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의 두 가지 교훈
[성서일과 4본문]
(창세기 11:1-9)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시편 104:24-34, 35b)
24.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25.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26.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27.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28. 주님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님께서 손을 펴 먹을 것을 주시면 그들은 만족해합니다.
29. 그러나 주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님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30.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31. 주님의 영광은 영원하여라. 주님은 친히 행하신 일로 기뻐하신다.
32. 주님이 굽어보기만 하셔도 땅은 떨고, 주님이 산에 닿기만 하셔도 산이 연기를 뿜는다.
33.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 때까지 나의 하나님께 노래할 것이다.
34. 내 묵상을 주님이 기꺼이 받아 주시면 좋으련만! 그러면 나는 주님의 품 안에서 즐겁기만 할 것이다.
35. (죄인들아, 이 땅에서 사라져라. 악인들아, 너희도 영원히 사라져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사도행전 2:1-21)
1.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2.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6.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7.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8.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9.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11.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12.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13.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15.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17.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18.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19.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20.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21.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14:8-17(25-27))
8.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14.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17.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노트]
바벨탑의 두 가지 교훈
<바벨탑과 빌립 사이에서>
* 구약 본문의 바벨탑은 마천루(摩天樓; 고층건물)를 연상케 한다. 여기서 마(摩)는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하늘을 어루만질 만큼 높은 다락집(건물)’이라는 뜻이다. 천마산(天摩山)의 ‘하늘이 어루만지는 산’이라는 뜻과 반대다. 그래서 마천루라는 이름이 은근히 불경스럽던 차에, 바벨탑에서는 아주 노골적인 불경(不敬)이 느껴진다. 하늘에 대한 경외심이 아니라 호기심 내지는 강한 과시욕이 느껴져서 더 그렇다. 경외심이 없었던 까닭은 바벨의 사람들이 하늘의 뜻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매우 당돌한 요구를 한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문득 바벨탑의 불경이 느껴진다. 그러나 빌립의 요구는 바벨탑의 불경과는 달리 순수한 갈망이다. 바로 앞(6-7절) 예수님 말씀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그럼에도 빌립의 요구 안에 바벨탑과 닮은 게 하나 있다면, 하늘 뜻(예수님)에 대한 무지다.
⇒ (요한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바벨탑과 오순절 예루살렘 사이에서>
* 오늘 구약본문에서 인간들은 발달된 토목기술로 유명해지고 똘똘 뭉치려고 했다. 노아 홍수시대 직후라는 것을 생각하면,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게 지으려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홍수 이후 하늘 뜻(창세 9:8-17, 무지개 언약)에 대한 또 하나의 무지다. 아무튼 하늘의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과 달랐다. 그래서 말을 흩어지게 하여 사람들도 흩으셨다. 여기서 핵심은 하늘마음으로부터 빗나가는 사람들의 욕심을 제어하시려고 사람들을 흩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말을 흩으셨다.
⇒ 흩어지지 않고 똘똘 뭉쳐 무한증식하려는 것의 대표상징이 바로 암세포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창조질서다. 인생을 죽이는 암세포와 같은 물질만능시대, 무한경쟁, 무한증식 시대, 메가(다국적)기업 시대에, 인생을 살리시려는 하늘 뜻과 계획을 바벨의 교훈으로부터 얻는다.
**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에는 아주 다른 모양으로 하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로 다른 말들이 통하게 하심으로 하늘 뜻이 전해지는 사건이다. 이 신비로운 소통은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베드로는 이것을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설명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성령께서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극치(“하나님의 큰일들” 행 2:11) 즉, 하늘 뜻을 땅이(사람들이) 알도록 하신 것이다.(그리하여 하나 되게 하신 ⇒ 교회를 이루신) 이것이 성령강림절의 알맹이다.
*** 결론으로 바벨탑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공통점은, 모두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말을 흩으시고, 말을 통하게 하시는 서로 반대되는 방법이었다. 말을 흩으셨을 때 사람들은 흩어졌고, 말을 통하게 하셨을 때 사람들이 뭉쳤다. 즉 교회가 탄생한다.
⇒ 물론 그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이다. 교회의 표어는 뭉치는(하나 되는) 것이지만, 그건 사랑으로 하나 됨을 표현한 것이고, 그 결과는(시스템은) 역시 흩어짐이다. 흩어져 복음을 증거하는 것, 흩어져 물질을(사랑을) 나누는 것, 그렇게 흩어지면서 천국을 확장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길,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메가처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고 본다. 개 교회의 조직은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나누어 흩어져야 한다. 그럴 때에야 개(個)교회들은 개교회에 매몰되지 않고 ‘교회론’의 알맹이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잊었던 공교회(거룩한 공회, 한 몸)의식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소통에 대한 단상>
문득 SF영화들 가운데 한없이 발전하는 소통기기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이 점점 실현되어가고 있다. 최근 뉴스에서, ‘사물 인터넷’개념과 ‘구글 글래스’라는 것이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통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빨라질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소통의 기계들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눈과 눈을 마주보며 나누는 대화,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길이 점점 멀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과학기술이 한없이 발전하여 하늘을 찌를 듯이 발전하는 모습에서 다시 바벨탑을 느낀다. 그렇게 발전한 세상, 언어의 장벽을 완전히 뛰어넘은 세상은 또 다시 바벨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예감은 기우일까? 바벨의 교훈은 이것이다. 하늘을 찌를듯한 토목기술의 발달, 과학기술의 발달, 그것으로는 결코 ‘흩어져야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루는 천국’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소통의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겸허하게 하늘의 뜻을 살피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나머지
(요한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 오늘 복음 말씀의 요절을 바로 이 말씀으로 택했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약속의 말씀들[12b, 13∼14, 16∼17절]의 전제 말씀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13, 14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는 말씀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요절말씀의 열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일서 5:14절 말씀을 참고할만하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담대함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내 이름으로 구하면”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이라는 뜻이다. 이 경지가 바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17c)가 아니겠는가?
** 오늘 시편본문인 104:24-35 는 매우 유명한 노래다. 특히 30절이 인상적이다.
30.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이 노래가 오늘 본문말씀들을 하나로 꿰어 아우르는 말씀처럼 보인다. 예전에 한국예배음악연구소에서 벗들과 함께 지었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내가 시편 노랫말을 조금 다듬어서 몇몇 벗들이 거기 이런저런 가락을 붙인 노래다.
[악보] ‘온 생명의 노래’ 3곡
(딱 10년 전인 2003년에 펴낸, 성실문화 35호 노래마당에 실린 악보다.)
[말씀동화] 을순이 아줌마 말문이 터졌어요!
을순이 아줌마는 양평 봉황면에 사는데요, 우리 봉황교회 집사님이세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황을숙이라는 집사님도 계셔요. 이름이 비슷하죠? 자매냐고요? 물론 교회에서는 우리 모두 자매고 형제죠. 그런데 친자매는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름이 비슷하냐고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을순이 아줌마, 우리 황을순 집사님은 원래 베트남 사람이에요. 그런데 베트남 사람이 어쩌다가 우리 동네에 와서 살게 되었냐 하면요, 그 사연은 이래요. 우리 동네 봉황초등학교 앞 개울 건너편에 현수막 하나가 오랜 동안 걸려 있었는데, 거기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베트남 며느리 착해요’
그걸 보고 우리 동네 옹기가마 이씨 할아버지께서 오랜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맞아들인 맏며느리죠.
‘말도 안 통하는데 어쩌지? 성격이 안 맞으면 또 어쩌나?’
처음엔 조마조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씨 할아버지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흐뭇하고 행복해하셨죠. 말이 잘 안통해서 답답하긴 해도 그밖에 나머지는 다 100점짜리 며느리였거든요. 아담한 키에 가무잡잡한 구릿빛 얼굴, 활짝 웃을 땐 하얀 이빨이 돋보이는 고운 며느리, 마음씨 곱고 솜씨도 곱고 부지런한 며느리, 남편에게도 큰 기쁨이고 시어머니 시아버지께도 참 착한 며느리였답니다.
게다가 시어머니 따라서 난생처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신앙생활도 남부럽지 않게 열심히 참 잘했어요. 성경말씀 읽으려고 애쓰는 바람에 한글도 빨리 깨치게 되었죠. 그리고 우리 여선교회 회장 황을숙 집사님이랑 똑같은 황씨라서 그런지 금세 단짝이 되고, 단짝이 되자마자 아예 이름을 황을순으로 바꿀 정도로 성격도 매사에 화끈하고 적극적이었어요.
첫아들 낳고 이름을 현금(玄琴)이라고 지었어요. 둘째 딸 이름은 해금(奚琴)이라고 지었죠. 현금의 ‘현’은 검을 현자예요. 거문고를 그렇게도 부르죠. 거문고는 씩씩한 남성미가 넘치는 우리 악기인데, 술대라는 작은 막대기를 손가락에 끼고 마치 타악기처럼 줄을 치면서 연주하는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인 악기죠. 술대는 길이가 볼펜보다 조금 길어요. 해금은 섬세한 여성미가 넘치는 우리 악기죠. 몸집도 작고 소리도 작지만 아주 매력적인 악기랍니다. 그런데 왜 아이들 이름을 거문고와 해금으로 지었는지 아세요? 그건 바로 우리 황을순 집사님이 단보우 전문가거든요. 단보우는 베트남에서 유명한 전통악기랍니다.
단보우는 정말 매력있고 독특한 악기예요. 자그마한 탁자 위에 얹어놓고 연주를 하는데, 크기는 가로 세로 모두 가야금보다 훨씬 작고, 왼쪽에 위로 삐죽 솟아오른 ‘음조절대’의 높이도 해금의 절반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악기예요. 줄도 해금은 두 줄인데, 단보우는 줄이 하나뿐이죠. 소리도 작아서 마이크를 대고 연주해야 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작고 작은 악기예요. 그런데 거문고처럼 오른손으로 작은 막대기로 줄을 퉁기면서 왼손으로는 해금처럼 음을 조절하는 맛이 매우 오묘하답니다. 줄은 우리 해금이 명주실로 만드는 것처럼 단보우도 명주실을 썼는데, 소리가 너무 작아서 지금은 우리 양금처럼 철사 줄로 바뀌었죠. 그래서 악기 전체적인 맛이, 우리 거문고와 해금, 그리고 양금을 합해놓은 것 같은 오묘하고 멋진 맛이 나는가 봐요. 아무튼 이제 우리 황을순 집사님이 왜 아들 딸 이름을 현금이랑 해금이라고 지었는지 좀 이해가 가죠? 혹시 셋째를 낳으면 양금이라고 지으실까?
그런데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 황을순 집사님의 밝고 고운 얼굴에 깊은 그늘이 지기 시작했어요. 나팔꽃처럼 활짝 웃을 때마다 늘 환하게 빛나던 하얀 이빨도 이젠 보이지 않고, 건강한 꼬꼬닭처럼 매순간 종종거리며 신바람 나게 일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교회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집에서도 그러신다고 시어머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세요.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어요. 그런데 지난 주일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까닭을 알게 되었죠. 예배를 마치고나서 오후집회 때였어요. 목사님과 함께 다음 주일 본문말씀을 읽으며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죠. 그런데 시편 104편 말씀을 떠듬떠듬 봉독하던 황을순 집사님이 갑자기 울컥하신 것 같았어요. 처음엔 아직 한글이 좀 서툴러서 더듬거리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점점 목소리가 떨리더니 그만 훌쩍이며 우시는 거예요. 교인들이 당황한 가운데, 목사님이 침착하게 물으셨어요.
“황집사님, 무슨 일 있어요? 그렇잖아도 요새 얼굴빛이 어둡던데, 속 시원히 털어놓아 봐요. 우리가 함께 기도할게요.”
“목사님 죄송해요. 제가 좀 이상하죠? 지금 시편 읽다가 은혜 받아서 그랬어요.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이 말씀이 아주 은혜로워요. 목사님!”
“아! 어떤 점이 그렇게 은혜로웠나요 집사님?”
“우리가 다시 창조된다는 거가 너무너무 은혜로웠어요.”
“아, 그렇군요. 아주 은혜로운 말씀이죠. 그렇죠. 그런데 왜 그 말씀이 특히 은혜로웠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우리 모두에게 그 받은 은혜를 나눠주면 좋겠는데...?”
잠시 조용히 생각하던 황집사님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어요. 우리말이 서툴러서 평소 말수가 적던 우리 황집사님인데, 느리지만 오랜만에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하신 거예요.
“사실은요 목사님, 제가 요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얼마 전에 동네 하우스에서 일하는데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여러 사람이 같이 상추 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캄보디아에서 온 청년 일꾼 한 사람에게 누가 욕을 하는 것을 들었어요. 일도 못하면서 게으르고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다며 낄낄거리면서 흉을 보는 거예요. 한국말 못하는 그 청년은 그냥 멀뚱멀뚱 따라 웃기만 하고 있고요. 그래서 제가 그 아줌마께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말했죠. 아주머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지 마세요,,,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벌컥 성을 내는 거예요. 한국말 좀 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한국사람 다 된 줄 아느냐 하면서 손가락질까지 했어요. 그리고 제 이름을 가지고 뭐라뭐라하는 거예요. 너는 갑순이가 아니고 을순이라고요. 남의 하우스에서 일하는 주제에, 남의 나라에 온 주제에,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고요. 아마 점심 때 막걸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취했는지... 그 아줌마가 좀 심했어요. 그래도 저는 꾹 참고 일했어요. 일을 다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저희 현금이랑 해금이를 보는데 그만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이 아이들도 나처럼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크면 어떻게 하나...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막 울었어요. 그래서 요새 제가 좀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았는데요. 그런데 지금 시편 말씀을 읽는데 그만 마음이 확 풀어진 거예요. 우리가 다 다시 창조될 수 있다고 하셔서요. 한국사람, 베트남사람, 캄보디아 사람 따로 없이 전부 다시 창조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목사님?”
조용히 듣고 있던 목사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말씀하셨어요.
“집사님, 황을순 집사님. 성경말씀은 그대로 믿으면 되요. 믿는 만큼 하나님 뜻이 보이고, 믿는 만큼 내 안에서 그 뜻이 이루어져 가시죠. 그런데 동네 아줌마들이나 우리 봉황교회 성도들이나 누구라도 베트남과 캄보디아 같은 외국에서 온 분들이 한국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큰 잘못이에요. 돈이 좀 더 많다고 우쭐대는 꼴불견들 아시죠? 특히 요새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 괴롭히는 우스꽝스런 일들이 뉴스에 자주 나오고 있잖아요? 자기가 좀 높은 사람이랍시고 비행기 승무원 머리를 툭툭 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자기가 좀 지위 높은 공무원이랍시고 남의 나라에 가서 힘없는 어린 사람에게 술 먹고 몹쓸 짓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특히 대기업이 작은 가게를 못살게 구는 비겁한 일은 아주아주 많죠. 요사이 이런 걸 ‘갑(甲)의 횡포’라고 부릅니다. 세상엔 이런 철부지 갑돌이 갑순이들이 아주 많아요. 우리 황집사님 이름이 갑돌이나 갑순이가 아니라 을순이라는 거 절대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갑돌이보다 을순이를 훨씬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에요. 아까 읽은 다음 주 성령강림절 성경말씀 기억하죠? 하나님께서는 왜 바벨탑을 짓는 갑돌이들을 다 흩어버리셨는지, 그리고 왜 갈릴리 촌사람인 을돌이 을순이들을 모아서 저 거룩하고 고귀한 일에 쓰셨는지! 황집사님, 우리 황을순집사님! 내가 갑순이가 아니라 을순이가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황을순 집사님에게 ‘단보우’라는 악기를 주셨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가야금 거문고보다 작고, 해금보다도 작고 소리도 작지만, 그 모든 장점들을 다 아우르는 단보우를 황집사님께 선물하신 하나님의 뜻을 꼭 찾아보세요.”
우리 황을순 집사님 얼굴이 오랜만에 활짝 피어났어요. 풀죽었던 눈매가 활짝 살아났어요. 그리고 그 선한 눈매가 갑자기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더니, 목사님께 밝고 힘찬 목소리로 얘기했어요. 다음 주 성령강림절 예배 때 단보우로 찬양 반주하고 싶다고! 그리고 또 얘기했어요. 그 하우스 왕따 캄보디아 청년을 다음주일 예배 때 꼭 초청하고 싶다고! 그리고 또 얘기를 하기 시작하네요. 황집사님이 이렇게 우리말을 빨리하고 많이 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예요. 한번 말문이 터지니까 자꾸자꾸 멋진 생각들이 막 쏟아져 나오나 보죠?
“목사님, 이건 갑자기 드는 제 생각인데요. 다음 주일 사도행전 말씀에 보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여러 나라 말로 전도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다음 주일 예배 때 그 말씀을 봉독할 때 한 분이 한글로 읽고, 제가 베트남 말로 읽고, 또 그 캄보디아 청년은 캄보디아 성경 구해서 읽으면 어떨까요? 동시에 읽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어떨까요?”
목사님 입이 딱 벌어졌어요. 다른 집사님들도 보름달처럼 눈이 커졌어요. 어? 그런데 어쩌죠? 우리 황집사님 생각은 이게 다가 아닌가 봐요. 또 눈빛이 별처럼 빛나더니,
“목사님 그리고요 우리 베트남에서는 혼인예식 때 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떠오른 생각인데요. 왜 흔히들 혼례식처럼 기쁜 날엔 꽃을 뿌리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성령님이 혀처럼 제자들 머리위에 내려와서 하나 되는 모습이랑, 제자들이 방언으로 전도할 때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 말씀과 하나 되는 성경 장면을, 마치 신랑신부 하나 되는 기쁜 날처럼 빨간 꽃잎을 뿌리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요? 찬양할 때도 뿌리고, 특히 여러 나라 말로 성경봉독할 때 뿌리는 것도 좋겠죠?”
목사님 입이 해물탕 큰 조개처럼 딱 벌어졌어요. 황 집사님 시어머니 눈도 쟁반만큼이나 커졌어요. 그리고 황집사님 눈빛이 또 한 차례 반짝이기 시작하네요. 이번엔 은하수처럼 막 쏟아질 것 같아요. 누구 좀 말릴 사람 없나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행 2:17-18)'
어느덧 창밖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황을순 집사님 마음속에도 성령의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울했던 마음이 다 씻겨 내려갑니다. 꽉 막혔던 마음이 시원하게 뚫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환하게 내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마음속에 기도가 솟구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정훈, 2013년 5월 18일 밤]
김재임 (OMSC, 'Joy in the Lord'; the collage Art of Jae-Im Kim, Vol. 1)
작가 김재임 선생님(겨자씨 교회) 동의를 얻어 여기 싣습니다.
그림을 원하는 분은 소속과 사용처를 밝히시면 첨부파일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suhmoo@hanmail.net)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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