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흐름을 놓쳐서인지 열쇳말 찾기가 쉽지 않다. 고민이 깊다. 주된 원인은 본문 읽기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극복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일로 너무 바쁘다. 자연스럽게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중심에 두게 됐다.
2.
구약 본문은 아모스 8: 1 - 12절이다. 아모스의 모든 예언이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몇 십 년 후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다. 아모스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적한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삼키고, 권력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는 현실, 오늘과 같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진정성도 없다. 만약 사람이 종교적으로라도 진정성을 갖게 된다면 좀 더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말씀이 있었을 테니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말씀이 없다는 말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말과 같다. 설교는 넘쳐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통화량이 많아져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설교의 인플레이션, 말의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유는? 가난한 자, 힘없는 자를 억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3.
시편 본문은 시편 52편이다. 악인과 자신을 대조하는 시인의 말이 나온다. 악인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자기 재물을 의지한다. 또 악행으로 세도를 부린다. 반대로 의인은 한결 같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 예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했다(마 6:24, 눅 16:13).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재물을 사랑하든지 하나만 선택할 수밖에 없다.
봄에 아내와 백양사에 들렀다. 거기 대웅전에서 금으로 된 석가모니 상을 보았다. 그리고 자녀를 위한 기도를 드리라는 현수막을 보았다. 이런 모습에서 본질에서 벗어난 종교의 이면을 보았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날이 무뎌진 칼을 본 듯한 느낌, 아무 생기 없는 교실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돈은 사람들을 무력화시켰다. 정작 중요한 것에는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생명력을 빼앗고, 사람들의 등을 무조건 밀어 댄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등 떠밀려 간다.
4.
복음서 본문은 누가복음 10: 38 - 42절이다. 이 말씀이 일보다는 말씀을 들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깊이 있는 초청이라 생각한다. 봉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보다 열등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소유보다는 존재가 먼저고, 봉사보다 기도가 먼저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뭔가에 쫓기며 살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삶의 방식이 주는 악은 바로 염려와 근심이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그래서 불평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남을 비난하게 되고 그 불평을 예수에게 한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마리아에게 도와달라고 직접 말하면 될 것을 왜 예수에게 불평하면서 마리아에 대한 비난을 하는지?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일을 벌여놓고 염려와 근심 그리고 불평과 비난을 할 때가 잦다. 단순한 삶, 검소한 삶이 그립다. 그런데 이것은 내적인 동기부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하나라도 더 따고, 한 점이라도 더 올리라고 등 떠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영혼에 해롭다.
5.
신약 본문은 골로새서 1: 15 - 28절이다. 복음의 일꾼(23절), 교회의 일꾼(25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24절), 말씀을 이루려(25절), 완전한 자로 세우려(28절) 등을 생각할 때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몇몇 형제들이 아바 펠릭스를 찾아가서 말씀을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노인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간청을 하자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아버시여, 그렇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말씀이 없다네. 사람들이 노인들을 찾아가 말씀을 청하고 또 자신이 들은 말을 실천하던 때에는, 하나님은 노인들에게 할 말씀들을 주셨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말씀을 청하고서도 들은 것을 행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노인들로부터 말씀의 은총을 거두어들이셨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아무런 말씀을 갖지 못하게 되었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네.” 이 말을 듣자 형제들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바시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 그들은 삶 대신 말을, 실재 대신 보고를, 삶에 대한 환상만 만들어 낼 뿐 삶에 대한 책임은 면제시켜 주는 말, 자신이 의지하고 도피할 수 있는 권위 있는 말을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바 펠릭스는 학생들을 말없는 세계로 인도해 들인다. 그는 그들의 언어를 낮추고, 우리가 실재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환상을 허물어뜨리기를 원한다. … 참된 말과 참된 세계는 인간 정신의 구성물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 우리가 지식으로 세계를 만들려는 환상을 버릴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파커 파머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109-110).
그리고 한 가지 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가 생각났다. 복음과 교회에 일꾼이 되어서 열심히 실천해야 하는데, 열심히, 열심히! 때로 그 열심이 지나친 행동주의로 몰아간다. 마르다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며, 쫓기는 삶, 등 떠밀려 사는 삶, 동생이 밉고, 예수가 원망스러운 삶 말고, 장 지오노의 소설에 나오는 나무를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처럼 살고 싶다.
6.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부산하게 뛰어다니지 않고, 신이 내게 허락한-선물한 또는 맡긴- 일이라고 확신하는 그 한 가지 일을, 예수의 말씀 앞에서-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편- 검질긴 태도로 실천하며 살고 싶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밤이다. 고요한 영혼을 가지고 싶은 밤이다.
오늘날 스펙 쌓기에 빠져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고, 말씀의 홍수 속에서 정작 마실 물이 없어 허덕이는 젊은이들, 우리 사회, 우리 교회 청년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달달한 힐링 멘토가 아니다! 말씀과의 진정한 사귐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의미로 충만한 삶을 꿈꾼다!
성취가 아니라 사색과 보람이 내 삶의 양분이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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