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 본문을 아우르는 열쇠말을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설교 제목은 위대한 질문으로 할 계획이다. 때때로 기독교 신앙은 인생의 모든 답을 알고 있다는 교만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기도하면 돼’, ‘말씀 보면 돼’, ‘예수면 돼’ 이런 식의 태도는 자칫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이 폭력이 될 수 있다. 인생은 단순하지 않다. 본디 모호한 인생을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내려면 진정성 있는 신앙 태도를 갖고, 고빗사위마다 인생의 질문 앞에 진실하게 서야한다. 세 가지 질문이 있다.
2.
첫 번째 질문은 ‘내 하나님은-또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이다. 시편 본문은 시편 42, 43편이다. 42: 1절과 43: 2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먼저 42: 1절은‘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이고, 43: 2절은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특별히 43: 2절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르짖은 말이기에 자꾸만 눈길이 머문다.
신앙에는 ‘어둔 밤’이 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었는데 지금은 왜 그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가? 게다가 대적들은 비방한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42: 10) 경험과 관념의 하나님은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되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이 거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시인은 상처와 실망으로 끝내지 못하고, 끝끝내 희망을 붙든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42: 5, 11, 43: 5)
3.
구약 본문은 열왕기상 19: 1 – 15a절이다. 먼저 살펴 본 시편 본문과 똑같은 상황이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50명을 상대해 보란 듯이 승리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을 고백했다(왕상 18: 39). 그의 기도는 힘이 있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가뭄이 그쳤다. 그런데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피했다. 인적 없는 곳이기에 대놓고 비방하는 자들은 없지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위대한 승리자인가, 초라한 도망자인가? 누구인가 나는? 내면에 온갖 아우성에 어지러움을 느끼는 그에게 하나님이 물으신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익숙한 음성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부른 그 음성과 같다(창 3: 9). 대답을 다그치는 질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직면하게 하는 질문이다. ‘그래,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격정이 그친 후 세미한 소리가 들린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흔들어 깨우는 이 세미한 소리를 듣고, 다시 가야 할 길을 간다.
3.
복음서 본문은 누가복음 8: 26 – 39절이다. 거라사 지방에 간 예수는 귀신 들린 자 한 사람을 만난다. 오래 옷을 입지 않고, 무덤에 살며, 괴력을 발휘해 쇠사슬과 쇠고랑도 끊는 골칫덩이다. 귀신 들린 자는 예수를 알아본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28) 귀신을 향해 나오라고 명령한 예수는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을 한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군대’라고 답한다(30).
거라사 지방이 정확히 어디인지 지금도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 하나이고,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돼지를 주 제물로 하는 제사를 드렸다. 또한 역사적으로 유대와 로마에 의해 압제에 시달렸고, 예수 당시에도 로마 군단이 주둔해 있었다(최규창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28-38). 한 마디로 아픔이 많은 땅이다. 르네 지라르는 거라사 광인이 쇠사슬과 쇠고랑을 끊었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의 암묵적인 방조로 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거라사 광인은 이 지역 전체의 폭력 욕구를 짊어진 ‘희생양’인 셈이다. 긴 시간 폭력에 시달려온 사람들, 이들이 겪었던 모진 아픔은 광기가 되었다. 예수는 광기의 실체가 무엇인지 물었고, 그를 (메커니즘에서) 해방했다.
4.
신약 본문은 갈라디아서 3: 23 – 29절이다. 신약 본문은 근본적인 희망을 향한 검질긴 마음과 존재를 흔들어 깨우는 세미한 소리 그리고 광기에 휘둘린 사람의 고통에서 해결하는 능력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것은 믿음이다. 율법은 말한다.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고. 그러나 믿음은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모두 하나라고.
진리는 객관주의로 설명될 수 없고, 인생에는 획일적인 정답이란 있을 수 없다. 철석같이 믿었던 관념과 경험이 무자비하게 박살날 때가 있고,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없는 불안한 시절이 있고,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벅찬 역사의 무게란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에 태생적인 구분은 무의미하다. 답이나 법으로서 믿음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신앙 태도로서의 믿음이 필요하다.
5.
이런 묵상을 했습니다. 앞으로 말씀 기억력을 위해서 좀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설교를 하고 나면 스스로 장황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번 주에 네 본문을 읽고, 설교 준비를 하면서 '단순함'에 대한 고민을 함께 했습니다.
6.
전통문화와 관련된 그림을 선택하면 좋을텐데 가진 것이 없어 아쉽습니다.
'성실문화 응용하기 > 설교준비 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강림 후 제8주 (한정훈) (0) | 2013.07.16 |
---|---|
성령강림 후 제7주 (한정훈) (0) | 2013.07.09 |
성령강림 후 제6주 (한정훈) (0) | 2013.07.02 |
성령강림 후 제4주 (한정훈) (0) | 2013.06.18 |
성령강림 후 제3주 (한정훈) (0) | 2013.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