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제3주
사도행전 2: 14a, 36-41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시편 116: 1-4, 12-19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베드로전서 1: 17-23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누가복음 24: 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다른 사람
고집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사람이 세월의 침몰과 함께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아물지 않을 상처를 입었다. 물론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도 이 아픔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17일이 됐는데도 창을 열자마자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팝업창처럼 아직도 온갖 나쁜 소식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있다. 온 나라가 팔팔 끓는 냄비 물처럼 끓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아니 제대로 된 표정 한 번 짓지 못했다. 고집이 대단하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구출하셨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에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홍해의 기적만큼이나 기억에 남을 이야기이다. 세월의 침몰을 따라 줄줄이 엮여 나오는 갖갖이 부조리를 듣보기 하면서 새삼 열 가지 재앙을 떠올렸다. 왜 한두 번도 아니고, 열 가지 재앙이 필요했을까? 하나님이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여전히 눈이 어두워 진실을 보지 않는 아니, 더 정확하게는 보지 않으려는 사람과 제대로 된 표정 한 번 짓지 못하는 권력을 보면서, 진짜 너무한 건 하나님 아니라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죄
베드로는 사도들과 함께 소리 높여 외쳤다(행 2: 14).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36) 이스라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버렸다.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잘 살지 않았다. 메시아에 관한 지식과 정보는 넘쳐났지만, 정작 예수가 열어젖힌 구원의 길과 예수가 몸으로 살아낸 진리 그리고 예수가 포기하지 않은 그 생명은 버렸다. 우리 세월,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세월의 침몰은 우리의 세월이, 또 이 세월을 이끈 세대가 잘살지 않았다는 방증이며, 그래서 유죄라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이다.
‘잘살아 보세’가 아침마다 이 땅에 울려 퍼졌고, 입만 열면 경제력이 세계 몇 위니 하는 말로 저 자신을 추켜세웠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든 게 엉망이다. 이 땅의 학생은 창살 없는 감옥에 가만히 갇혀있고, 청년은 온종일 자신을 착취하지만 미래에는 철저히 닫혀있고, 어른은 밖에선 비겁하지만 안에선 독재자처럼 굳어있고, 노인은 늘어난 수명에 몸과 마음이 짓눌려 눈과 귀가 막혀있다. 잘살아보자 더니. 아니, 잘살게 됐다더니. 우리의 세월은 밥은 굶지 않게 됐지만, 도리를 저버리고, 순리를 거스름으로 유죄선고를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잘살지 않았다.
직면
그런데 이 세월이 유죄선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보통 또 보통 사람은,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그 진실이 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경우까지 헤아리는 진실인 경우는 드물다. 세월의 침몰이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자신의 삶과 연결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런 관계없이 살 수 있다. 그런다고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이 아픔과 직면해야 하고, 더욱이 교회는 이 아픔을 공적인 자리로 가지고 와서 함께 직면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 그래야 하는가? 우선 문학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는 문학의 기능에서 노른자위는 힐링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기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뭘 하고 있는가, 내가 나태하지 않는가, 내가 행복한가, 또는 내가 행복한데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가. 늘 이렇게 따져 묻게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문학은 이렇게 이 세월이 유죄임을 직시함으로써 이 세월을 이끈 세대에서 구출되고, 마침내 도래할 구원에 참여한다.
종교의 일
문학이 하는 일이 이렇다면, 종교가 하는 일은 어떠해야 하는가? 물론 문학이 종교는 아니고 종교가 문학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종교의 본질적인 기능도 문학의 저 직시-또는 직면-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 직면은 선지자를 통해 유지됐다. 선지자 혹은 예언자는 앞날을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 우리의 끝내 피하고 싶던 우리의 실제 모습과 직면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의 생애가 우리를 직면하라는 요청 앞에 서게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래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 37) 고통스럽더라도 진실과 직면해야 한다. 종교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또 세상의 악이 자기 내면의 악과 그 결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줘야 한다. 직면이 없다면 끝내 힐링도 없다. 직면이야말로 종교의 일이어야 한다.
낯선 예수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간다. 누가복음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간다고 했는데, 아마도 예수를 잃고, 예수를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눅 24: 13). 그들의 마음은 예수의 죽음에 꽉 붙들려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자신과 역사의 전환점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믿었다. 예수가 대제사장과 관리들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부활한 예수가 가만히 찾아와 길동무가 된다(15). 그리고 묻는다. “너희가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
그러자 글로바라 하는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의 충격과 자신들의 기대와 실망 그리고 혼란에 대해서 쭉 이야기한다(18-24). 성경은 글로바 일행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그 이유는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16). 이해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눈이 어찌 밝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자들이 낯선 예수와 동행하면서 저녁 무렵에는 상당히 친밀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29). 실은 낯선 예수에게서 처음부터 어떤 익숙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
그리고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헨리 나우웬의 말을 빌려 온다. “지금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영적인 삶의 핵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함께 앉아 먹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사하신 후 떼어 그들에게 주신다. 그러자 이들은 이 손님이 바로 예수님, 죽어 무덤에 묻혔던 그 예수님임을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불현 듯 깨닫는다. 그러나 이 확신이 찾아드는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글로바와 친구가 빵을 떼시는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더 이상 새 희망의 조건으로 그분의 육체적 임재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너무 친밀해져 그분의 낯설던 모습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분이 어찌나 가까이 오시는지 더 이상 희망의 근거로 그분의 육체적 현시(顯示)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글로바와 친구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헨리 나우웬 <예수, 우리의 복음> 170-171). 아, 다른 사람.
생각해 볼 것은 예수를 낯설게 만든 사건의 충격과 낯선 예수를 새 희망으로 알아본 순간의 충격이 한 이야기, 한 만남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우리에게 새 희망의 조건은 없다. 지금까지 답이라고 생각했던 종교적 신념은 세월의 침몰과 함께 낯설어졌다. 아직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살고 있다. 다만 우리가 엠마오에 닿기 전에, 이 절망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다시 사신 낯선 예수를 새 희망으로 만나기를 바랄 뿐이다.
뭘 해야 할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자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부활절을 낯설게 만든 세월의 침몰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는 없고, 또 같아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되자. 반드시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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