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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설교준비 일지

성령강림후 제5주 | 중심인 말씀 (한정훈)

성령강림 후 제5주

시편 119: 105-112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6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10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8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
109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110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1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2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창세기 25: 19-34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로마서 8: 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마태복음 13: 1-9, 18-23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중심인 말씀

근본적 차이
살다 보면 사람에게 근본적 차이를 느낄 때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취향부터 생각에 이르기까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저 사람과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에서와 야곱이 그렇다. 이삭과 리브가는 (역시)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하나님께 기도해 아이를 얻었다. 쌍둥이다. 그런데 부모의 골칫거리가 될 만큼 쌍둥이가 엄마 배에서 다툰다. 앞으로 있을 더 큰 갈등에 대한 암시이다. 이삭은 말한다. “22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 25: 22) 하나님의 대답이다. “23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뱃속에서 다투는 쌍둥이에 대한 예언치고는 거창하다. 두 아이의 운명은 두 민족의 운명이고, 두 국가의 운명까지 담고 있다. 성경은 이 쌍둥이 형제가 대립할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려는 것일까? 에서와 야곱의 차이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천한 사람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나면서부터 이야깃거리다. 형은 피부가 붉고, 온몸에 털이 많은데, 야곱은 그렇지 않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어 들을 누비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므로 장막에 거한다. 자연스럽게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성경은 두 사람 기질과 외모가 얼마나 다른지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명을 가름할 중대한 한 사건을 기록한다.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매우 피곤해한다. 그리고 배가 몹시 고팠다. 야곱이 죽을 쑤었는데, 팥죽이라 붉다. 에서가 “30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말한다. 그러자 야곱이 “31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팥죽에 장자의 명분이라니. 야곱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거래에 에서가 반응한다. “32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다시 확인한다. “33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한다. “33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에서와 야곱, 두 형제 모습이 아주 가관이다. 둘이 똑같다. 누가 덜 하고, 더 낫고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매듭짓는다.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 34)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서 12: 16은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말한다(새번역은 ‘속된 사람’이라고 번역한다). 성경의 성난 눈초리는 약삭빠르게 잇속을 챙긴 야곱을 빗겨가고, 곧장 에서에게로 향한다. 야곱을 용납한 성경은 어째서 에서는 천한 사람이라고 정확히 짚어낼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나눌 것이 있다. 그 후에 에서를 이야기하자.

일그러진 초상
에서와 야곱처럼 한 배에서 나왔어도 근본적 차이가 있다. 다자녀 가정인 우리 집에서도 많이 느낀다. 형제가 어찌 이렇게 다른지 신기하다. 어쩌면 이 땅 모든 차이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한다. 동양과 서양, 인종에 따라, 지역과 전통 등. 공간만 아니라 시간도 마찬가지다.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하는데, 지금은 훨씬 더 빨리 바뀌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세대차이가 더 심각하다. 세계화 그리고 현대화되면서 공통점보다는 오히려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 이면에는 근본적인 결속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에서와 야곱은 한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이 다르다 할지라도 태생을 부인할 수는 없다. 비록 형제라는 이 엄연한 사실이 둘 사이에 벌어진 운명을 메우지는 못할지라도 반대로 어떤 것으로도 이 근본적 결속을 끊을 수 없다. 그로써 어떤 가능성일 수 있다.

우리나라 교회는 다양성에서 대립 이상의 가능성 즉, 결속을 보는 데 자주 실패한다. 다양성 속에서 이해와 존중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여 안팎으로 이미지를 다 실추했다. 얼마 전 불교 성지이면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에서 기독교인의 땅 밟기 기도가 있어 큰 논란이 됐다. 복음성가 ‘그 사랑 얼마나’를 부르면서 사원 안에서 통성기도를 했다. 한국 말소리가 들린 것을 이상하게 여긴 한국 비구니 스님이 사실을 확인하고 제지했다. 그런데 이 무례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불쌍해서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스님은 수개월째 하던 묵언 수행을 깼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의 이런 무례한 모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매우 비상식적 행동일 뿐만 아니라 이웃 종교에 대한 무지와 진리에 대한 독선이 낳은 한국 기독교의 일그러진 초상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에서 문제로 돌아가자. 왜 성경이 야곱에게는 침묵하고, 에서는 천한 사람이라 했는가 생각하다 4대강 사업과 강정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는 한 사진작가가 원하는 구도를 위해 수백 년 된 금강송과 주위 나무를 불법으로 벌목한 일이 논란이 됐다.) 자본주의가 여러 주의(ism) 중에서 유독 천박한 주의는 아닐 것이다. 다만 천박한 자본주의는 눈에 보이는 이익과 결과밖에 보지 못한다. 에서와 같다. 몇 백 몇 천 아니 몇 만 년을 이어왔을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그 심각성을 모른다. 효율 앞에서 몇 세대를 이어온 유산과 전통도 산산이 부서진다. 에서가 망령된 사람이 된 까닭은 전신이 붉어서도, 사냥을 좋아하는 들사람이어서도 아니다. 사람이 천해지는 것은 말투, 표정, 몸짓, 취향에 품위가 없어서가 아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에 대한 신중함을 요청할 중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가벼움이 에서를 속되게 했다.

시인은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하고 노래한다(시 119: 105). 등불은 낮이 아니다. 그러나 매번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에는 넉넉한 빛이다. 낮이 아닌 등불만으로도 충분하다(독일성서공회 해설 참조). 가벼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낮이 필요한 게 아니다. 대단한 무엇 없이도 등불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을 중심으로 이끌 등불이면 된다. 에서에게는 이 작은 등불이 없다. 그래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졌다. 미야코 시다의 ‘Rigolo’ 공연을 보고 감탄한 기억이 있다. 초인적 집중력으로 간신히 균형을 잡은 구조물이 깃털 하나가 자리를 떠나면서 와르르 무너진다. 어찌 보면 에서가 가벼워진 것은 자리를 지키는 깃털 하나가 없기 때문이다.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지키는 소박한 정신이 없어서 천박해졌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참을 수 있는, 참아야 할 가벼움을 찾아내지 못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말씀과 중심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는 천국 말씀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결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네 가지 조건 중에 ‘흙이 얕은 돌밭’을 먼저 보자. 예수는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라고 말한 후에 “20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설명하신다(마 13: 20-21). 다음 ‘가시떨기’는 “22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심긴 말씀이 결실하기 위해 감정의 돋움이 아니라 인내의 붙듦이 필요하고, 세상 염려와 재물 유혹에 말씀이 막히지 말아야 한다. 이 비유는 따로 설명 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상투성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6) 하나님께 굴복한 마음은 세상에 굴복한 마음과 반대된다. 당장 이익이나 결과에 흔들리지 않는다. 말씀이 마음을 붙들기 때문이다. 에서는 한 번 팔아버린 장자 명분을 되찾을 수 없었다. 한 번 훼손하면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자연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만나는 사람을 다시 안 볼 사람으로 보는 마음보다 두 번 볼 사람, 세 번 볼 사람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한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심긴 말씀이 결실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그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시간이 필요하다. 결실은 인내의 결과이다. 송명희 시인이 가사를 쓴 <나>라는 찬양이 있다. 가사가 이렇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그리고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이렇게 노래한다. 후렴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이다. 중증 장애인인 그가 어디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발견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마음속에 남이 모르는, 남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깨달음이 심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남보다 돈을 더 잘 버는 사람도 아니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 허가를 받거나 인생역전에 성공하는 사람도 아니다. 마음에 말씀이 심겨 중심을 지키고 또 그 마음에 심긴 말씀에 중심을 붙드는 사람이다. 말씀에 생을 걸자. 이 말은 성경책을 소중히 여긴다거나 설교 시간을 금과옥조로 삼자는 말이 아닐 것이다. 속된 것과 자기 욕망에 흔들리지 않을 중심이 말씀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가 말씀하신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