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로
건질 수
없는 삶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는 잠수부에게 잡혀간 아들을 찾아 나서는 아빠 광대 물고기 '말린' 의 모험담이자, 예기치 못한 역경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해가고 동시에 자신에 대한 아빠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아들 '니모'의 성장기를 담은 만화 영화이다. 바다 반대편에 있는 아들을 찾아 숱한 어려움을 뚫고 간 말린은 아들이 죽은 모습을 보고, 죽음보다 더한 허무에 빠져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니모는 죽은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죽은 척했을 뿐이다.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탈출에 성공한 니모는 힘을 다해 아빠를 부른다. 그러나 이미 집으로 돌아간 아빠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에 말린과 함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니모를 찾았던 '도리 아줌마'를 만나게 되고, 극적으로 아빠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때 마지막 위기가 찾아온다.
고기잡이 배에서 내린 그물에 도리 아줌마가 걸렸다. 수많은 물고기가 그물에 걸렸고, 니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리 아줌마를 구출하기 위해 그물 속으로 뛰어든다. 다시는 아들을 잃을 수 없다는 말린은 간절한 호소로 니모의 손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도리 아줌마를 구할 길은 이 길밖에 없다는 니모의 말에 놀라 붙잡았던 손을 놓는다. 니모는 그물에 걸린 모든 물고기에게 아래로 헤엄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도리 아줌마와 함께 무리를 이끈다. 처음에는 그물을 끌어올리는 기계의 힘에 이길 수 없어 물 밖으로 끌어올려 지지만, 모두가 하나 돼 아래로 헤엄치자 결국 그물을 지탱하던 기둥이 부서지고, 모두가 살게 된다. 삶의 의지는 죽음의 의지에 절대 지지 않는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힘을 합쳐 아래로 헤엄치는 방법뿐이다.
예레미야 29: 1, 4 - 7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4 만군의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해서 가데스바네아에 다다랐을 때 정탐꾼 열둘을 보냈다. 그 중에 두 명만이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머지 열 명의 부정적인 평가에 귀가 멀었고, 그 나약한 정신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그들의 진짜 문제는 패배의식이다. 포로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낙심했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겪은 엄청난 재앙이 누구 탓인지 잘잘못을 따지거나, 사회학적 분석이나 넋두리, 어찌 보면 민족적·종교적 반성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살려는 의지이다.
하나님의 심부름꾼 예레미야는 살아야 한다고 편지를 써 보낸다.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않게 하라!’ 살 길을 찾으라는 이 메시지는 패배의식 따위의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메시지는 바쁘게 살라는 왜곡된 멘토링이 아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살라는 명령이다. 살라는 메시지는 명령이다.
시편 66: 1 – 12
1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3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4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5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6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7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8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9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11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12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인은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1-2)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은 살려는 의지에 응답하시고, 살아있는 백성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바다를 건넜고, 마른 강을 걸어서 건넜다(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삶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은 무능한 분도 아니고, 무관심한 분도 아니다(7).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가 아예 넘어져 다시는 못 일어나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9).
찬양은 살아있는 자에게 허락된 선물이다. 인생의 끝은 허무에 있지 않다. 죽음과 고통, 역경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빛을 이기는 어둠이 없고, 살려는 검질긴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죽음의 의지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살리는 영이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살려는 마음으로 충만한 상태를 성령 충만한 상태라고 말해도 무관하다. 어떠한 경우라도 살아야 한다. 피하지 말아야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는 긍정의 과잉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살라는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싱글벙글 웃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가볍게 이겨내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 죽음의 공포 앞에 무릎 꿇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유혹에 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삶을 지지하신다.
디모데후서 2: 8 – 15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 사이에서 대장 노릇 했던 어떤 선배에게 불만을 품은 까마득한 후배가 그 선배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 번 싸워보자고 한 것이다. 나는 더는 잃을 게 없다는 말을 했다. 그 후배는 고아였다. 버릴 게 없는 사람은 강하다. 결국, 그 후배는 싸우지 않고 이겼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소유에서 해방돼야 한다. 그런데 과연 더는 버릴 게 없는 사람이 가장 강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 버릴 수 없는 단 하나를 가진 사람이다. 자식을 위해서는 불구덩이에도 들어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차에도 뛰어드는 게 인간의 강인함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안-기억한-다(8). 복음을 위해 여러 가지를 스스로 버린 바울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결코 잃을 수 없는 단 하나를 붙잡은 사람이다. 그가 예수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력을 붙들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 (9)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세상도 이기고, 죽음도 이긴다.
누가복음 17: 5 – 10
5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이야기에서 절대 뺄 수 없는 단어들이 무엇인지 골라서 따로 놓고 보면, 이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는지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이방인. 나는 예수께 돌아와 경배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말을 빼놓고는 이 이야기의 메시지가 오롯이 전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이 단 한 명의 이방인에게 “일어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오랜 전통을 통해 배웠고, 아브라함의 자손, 선택받은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아는 구원의 혜택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했을 것이다. 하나는 이방인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라는 메시지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다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구원은 낯선 곳에서 일어난다. 낯선 곳이라는 말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상투적 삶-또는 삶의 자리-에서 구원을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조그마한 고통에도 굴복하는 나약한 정신과 생명의 저항 없이 길든 상투적인 삶 속에서 구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삶은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 그때마다 쓰러지고, 무너져서는 구원의 감격과 삶의 환희를 경험할 수 없다. 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그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든든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고약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살려는 의지를 놓쳐선 안 된다. 살려는 의지를 붙잡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처럼 삶의 환희를 경험하고, 새 삶을 허락한 하나님께 경배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은 살리기 위해 예수를 주셨다. 생명을 붙들어야 한다. 생명이라는 단 하나의 전망을 붙든 후에라야 도전도 가능하고, 세상을 바꾸는 일도 가능하다.
이제까지 나는 순수함을 어떤 때로 묻지 않은 고상한 상태로 이해했다. 그런데 <힘내라 맑은 물>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흐린 물줄기 이따금 만나거든 피하지 말고 뒤엉켜 가거라” 단 하나의 전망을 붙들고 더러운 물과 뒤엉키면서도 끝내 가야 할 길을 가는 그 눈물겨운 삶의 의지가 빛나는 상태에서 진정한 순수가 드러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제 아이를 꼭 자연분만으로 낳기를 원해 끔찍한 진통을 하루 종일 참았지만 어쩔 수 없어 수술을 선택해야 했던 동생 부부와 통화를 했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수술을 하지 않고) 배를 앓고 자식을 낳아야 진정한 어머니가 된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가지고 있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순수였다. 이런 순수는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왜곡된 관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나약한 정신과 상투적인 삶과 이데올로기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그물을 벗어난 삶 그 자체이다. 이제 나는 사랑의 이끌림을 받아 고통에 저항하는 모든 검질긴 의지가 오롯이 생명을 향하는 상태를 순수라고 믿는다. 구원도 새롭게 깨달은 순수의 뜻매김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상투적이며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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