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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설교준비 일지

왕국절 제1주 (한정훈)

1.

제목을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로 정했습니다. 세상의 반대말이 진리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세상은 진리를 반대합니다. 세상은 진리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하는 일에 헤살을 놓고, 진리를 억압합니다. 자신은 더한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법대로 하자!' 언죽번죽 소리를 높입니다. 적반하장,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말이 꼭 맞습니다. 빛이 어둠을 내어 쫓는 것처럼 진리는 거짓을 폭로합니다. 진실은 세상이 얼마나 진실하지 않은지 드러냅니다. 진리 앞에 위선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2.

예수께서 18년 동안 관절염으로 뒤틀리고 등이 굽어서 고개조차 들 수 없는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성경은 귀신들려 앓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여, 네가 자유케 되었다!" 말씀하시면서 손을 얹습니다. 예수께서 오래 고통받는 여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함께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당장입니다. "일하는 날로 정해진 날이 엿새나 됩니다. 치료받고 싶거든 그중 한 날에 오시오. 그러나 일곱째 안식일에는 안됩니다." 실정법을 들먹이며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따지고 듭니다.


3.

그는 위선자입니다. 사기꾼입니다. "너희들은 안식일에 자기 소나 나귀는 풀어서 외양간에서 끌고 나가 물을 먹인다. 그러면서 사탄에게 18년 동안이나 애며 있던 이 여인을 풀어 외양간에서 데리고 나온 것은 문제라고?" 예수께서 쏘아붙입니다. 회당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 참조). 어째서 인지 세상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싫어합니다. 사람을 살리면 법을 어긴다고 합니다. 자기들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으면서도 잘못된 건 바로 잡자고 하는 시위도 법대로 하라고 잡아들입니다.


4.

구약 시대부터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언자라고 하면 앞일을 점치는 사람쯤으로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예언자-또는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우선된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되어 세상의 어둠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 역시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면서 우발적인 선택이 아니었음을 설명하시는 장면이 전과 다르게 눈에 띕니다.


5.

현대사회는 지독한 불신사회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낯선 이를 향한 환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문을 더 완벽하게 잠그는 법을 가르치고, 낯선 사람의 손을 뿌리치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잃어갑니다. 이웃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는 시선이 우리에게 더 익숙합니다. 사람들은 낯선 것을 쉽게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가 점점 더 예측불가능해 질 거라는 사실입니다. 미래는 낯설고, 사람들은 낯선 것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철저하게 불신에서 출발한 신뢰가 바로 보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을 주십니다.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구별했다는 사실을 설명하십니다.


6.

더께가 많이 내려 앉아 때 묻은 말이 되었지만 불신지옥, 믿음이 없는 세상은 지옥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다릅니다. 불신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두려움에서 시작하지 않고, 신뢰에서 시작합니다. 시편 71편을 지은 시인은 이 사실을 붙듭니다. 시인은 나이가 지긋한-또는 늙음을 바라볼 수 있는- 노인이거나 노인이 다 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너무 젊은 사람은 늙었을 때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하였고,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었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에 자신을 받아 주신 분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7.

그렇지만 시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끝끝내 검질긴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이런 거 아닐까요? 주님을 한 번 믿었으면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믿음을 지키는 것이 좋은 믿음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시내산에서 화염이 솟구치고, 지축이 흔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 또한 두려운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모름지기 엄하게 해야 우습게 대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흘린 피의 호소를 듣고 가인을 벌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런데 예수의 행동은 이상합니다. 


8.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조롱하는 이들을 보고 하나님께 호소하는데, 예상했던 내용이 아닙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눅 23: 34)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가 걸은 길로 은혜가 선포됐습니다.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손이 곱는 다든지, 눈이 먼다든지, 즉각적인 심판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 더 거룩해졌을까 생각해 보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의 심부름 꾼을 보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임박한 심판을 피하라는 것이지 두고봐라 하는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즉각적인 심판이 없어서인지 그 말을 뒷등으로 듣습니다.


9.

그래서는 안됩니다. 예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지만 예수를 저버리고 예수의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예수의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요 12: 47).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그러날까 두려워 밝은 데로 나아오지 못하는 법입니다(요 3: 16-21). 세상 곳곳에서 듣그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화학무기로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아기들이 죽는가 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온 국민을 속이고도 언론을 장악해 시민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10.

회당장과 그 무리를 향해 "사기꾼들아! 위선자들아!" 외쳤던 날이 선 예수를 기억해야 합니다. 애국과 빨갱이 운운하면서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이 거짓된 자신의 모습은 감쪽같이 감추고 '실정법'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안락한 삶에 젖어서 행복만 좇아 다니는 것은 복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어 세상에 진리를 선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 이미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나를 먼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믿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11.

애기애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는 길은 자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지지하는 하나님의 설명을 듣지 않고서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그 설명(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알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나같은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어떻게 나를 쓰시려 합니까?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