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성서일과 4본문을 올립니다.
2013/3/31 부활주일
(이사야 65:17-25)
17.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1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19.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20.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21.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22.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23.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복 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시편 118:1-2, 14-24)
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이스라엘아,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여라.
14. 주님은 나의 능력, 나의 노래, 나를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15. 의인의 장막에서 환호하는 소리, 승리의 함성이 들린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16. 주님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다.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
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18. 주님께서는 엄히 징계하셔도, 나를 죽게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19.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20.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21.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2.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23.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24. 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사도행전 10:34-43)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35.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37.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39.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40. 하나님께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41.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로 정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1-18)
1.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10.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11.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성실문화 74호 예배마당에 실린 것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구약 본문 (사 65:17-25)]
※ 눈에 띄는 단어 ; ‘창조’, ‘기억’
※ 분문의 자리 ; ①바벨론에서 귀환한 뒤 맞게 되는 여러 난관들, 바벨론 생활과 다른 익숙하지 않음들, 이런 불편한 환경에서, 어쩌면 출애굽 백성들이 광야에서 느꼈던 애굽 생활에 대한 그리움 같은 기억, ②더 거슬러 올라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조상들의 죄에 대한 기억
⇒ (이 때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말씀이 선포되다!) (17b)...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 오히려 기억을 더 거슬러 올라가, 낙원(에덴)을 기억나게 하시는, 그 낙원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나게 하시는 말씀들
⇒ 17-18 절에 ‘창조’가 4차례 반복된다.
⇒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던 창조주의 마음이 느껴진다.
⇒ (19)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 본문 전체 느낌 정리 ; 부활절 구약본문의 느낌은,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느낌이 강하다. 포로생활이 과연 얼마나 죄 값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건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다름아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부활에 대한 개념이나 기쁨에는 못 미쳐도, 건강 장수(20), 평화로운 삶(21-23)에 대한 약속, 그리고 이어지는 에덴기억 말씀 속에서, 영생의 기운이 느껴진다.
※ 마음에 오래 남는 구절 ; (24)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 창조주께서 처음 지으시고 애지중지하시던 마음이 느껴진다. 첫 아이를 키울 때 기억이 난다. 애가 울기도 전에, 시도때도없이 기저귀가 젖었나 먼저 들여다보던, 배는 안 고픈가 젖병을 들여다보던 기억이 난다.
⇒ 부연하자면, 오늘 부활절 구약본문, 특히 이 구절 속에서 이런 강렬한 느낌이 든다. 성경의 ‘창조와 구원’, 즉, ‘창조의 기억과 구원 약속’이라는 성경의 큰 주제 안에 담긴 알맹이, ‘부활’, ‘예수부활’ 사건의 고갱이는 바로 나를 애지중지하시는 태초마음, 창조주 하나님의 첫 마음이로구나 하는 느낌!
[시편 본문 (시 118:1-2, 14-24)]
※ 눈에 띄는 단어 ; ‘주님께 감사’(1, 19, 21), ‘구원’(14, 19, 21)
※ 본문 전체 느낌 정리 ; 전반적으로 오늘 구약본문에 대한 ‘응답찬송’의 느낌이 물씬 난다.
⇒ 구약 본문의 마지막 절, 끝 구절 “주님의 말씀이시다”에 뒤이어지는 듯이 오늘 시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 (18절) 주님께서는 엄히 징계하셔도, 나를 죽게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이 구절 느낌이 특히 그러하다.
※ 마음에 오래 남는 구절 ; (22)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완전 인생역전의 강력한 상징노래로서, 구약본문에 대한 응답찬송으로 안성맞춤이다.
⇒ 더욱이 부활절 찬양으로서 매우 적절하다. 신약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부활예수를 가리킬 때 사용한 그 유명한 상징이 바로 여기 시편 118:22에서 유래한다. (예; 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벧전 2:7)
[서신서 본문 (행 10:34-43)]
※ 눈에 띄는 단어 ; ‘만민의 주님’(36),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42)
특히 38-42절은 부활절 복음말씀을 좀 더 풍부하게 하는 내용이다.
※ 눈에 띄는 문장 ; 3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 온 몸으로 막힌 담을 허무시는 평화의 임금님!
(에베 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 본문 전체 느낌 정리 ; 본문의 앞 뒤 맥락을 살펴보면, 고넬료가 매우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앞에 선 것을 볼 수 있다. (33절 “...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 모여 있습니다.”)
⇒ ‘말씀’을 경청하려 간절한 마음으로 모인, 매우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본문에 바로 뒤이어지는 구절(44-48절)을 보면, 부활의 열매가 풍성하게 결실하는 감동이 있다.
[복음서 본문 (요 20:1-18)]
복음서 본문은 마치 ‘예수 부활사건’ 현장 검증(?)의 느낌이 들 정도로 자세하고 생생하다.
⇒ 좀 엉뚱한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말씀동화’로 대신한다. 너무 길고, 내용도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 ‘동화’라는 표현이 부담된다. 말씀동화에 나오는 지명과 교회 이름, 그리고 사람 이름들은 이 말씀동화를 사용하는 각 교회에 맞게 바꾸면 좋겠다. (성실문화 74호, 113-118쪽 예배마당에 실린 말씀동화를 조금 다듬었습니다.)
[말씀동화] 막달라마리아 이모를 만났어요!
큰 빛이 번쩍 하더니 동그란 알처럼 생긴 것이 나타났어요. 타임머신이 온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옮겨다닐 수 있는 기계라서 이름이 타임스페이스인데, 아주 먼 미래에서 날아왔대요. 그것도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 봉성리 동그란 동산에 있는 동그란 성실교회로 온 거예요. 타임머신에는 아줌마 한 사람이 타고 있었어요. 옷차림새는 좀 달랐지만, 생김새도 우리처럼 동글동글하고, 말도 우리말 쓰고, 엉?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사람이잖아? 그것도 양평사람이래요. 대한민국 양평에서 타임머신을 발명한 과학자가 났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어쩌다 2013년 현대로 왔는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우리 오총사 선구, 영원이, 영훈이, 진구, 소현이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질문을 퍼부었어요. 타임머신 아줌마는 그 많은 질문에 대답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평소 먹고 싶은 것이 많은 것만큼이나 궁금한 게 참 많았던 아이들인데, 딱 걸린 거죠. 먼 미래의 우리 후손인 타임머신 아줌마는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분이었대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타임머신을, 그것도 타임스페이스를 만들게 되었고, 오랜 꿈이었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입력했는데, 그만 실수로 장소는 안 옮겨지고 시간도 2013년으로 오게 된 것이었어요.
우리는 마침 2013년 부활절을 앞두고 말씀연극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부활주일 본문말씀인 요한복음 20장 1-18절을 읽고 또 읽고 거의 외울 정도로 읽으며 연극 대본을 만드는 중이었죠. 그런데 본문말씀을 많이 읽다보니까 생각도 많아지고 궁금한 것도 많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연극 대본을 만드는 토론시간마다 서로 다른 생각들, 아주아주 다양한 상상력들 때문에 늘 옥신각신하느라 대본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타임머신 아줌마에게 부탁을 했죠. 예수님 부활하신 그 때 그 자리로 가보자고! 타임머신 아줌마는 열심히 기계의 고장 난 부분을 고쳤어요. 드디어 봉성리 성실교회 다섯 꾸러기들과 타임머신 아줌마를 실은 타임스페이스는 2,000년을 더 거슬러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부근, 예수님의 돌무덤까지 날아가게 되었어요.
우리 타임머신, 아니 타임스페이스의 네비게이션 성능이 정말 대단했어요. ‘예수님 무덤돌’이라고 치니까, 한번 번쩍 하더니, 어느새 큼지막한 무덤 돌 앞에 도착한 거예요. 어라?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사람이 아무도 없네? 무덤 돌이 문 옆에 옮겨진 것을 보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건 분명한데,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딜 간 것일까? 아마 정확한 시간을 맞추지 못했나 봐요. 타임머신 아줌마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네요.
우리는 먼저 누구를 만나면 좋을까 의논했어요. “그야 당연히 막달라 마리아지!” 소현이가 큰소리로 말했어요. “마리아는 여자라서 제일 친절할 것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일 말도 많이 나눈 사람이니까!”라고 영원이가 말했어요. 평소 터프한 베드로를 좋아하던 진구가 조금 불만이었지만, 결국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어쩐다지? 우리는 이스라엘 말을 모르고, 막달라 마리아 아줌마는 우리말을 모를 텐데? 그러자 타임머신 아줌마가 빙그레 웃었어요. 이미 다 준비해왔던 거예요. 타임머신 아줌마도 원래 예수님 만나러 가기 위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던 말인 아람어 통역기를 만들어 두었던 거예요. 정말 대단하죠?
우리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막달라 마리아’를 입력했어요. 그리고 또 한번 번쩍하더니 우리는 어떤 아담한 집 앞에 도착했어요. 마침 그 집안에서 예쁜 아줌마 한사람이 나왔어요. 우리가 인사를 건네자, 그 아줌마는 깜짝 놀랐어요. 완전 낯선 옷차림에 낯선 생김새 때문에 크게 놀랐을 거예요. 공손히 머리숙여 인사를 하니 아줌마는 금새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자신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했어요. 마침 집 안에는 예수님 제자들이 한 명도 없었어요. 막달라 마리아 아줌마가 우리를 집 안으로 초대했고,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정갈하고 소박한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어요. 자리에 앉은 우리는 마리아 아줌마께 많이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아줌마는 좀 놀라긴 했지만, 금새 괜찮아졌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얼마 전에 이보다 더 큰 놀라운 일을 겪었기 때문라네요. 바로 우리 예수님 부활사건이었어요. 그리고 아줌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모라고 부르기로 결정했어요.
우리는 이모에게, 우리가 찾아온 이유를 말했어요. 그리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을 펴서 요한복음 20장 본문말씀을 보여드렸어요. 한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놀랍고 기쁜 표정이었어요. 드디어 우리는 한줄 한줄 짚어가며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1절; 무덤돌이 왜 움직인 거죠?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나오시기 위해서였나요? 그리고 어떻게 누가 옮겨줬는지 아세요?
이모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어요. 그 때 우리 중에서 가장 똑똑한 타임머신 아줌마가 끼어들었어요. “무덤돌이 움직인 건 예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막달라 마리아 이모랑 제자들을 위해서가 아닐까? 부활 예수님께는 이미 무덤돌이 장애가 되지 않으실테니까. 그리고 정확히는 모르지만, 마태복음 28:2절에는 무덤돌을 움직인 지진과 천사가 등장한단다.” 타임머신 아줌마는 우리보다 성경공부를 훨씬 많이 한 게 틀림없어요. 그러자 영훈이가 중얼거렸어요. “그럼 왜 요한복음에는 그 지진이랑 천사가 안 나온거지?”
2절; 이모가 제자들께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예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이모는 잠깐동안 아무 말도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어요. “솔직히 난 예수님이 수난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수난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기억나는데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기억이 잘 안나요.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본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아직도 우리 예수님 다시 살아나신 것이 실감이 안나요. 어안이 벙벙해요.”
3, 4절; 왜 제자들은 나란히 뛰지 않았나요? 이모도 같이 뛰어갔나요? 만약 그랬다면, 셋이 나란히 서서 뛰면 힘도 안 들고 운동도 되고 좋았을텐데?
“정말이지 그 땐 우리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답니다. 그 때 누가 먼저 달려나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무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나갔어요. 내가 가장 뒤에 뛰었죠. 물론 운동을 하기위해 뛰어간 게 아니니까 옆으로 나란히 뛰진 않았고,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성격 급한 우리 베드로님이 먼저 뛰쳐나간 것 같은데, 그 뒤로 누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7절; 우린 7절 말씀이 가장 궁금했어요. 다른 복음서말씀과 달리 무덤 속 모습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했어요. 우리 생각에 그 때 모두 멘붕 상태였을텐데, 아 여기서 멘붕이라는 말은, 넋이 나간 것 같은 거예요. 얼빠진 상태!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 입으셨던 세마포와 머릿수건의 상태와 위치까지 자세히 기억할 수 있었나요?
“글쎄요? 저는 사실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만 들여다보았을 뿐이고, 무덤 속이 밝지 않아서 자세히 볼 수도 없어서 잘 몰라요. 성경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면, 아마 그 날 무덤 안에 들어갔던 두 제자들의 기억이었을 것 같네요.” 바로 그때 선구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어요. “이모, 여기 1절과 2절을 보면요, 이모가 무덤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 시신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이모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신 게 맞나요?” “그건 맞아요. 무덤 속이 어두웠어도 새벽이라 바깥도 밝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때마침 먼동이 터오는 때라 햇빛이 무덤 속에 조금씩 비추기 시작해서,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은 틀림없이 확인했었어요.” 영원이가 질문했어요. “이모, 혹시 그 때 무덤 안에서 무슨 냄새같은 건 안났나요? 시체 썩는 냄새라든가, 아니면 동굴 속 퀘퀘한 냄새같은 거? 혹은 아주 신비로운 향내 같은 건 못느끼셨어요?” “글쎄요. 내가 좀 정신을 차리고 오래 있었다면 냄새를 느꼈을 텐데, 너무 긴박하고 정신없어서 잘 기억나지 않네요. 미안해요.”
8절; 8절에 보면 ‘사랑제자’가 무덤에는 먼저 도착했지만 안에 안들어가고 있다가 베드로가 들어간 뒤에야 뒤늦게 따라 들어갔다고 했는데요. 왜 그랬나요? ‘사랑제자’는 겁쟁인가요? 그리고 따라쟁인가요?
“아 그건, 그는 매우 섬세한 사람이랍니다. 겁쟁이라기보다는 섬세하고 감성도 풍부하고 사랑도 많은 분이예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만큼 사랑이 넓고 깊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깊고 조심성도 많죠. 내 추측에는, 아마 무덤 속 상황을 바깥에서 먼저 자세히 살펴보고 조심조심 들어가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예수님을 모셔둔 무덤이잖아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겠죠. 그런데 뒤늦게 달려온 베드로님이 거침없이 쑥 들어가버리니까, 뒤따라 들어간 것이겠죠?”
9, 10절; 그리고 그 두 분 제자들이 그냥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했는데요. 돌아갈 때는 뛰어가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무슨 대화를 하며 걸어갔다거나, 혹시 뭐 아시는 게 있나요?
“아뇨. 모르겠어요. 난 함께 돌아가지 않았거든요.” 타임머신 아줌마가 끼어들었어요. “9절에 보면, 아직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예언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신 것으로 봐서, 그저 누가 예수님 시신을 훔쳐갔을까? 그런 이야기만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인데,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딱, 누가복음에 나오는 엠마오 길의 두 제자들과 느낌이 같아요.”
11절; 근데 이모는 왜 제자들을 따라서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 계속 우셨어요? 너무 오래 우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왜 또 무덤 속을 들여다보셨죠? 이미 이모도 확인했고, 두 제자들도 다 들어가서까지 확인했었는데 말예요.
“난, 난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었어요. 남들은 다 포기해도 나는 정말이지 어떻게 해서라도, 아무 거라도 붙잡고 우리 예수님을 찾아야 했어요. 얼마나 불쌍하고 억울하신 분인데... 그 고통스럽고 억울한 죽음으로도 모자라 시신까지 빼앗길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눈물이 났어요. 잠시 그쳤다가도 예수님 생각만 하면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그날 내 눈은 마치 하염없이 물이 쏟아지던 노아의 홍수 때 같았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내 눈이 많은 눈물 때문에 아주 흉하게 퉁퉁 부었던 것 같아요.” 이 때 영훈이가 순발력 있게 말했어요. “맞아요. 울고 울고 너무 많이 울면 아예 앞이 안보이게 되요. 지난주일 고난주일 시편도 그랬어요. (시편 31:9)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다시 이모가 말했어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내 눈앞이 침침했죠. 그리고 무언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문득 무덤 속에서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보았죠.” 그 때 옆에서 듣고 있던 타임머신 아줌마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어요. “마리아님 심정이 아프게 느껴져요. 얼마나 사랑했던 예수님인데,,, 그가 찔리신 상처, 찢기신 상처가 마리아님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 저도 조금은 느껴져요. 제가 그걸 어떻게 느낄 수 있냐하면... 언젠가 컴퓨터로 본 옛날 사진 한 장 때문이죠. 예수님의 도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21세기 사진이었어요. 고향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칼 앞에서 돌을 던지며 싸우다가 총에 맞아 숨진, 그리고 그 시신조차 빼앗겨 크게 우는 가족들의 사진이었죠. 그 사진 속에 내 나이 또래의 우는 여자를 보면서 저도 가슴이 아파 울먹였던 기억이 나네요. 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빼앗긴 사람들의 심정은 아마 어느 나라나 다 비슷할 거예요.”
12절; 흰옷 입은 천사 둘이 있었다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죠? 아까 제자들이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는 분명히 못 보았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처음에는 무덤 안이 텅 비어 있었어요.” 그 때 진구가 말했어요. “천사가 날개가 달렸잖아요? 그리고 동굴이잖아요. 아마 박쥐처럼 동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어서 못 본 게 아니었을까요?” 우린 오랜만에 깔깔 웃었어요. 진구의 상상력이 참 재미있었죠. “천사는 신비로운 존재니까, 그냥 신비롭게 스르륵 나타난 거겠지” 소현이의 의견이예요. 그 때 영훈이가 말했어요. “그래도 우리가 부활절 말씀연극 꾸밀 때 천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게 중요한데,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하지 않을까? 좀 멋지게 나타나야 할 텐데?” 그 때 갑자기 선구가 소리쳤어요. “아! 갑자기 좀 멋진 생각이 나는데? 아빠가 예전에 사주신 구약 그림성경사전에 언약궤 뚜껑 위에 있는 그룹이라는 신비로운 천사가 있는데, 12절에 나오는 천사들하고 되게 비슷해요. 언약궤 양쪽에 끝에 앉아 있는 모습도, 예수님 시신 있던 자리 머리끝과 발끝에 앉아 있는 것도 비슷하고요. 그런데, 이건 참... 지나친 상상인지 몰라도요, 예수님 누우셨던 무덤이 딱 지성소 같지 않아요?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 자체시잖아요. 그러니까 언약궤가 들어있던 지성소가 딱 예수님 무덤 맞네! 그리고 마태복음 27:51절에 보면 예수님 돌아가실 때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지잖아요. 그러니까 꽉 막힌 지성소 문이 열려버린 건데, 그게 딱 무덤 돌문이 열린 거랑 비슷한 거 아닌가?” 원래 선구는 오래전부터 상상력 하나는 알아주는 책벌레예요. 타임머신 아줌마가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하네요. 다른 아이들은 그냥 뭔 말인가...? 하고 쳐다보고만 있네요.
13절; 이게 굉장히 궁금한데요... 이모는 그 두 천사가 진짜 천사인지 알고 대화를 나눈 거예요? 그냥 낯선 사람이 아니라 천사인 줄 알았다면 기절할 듯 놀라야 정상 아닌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궁금한 건, 천사들이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하고 묻는데, 둘이 함께 묻는 것처럼 보여요. 이중창 하듯 질문한 건가요? 왜 그렇게 질문을 하죠?
“아까 얘기했듯이, 그 때 난 제 정신이 아닌 넋 나간 사람 같았었고, 눈도 퉁퉁 부어서 눈앞에 뿌연 상태였답니다. 그러나 그 때 정신없는 내 느낌으로도, 그 두 분이 평범한 보통사람이 아닌 천사 같은 분들이라는 생각은 들었어요. 형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어요. 그렇지만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마당에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천사건 만사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이어서 타임머신 아줌마가 설명했어요. “천사들이 이중창하듯 질문한 것은, 내 생각엔 자연스런 일인 것 같아. 요한사도가 쓴 묵시록 7:11-12절에 봐도 여러 천사들이 한목소리로 합창하듯 말하는 장면이 나온단다.”
14절; 그런데 왜 천사들과 대화하다 말고 뒤로 돌아섰나요? 나 같으면 천사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을텐데? 마치 도끼 잃어버린 나무꾼이 산신령 만났을 때 처럼요. 혹시 천사가 뒤를 돌아보라고 알려줬나요? 그리고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던 예수님을 만났는데 왜 못알아보셨나요? 마치 변화산의 예수님처럼 얼굴이 완전 변모하셨기 때문인가요? 옷차림도 바뀌고?
“글쎄요? 난 내가 뒤 돌아섰는지 조차 잘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마치 복잡한 길에서 어린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처럼 정신없이 앞뒤를 살피고 있었을 것 같아요. 물론 천사의 대답을 들으려고 귀는 쫑긋 세우고 있었죠. 그 때, 뒤돌아섰을 때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러나 예수님인줄 몰랐죠. 눈이 침침한 탓도 있지만, 평소와는 다른 느낌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당연히 지금 예수님은 시신으로 어딘가에 누워계실 것이라는 생각뿐이었거든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답니다.”
15절; 예수님이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하고 물으셨는데요. 조금 전 천사들의 질문하고 비슷한데, 느낌도 비슷했나요? 좀 신비로운 느낌? 혹은, 왜 우느냐고 물으시는 뜻이, 왜 우는지 몰라서 질문하신 건가요? 아니면 울면 안 되는데 왜 우느냐는 말씀은 아니었나요? 그리고 왜 예수님을 동산지기인줄로 생각했나요? 무슨 근거가 있나요? 그리고 왜 동산지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다고 추측했나요?
막내 소현이가 먼저 말했어요. “내 생각에는 그건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영훈이가 대답했어요. “그래도 말씀연극을 만들려면 가능한 모든 걸 알아야해. 성경말씀 구석구석을!” 막달라 마리아 이모가 대답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물으신 뜻은 정확히 모르겠어요. 글쎄...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두 가지 뜻이 다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것도, 내가 일찌감치 얘기한대로 지금 이렇게 멀쩡히 부활했는데 왜 죽은 시신을 찾고 있느냐고 하신 것 같기도 하고...”
16절;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부르실 때 어떻게 금방 예수님인줄 알아차렸나요? 그리고 돌아서서 “라부니!”하고 불렀는데, 왜 돌아섰나요? 금방 또 뒤돌아섰던 건가요? 그리고 라부니는 무슨 뜻이죠?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 때 돌아서 있었던 건, 우습게도 예수님이신 줄 몰랐기 때문이예요. 살아나신 예수님 못보고, 돌아가신 예수님만 찾고 있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분명히 예전의 예수님과는 무언가 다르세요. 우리가 아직 잘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부활이란, 죽었다가 예전의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것과는 분명히 달라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도 그게 느껴져요. 예전과는 다른 부활예수! 그런데, 내 이름을 부르시던 그 음성은 다르지 않았어요. 일곱 마귀 들렸다고 모두들 천대하는 나를, 사랑으로 고쳐주시고 아무 차별 없이 사랑을 담아 불러주시던 내 이름! 아니 어쩌면 내가 천한만큼 더 사랑을 많이 담아서 불러주셨던 것 같아요.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 아시죠? 그리고 내가 라부니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예수님에 대한 내 마음이랍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르는 랍비라는 표현보다 더 크고 신령한 사랑을 담아 저는 예수님을 늘 그렇게 부른답니다.”
17, 18절; 왜 예수님이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죠? 하나님 아버지께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라고는 하셨는데... 마태복음 28:9절에는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을 붙잡은 기록이 있는데,,, 끝내 예수님께 손을 안 댔나요?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손을 대고 싶었었나요? 왜죠? 그리고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을 때 반응들은 어땠나요?
“나는 예수님을 덥석 안아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예수님 말씀 듣고 꾹 참았죠. 정말 안타까운 건, 내가 부활예수님 만난 얘기를 전했지만 제자들이 잘 안 믿는 거였어요. 어떤 이는 만져봤느냐고도 물었죠. 환영이거나 유령인지도 모른다면서, 그러나 나는 분명히 확신해요. 만져봐야 믿는 것, 만져지면 믿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정말 사랑한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보고도, 만져보고도 믿지 못하는 법이죠. 또 살다보면 알게 되요, 만져지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속이는지를, 만져지는 것에 내 맘대로 추측을 담아 얼마나 스스로 잘 속아 넘어가는지를 알게 된답니다. 말이 좀 어렵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어요. 난생처음 타임머신도 타보고, 난생처음 꿈에 그리던 예수님 부활 현장에도 와보고, 막달라 마리아 이모도 만나게 되니, 정말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시간가는 줄 몰랐어요. 해가 저무니 문득 집에서 기다리실 부모님들 생각이 났어요. 가만 생각해보니 부모님께 타임머신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도 못 드리고 나온 거예요. 어쩌지? 아무튼 어서 서둘러 돌아가야 해요. 막달라 마리아 이모랑 더 많이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만나고 싶었는데,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꼭 뵙고 큰절하고 싶었는데, 다음을 기약해야겠어요. 자 이제 헤어질 시간! 우린 이모와 작별 인사를 나눴어요. 우리 모두를 한명씩 꼭 안아주시는 이모는 사랑이 많은 분인 게 틀림없어요. 사랑덩어리 우리 예수님의 사랑을 담뿍 받은 게 틀림없어요. 이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이에요. 한없는 너그러움과 설렘이 담긴! 맞아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사랑 때문이에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을 우린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아무튼 오늘 이모랑 얘기한 걸 잘 다듬어서 이번 부활절에는 꼭 멋진 말씀연극을 만들고 말거예요.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이 담뿍 담긴 예수님 부활의 비밀을 생생하게 그려볼 거예요.
[이정훈 지음, 2013년 2월 초] |
'성실문화 응용하기 > 본문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년 4월 14일, 부활절 3주 예배준비노트 (0) | 2013.04.13 |
---|---|
2013년 4월 7일, 부활절 2주 예배준비 노트 (0) | 2013.04.07 |
2013년 3월 24일, 사순절 6주(수난주일, 또는 종려주일) 예배준비 노트 (0) | 2013.04.07 |
2013년 3월 17일, 사순절 5주 예배준비 노트 (0) | 2013.04.07 |
2013년 3월 10일, 사순절 4주 예배준비 노트 (0) | 2013.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