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길, 제자의 길
[성서일과 4본문]
(왕하 2:1-14)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가 되니,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길갈을 떠났다. 길을 가다가,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베델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베델까지 내려갔다.
3. 베델에 살고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여리고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여리고로 갔다.
5. 여리고에 살고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요단강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
7. 예언자 수련생들 가운데서 쉰 명이 요단강까지 그들을 따라갔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 강 가에 서니, 따르던 제자들도 멀찍이 멈추어 섰다.
8. 그 때에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강을 건너갔다.
9.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13.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들고 돌아와, 요단 강 가에 서서,
14.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그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외치고, 또 물을 치니, 강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엘리사가 그리로 강을 건넜다.
(시편 77:1-2, 11-20)
1. 내가 하나님께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는 이 소리를 들으시고,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2.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 치켜 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
11. 주님께서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그 옛날에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그 일들을 기억하렵니다.
12. 주님께서 해주신 모든 일을 하나하나 되뇌고, 주님께서 이루신 그 크신 일들을 깊이깊이 되새기겠습니다.
13.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
14.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을 만방에 알리셨습니다.
15. 주님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주님의 팔로 속량하셨습니다. (셀라)
16. 하나님, 물들이 주님을 뵈었습니다. 물들이 주님을 뵈었을 때에,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바다 속 깊은 물도 무서워서 떨었습니다.
17. 구름이 물을 쏟아 내고, 하늘이 천둥소리를 내니, 주님의 화살이 사방으로 날아다닙니다.
18. 주님의 천둥소리가 회오리바람과 함께 나며, 주님의 번개들이 번쩍번쩍 세계를 비출 때에, 땅이 뒤흔들리고 떨었습니다.
19.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20.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양 떼처럼,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갈라 5:1, 13-25)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15.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16.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7.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21.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누가 9:51-62)
51.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55.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5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59.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6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61.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62.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노트]
오늘 구약과 복음서를 이어주는 공동주제는, ‘승천준비(昇天準備)’입니다.
엘리야의 승천과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가 되니, ...”(왕하 2:1)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누가 9:51)
그런데 ‘승천준비’라는 큰 그릇 안에 담긴 알맹이 주제는, ‘제자의 길’이라고 봅니다.
구약본문에는,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르는 제자 엘리사가 돋보입니다.
복음서본문에는, 예수님의 기준에 못 미치는 제자 후보생들 모습이, 구약의 엘리사와 대조적입니다.
엘리사를 떼어놓으려고 세 차례나, <길갈에서부터 벧엘∼여리고∼요단강> 인근을 맴도는 (지도를 보니까 딱 그렇게 느껴집니다) 엘리야, 그러나 끝까지 스승과 안 떨어지려는 엘리사... 이들의 세 차례 대화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x3) / “...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x3)”(2, 4, 6절)
그런데 왜 엘리야는 엘리사를 떼어놓으려 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떼어놓으려 한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도를 시험하고 연단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승 엘리야에게서 안 떨어지려는 엘리사의 모습에서, 종류는 다르지만, 문득 나오미와 룻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어찌보면 너무 맹목적(盲目的)입니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맹목(盲目)이 아닙니다.
눈이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눈이 밝은 것입니다.
스승 안에 있는, 시어머니 안에 있는 알맹이를 본 것입니다.
(이게 제자(弟子)입니다.)
유치한 비유인지 몰라도, 먹이를 발견한 맹수의 집중력이랄까요?
멀리서 산삼을 발견하고 다가가는 심마니에게는 모기떼가 깨무는 게 느껴질리 없습니다.
중간에 말벌 왕탱이 집을 발견한다 해도 산삼을 포기할리 없습니다.
룻에게, 엘리사에게 그 산삼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그 산삼은 무엇입니까?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결코 맛볼 수 없는, 이제껏 맛본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듣도 보도 못한 거룩한 기운, 진리의 향기, 천국의 맛 아닙니까? (엘리사는 그걸 구체적으로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천국의 맛은 어떻게 맛볼 수 있는가?
간단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맛에 길든 내 혀, 그 입맛을 버려야 합니다.
내 입맛을 바꾸지 않으면 결코 그 천국의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맛이 무엇입니까?
돈맛, 권력 맛, 나아가 명예 맛, 심지어 세상 지식의 맛, 그리고 온갖 말초적인 쾌락의 맛들입니다.
그것들에 찌든 내 입맛을 바꾸려면,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엘리사처럼, 사도들처럼, 내가 가진 것 다 버리고 따라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천국의 맛이라는 그 심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맛이, 피부가 떨리고 심장 떨리는 생생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그 세상맛에 빠진 자들의 모습을 가리켜, “육체의 욕망”(13, 16, 17절), “육체의 행실”(19∼21절, 약 15가지)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에 천국의 맛을 본 사람들, 곧 제자로서 스승의 뜻을, 주님의 삶을 끝까지 따르는 제자다운 삶, 그런 인생의 증거를,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바꿔 말하면, 다 버리고 따라나선 제자란, 그래서 끝까지 가는 제자란, 이미 성령께서 건드리시기 시작한 이들입니다.
성령께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줄 알고, 육체의 행실을 이미 버린 사람들입니다.
16, 18, 25절에 세 번 연속해서 나오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가라"는 말씀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스승께서는 떠나셨어도 계속 그렇게 동행하고 계심입니다.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통일찬송가 506장, 예수 더 알기 원함)
이렇게 성령님 인도를 따라 살아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격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성령의 9가지 열매처럼!)
바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승님을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본문 77편 11, 12절 노랫말에 주목합시다.
제자라면, ‘말씀’ 안에서 주님의 역사(役事, 歷史)를 “회상”하고, “기억”하고, “하나하나 되뇌고”, “깊이깊이 되새겨”야 합니다.(11, 12절)
그래야 “주님의 길”(x3) (13, 15절)을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길”이 뭡니까? 그게 바로 엘리사가 느낀, 룻이 느낀, 스승 안에 있는, 시어머니 안에 있는 알맹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제자의 길’을 제대로 가는 첩경이요, 제자의 길을 위한 정밀지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길”을 아는 것은, 세상맛,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고, “육체의 행실”을 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13절)
너무나 거룩하여, 온 바다가 떨고(16절), 땅이 떱니다.(18절)
그렇습니다. 또 한편 천국의 맛은 두렵고 떨림이었습니다.
바로 성령께 사로잡힌 사람 - 제자의 일상입니다.
물론, 모든 것 다 버리고 스승만을 따라나선, 그 '제자' 말입니다.
정리합니다.
엘리사는 바로 그 맛을 본 겁니다.
룻은, 엘리사는 그 맛을 보았기 때문에 다 버리고 따라나섰던 겁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듯, 떠난 겁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엘리사는 저렇게도 집요하게 스승을 붙좇은 것입니다.
그 맛을 본 것입니다.
세상맛 버릴 만큼, 이제껏 맛본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듣도 보도 못한 진리의 향기, 천국의 맛, 그 거룩한 기운, 즉 거룩한 두려움을, 떨림을 느낀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누가복음 9:57절 이하에서, 제자가 되고파하는 이들에게서 예수님은, 엘리사에게 있었던 '그걸' 찾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거룩한 떨림이 그들에게서 느껴지지 않으신 겁니다.
아마 그들은 성령께 사로잡힘을 당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럼, 나는 지금 어떠한가?
이들을 거울삼아 내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내 안에 ‘주님의 길’에 대한 선명한 기억이 있는가?
그에 대한 생생한 떨림, 경외심이 있는가?
과연 나는 줄기차게 성령님과 관계하고 있는가?
지금 붙들고 놓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게 과연 알맹이, 그 두렵고 떨리는 주님의 길인가?
그 전에 먼저, 나는 다 버렸던가?
과연 나는 제자인가?
[나머지]
무엇 때문인지, 오늘 구약본문과(그 배경 본문들과) 복음서 본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많습니다.
그물처럼 촘촘합니다. 무엇 때문일까?
왕상 19:19절 이하의 엘리야가 처음 엘리사를 부르는 대목이 오늘 복음서 본문인 누가 9:61절 이하와 통합니다.
심지어 예수께서 62절에서 쟁기질 비유를 드신 것조차 마치 쟁기질하던 엘리사를 떠올리게 할 정도입니다.
평소 같으면, 농부가 아니라 어부의 비유를 들지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은 진짜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는 아호(雅號)다운데(마가 3:17), 이는 오늘 구약본문 바로 앞인 왕하 1:9절 이하의 내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엘리야의 오늘 모습은, 은퇴하는 목사님을 연상시킵니다.
홀연하고도 표표히 외투까지 다 벗어 던지고 가볍게 떠나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저도 언젠가 은퇴목사가 될텐데... 말이 쉽지 누가 그럴 수 있을까요?
천하의 엘리야, 우리 예수님이시니까 그럴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라면 그 스승님을 따라야하지 않을까요?
좋은 예로, 아씨시의 성자 프란치스코가 떠오릅니다.
[말씀노래] 예루살렘 진군가
1. 예수께서 때가되어 예루살렘 가시려고 / 심부름꾼 앞서보내 준비하게 하시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영접 거부하네 / 제자들은 분노하고 예수마음 심란하네
2. 다른마을 지나갈때 어떤사람 따라오네 / 선생님이 가시는곳 나도따라 가오리다
여우도 굴이있고 새도제집 있건마는 / 나에게는 집이없다 머리둘곳 조차없다
3. 어떤사람 바라보고 나를따라 오려무나 / 아비장례 먼저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죽은자의 장례일랑 죽은이에 맡겨두고 / 너는가서 전파하라 천국도래 급하도다
4. 어떤사람 따라오며 예수님께 여짜오되 / 집안식구 작별인사 먼저허락 하옵소서
천국일꾼 되었으면 머뭇머뭇 하지말라 / 쟁기를 잡았으면 앞만보고 전진하라
[말씀동화] 봉황권법 봉성(鳳聖)탈춤 배울 사람 찾습니다.
어떤 무술인이 혼자 무술 연습하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매우 힘차고 멋집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걸 보고, “지금 춤추세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무술인은 자존심이 상해서 쪼그리고 앉아서 엉엉 울어버리네요.
어떤 춤꾼이 혼자 춤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걸 보고, “지금 무술하세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춤꾼은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내며 멀리 가버리네요.
그러나 정말 고수들은, 정말 춤의 달인, 무술의 달인들은 그런 말을 들어도 크게 화내지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원래 춤과 무술은 뿌리가 같기 때문이죠.
정말 무예가 깊은 사람의 무술 동작은 춤처럼 우아한 법이고, 춤의 고수가 추는 춤은 부드러우면서도 바위를 뚫는 기운이 서려 있는 법이죠.
길리야는 양평 봉성리 삿갓봉에 묻혀 사는 초절정 고수랍니다.
무술의 고수이며 탈춤 명인이죠.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길리야의 정체를 몰라요.
그냥 매일 배낭을 메고 이산 저산 돌아다니는 할 일 없는 백발노인인 줄 알죠.
그러나 길리야는 이미 전국의 무술가들과 무용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저명인사예요.
길리야의 스승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길리야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길리야의 얼굴조차 모릅니다.
심지어 길리야의 무술 솜씨나 춤 솜씨 역시 아무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길리야가 그렇게 유명해 진걸까?
그건 바로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무예비결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길리야라는 소문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사실이었죠.
길리야는 그 비결서를 바탕으로 봉황권법과 봉성탈춤을 창제했거든요.
봉황권을 연마하면 몸에 있는 모든 병이 낫게 됩니다.
그리고 봉황권이 깊어지면 봉황처럼 거룩한 기운이 온몸에 서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길을 가면서 단전과 정수리에 마음을 모아 깊은 숨을 쉬기만 해도, 사방 30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떨리게 되고, 마침내 그들의 몸과 마음 역시 깨끗하게 될 정도로, 봉황권은 정말 신비로운 권법입니다.
봉성탈춤 역시 대단히 신비로운 춤이죠.
양팔을 활갯짓하며 펄쩍 뛰어오르는 도약(跳躍)과, 잔뜩 쭈그리고 앉는 굴신(屈身)은 봉황권의 기세를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뿐 아니에요.
봉성탈춤 9마당마다 각각 고유한 주제와 표정이 있는데, 길리야가 그 표정을 지으면 아무리 두꺼운 탈을 뒤집어써도 탈바가지 위로 그 표정이 선명하게 서릴 정도입니다.
봉성탈춤 9마당의 주제는,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입니다.
길리야가 탈 하나만 쓰고 이 아홉 마당을 차례로 춤추면, 마치 변검(變臉)처럼 탈의 표정이 주제에 따라 바뀝니다.
그뿐이 아니에요.
길리야의 봉성탈춤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춤의 표정, 춤의 9가지 진미(珍味)가 느껴지죠.
그래서 그 맛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그 맛을 다시 느끼고 싶어하고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길리야의 소문과 봉황권, 봉성탈춤의 소문이 제멋대로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봉황권만 익히면 어떤 강적도 왼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물리칠 수 있다는 둥,
봉성탈춤 9마당만 익히면 전세계 어떤 춤이든 모든 춤의 달인이 될 수 있다는 둥,,
그래서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엉뚱한 꿈을 꾸며 길리야를 찾기 시작하네요?
현상금을 걸고 찾는 사람까지 생겼어요.
심지어 서울 부자동네 아줌마들까지 난리가 나서 돈 보따리를 싸들고 길리야를 찾기 시작합니다.
자식 예체능계 대학에 보내려고 그러는 거라나?
그러나 길리야는 절대 제자를 두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별의별 헛소문이 다 퍼져도 절대 댓글도 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리야는 인터넷을 모르는 컴맹이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길리야는 딱 한 사람 제자를 두기로 결심했어요.
봉황권과 봉성탈춤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찾기로 한 것이죠.
그래서 길리야는 좋은 제자 하나를 찾기 위해 매일 매일 양평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리사는 어린 시절 엄마아빠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갔다가 성인이 되어 혼자 역이민을 왔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귀농하여 양평에서 농사를 짓는 처녀 농사꾼입니다.
어느 날 리사가 트랙터를 운전하며 밭을 갈고 있었죠.
길리야는 리사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요즘 세상에도 저렇게 맑은 그릇이 있었다니!”
텅 빈 큰 그릇에서 우러나오는 짱짱한 공명을 느꼈습니다.
그건 마치 아주 잘 만든 커다란 항아리 같았어요.
어떤 음식이 들어가도 완벽하게 발효를 시켜버릴 것 같은 항아리!
길리야가 리사의 트랙터 앞에 하나뿐인 춤복을 던지네요?
눈치를 챈 리사가 말합니다.
“할아버지, 혹시 이거 길거리 캐스팅 같은 건가요?”
길리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죠.
“저는 보시다시피 몸집이 된장항아리같이 생겨서 이런 멋있는 춤복이 어울리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정말 몸치라서 춤을 전혀 못 춰요.”
길리야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봉성탈춤 9마당 가운데 가장 짧은, 둘째 마당을 추었습니다.
그러자 리사의 가슴 속에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하네요?
그리고 리사는 아무 말 없이 트랙터를 버리고 길리야를 따라나섭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리사는 스승 길리야의 봉황권과 봉성탈춤을 모두 배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께서 리사에게 하산하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리사는 싫다고 했죠.
절대로 스승 곁을 떠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스승께서 세 번째 하산을 명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리사야, 이제 네가 봉황권과 봉성탈춤을 전수시킬 제자를 찾아야 할 차례다. 나는 더 이상 제자를 둘 수가 없다. 이젠 내가 네게 더 가르칠 것이 없구나. 혹시 마지막으로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렴.”
마침내 하산을 결심한 리사는 스승님께 전설의 ‘무예비결서’를 갖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스승 길리야는 껄껄 웃으며 대답합니다.
“리사야, 그건 좀 부풀려진 전설이란다. 사실은 무예비결서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 그동안 너와 내가 매일 매일 읽고 쓰고 또 읽었던 이 성경말씀이 바로 그 비결서란다. 문제는 나와 너처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르기로 결심, 결행하면서 읽을 때 비로소 성경말씀은 봉황권과 봉성탈춤을 완성시켜 주시는 비결서가 되는 것이란다.”
리사는 그제야 수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이 느껴졌어요.
부모님과 함께 살 때 읽던 성경, 귀농해서 혼자 양평에서 살 때 읽던 성경,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스승님을 따라 산에 올라 수련하며 읽던 성경의 맛이, 그 느낌이 각각 달랐다는 것이 생각났어요.
봉성탈춤의 9마당 하나 하나를 익히면서, 마치 소림사에서 아홉 관문을 하나 하나 통과하듯이, 9마당을 익히는 동안 성경말씀이 얼마나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달고 오묘했는지 이제야 환하게 기억났어요.
그러고 보니 리사는 어느새 길리야 스승님 얼굴과 걸음걸이까지 판박이처럼 닮아가고 있는 거였어요.
스승님의 표정과 자세, 그리고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랐는데...!
길리야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리사야, 내게는 스승님이 예수님 한분뿐이란다. 예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모르지만, 아마 예수님의 표정과 자세와 걸음걸이를 내가 쏙 빼닮았다고 나는 믿어. 스승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하늘이신 주님, 말씀이신 주님께서 모든 것 다 버리고 하늘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나도 너도 모든 소유 다 버리고 하늘 아버지 뜻에 순종하려고 귀 기울이며 살 때, 사람은 누구나 다 하늘을 닮아가고, 말씀을 닮아가는 법이거든!”
“예, 스승님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스승님께 배울게 너무 많아요. 봉성탈춤 아홉마당도 아직 무르익으려면 멀었습니다.”
“리사야, 과일 가운데는 후숙(後熟)하는 과일도 있단다. 후숙은 ‘뒤익기’라고도 하지. 열매를 추수한 뒤에 한참 지나야 정말 달고 맛있게 익는 거 말이다. 네 봉성탈춤 아홉마당은 이제부터 익기시작할 것이다. 네가 매일매일 이 비결서인 성경을 읽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만을 느끼며 따를 때 비로소 봉황 같으신 성령의 춤, 봉성탈춤 아홉마당은 향기롭게 무르익을 것이야!”
마음이 행복해진 리사는 길리야 스승님의 춤복을 물려받고 하산했어요.
춤복을 입고 봉성탈춤의 활갯짓을 하며 도약하자 순식간에 산봉우리 세 개를 뛰어넘었습니다.
신선(神仙)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이 부럽지 않은 춤복이 아닐 수 없네요.
리사는 이렇게 춤복을 입고 온 나라를 순식간에 돌아다니면서 봉황권과 봉성탈춤으로 몸과 맘에 병든 이들과 굶는 이들에게 힘을 주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스승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내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귀 열리고 눈 열린 벗을, 옹기 항아리처럼 큼지막한 그릇을 딱 하나만 찾으려고 마음먹었어요.
리사는 스승님 길리야와 달리 인터넷 도사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싸이트도 만들고, 거기서 지구 어딘가에 묻혀있을 맑고 향기로운 큰 그릇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과연 좋은 그릇의 그 향기, 그 맑은 공명을 느낄 수 있을까?
리사는 지금 그게 궁금합니다.
[이정훈 지음, 2013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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