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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문화 응용하기/설교준비 일지

성령강림후 제4주 | 다시 일어남 (한정훈)

성령강림 후 제4주


아가 2: 8-13

8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9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창세기 24: 34-38, 42-49, 58-67

34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35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36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37 나의 주인이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38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42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43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44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45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내게 마시게 하라 한즉

46 그가 급히 물동이를 어깨에서 내리며 이르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낙타에게도 마시게 한지라

47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48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49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61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로마서 7: 15-25a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마태복음 11: 16-19, 25-30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다시 일어남


맥추절의 의미

내일은 맥추감사주일이다. 한국교회는 유대인의 절기인 맥추절에 감사란 단어를 붙여 맥추감사주일로 지킨다. 맥추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순절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유월절이 지난 두 번째 날 그해에 난 첫 이삭 한단을 잘라 하나님께 드린다(레 23: 15-21). 이날 그러니까, 유월절이 지난 두 번째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바로 오순절이다. 예수는 유월절에 돌아가셨고, 유월절이 지난 두 번째 날 부활하셨고, 오순절은 마가 다락방에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오순절은 계절로 볼 때, 보리 수확 시기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 농경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오순절을 보리 수확을 뜻하는 맥추절이라 부르게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오순절과 맥추절은 같은 날이다. 한국교회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맥추절은 7월 첫째 주로 지킨다. 특별히 맥추절에 감사란 단어를 붙여 맥추감사절로 지키는데, (보리 수확 시기이기도 하고) 한해의 절반 즉,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농경문화가 점점 사라지면서 도시화되고 있지만, 의미가 이렇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이삭 배필 찾기

맥추절과 한국교회의 맥추감사절이 모두 농경문화와 관련 깊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우리 신앙이 삶과 때려야 뗄 수 없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과 동떨어진 어떤 것이 신앙 아니다. 본회퍼는 “하나님은 이 땅위에서 경건한 자들이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시 37편).”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생명, 건강, 평화, 세속의 재산을 구하는 기도가 꼭 세속적인 것은 아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시편 이해> 55-56). 신앙과 삶의 관계에서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게으른 표현이다. 이럴 때 균형은 너무 관념적 개념이다. 어쨌든 삶과 분리된 신앙은 순수에 대한 오해에 가깝다.


삶과 분리되지 않은 신앙,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오늘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과의 아기자기한 소통 즉, 간구와 응답, 소망과 성취가 주거니 받거니 어긋난데 없이 아귀가 잘 맞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믿음직한 종을 불러 노년에 낳은 이삭의 배필을 구해오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족속 여자가 아닌 아버지 집 곧, 친척이 사는 곳 여자를 구해오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아브라함의 종은 낙타 열 필과 보물을 챙겨 메소보다미아(아람나하라임)로 간다. 그리고 저녁때 나홀의 성 밖 우물가에 다다른다.


거기서 아브라함의 종은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창 24: 43-44) 성경은 이 마음의 기도가 체 마치기도 전에 응답받았다고 기록한다. 이삭의 아내 될 리브가가 나타났다. 이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삭이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이삭 배필 찾기는 해피엔딩이다.


복된 사람, 복된 세상

성경에는 불의나 원수와의 투쟁도 있고, 처절한 생의 의지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따뜻하고, 잔잔하게 삶을 돋우는 어머니 같은 이야기도 있다. 감사한 일이다. 필요한 것을 믿고 구하는 사람과 구한 것을 흔쾌히 허락하시는 하나님 사이에는 근본적인 신뢰가 있다. 오늘은 여기서 시작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함께 나누려 한다. 첫 애를 가졌을 때, 주위 사람으로부터 부정적 조언을 많이 들었다. 보통 인생에 대한 상당히 현실적인 묘사인데, 인제 와서 보니 틀린 말이 하나 없다. 그런데 또 어찌 보면 죄다 틀린 말이다.


보편적 인생의 문제를 너무 현실적으로 묘사할 때, 너무 현실적이어서 진실을 벗어날 때가 있다. 결혼하면 끝, 아이 가지면 끝, 학생 때가 좋다 이런 말은 현실에 가까우면서 진실에는 먼 말이다. 폭로나 해체는 신앙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신앙은 인생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을 보자고 한다. 신앙에는 그런 힘이 있다. 분석이나 비평이 아니라 경탄과 허락을 통해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인생이 쉴 새 없는 몰아침이나 다툼과 쟁취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견디겠는가. 삶은 은총이다. 거기에 진실이 있다.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신뢰에 눈을 떠야 한다. 눈을 뜬 곳에서만 시작되는 삶이 있다. 신뢰라는 시작, 이 시작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나 평화를 위해 스스로 저항이 된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투쟁과 저항으로 부름 받은 사람에게 이 시작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투쟁 없이는 진보도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진보는 투쟁 이상의 것을 요청한다고 믿는다. 존재의 변화나 내적 평화를 위한 이상에도 응답해야 한다. 계산 없는 이해, 값없는 사랑과 같은 은총의 경험으로만 세워지는 세상이 있고, 나는 그런 세상이 복된 세상이라 믿는다.


근본

예수는 당시 세대를 비유로 말한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 16-17) 당시 사람들은 금욕주의자인 요한은 귀신 들렸다 하고, 요한과 다른 행보를 걷는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 즉, ‘인간쓰레기의 친구’라고 낮춰 불렀다(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뭘 해도 듣지 않는 사람은 엄격한 사람이 아니라 듣는데 게으른 사람이다.


전혀 다르지만, 어쩐지 닮은 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귀를 장에 팔러 가는 부자(父子)이야기이다. 처음에 부자가 걷고 나귀를 끌고 가자, 장사꾼들이 수군댄다. 힘든 데 타고 가지. 그래서 아들만 태운다. 노인들이 수군댄다. 고얀 놈. 그래서 아들이 내리고 아버지만 탄다. 아낙네들이 수군댄다. 가엾어라. 그래서 부자가 함께 탄다. 동네 아가씨들이 수군댄다. 인정머리 없기는.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충고한다. 둘이 나귀를 지고 가면 될 것 아니오. 그렇게 한다. 다리 위를 건너다 시퍼런 물을 보고 놀란 나귀가 휘청거린다. 어, 어 하다가 나귀가 물에 빠진다. 


중심을 놓치고 사는 사람의 앞면과 뒷면이 이렇다. 본질인 문제에는 이래도 저래도 다 무관심하면서, 정작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귀가 팔랑거린다. 태평성대를 이끈 요임금이 순임금한테 왕위를 물려주면서 ‘윤집기중(允執其中)’이라 했다. 그 순임금이 우왕에게 다시 왕좌를 넘기면서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 했다. 모두 진실로 그 중심을 잡으라는 말이다. 중(中)은 세상의 근본 원리에 가깝다. 모자람과 지나침에서 벗어나는 길은 진실한 마음으로 근본(根本)을 붙드는 길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중심, 그 근본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두는 사람이다.


예수라는 장소

예수가 말한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 28-30) 같은 말씀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보면, “너희는 피곤하고 지쳤느냐? 종교생활에 탈진했느냐? 나에게 오너라. 나와 함께 길을 나서면 너희 삶은 회복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제대로 쉬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하여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아라.”


이어서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을 배워라. 나는 너희에게 무겁거나 맞지 않는 짐을 지우지 않겠다. 나와 함께 있으면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법을 배울 것이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법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인지 한 마디로 뜻매김할 수 없을지라도 아마도 중심을 붙들고, 근본에 붙들린 사람이 누리는 복에 가까울 것이다. 이때 중심은 분노나 거절의 설움이 아니라 신뢰와 사랑 그리고 평화이어야 한다. 희로애락에 휘청거리는 마음이 바로 서는 곳, 불확실과 상처의 공포와 먼 곳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예수이다.


재기(再起)

마지막으로 로마서 말씀을 보자.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22-24) 유명한 말씀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런데 탄식하던 바울이 갑자기 “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렇게 고백한다.


이 비약, 여기에 진실에 가깝게 인생을 묘사하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전에 일하던 곳에 옛집 국수라는 국숫집이 있다. 인심 좋고, 맛도 좋은 곳으로 근처에서는 유명하다. 함께 일하는 분 중에서 채식주의자가 있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그분을 위해 고기를 뺀 국물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근데 이 국숫집은 사실 다른 일로 유명하다. 돈이 없어 국수를 몰래 먹고 도망치던 사람에게 주인 할머니(원주인)가 “뛰지 말아, 다쳐요.”라고 했다는 일화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 전개가 없다. 실패한 사업이 재기하는 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실패한 인생이 재기하는 길은 이 비약에 있다고 믿는다.


<사진 출처 : http://shinlucky.tistory.com/1242>


적확한 분석이나 비평이 아니라 논리를 뛰어넘어 한걸음에 중심으로 치고 들어오는 신뢰와 사랑, 감사가 마음을 다시 일으킨다.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이다.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 10-13) 이제껏 간신히 버티었다면, 이제 중심으로 이끄는 이 노래를 듣자.


하나님은 오늘도 노래 부르시며, 노래로 우릴 부르신다.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독일 신학자가 있다. 천재라고도 하고, 독일의 양심이라고도 한다. 이 사람이 옥중에서 이런 시를 썼다.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은 영주 같다고도 하는데, 실제 나는 흔들린다. 약하다. 이런 고백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다시 반복한다. “누구인가, 나는”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은 아십니다” 여기에 생을 걸자. 아가서의 노래, 나는 오늘 그 노래가 이런 문장으로 읽힌다. “뛰지 말아, 다쳐요.” 이 노랫소리를 듣고, 다시 일어나는 복된 맥추감사주일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