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지
않아도 되는
자리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이 군대 옷을 이것저것 사가지고 와서 휴가 동안 입고 다니는 걸 보고 어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해 물었다. “왜 휴가 나와서 군대 옷을 입니? 다른 옷으로 바꿔 입고 나가.” 그랬더니 아들이 “이건 짬이 더 돼야 입을 수 있는 옷인데, 나중에도 계속 입으려고 미리 사왔어.”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고 싶어서 비가 내리는 날 판초우의 속에서 자유를 누렸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억압이 상식으로 생각된 사회였다. 2-30년 사이에 형편이 많이 좋아졌지만 지금도 사회 전반에 억압이 흠뻑 배어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불편해 하는 억압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보통 윤똑똑이로만 여긴다. 억압을 하는 사람이나 억압을 당하는 입장이나 서로 억압을 억압으로 보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좋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
교복을 파는 가게 쇼윈도에 “네 멋대로 해!”라는 문구를 보고, 걱정이 먼저 되는 것은 내가 꼰대가 되어가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락 스피릿’을 이해하고, 열광했다.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네 멋대로 해라’다. 사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제목을 얄팍한 상술로 바꿔버린 게 싫었다. ‘네 멋대로 해라’에는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만 나온다. 컨베이어 위를 지나가는 것 같은 영혼 없는 등장인물이 없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비뚤어지라는 선동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였다. 자유는 ‘자기 멋대로 사는 게’ 아니다.
결속이 없는 자유는 암세포다. 브레이크가 없어 무한 증식하는 것이 암세포의 특징이다. 놀이동산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를 우리는 미아라고 부른다. 어른이 돼서도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철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어떤 나라의 역사책을 들춰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착취하고, 압도하는 것은 신을 거절하는 행동이다. 또 하나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를 가혹하게 소모시키는 일도 신을 거절하는 행위다.
예레미야 2: 4 - 13
예레미야를 심부름꾼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집을 향해 말씀하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변절했느냐? 물으신다. 나(하나님)에게서 어떤 잘못을 발견했기에 거품에 불과한 우상을 따라 간 것이냐? 사람이 하나님과 하늘을 등지는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흠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참된 것보다 거짓된 것에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빛보다 어둠을, 진실보다 거짓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빛과 진실을 붙잡는 방법에 기억이 있다.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이지만 또한 짐(?)이기도 하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해야 하고, 기억하려는 의지를 실천해야 한다. 해방의 기억, 은총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붙잡아야 할 기억이다. 어떤 사람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앞만 보면 된다.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 하지 못하는 사람은 얇아서 위태로운 오늘을 사는 사람이다. 황현산 교수는 <밤이 선생이다>란 수필집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12)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를 두텁게 하는 일이다. 딛고 선 터가 얇은 사람은 불안한 오늘을 살 수 밖에 없다.
시편 81: 1, 10 - 16
예술가들이 적은 돈을 받으면서도 그림, 시, 음악을 포기하기 않는 것은 그들이 예술에서 구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시가 구원이고, 음악가에게는 음악이 구원이다. 우리가 예수를 구원이라 고백한다면 다른 무엇과 바꿔서는 안 된다. 한 번 바꾸면 그것은 영원히 그 사람의 운명이 된다(시 81: 15).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에서는 남은 인생을 야곱의 형이지만 차남으로 살아야만 했다. 한 번 돈에 무릎 꿇으면 조아린 머리를 다시 세운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번 욕망에 무릎 꿇으면 몸과 영혼이 상해가는 걸 알면서도 끊기가 어렵게 된다. 시인은 이런 현실을 하나님께서 고집대로 하게 내버려 두셨다고 표현한다. 사람은 숭배하는 것-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대상-에 종속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다(시 81: 12, 15).
히브리서 13: 1 - 8, 15 - 16
히브리서 13장을 보면, 빛과 진실을 붙잡는 법이 무엇인지 두 번째 열쇳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전망이다. 비전, 꿈 뭐라고 표현해도 좋지만 사람은 참된 전망 하나와 꾸준히 드잡이를 해야 한다. 신을 거절하는 방식의 성취를 전망으로 잡은 자는 반드시 망하게 돼 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세상이다. (히 13: 1, 어떤 사람은 이런 세상을 꿈꾸지 않는 것도 같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한 세상이 하나님 나라 아닐까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그럼, 다음에 오는 구절들을 거리낌 없이 읽을 수 있다. 낯선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세상에서는 이따금 천사를 대접하기도 한다. 갇힌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갇히지 못한 것에 대해 빚진 마음을 가지는 세상. 결혼을 소중히 여기고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도구화시키지 않는 세상. 이미 허락된 것을 소중히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견고한 확신으로 서 있는 세상. 참된 삶이 가득한 세상은 이런 세상이다. 자아에 갇히지 않은 영혼들만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드릴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찬양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제사를 드리게 된다.
누가복음 14: 25 - 33
마지막으로 빛과 진실을 붙잡는 방법은 비키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앉는 일이다. 겸손하고 소박한 태도, 거품이 끼지 않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 안식일 식사를 하러 가셨는데 청함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골라 앉으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는 “상석에 앉지 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자기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콤플렉스나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사람은 큰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높이신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그대로 있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을 그대로 보려면 낮은 자리로 가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얼만 큼의 존재인지 확인할 수가 있다.
(한희철 목사님의 글 ‘지지 못한 지게’ 소개) “아주머니, 사람에겐 저마다의 고통이 있나 봅니다. 다른 사람이 져줄 수 없는, 자신만의 감당해야 할 고통이 저마다 있나 봅니다. 내가 얼마나 작아져야 당신의 고통의 자리, 바로 그 자리에 닿을 수 있는 것인지, 오늘 지지 못한 당신의 지게를 두고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낮아지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해봐야 내가 얼마나 한계가 있는 존재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높아지려는 성향이 자연스러운지를 알 수 있다. 낮아지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해봐야 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의 깊이와 무게를 어쭙잖게나마 재볼 수 있다. 비키지 않는 자리를 찾아 앉는 삶이 예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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