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고린도후서 4:6)
[성서일과 4본문]
(열왕기하 2:1-12)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가 되니,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길갈을 떠났다. 길을 가다가,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베델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베델까지 내려갔다.
3. 베델에 살고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여리고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여리고로 갔다.
5. 여리고에 살고 있는 예언자 수련생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요단강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 있거라."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
7. 예언자 수련생들 가운데서 쉰 명이 요단강까지 그들을 따라갔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 가에 서니, 따르던 제자들도 멀찍이 멈추어 섰다.
8. 그 때에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강을 건너갔다.
9. 요단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 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시편 50:1-6)
1.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어, 해가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온 세상을 불러모으신다.
2.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눈부시게 나타나신다.
3. 우리 하나님은 오실 때에, 조용조용 오시지 않고, 삼키는 불길을 앞세우시고, 사방에서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면서 오신다.
4. 당신의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을 증인으로 부르신다.
5. "나를 믿는 성도들을 나에게로 불러모아라. 희생제물로 나와 언약을 세운 사람들을 나에게로 불러모아라."
6. 하늘이 주님의 공의를 선포함은, 하나님, 그분만이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 (셀라)
(고린도후서 4:3-6)
3.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9:2-9)
2.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5.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6.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7.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8.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끈은, ‘눈부신 사랑’입니다.
구약,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열왕기사 2:2,4,6)
시편, “하늘이 주님의 공의를 선포함은”(시편 50:6)
서신서,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고린도후서 4:5)
복음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가복음 9:7)
오늘 요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입니다.(고린도후서 4:6)
[구약과 시편본문 얼개 (열왕기하 2:1-12 / 시편 50:1-6)]
오늘 구약본문의 소제목은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엘리야의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 모습이 에녹처럼 매우 신비롭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창 5:24),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듯이(히 11:5)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12절에, 엘리야와 헤어지면서 엘리사가 외치는 한마디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에
많은 것이 담겨있습니다.
“불병거와 불말”(11)에서 이어지는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는
예언자야말로 진정한 국력(國力)임을 드러냅니다.
한국교회의 예언자들에게 큰 각성(覺醒)과 반성(反省)을 일으키는 대목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과장이 아닙니다.
그만큼 의지했고, 그만큼 닮아가려는 것입니다.
그 뒤 엘리사가 살아간 모습을 보면 과연 그러합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자,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왕하 13:14)
자식이 부모를 빼어 닮듯 이렇게 고스란히 스승의 뒤를 따른 삶!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내려다보시며 그러셨듯이,
하늘의 스승은 땅의 제자를 내려다보며 내내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오늘 시편본문의 소제목은 ‘바른 예배’입니다.
이 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진행합니다.
시내산에 나타나 십계명을 세우셨던 하나님께서,(5)
시온산에 눈부시게 나타나시는 모습은(2-3)
오늘 구약본문의 불병거와 불말로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하나님과
오늘 복음서본문의 빛나는 예수님의 징검다리입니다.
“당신의 백성을”(4), “성도들을”(5) 심판하려고 모으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십계명)
하늘이 증언(선포)하는 하나님의 공의는(6)
약자를 돌보시는 공평과 정의,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본문 얼개 (고린도후서 4:3-6 / 마가복음 9:2-9)]
오늘 서신서본문의 소제목은 ‘사도의 직분에 담긴 복음의 광채’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으나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태초에 빛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 얼굴의 빛으로(6)
우리 모두 그 빛을 닮아가게 하십니다.(6, 3:18)
특히 교회를 위해 종이 되는 것은 딱 예수님 때문입니다.(5)
예수님의 삶을 닮은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빼닮은 바로 그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본문의 소제목은 ‘예수의 변모’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에서 하늘로 사라진 엘리야가,
오늘 복음서본문에 다시 나타납니다.
다시 나타난(나타날, 재림) 엘리야는 마지막 때를 상징합니다.(말 4:5)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서본문의 바로 앞과 뒤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고지하십니다.(8:31-38, 9:30-32)
예수님의 죽음 준비는 부활준비요,
이는 곧 승천과 재림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하나님 사랑이 짙어집니다.
예수님 세례 받으실 때 처음 들렸던 성부음성이,
이젠 제자들에게까지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7)
그 성부 음성의 알맹이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어라”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곧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한 몸이신 사랑하는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을 참고했습니다.)
[정리]
주현절 첫 주일에 주님 세례 받으실 때 들려오는 성부의 음성이
주현절 끝 주일에 주님 변모하실 때 다시 들려옵니다.
그런데 다시 들리는 성부음성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이 듣습니다.
그만큼 제자들도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오늘 시편본문 시온산에서 눈부시게 나타나신 하나님처럼,
오늘 복음본문 변화산에서 눈부시게 변하시는 예수님처럼,
오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눈부시게 변화해야 교회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 받는 눈부신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의 마음속을 비추셔서(고후 4:6)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 말씀을 환하게 깨달아
주님을, 그 사랑을 빼어 닮게 하시길!
그래서 탐욕을 죽이고 교회를 구할 신령한 힘을 주시기를,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나라를 구할 신비한 힘을 주시기를!
엘리사가 그랬듯이, 바울이 그랬듯이
스승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주님 말씀을, 그 사랑을 닮아가게 하시기를 빕니다.
[나머지]
* 말씀의 호위무사
오늘 구약본문은 불의 예언자 엘리야와 제자 엘리사가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갈멜산 제단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천하의 엘리야가 세상을 뜨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길갈에서 베델과 여리고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는 여정에서 저들이 같은 말을 반복(反復)하는 대화가 흥미롭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4,6) 같은 말을 세 차례나 반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떼어놓으려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떠나지 않으려고 룻이 반복하던 말도 떠오릅니다. 의리의 사나이 엘리사! 스승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엘리사!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12)> 한편 엘리사의 모습은 마치 주인 곁을 끝까지 지키려는 호위무사 같은 느낌도 듭니다. 일평생 주님 말씀 따르며 목숨 걸고 말씀 지켜온 ‘말씀의 호위무사’ 엘리야! 그를 닮은 제자 엘리사가, 목숨 걸고 스승 곁을 지키려다 난데없는 불병거와 불말을 만납니다. 불의 예언자 엘리야이기 때문일까요? 불병거와 불말이 마치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듯이, 땅에 남을 사람과 하늘에 오를 사람을 갈라놓는가 싶더니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합니다. 이 때 엘리사의 외마디 소리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12)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불병거와 불말을 보고 떠오른 말이었을까요? 특기할 것은, 세월이 흘러 엘리사가 죽을 때도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죽어가는 예언자 엘리사 곁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외칩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병거와 마병이란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문득 예언자가 바로 천군(天軍)과 같은 진정한 군사력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사사기 7:22에서도 사사 기드온의 300 용사 나팔소리에 미디안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무찌릅니다. 역대하 20:21절 이하에는 군인의 나팔소리가 아니라 성가대의 노래가, 군복도 아닌 예복을 입고 노래하자 적군이 서로 저희들끼리 무찌르는 일이 벌어집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대하 20:20)
말씀을 지키려는 예언자에게서 ‘호위무사’라는 좀 우스꽝스런 표현을 떠올린 것은, 이밖에도 말씀을 가리켜 ‘칼’이라 묘사한 바울과 요한 때문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에베 6:17)
그러니 회개하여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로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계시록 2:16)
(※ 3년 전 실은 것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 변화산 제자들, 예수님 모시고 십자가 행군을 시작하다
오늘 주현절 마지막 주일 복음서본문의 자리는 변화산이다. 변화산은, 예수께서 주현절 첫 주일 세례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심을 시작으로 갈릴리 곳곳에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시다가 마침내 오른 산이다. 변화산은, 마치 예수님 공생애의 분수령처럼, 갈릴리 활동을 마치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십자가 행군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변화산 이야기의 알맹이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리고 주현절 마지막 주간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이어진다.) 그러고 보니 변화산에서 예수님 옷이 하얗게 변하는 것은(3) 죽으심을 가리키는 수의와 동시에 빛나는 부활의 몸을 가리키는 상징처럼 보인다.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주고받는 말씀 역시(4), 마지막 때, 즉 죽으심∼부활∼승천∼재림이 주제였을 듯하다. 구름 속에서 들려온 성부 하나님의 음성 “...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역시 동상이몽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경청하고 순종할 것을 명하시는 말씀일 것이다. 이런 주제의 흐름 속에서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9)이라는, 제자들이 알아듣기 힘든 말씀까지(10) 하신 것이다. 더불어 오늘 변화산 본문의 앞뒤에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예고를 하신 것(막 8:31, 9:31) 역시 이 주제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인다. 문제는 제자들이다. 비록 무지몽매, 동상이몽 제자들이지만, 변화산에서 이렇게 이중삼중 배려하신 하나님 사랑이 시나브로 스며들 것이다. 결국 변화산은 예수님의 변모뿐 아니라, 제자들 변화의 맹아(萌芽)가 발아하기 시작한 자리였음이 틀림없다.
[말씀동시] 태양 같은 예수님 (이선구 지음. 성실교회 청년부. 「성실문화」93호)
어둔 세상 비추러 오신 태양 같은 예수님
어느 산 위에서 참 모습을 밝히시네
두 별이 다가와 태양과 마주하니
깜짝 놀란 제자들 횡설수설 갈팡질팡
아버지가 구름으로 친히 말씀 내리시니
태양과 별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네
혼란스런 제자들에게 예수님 가라사대
나중에 다시 해 뜨면 모든 것 밝혀지리
[말씀시조] 엘리야 떠나던 날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93호)
엘리야 떠나던 날 엘리사가 곁을 지켜
길갈 베델 여리고와 요단강을 건너갔다
스승님 떠나가시니 슬퍼하는 엘리사
[말씀한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엘리야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93호)
忽然降臨火車馬(홀연강림화거마) 홀연히 불 병거와 불 말이 강림하여
旋風昇天以利亞(선풍승천이리아) 회리바람 부는 속에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갔다
以利沙號叫裂衣(이리사호규열의) 엘리사가 자기 옷을 찢으며 부르짖었고
其後不復見師傅(기후불부견사부) 그 후로는 사부님을 다시 볼 수 없었다.
數千載後變化巍(수천재후변화외) 수천 년이 지난 후에 변화산 산상에서
耶穌變貌耀如日(야소변모요여일) 예수님은 변모되어 해같이 빛나셨고
主與摩西故先知(주여마서고선지) 모세 엘리야와 진지하게 대면하여
胸襟談話良眞摯(흉금담화량진지) 흉금을 털어놓고 말씀을 나누셨다
門徒面伏甚恐慄(문도면복심공율) 제자들은 무서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擧目再見有唯主(거목재견유유주) 눈을 들어 다시 보니 주님 한 분만이 거기에 계셨다.
[말씀서예] 열왕기하 2:2,4,6 ( 지음. 「성실문화」93호)
[말씀노래] 변화산아리랑 (이정훈 개사. 아리랑가락. 「성실문화」93호)
[본문] 마가복음 9:2-9
[노랫말] 변화산아리랑
1.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변화산 고개를 올라간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데리고, 예수님 높은산에 올라가시네
2.예수님이 제자들 보는앞에서, 빛처럼 깨끗하게 변모하시네
모세랑 엘리야가 예수님과 말하니, 제자들 겁에질려 덤벙거리네
3. 구름이 제자들을 뒤덮은뒤에, 구름속 신비로운 하나님말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너희는 그말씀에 순종하거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변화산 고개를 넘어간다)
[해설]
7.5조에 가까운 이 가락은 크게 보아 한국 전통 운율인 3.4, 4.4조의 변형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전형적인 3박자 노래인 ‘아리랑’에 얹어 부를 수 있다. 1절의 경우, 처음 1, 2째 줄은 아리랑의 뒷소리에 해당하고, 다음 3, 4째 줄은 아리랑의 앞소리에 해당한다. 그래서 아리랑은 세마치장단으로 반주하면 박진감이 있고, 중중모리장단으로 반주하면 안정감이 있다. 뒷소리는 세마치로, 앞소리는 중중모리로 섞어서 반주할 수도 있다. 3절까지 다 마친 뒤에 ‘아리랑’ 뒷소리를 하반절만 개사해서 반복한다.
[악보] 변화산아리랑 (이정훈 개사, 아리랑 가락)
[시편 송서(誦書)] 시편 50:1-6 ( 지음. 「성실문화」93호)
(※ 천자문독송 가락으로, 즉 전래자장가 가락으로)
1.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2.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3.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4.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5.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다함께]
6. 하늘이 그-의 공의-를--,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그-는) 심판장 이심이∼로∿다∼(셀라)∥
[말씀놀이] (이정훈 지음)
주현절 마지막 주, 2018년 2월 11일 (성서일과 본문 낱말 맞추기)
열왕기하 2:1-12, 시편 50:1-6, 고린도후서 4:3-6, 마가복음 9:2-9
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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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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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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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열쇠
①‘야훼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 뜻을 가진 이스라엘 초기 예언자로서 아합왕과 아하시야왕 시대에 활동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던 때에 참된 예배를 회복시켰다. 신약성경 시대에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했었다.(막 9:4) 말라기 4:5절에 심판의 날에 주님께서 그를 다시 보내실 것이라 하셨으며, 마태복음 11:14절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바로 그 사람 ○○○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열왕기하, 마가복음)
②신약성경에 많은 동명이인이 있는 이름이다. 예수님 오실 길을 닦은 세례자, 베드로의 아버지,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서게 만든 마가라고도 하는 이(행 15:36-41) 등이 있다. 오늘 본문의 인물은 예수님의 애제자다.(마가복음)
③문자적으로 ‘나의 큰 자’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선생님!”하고 부르는 말이다. 율법학자를 존경하는 뜻으로 부를 때 썼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요 1:49), ‘세례 요한’(요 3:26), ‘바리새파 교사’(마 23:7) 등에게 사용되었다. 신약시대 유대사회에서 이를 가리키는 세 단어가 있었다. ①‘라브’=‘교사’(‘선생님’을 일컫는 가장 단순한 형태), ②‘○○’=‘나의 선생님’(‘나의 큰 자’란 뜻으로 ‘라브’보다는 애정과 존경이 더 담긴 표현(마 26:25; 막 9:5)). ③‘랍오니(라부니)’=‘큰 선생님’이란 의미로서 ‘○○’보다는 훨씬 높은 극존칭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마 26:25; 막 9:5; 요 3:2)나 ‘랍오니(라부니)’(막 10:51; 요 20:16)로 불리셨다.(마가복음)
⑤지명(地名)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며,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성경에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며, 예루살렘 북쪽 세겜 방향으로 약 19㎞ 지점에 있다. 분단시절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이곳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려서,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곳의 우상숭배 행위를 엄하게 지적하였고, 특히 호세아는 이곳 ‘○○’(하나님의 집)을 ‘벧아웬’(사악한 집, 우상 숭배의 집)이라 고쳐 불러 그 죄악상을 고발하기도 했다(호 4:15). 결국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유다의 요시야 왕은 이곳에 있던 우상 제단을 부수고 야훼 예배를 회복시켰다(왕하 23:15-23). (열왕기하)
⑥신약성경에는 여러 동명이인이 나오며, 12사도 중에도 둘이나 있다. 사도 요한의 형, 그리고 알패오의 아들 등이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요한의 형이다. 추측컨대 이 두 형제의 불같은 성격 때문인지, 예수님께서 ‘보아너게(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다.(마가 3:17) (마가복음)
세로열쇠
①북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야의 제자로서, 엘리야가 승천할 때, 스승의 영적 능력을 갑절이나 받게 해달라고 청했었고, 스승처럼 죽은 아이를 살리기도 했으며,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쳐주기도 했다. 이름 뜻은, ‘하나님의 구원’(열왕기하)
②길이 약 360㎞인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강. 북쪽 헐몬산에서 팔레스타인을 가로질러 남쪽 사해로 흐르는데, 강의 시작점에 비해 강 끝이 약 900미터나 낮아지므로 중간에 폭포 비슷한 급류가 27개소나 된다. 강 양편 계곡은 무성한 수목으로 경치가 아름답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 강을 건넜고, 나아만이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이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금으로 나병을 고쳤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곳도 이 강이다.(열왕기하)
④소금기가 많은 사해 바로 위 여리고, 그 바로 위에 있다. 이름 뜻은 ‘(둥근)원’, 또는 ‘굴러간다’는 뜻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첫 번째 진을 친 곳이다(수 4:19-20).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도하를 성공적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념비를 세우고(수 4:19-24), 광야 생활 동안 하지 못한 할례를 베풀고 유월절을 거행했다(수 5:2-9). 40년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인 만나가 중단된 곳이기도 하다.(열왕기하)
⑤이름 뜻은 ‘반석’인데,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로서 안드레와 형제간이다. 그의 본명인 시몬 대신 예수님이 아람어로 지어주신 이름인 ‘게바’의 헬라어 번역이다.(아람어는 수리아 즉 시리아어로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언어다.) (마가복음)
⑥평균 해면 아래 259미터에 있는 낮은 지역으로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오래된 성읍이다. 가장 오래된 성벽은 이미 BC.7,000년 경 세워졌다. 바로 아래 있는 사해(死海)에서 나는 소금, 역청, 유황 장사로 부유했다. 이 성읍 언덕 기슭에서 솟아나는 샘 덕분에 종려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도 있어서 ‘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도 불렸다. (열왕기하)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성경」(대한성서공회), 「성경낱말사전」(성도출판사), 인터넷 사전 등을 참고하고 부분 인용했습니다.)
[말씀동화] 변화산에서 부르는 동막골아리랑
옛날옛날 한 옛날에, 이것은 호랑이가 딱지 접던 시절 이야기예요.
안드로메다 너머에서 우주공간을 딱지 접듯이 척척 접어
순식간에 지구에 온 내 이름은 ‘딱지’야.
우리는 너희 지구에 비해 과학기술이 월등하단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척척 접어서 밀고 당길 수 있지.
나는 우리 고향에서도 월등한 기술로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주무르지.
아마 우주에서 지구별을 발견하고 방문한 것도 내가 처음일걸?
그런데 내가 처음 지구에 와서 만난 사람은 둘이었어.
한사람은 털이 많고 다른 한사람은 머리털이 별로 없었지.
털 많은 사람은 엘리야(왕하 1:8), 머리털이 부족한 사람은 엘리사(왕하 2:23),
그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단다.
내가 그들을 만난 곳은 요단강이라는 강가였는데,
때마침 그 두 사람이 작별하는 중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말이랑 마차가 나타나는데
불이 활활 붙어 있어서 조금 놀랐지.(왕하 2:11)
‘오호! 지구에도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게 하는 기술이 있었군!’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단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지구 기술이 아니었고,
그리고 그건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었지.
지구인들의 눈높이에 맞게 적당히 이해도 되고
또 적당히 놀랄 수 있게 눈높이를 맞추는 예술의 경지 말이야!
그럼 그 예술가가 누구냐고?
조금 기다려봐 곧 얘기해줄게!
스승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를 떠날 때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른 것만 해도 그래.(왕하 2:11)
아마 지구인들에게는 하늘이라는 느낌이 특별한가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접어 올 때,
반드시 하늘 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게 아니거든.
우린 바다나 땅에서 솟아날 수도 있고,
커다란 바위나 나무에서 슬그머니 나올 수도 있단다.
그런데 우리보다 훨씬 높은 경지의 예술가 그분께서는
불편을 무릅쓰고 지구별 사람들 눈높이를 배려하신 거지!
지극한 정성, 사랑으로!
내가 스승 엘리야랑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 뒤 제자 엘리사의 행동을 보았을 때
엘리야는 제자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랬나봐.
스승이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려고, 엘리사는 꽤나 애썼다지?(왕하 2:2,4,6)
그리고 이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엘리야는 바로 그 예술가, 하나님이라는 분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게 틀림없어.
늘 혼자 외롭게 살고, 강력한 힘이 있으면서도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던 엘리야를
이젠 좀 편히 쉬게 하려고 후다닥 데려가신 것만 보아도 그래.
사실 나는 하나님을 잘 몰랐단다.
우리보다 과학기술이 훨씬 약한 지구별을 한없이 얕잡아보았던 내가
지구별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 건 바로
하나님을 알고부터란다.
처음 불병거랑 불말을 보았을 때는 엘리야가 실력 좀 있는 마법사인줄 알았지.
그런데 엘리야는 염력을 쓰는 마법사가 아니라 예언자였고,
예언자란 염력이나 과학기술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분,
오직 사랑을 할 때 환히 느낄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물론 그분이 가진 힘, 그분이 하는 일, 그분이 전하는 말씀 역시
그 알맹이가 바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온 사랑을 기울여 만든 것이 바로
지구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온 우주와 온 시간을 주름잡듯 척척 접고 다니던 나는
내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 알게 되었단다.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잠깐 다녀갔던 내가 다시 지구별을 찾은 것은
요단강에서 제자를 떠나 홀연히 사라진 엘리야가 지금 어디쯤 있을까 궁금해서
엘리야의 현재 위치를 검색해서 찾아간 것이었는데,
아뿔싸! 알고 보니 그게 500년도 더 지난 어느 날이었던 거야!
거긴 그때 그 요단강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높은 산이었는데,
얘들아, 얘들아, 놀라지 말고 들어!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와! 나는 정말이지 행운아! 온 우주의 행운아가 틀림없어.
아무도 못 믿겠지만, 난 두 번째 지구별 여행 만에 정말 임자를 만나고 말았단다.
엘리야를 만나려고 했던 건데, 엘리야가 문제가 아니었어,
바로 그 예술가를 만났다니까? 하나님 말이야, 하나님!
내가 얼마나 흥분했으면, 모든 약속 다 취소하고
지구별에 몇 달씩이나 머물렀다니까?
내가 고향을 몇 달이나 떠나 있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아니?
이걸 어떻게 다 설명하나? 아휴 답답해라!
내가 찾던 엘리야가 모세라는 더 오래된 노인이랑 함께 나타났어.(마가복음 9:4)
그들은 내 과학기술 경험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나타났지.
그런데 그들이 나타난 게 어떤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은 분을 만나려는 것이었는데,
그분은 옷뿐 아니라 얼굴빛 또한 눈이 부셨단다.
그건 태양빛 같은 수준의 빛이 아니었어.
어느 우주의 눈부신 빛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신비로운 빛이었지.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난생 처음 보는 그 신비로운 빛에 놀란 나머지 나는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단다.
그때 그 빛나는 분의 제자 세 사람이 나를 흘낏 돌아보더니,
금세 고개를 돌려버리네?
아마 그 세 사람도 지금 어마어마하게 놀라는 중이었던 게지!
나처럼 이상하게 생긴 ‘딱지’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거야!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
갑자기 산꼭대기를 신비로운 구름이 뒤덮더니
구름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온 우주를 주름잡으며 마음껏 돌아다니는 나는
본능적으로, 경험적으로 금세 알아채버렸어,
‘바로 이분이구나!’
지구별 사람의 모습을 한 그 예수라는 분과
구름 속에서 들려온 그 신비로운 목소리!
천하의 예술가도, 그 어느 우주의 예술가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랑의 예술가, 하나님! 바로 이분이구나!
아! 나는 내 눈으로, 내 귀로 그분을 만나버린 거야!
그 때 나는 순식간에 깨달아버렸지.
지금 내 눈이랑 내 귀가 얼마나 사랑스러워졌는지를!
그리고 난 모든 계획 다 포기하고 몰래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단다.
그분이 예루살렘이라는 곳으로 여행을 시작하신 그 길,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며칠 뒤 십자나무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그 길,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시고, 제자들을 만나 하늘위로 승천하신 그 길!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거룩한 영으로 제자들을 찾아오신 그 길,
제자들과 완전 한 몸이 되신 뒤 순식간에 변해가는 제자들,
그들이 달려간 그 길들을!
그리고 난 홀연히 깨달아버렸단다.
그때 그 산이 변화산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변하시는 것뿐 아니라,
스승님의 그 신비로운 모습을 눈으로 보고,
하나님 그 사랑의 목소리를 귀로 들으면서
마침내 제자들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변화산이었다는 사실을!
그러니 내가 얼마나 부러웠겠니?
지구별 너희들이 얼마나 부러웠겠냐고!
내 고향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사랑의 기운,
하나님의 사랑 기운이 시도 때도 없이 흘러넘치는 너희 지구별이...!
꿈에 그리던 지구별에 세 번째 찾아온 게 바로 엊그제 여기야.
예수님 제자들이 변화산을 내려와 어떻게 변해갔는지 궁금하던 차에
예수님을 쏙 빼닮은 제자들의 자취를 검색해서 지구별의 시공간을 뒤진 결과가
바로 여기, 2018년 2월, 대한민국 강원도 평창이라니까?
왜 평창일까?
평창이 온통 흰 눈 가득한 산투성인 걸 보니
문득 하얗게 빛나던 예수님, 그 변화산이 떠오르네?
글쎄? 흰 눈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어라? 추운 날씨인데,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네?
아하! 평창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 겨울철 눈 잔치, 얼음 축제를 연 거였어.
그리고 여기 평창에서 지금 예수님 기운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 까닭도 알게 되었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에베소서 2:14)
지금 원수처럼 둘로 갈라져 있는 한반도의 두 나라를
원래대로 하나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기운이 가득한 거야.
지금 여기 평창에!
허리 잘린 한반도가 한몸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변화!
지금 한반도는 지구촌 모든 민족들에게
원수가 하나 되는 놀라운 꿈을 심어주는
온 인류의 변화산이 되어가고 있는 중인거야.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머리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평창아리랑의 형님겪인 정선아리랑을 부르시네?
가만, 이건 또 무슨 아리랑이지?
강원도 평창 심심산골에 있는 자그마한 동막골에서 부르는 아리랑이네?
아니? 이건 뭐지? 동막골이야말로 정말 예수님 기운이 가득한 고을이잖아?
그런데 왜 내 검색기계에는 동막골의 기운이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아무리 우수해도 기계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이런 걸까?
지구별의 마지막 변화산, 동막골의 노래!
우리 함께 불러볼까?
나비야나비야 청산가자 호랑나비 너도가, 비행기재 고개고개로 넘실넘실 넘어가
두메산골 아무골짜기 마을 하나 보이네, 아이들처럼 마구살아라 당실당실 동막골
착한할머니 고운어머니 든든하신 아버지, 함께 일하고 같이 밥먹세 금실금실 동막골
머리에 꽃꽂은 착한아이는 어깨동무 내동무, 욕심쟁이들 착해지려마 방실방실 동막골
나비야나비야 청산가자 호랑이 너구리 너도가, 아픈 동무들 새살돋아라 덩실덩실 동막골
아리랑고개는 열두고개 동막골은 한고개, 아이들처럼 마구좋아라 둥실둥실 동막골 ∼
[‘동막골 아리랑’. 이정훈 지음. 평창아리랑 가락으로]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부르는 평창아리랑을 보고 감동하여 지음]
[이정훈 지음. 2018년 2월 11일 주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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