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읽고 고민했지만 주제가 잡히질 않는다. 마치 큐브 맞추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돌리고 돌려서 다 빨강색으로 맞췄는데 구석에 한 녀석이 파란색이고, 다 녹색인데 구석에 한 녀석이 노란색이다. 예배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초조하다.
….
열쇠말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지만 주제를 잡으려고 본문을 여러 번 읽게 되어 완전히 헛수고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아무튼 어렵게 정한 주제는 ‘새로움’이다.
2.
구약 본문은 열왕기하 5: 1 – 14절이다. 나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치료가 불가능하던 옛날에는 천형병이라 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생각했다. 한센병은 원래 전염성이 강하지 않을 뿐더러 나아만 장군이 걸린 나병은 전염성이 없는 마른 버짐이 생기는 피부병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대한 성성 굥회 해설 참조).
한센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은 이스라엘 시녀의 말을 듣고, 사마리아로 떠난다. 아람 왕의 편지를 받아 들고 이스라엘 왕을 찾아간 나아만 때문에 왕궁은 발칵 뒤집어 진다.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나아만을 부른다. 이에 나아만은 선지자의 집 앞에 이른다.
그런데 정작 엘리사는 나오지 않고 그가 보낸 심부름 하는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한다.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나아만은 화가 났다. 그는 엘리사가 자신에게로 와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환부 위에 흔들어 고칠 줄 알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화가 나서 돌아섰다.
나아만의 지혜로운 종들이 그를 말린다. 아주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도 그대로 했을 텐데 오히려 쉬운 일을 거부하실 거냐며 설득한다. 나아만은 화를 진정시키고 종들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근다. 그랬더니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다.
요단 강이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보다 나아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엘리사가 직접 나와 크게 하나님을 부르고 부위 위에 흔들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아만의 지위에 걸맞은 대우나 더 좋고 귀한 어떤 치료법에 의해서 회복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걸로 될까?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을 훈련하면서 의심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심 하지 말라. 겉으로 보이는 형식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 애쓰는 까닭은 형식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새롭게 되기 위해서다. 나아만은 아람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구원한 큰 용사이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이다. 우리의 업적, 스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질병처럼 앓고 있는 것이 있다. 누구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길 떠남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하고, 진실한 충고가 필요하고, 의심 없는 순종이 필요하다.
나아만이 일곱 번 요단 강에 몸을 잠갔을 때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었다. 우리의 만남을 믿고, 우리에게 허락된 이 현실을 믿자!
3.
시편 본문은 시편 30: 1 – 12절이다. 이 시편은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난 자의 개인 감사시다. 그러나 개인적인 고백에만 그치지 않고, 성전 낙성가이기도 하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주전 165년에 되찾아 다시 봉헌한 사건을 해마다 기념하는 행사에서 낭송하였다(독일 성서 공회 해설 참조).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면 산 같이 굳게 선 사람도 근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역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 신앙의 새로움을 유지하는 방법은 밝을 때 어두움을 어두울 때 밝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약할 때 강함을 강할 때 약함을 기억하는 일이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는 일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를 기억하자.
궁극적인 결론은 낙관하면서 하루하루의 일상은 계절의 변화처럼 맑은 날, 굳은 날, 비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눈 오는 날, 추운 날, 더운 날, 구름이 적은 날, 많은 날…, 변화무쌍하다. 어느 날 하나만 계속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날 그날에 영원히 감사하리라!
4.
신약 본문은 갈라디아서 6: (1 – 6) 7 – 16절이다. <회심의 변질>을 쓴 앨런 크라이더는 회심을 ‘재사회화’란 개념으로 뜻매김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으로 사회화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삶인가? 새로움의 알짬이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을 읽고, 알맞은 문장을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습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남을 기쁘게 하거나 남이 지시하는 하찮은 방식에 나를 끼워 맞추려는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일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거나 안 받거나 하는 일과 같이, 여러분과 내가 하는 일에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있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새로운 것, 곧 자유로운 삶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 곧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이들에게 평화와 긍휼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할례를 받거나 안 받거나 하는 일과 같이, 여러분과 내가 하는 일에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있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새로운 것, 곧 자유로운 삶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 (우리가 하는 일이 중심이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중심이 되는 삶, 이런 삶이 자연스러운 세계가 그리스도인이 재사회화 과정을 거쳐 살게 되는 나라이다.
나아만에게 중요한 것은 나아만이 어떤 강에서 씻는가, 엘리사가 환부에 손을 대고 흔드는가, 또 할례를 받은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냐, 할례를 받지 않은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냐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 바울을 말마따나 중요한 것은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중요하다.
5.
복음서 본문은 누가복음 10: 1 – 11, 16 – 20절이다. 예수는 칠십 인에게 권능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우리가 정말 기뻐해야 할 일은 우리가 받은 그 권능으로 업적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기록되고 있음이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이것이 우리가 정말 기뻐해야 할 이유이다.
잠시 은혜보다는 의지를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잊을 때가 있다. 은혜의 감격을 제쳐두고 의지를 불태울 때가 많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취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리듬을 놓치고 어깨에만 잔뜩 힘을 주고, 핏대를 세울 때 문제가 된다.
열심히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열심히 할 때 자의식이 커진다는 사실이고, 자의식이 커지면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된다는데 있다.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되면 비효율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너무 탓하거나, 너무 미안해하게 되고, 또 자신을 너무 하찮게 대하거나, 너무 못견뎌할 때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럼 자신이 하는 일에 갇히는 꼴이 된다. 자신이 하는 일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봐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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