일과 말씀도, 말씀노래도 방아타령과 함께 신나게 읊조릴 거예요.
그렇게 알곡 말씀들로 밥도 만들고 떡도 만들어서 가난한 이웃들이랑 실컷 나눠먹을 거예요.
“방아타령 좋을씨고!”
“얼∼쑤!”
[이정훈 지음, 2013년 8월 4일 주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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