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시편 27:14)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15:1-12, 17-18)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7.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8.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9.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10.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12.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18.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시편 27)
1.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2.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3.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4.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5.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6.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7.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8.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9.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0.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11.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엿보고 있으니,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12. 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내 목숨을 내 원수의 뜻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13.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14.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빌립보서 3:17-4:1)
17.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19.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누가복음 13:31-35)
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35.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끈은 ‘내 목숨을 보호하시는 주님’입니다.
구약,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창세기 15:1)
시편,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서신서,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빌립보서 3:20)
복음서,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누가복음 13:34)
오늘 요절은,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입니다.(시편 27:14)
[구약과 시편본문 정리 (창세기 15:1-12, 17-18, 시편 27)]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다’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람의 두려움이 두 차례 나옵니다.
환상 중에(1), 그리고 잠 들었을 때(12), 이 두 차례입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하나님 부재, 또는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후자인 듯합니다.
그리고 아브람 내면 깊숙한 문제도 그 두려움의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미래, 즉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음 말입니다.
아브람이 자조적으로 뇌까린 그 이름 엘리에셀!(하나님은 나의 도움!)
그 낙심과 절망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희망으로 역전시키는 약속을 주십니다.
아브람의 요구가 없음에도 자손과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아브람을 위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하나님과 사귀는 자의 기도’입니다.
전반부의 기도자는 성전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친교함으로써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후반부의 기도자는 두려움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배”(8), “얼굴”(9) 등은 하나님께서 내 가까이 계심,
가까이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염원하고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모든 두려움, 죽음의 공포...(11-12)
이 근원적인 두려움의 문제까지 근본적으로 풀어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사귀는 예배에서
끝까지 우리를 도우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10)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정리 (빌립보서 3:17-4:1, 누가복음 13:31-35)]
오늘 서신서 본문의 소제목은 ‘목표를 향한 달음질’입니다.
빌립보에 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갖듯이, 우리가 땅에 살면서도 하늘 시민권을 가졌으니,
하늘로부터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사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21)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거짓교사들처럼 땅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18-19)
주님과 친교(4:1), 나아가 성도간의 친교까지 가능한 것입니다.(4:2)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도우시니 가능합니다.(21)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시다’입니다.
헤롯의 악한 계획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예수의 길(예언자의 길, 십자가의 길)은 권력자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정해지고 진행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을 한탄하심은,
그렇게 애타게 도우려는 주님의 손길을 외면하고 오히려 악으로 갚기 때문입니다.(34)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예루살렘이 왜 저러는 걸까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오늘 우리 모습 같아서 두렵습니다.
(이상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 해설 일부 참조)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서 다시 올립니다)
[정리]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시는 오늘 예수님의 애타는 마음이 담긴 복음서본문 속에서
오늘 우리나라, 우리 한국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부디 우리사회를 끊임없이 이간질하는 귀신을 내쫓아주시기를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의 고질병을 주님께서 친히 고쳐주시기를 빌 뿐입니다.(눅13:32)
하나님께서 탐욕스런 우상숭배자 아합 왕을 죽이기로 결심하셨을 때
예언자들의 입에 거짓말 하는 영을 집어넣으시던 그 두려운 역사가
고스란히 떠오를 만큼(왕상22:19-23)
지금 한국교회 강단과 단톡방 안에 거짓말, 거짓정보가 난무합니다.
이것이 과연 우상숭배에 빠진 탐욕스런 정치지도자 하나를 꺾으시려는 것인지
탐욕에 빠진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꺾으시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온몸과 마음이 떨립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엿보고 있으니,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시편27:11)
청문회장은 물론 법정에서조차 겁도 없이 거짓 증언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고
목회자들 입에서 법원을 부수고 헌법재판소조차 부수자고 선동하는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우리는 오직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 역사를 기다리며
이 악한 광기의 시대를 딛고 일어섭니다.
“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내 목숨을 내 원수의 뜻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시편27:12-14)
[나머지]
* 목숨 바쳐 언약 지키신 하나님 사랑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는 영원히 해결할 길 없는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그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의 부활! 그 부활신앙이 우리를 그 공포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죽음의 공포에게 노예처럼 붙들려 살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집착하고, 자식에게 유산을 상속하려는 모습이 그 증거입니다. 부활신앙이 머리에는 가득하지만, 몸으로 삶으로 내려오는 순간 다 휘발되고 마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늙을수록, 죽음에 가까울수록,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돈과 권력에 집착합니다. 늙어 아무 힘없어 죽는 순간까지 나를 봉양할 사람-자식이 나를 버리지 않도록 하려고 유산을 부여잡고 삽니다. 따져보면 이건 결코 지나친 해석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부활신앙을 내 몸에 육화하려면, 오늘 본문말씀들처럼, 목숨 걸고, 아니 목숨 바쳐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 사랑, 그 ‘하나님의 임재’, 임마누엘을 선명하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늘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긴 만큼, 돈과 권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부활신앙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끝까지 나를 지키고 돌보아주실 분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 아니라, 목숨 바쳐 사랑의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시편27:10)
**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돌보신다.
「(상략)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엘리에셀이라고 하는 아브람의 종의 이름은 그 뜻을 번역하면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브람이 자기 종을 부를 때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즉, “나를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부리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자기 집 강아지의 이름을 자기 상관의 이름으로 정해놓고 불러대는 것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하나님을 대한 태도는 하나님은 자기의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는 분, 자기의 말을 듣고 실현해 주는 분, 자기에게 편하게 해주는 분으로 여겼지, 자기가 섬길 분, 자기가 따라야 할 분으로 여기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불러도 왜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사업을 위해, 내 자녀를 위해, 내 소유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께 매어 달렸는데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 불만을 가진 분들은 지금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대하시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시오, 역사의 섭리자십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바로 우리를 부르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지위는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용될 수 있는 처분 가능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이성호. 「새벽에 길어 올린 처음말씀」(2000. 도서출판 성실문화) 53-54)
*** 하나님의 말씀, 언약의 무게
「아브람은 하나님이 하늘의 별을 보여주실 때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셔서 뭇별을 보여주시며 네가 이 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지 아브람의 자녀의 숫자가 그와 같이 많으리라는 단순비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수많은 별들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우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한 하나의 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태양계는 다시 은하계에 속한 많은 비슷한 별들의 모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은하계는 소우주의 일부이며 이 소우주는 다시 대우주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러한 대우주가 수백만 개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 이상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얼마나 더 큰 세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많은 별들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면 우리는 반드시 이루어 질 줄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략)」 (이성호. 「새벽에 길어 올린 처음말씀」(2000. 도서출판 성실문화)
**** 우리의 바닥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오늘 구약본문 하반부에서 하나님께서 보이신 장면, 쪼개놓은 제물 사이로 연기 나는 화덕과 횃불이 지나가는 장면은(17)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약속에 얽어매시는> 모습입니다. 아브람이 만난 하나님은 지나치게 보일만큼 적극적으로 아브람을 도우십니다. 오늘 시편본문 10절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시27:10) 이 땅 마지막 보루인 부모조차 나를 버리는(나를 떠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나를 도우시는(내 곁을 지키시는) 주님! 시인 다윗이 만난 하나님의 도우심은 늘 우리 한계를 뛰어 넘으십니다. 오늘 서신서본문 하반부에 있는 21절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빌3:21) 2주전 서신서본문이었던 고후 3:18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이 만난 하나님 역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복음서본문 하반부 34절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눅13:34) 백성이 그것을 원하지 않음에도,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지나치리만큼 반복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 사순절 두 번째 주일 말씀에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우리의 극한 상황, 우리의 바닥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세상 끝까지 우리를 도우실 분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서본문의 예루살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지금 우리 한국사회, 한국교회는 끝없이 참으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수많은 싸인, 경고음들을 여전히 무시합니다. 회개는커녕 쉽게 덮어버리고 쉽게 잊습니다. 그럼에도 묻혔던 범죄들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광주항쟁과 관련한 은폐된 범죄들, 반민특위로 정리하지 못한 친일잔재들의 추악한 모습들까지 때가 되면 다 드러날 것입니다. 이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거짓들, 셀 수 없이 많은 참담한 죄악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안의 이 뿌리 깊은 적폐들을 끝까지 파내는 길, 골고다처럼 고통스러울 그 길 내내,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이룰 그날까지 주님의 선한 능력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시편 27:14)
사순절 2주입니다. 사순절 고통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사순절 두 번째 고갯마루에서 읽는 본문말씀이 매우 아픕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빌3:18-19)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눅13:35) 그리고 그 안에 희망이 깃들어 있음을 희망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음을 봅니다.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창15:12, 17) 아브람이 잠든 가운데 공포를 느낀 것은, 주님께서 바짝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감수성이 예민한 아브람의 공포에서 한국교회의 하나님 감수성을 기원합니다. 비록 여전히, ‘공산당보다는 무당이 낫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어느새 교회 안에 차오른 무당과 이단의 기운이 다 드러나 버렸으나, 위기가 기회임을 다시 되새기게 하시는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시27:10) 그리고 묵시록 말씀을 다시 찾아 읽으며 새깁니다.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계3:10) ‘주님의 때’가 어제보다 가까워졌습니다. 어느새 코앞입니다. 샛별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세상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지금 내가 얼마나 주님과 친한지, 주님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돌아보면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 앞서 일하시는 주님, 나보다 훨씬 앞에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빌4:1)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시27:14)
(※ 전에 올린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말씀동시] 사잇길 (김은주 지음. 「성실문화」 122호)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예수가 그 길이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내가 산 길을
가야 하리니 예배가 그 길이라
오늘과 내일과 모레도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남은 자의 길이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길
성령과 말씀 사이 좁고 협착한 길
그 길로 들어서면 시온의 대로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시편시조] 시편 27, 피난처 내 주님은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122호)
피난처 내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단 하나 내 소원은 주님 집에 살고지고
주님을 기다리리라 담대하고 강하게
[시편노래] 시편 27,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이정훈 편사, 이방실 작곡. 「성실문화」 122호)
[본문] (시편 27)
[노랫말]
1.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내가 그 무엇을 무서워하랴
대적자 나의 원수 악한 자들이, 나를 집어삼키려다 넘어졌으니
군대가 에워싸고 공격하여도, 두렴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리라
2. 나의 소원 들어주실 나의 하나님, 주님께 내 소원을 구하나이다
한평생 성전에서 주님과 함께, 오순도순 의논하며 살고싶어라
재난의 날 주님께서 날 숨기시고, 반석 위에 나를 올려 높여주시면
날 에워싼 원수들을 내려다보며, 주님께 예배하며 찬양하리라
3. 나의 기도 들으소서 나의 하나님, 애타는 내 기도에 응답하소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들었나이다, 예배하려 주님을 찾았나이다
나의 도움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주의 얼굴 숨기지 말아주소서
날 버리지 마옵시고 도와주소서, 내 부모가 날 버려도 날 거두소서
4. 주님의 길 보이소서 나의 하나님, 주의 길로 안전하게 인도하소서
원수들의 거짓증언 악한 폭력을, 주님께서 안전하게 막아주소서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주의 은덕 입을 것을 나는 믿노라
이제 너는 주님을 기다리거라, 굳세게 네 주님을 기다리거라
[해설]
시편본문을 성실교회 이정훈 목사가 다듬고, 성실문화 동인이며 국립국악원 정악단 지도위원이신 거문고 연주자 이방실 선생이 곡을 붙였다.
[악보] 시편 27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이정훈 편사, 이방실 작곡)
[시편송서(誦書)] 시편 27 (이정훈 다듬음. 「성실문화」 122호)
(※ 전래자장가 가락, 즉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1.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2.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3.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4.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5.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6.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7.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8.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9.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0.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11.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엿보고 있으니,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12. 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내 목숨을 내 원수의 뜻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13.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다함께]
14. 너--는-- 주님-을--,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말씀동화] 별 헤는 다락방에서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건 호랑이가 토닥토닥 다람쥐의 자장가 들으며 단잠 들던 시절 이야기예요.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지음 ‘별 헤는 밤’ 일부]
오늘도 해님이는 아우 달님이를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 노래합니다.
엄마가 가르쳐주신 노래를 부르다 그만 목이 멥니다.
해가 바뀌었어도, 우리만 남기고 훌쩍 세상을 떠나신 엄마아빠 생각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습니다.
다락방 둥그런 창문 너머에 저 많은 별을 언제 다 세려는지
달님이는 엄마아빠와 함께 일찍 하늘나라로 간 아우 별님이를 그리며
오늘도 밤하늘 별들을 헤아립니다.
별을 헤아리다 꼬로록 울리는 달님이의 배꼽시계소리를 들으며
해님이가 묻습니다.
“배고파?”
고개를 주억거리는 달님이 얼굴을 바라보며
해님이가 개구쟁이 눈빛으로 속삭입니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윤동주 지음 ‘별 헤는 밤’]
그러고는 해님이와 달님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먹고 싶은 걸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별 하나에 사탕과”
“별 하나에 찹쌀떡과”
“별 하나에 식빵과”
“별 하나에 아이스크림과”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신나게 먹을거리 타령을 이어가던 해님이는 습관처럼 다시 ‘어머니’를 부르고
배고픔도 다 잊은 듯 달님이는 엄마생각에 훌쩍이기 시작합니다.
해님이는 애써 씩씩한 척 아우를 다독이며
교회학교에서 배운 시편을 읽어줍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시편27:10)
엄마아빠가 나를 버렸다는 말에 달님이는 더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해님이가 아우를 달랩니다.
“이건 엄마아빠가 우리를 내버렸다는 게 아니라,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뜻이야, 우리 집처럼”
하늘나라에 가신 엄마아빠는 지금 하나님 품에 안겨 편안히 잠들어 있고
땅에 남은 우리는 주님께서 와서 돌보아 주신다는 노래라고
이 시편은 그런 뜻이라고 애써 설명합니다.
다락방에서 울다 잠든 달님이와 해님의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별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세기15:5)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을 이으십니다.
“너의 밥이, 너의 반찬이, 너의 밥상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창세기15:5절 흉내)
아이들의 입 꼬리가 귀에 걸리고, 생각만 해도 벌써 배가 부릅니다.
꿈결에도 해님이는 아우에게 늠름한 목소리로 설명합니다.
해와 달과 별, 저 많은 별들을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 약속이니
하나님 말씀은 꼭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님이와 달님이를 사랑스레 바라보시는 하나님 눈이 하트눈이 되시고
언제 나타났는지 천사들이 해님이와 달님이를 둘러싸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시편27:13-14)
[이정훈 지음. 2025년 3월 15일 토요일 아침]
(윤동주 시인의 시 일부와, 윤동주 시인의 어린 시절 삼형제 아명인 ‘해환, 달환, 별환’을 조금 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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