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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6일 (사순절 5주) 예배준비 노트

서무천사 2014. 4. 5. 15:12

“나사로야, 나오너라!”

 

[성서일과 4본문]

(에스겔 37:1-14)

1.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2.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3. 그가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4.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5.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6.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 내가 대언을 할 때에 무슨 소리가 났다. 보니, 그것은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였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다.

9.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래서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14.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시편 130)

1.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2.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 주님, 주님께서 죄를 지켜 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

4.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5.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님의 말씀만을 바란다.

6.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진실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7.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8.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로마서 8:6-11)

6.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7.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11.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45)

1. 한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이다.

3.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서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5.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그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

7.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고 하십니까?"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햇빛이 있으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

11. 이 말씀을 하신 뒤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12. 제자들이 말하였다. "주님, 그가 잠들었으면, 낫게 될 것입니다."

13.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가 잠이 들어 쉰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혀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16.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께서 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은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 리가 조금 넘는 가까운 곳인데,

19. 많은 유대 사람이 그 오라버니의 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23.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24.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25.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28. 이렇게 말한 뒤에, 마르다는 가서,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서 가만히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와 계시는데, 너를 부르신다."

29.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서 예수께로 갔다.

30.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다가 예수를 맞이하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 집에서 마리아와 함께 있으면서 그를 위로해 주던 유대 사람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서 나가는 것을 보고, 무덤으로 가서 울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따라갔다.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3.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님, 와 보십시오."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하였다.

37. 그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단 말이오?"

38.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어귀는 돌로 막아 놓았다.

39.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40.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41.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44.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성서일과 4본문 묵상]

오늘 사순절 5주 성서일과 4본문을 읽으면서 정리된 알맹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이시라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부활과 생명(영생)의 <소망>입니다.

(물론 이 둘은 그분의 <사랑>에서 출발했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전반적으로 본문의 환경은 죽음의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생명, 다시 살아남이 그 죽음과 짝을 이룹니다.

죽음은 언제나 그 앞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 다시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에 포위된 죽음의 운명입니다!

 

죽음을 집어삼킨 이 생명의 힘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고난주간 성금요일을 조금 앞둔 시점에서 볼 때, 이 본문들이 선택된 까닭이 느껴집니다.

 

 

① 구약 (에스겔 37:1-14)

오늘 구약본문은 유명한 본문입니다.

포로생활 속에서 마치 산송장처럼 널브러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기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골짜기에 바짝 말라 누워 있던 뼈들이 생생하고 거대한 군대로 일어서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맹이는, 에스겔이 이 모습, 이 과정을 가리켜, 그분께서 <무덤>을 열고(12, 13절) 이끌어 내실 때 비로소 <주님이심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짐>을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 점입니다.(13, 14절)

이는 그대로 오늘 복음서본문과 이어집니다.

즉,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시는 것과 절묘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요한 11:42)

 

(본문의 단어 중에 “뼈”가 11번, “주(주님)”이 12번 반복합니다. 주님과 우리-지금 우리의 부끄러운 꼴- 관계의 강조입니다.)

 

② 시편 (130편)

오늘 시편본문의 알맹이가 되는 단어를 꼽는다면, ‘기다림’ 그리고 ‘속량(贖良)’입니다.

먼저, 속량이란 값을 주고 노예를 해방시켜 양민(良民)이 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노예가 된 우리를 피값을 주고 해방시켜 천국시민이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상시킵니다.

시 130:5-7절의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은, 오늘 복음서본문에서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예수님을 기다리던 그 마음과 통합니다.

 

(본문의 단어 중에 “주님”이 15번이나 반복됩니다. 다시 한 번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강조하는 느낌입니다. 주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 내 몸으로는, 생활로는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③ 서신서 (로마서 8:6-11)

오늘 서신서본문은 점층적인 분위기가 강합니다.

 

9절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10절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11절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10절에서 “...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11절에서는 “...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서신서본문의 주제를 도식화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신∼죄(불순종)∼죽음∼ / 영∼의(순종)∼생명∼

 

성령님을 거스르는 것, 즉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의 세력이며, <육신에 매인 사람>은 죽음의 노예입니다.

결론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성령에 속한 생각>을 하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생명의 길입니다.

 

 

④ 복음서 (요한복음 11:1-45)

오늘 복음서 본문은 매우 유명한 본문이며, 곳곳에 깊이 사경(査經)할 곳이 즐비한 본문입니다.

먼저 ‘믿음’에 관한 구절이 8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 믿게 될 것이다... 믿느냐?... 믿습니다... 믿으면... 믿게 하려는... 믿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알맹이는 42절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로 앞인 요한복음 10장 31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성모독 때문이라고 합니다.(33절)

예수님께서는 참 어처구니없어 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너희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36절)

 

아무튼 오늘 본문의 자리는 이런 일을 겪으신 직후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사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목적 가운데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이것입니다.

제자들과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목적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과정입니다.

아직까지 <육신에 속한 생각>으로 가득한, 죽음의 권세 앞에 종노릇하고 있는 저들을 해방시키시려는, <부활과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시려는 믿음의 과정 말입니다.

 

 

⑤ 정리

지난 주 복음서 본문과 오늘 복음서 본문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4-5)"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햇빛이 있으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요한 11:9-10)

 

유대인들의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위하여(사랑을 위하여) 굳세게 일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일부러 이틀이나 더 머무르실 때 예수님 심정은 어떠셨을까요?(6절)

그리고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면서(14절) 이것이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잘 된 일이라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또 한 구석 심정>은 과연 어떠하셨을까요?(15절)

 

예수님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마리아와 마르다의 애타는 심정을 느끼지 않으셨을까요?

죽음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몸부림하는 나사로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틀 동안 내내 바늘방석 같지 않으셨을까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만큼, 그 만큼 더 힘들지 않으셨을까요?

 

반면에...

상가(喪家)에 도착한 예수님은 왜 드러내놓고 우셨을까요?(35절)

그리고 왜 그리 괴로워하시고 비통해 하셨을까요?(33, 38절)

이제 몇 분만 지나면 죽은 나사로가 되살아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고 환호할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견딜 수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선명한 생각은 이것입니다.

 

죽음의 공포, 죽음의 아픔 때문에 몸부림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신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고통과 공포입니다.

육체를 입고 오신 주님께서 피할 수 없는 공감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비통(悲痛)!

슬프고 아프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리고 무덤에 묻히실 때 한없이 오열할 저들의 비통을 미리 느끼고 계시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한편...

마르다와 나누신 대화가 자꾸 마음에 남습니다.

2주 전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나누셨던 대화, 본문 앞부분의 그 오묘하게 엇나가던 대화가 연상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요한 11:23-27)

 

그런데 마지막 27절의 마르다의 대답은 오늘 복음서본문의 알맹이를 담은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통해 얻으시려는, 주님께서 듣기 원하신 정답 말입니다.

그러나 따지자면 그보다 먼저 예수님의 현실적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지금 살아나리라는 예수님 말씀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9절에서 마르다가 무덤 문 열기를 주저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이 대답은 현실을 넘은, 현실을 건너뛴 정답이었습니다.

 

이런 걸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비록 수가성 여인의 동문서답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건 마르다의 평소 예수님을 향한 신앙이 급박한 상황을 맞아 극적으로 드러난 것으로도 보입니다.

 

 

⑥ 나머지

* 요한 11:16절, 도마의 돌발선언의 저의가 궁금합니다.

도마의 별명인 디두모(쌍둥이)라는 것 때문에 몇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먼저 어설픈 <메아리>가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시고 이것이 전화위복(제자들 믿음)의 기회가 되리라 말씀하시자마자 이런 반응을 하니 말입니다.

또한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도 듭니다.

→ 베드로 시몬이 마태복음 16:16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마자 16:22절에서 지극히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여 예수님께 야단맞은 장면과

→ 디두모 도마가 요한복음 20:25절 이하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자마자(28절), 곧 이어서 예수님께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받게 되는(29절) 장면 등이 딱 그렇습니다.

아무튼, 오늘 도마의 발언은 의미심장한 것 같기도 하고, 어리벙벙하기도 하고, 무슨 추리물의 단서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시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그냥 마음 속으로 불러내실 수도 있었고, 작은 소리로도 불러내실 수도 있었을 텐데 큰소리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오늘 구약본문, 겔 37:10절의 예언자 에스겔도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그렇게 큰소리로 대언 했을까요?

한 가지 짚이는 것은, 둘러선 무리들의 믿음을 위해서 더욱 큰소리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신 것 같습니다.(42절)

이 대목에서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바로 창세기 2:7절의 하나님 모습입니다.

흙으로 아담을 빚으신 뒤 그 코에 생기(생명의 기운)를 불어넣으시는 모습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숨결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시는 그 목소리에는 사랑이 담겨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이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일으켜 사랑을 나누고 싶으신 주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 성서일과 사랑방 모임에서, 오늘 복음서본문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본문에 관한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양평 대아교회 여병찬 목사님께서, 호스피스 전문 사역자들로부터 들은 고민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말기암 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지나 겨우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하나하나 정리하고 준비해가고 있을 때, 목사님들의 심방과 거기서 선포된 바로 이 본문,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로 말미암아 말기암 환자들이 다시 살려고 몸부림하게 되는 등, 이 말씀이 호스피스 활동에 큰 혼란을 주는 경우입니다.

다시 한 번 이 본문의 알맹이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드님>이시라는 믿음과,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부활과 생명의 주체, 그 소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상기했습니다.

그나저나 그 목사님들께서 지금 장례식의 주인공도 아닌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왜 이 본문을 설교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서 어떤 권면을 주셨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 오늘은 사순절 5째 주일이면서 동시에 한식(寒食)날입니다.

한식날엔 찬밥을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중국의 ‘개자추’ 전설에 따른 것이라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이 무렵 산과 들이 바짝 마를 정도로 가물고 바람도 세기 때문에 불을 피우지 않기 위한 옛 사람들의 지혜라고 합니다.

아무튼 한식날은 조상의 산소를 찾아 벌초도 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 무덤을 돌보는 날입니다.

 

그런데 개자추 전설에서 개자추가 죽는 과정의 모습과 오늘 본문의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나오는 장면은 묘하게 정반대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비교도 하고, 또 한편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않는 의미와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출애굽기 35:3)

불을 피우는 노동을 오늘날 에너지 사용과 연결해 보는 건 어떨까요?

최소한 일주일에 한차례 전기 사용을 줄이고, 자동차를 타지 않고, 공장을 가동하지 않는다면, 청명(淸明)해야 할 한식날이 적어도 오늘처럼 황사와 초미세먼지로 몸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생명운동의 실마리를 불 안 피우는 한식날, 안식일 정신에서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살아나는 자연 속에서 부활절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말씀 동시] 예수님을 믿어 [명암교회 교회학교 5학년 김윤서 지음. 『성실문화』 78호]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아?

예수님을 믿어!

 

 

[말씀 시조] (요한 11:1-45) [이정훈 지음. 『성실문화』 78호]

불쌍한 오라버니 우릴 두고 가지마오

마리아 통곡소리 베다니를 울릴때에

나사로 어서나오라 생명예수 음성이

 

 

[말씀 한시] 관 뚜껑이 열리고 걸어서 나왔다 [오세종 지음. 『성실문화』 78호]

生者必滅世常道 (생자필멸계상도) 산 자가 죽는 것은 누구나 겪는 공도(公道)

伯大尼村靑年殤 (백대니촌청년상) 베다니 촌 젊은이도 아파서 죽었다

馬利墓前落淚哭 (마리묘전낙루곡) 무덤 앞 마리아는 눈물 떨구며 울었고

耶穌亦傷涕淚傷 (야소역상체루상) 예수님도 상심하여 주루루 눈물 흘리시며

大聲呼曰拉君起 (대성호왈납군기) ‘나사로야! 일어나라’ 큰 소리로 외치시니

裂縛壽衣死者行 (열박수의사자행) 수의를 묶은 결박은 찢어지고 죽었던 젊은이가 일어섰다

發開棺蓋彳亍動 (발개관곽척촉동) 관 뚜껑이 열리고 뚜벅뚜벅 걸어서 나왔다

爾懷有信見主榮 (이회유신견주영) 믿음을 품으라 너희도 이와 같이 주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 서예] 시편 130:5 [오세주 작품. 『성실문화』 78호]

 

 

 

 

[말씀 노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주원남 지음. 『성실문화』 78호]

[노랫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해설]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이다. 마을 입구까지 마중 나온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곡으로 만들었다.

[악보] (2014년 1월 26일)

 

 

 

 

[말씀 동화] 나사로 개자추를 만나다

 

모처럼 하늘이 푸르구나.

오늘이 무슨 날인가?

말 그대로 청명(淸明), 그야말로 맑고 밝은 청명한 하늘이네!

황사도 없고 참 좋지?

 

내 이름은 나사로야, 베다니의 나사로!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좋은 이름이지.

그런데 성경에는 나사로가 또 한 명 있단다.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

부잣집 대문 앞에서 헌데 투성이로 고통스럽고 배고프게 살다가 죽어 천국에 간 나사로, 기억하지?

 

그런데 우리 둘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어.

첫째는, 성경에서 우리 둘 다 죽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또 하나, 우리 둘 다 성경책에 대사 한 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엑스트라는 아냐!

주연배우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연이란다.

 

그런데 왜 대사 한 줄 없느냐고?

원래 말이 없는 편이냐고?

아냐 아냐 그렇지 않아.

나라고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어?

우리 가족이랑 우리 동네 자랑도 하고 싶고, 또 우리 예수님 자랑하고 싶은 얘기도 이렇게나 많은걸?

지금부터 그동안 내가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던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거지 나사로에 비하면, 나는 참 행복하게 살았단다.

내 착한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늘 내게 참 잘해주었거든!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바지런한 마르다!

내 든든한 누이 마르다는 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요리해 줬지.

 

마리아는 또 어떻고?

우리 착한 마리아는 동네에서도 인기가 만점이었어.

이건 우리끼리 얘기지만, 마리아의 인기는 제 언니 마르다보다도 월등했단다.

물론 나보다도 훨씬 인기 짱이었지!

 

마리아의 인기비결이 뭔지 아니?

그건 바로 귀야, 귀!

마리아에게는 늘 경청(敬聽)할 줄 아는 귀가 있었다는 사실, 이게 비결이었어.

어른들 말씀은 물론이고, 동네 꼬마들 말까지도 허투루 듣는 법 없이, 마리아는 늘 귀담아 들었단다.

게다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마리아는 성경말씀에도 늘 귀를 기울였어.

 

그래서 우리 마리아는 베다니 뿐 아니라 십리 가까이 떨어진 예루살렘에도 벗들이 많았지.

내가 죽었을 때, 곳곳에서 조문객들이 많이 왔잖아?

그게 다 우리 마리아 덕분이었다니까?(요한 11:18-19, 31, 45)

어디 그뿐인 줄 아니?

마리아는 우리 예수님께도 인기가 짱이었어.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에 오셔서 말씀 주실 때마다 가장 가까이에서 경청한 사람이 누구였겠어?

그게 바로 우리 마리아라니까?

마리아는 늘 예수님 발치까지 바짝 다가가서 말씀을 가장 열심히 경청했어.

그러니 예수님 사랑을 독차지 할 수밖에!

물론 사람들 질투도 만만치 않았지.

 

너희도 이거 하나는 꼭 기억해 두렴!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게 바로, 말씀경청이라는 사실!

맛있는 거 사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하시는 게 바로바로, 말씀경청!

말씀을 경청한다는 건 바로 말씀을 사랑한다는 거고, 말씀사랑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최고 증거거든!

 

 

가만있자,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네?

하고 싶은 얘기가 아무리 많아도 시간 가기 전에 이 얘기는 꼭 들려줘야겠네?

내가 무덤에 있을 때, 개자추 아저씨 만난 얘기 안 했지?

이건 제법 판타스틱 한 얘기니까 그냥 한번 재미로 들어 보렴.

 

내가 몸이 아파 자리에 누워있을 때였어.

예감이 좋지 않았지.

이제 다시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죽을 때가 되면 누구나 다 이런 예감이 드는 걸까?

 

몸이 몹시도 아팠지만 나는 내 사랑하는 누이들이 걱정할까봐 크게 신음소리를 내지도 못했단다.

 

“오빠, 조금만 더 힘내요,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을 보냈으니 이제 곧 예수님이 오셔서 오빠 병을 금세 고쳐주실 거예요.”

 

나는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것을 애써 참으며 예수님을 기다렸지.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오지 않으셨어.

그토록 믿었던 예수님, 그토록 기다렸던 예수님이건만...

그 때 그 허탈하고 서운한 마음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단다.

마침내 나는 숨이 멎고 죽음을 맞이했지.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어.

아니 잠이 깬 것이 아니라 깊은 잠 속에서 꿈을 꾸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꿈인지 생시인지 나는 어렴풋이 의식이 드는 순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단다.

기나긴 고통이 멎고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어.

아! 이런 게 바로 안식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낙원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아니면, 꿈도 생시도 아닌 또 다른 곳인가?”

 

이렇게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였어.

누군가 내게 다가오는 거야.

 

“나사로, 안녕하신가?”

 

“누구시죠?”

 

“난 개자추라는 사람일세. 멀리 중국에서 왔지.”

 

“개자추? 되게 희한한 이름이네요?”

 

“허허 그렇지? 나에게 그대 이름 나사로도 만만치 않게 희한하다는 거, 알고 있나? 헐헐”

 

내가 죽은 뒤에 가장 처음 만난 사람인 개자추 선생은 나보다 한 600살 넘게 나이 많은 분이셨단다.

개자추 아저씨는 오래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람인데, 어느 나라 왕자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사람이었대.

그 왕자님이 우여곡절 끝에 장장 19년 동안이나 망명생활, 방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지.

그 기나긴 19년을 하루같이 왕자님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이 바로 개자추 선생이란다.

 

하루는 왕자님이 기나긴 산악 행군 끝에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힘도 없게 되었어.

이제 여기서 모든 게 다 끝이로구나 하며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왕자님 곁으로 개자추가 다가왔지.

 

“왕자님 이것 좀 잡숴보세요. 그리고 어서 힘내세요.”

 

세상에나! 어디서 났는지 고깃국을 끓여 온 거야.

도대체 고기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이 왕자님은 게눈 감춘 듯 먹어치웠겠지?

산나물을 넣고 끓인 고깃국이 정말 맛있었거든.

드디어 기운을 차린 왕자님이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그 고기는 다름 아닌 충신 개자추의 허벅지 살이었던 거야.

왕자님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을 베어 내다니!

 

왕자님은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겠지?

 

“내 언젠가 왕좌에 오르게 된다면, 개자추 그대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리고 마치 소설처럼 왕자님은 마침내 기나긴 방랑생활을 마치고 왕이 되었단다.

그리고 방랑생활 중에 함께 했던 충신들을 하나하나 불러 큰 상과 벼슬을 내렸지.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람?

왕이 되면서 마치 무엇에 씌운 사람처럼 충신 개자추를 새까맣게 잊어버린 거였어.

 

개자추 아저씨는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깊은 산으로 들어갔지.

그리고 나중에야 자신의 큰 실수를 깨달은 왕은 얼른 신하들을 보내 개자추를 불러오게 했단다.

그러나 웬걸? 개자추는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왕은 더 애타게 찾는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네?

온 산을 다 뒤져도 개자추를 찾지 못하게 되자 다급해진 왕은 마침내 이런 명을 내렸어.

 

“도저히 안 되겠다. 천하의 충신 개자추의 얼굴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내가 못 견디겠다. 어서 개자추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싶단 말이다. 여봐라. 어서 온산에 불을 놓아라. 나무 타는 연기냄새 때문에라도 개자추가 얼른 산에서 내려오게 하란 말이다.”

 

그러나 개자추는 불에 타죽도록 끝내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단다.

낙심한 왕은 크게 후회 하며 개자추가 죽은 이 날을 기려 온 나라 사람들에게 이날만큼은 절대 불을 피우지 말라고 명령했지.

그래서 차가운 밥을 먹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해서, 이날을 가리켜 지금도 찰 한(寒), 밥 식(食) 한식(寒食)이라고 부른단다.

해마다 식목일인 4월 5일이나 6일이 한식날이야.

 

“정말 뜨거웠다네. 정말이지 불에 타 죽는다는 건 세상에 다신 못할 일이지. 여보시오 나사로! 그대는 그대의 임금님이 부르실 때, 나처럼 고집부리지 말고 부디 지체 없이 얼른 그분께 달려나가시게. 혹시라도 그분께 서운한 게 있었더라도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달려가도록 해. 꼭! 아! 그러고 보니 세상은 어느덧 답청(踏靑)계절이구먼.”

 

“답청계절이요? 개자추 아저씨, 답청이 뭐죠?”

 

“아, 답청이란 우리 동방에 사는 사람들이 즐기는 명절이지. 내가 죽은 날인 한식이랑 거의 한 날인 청명(淸明)절기 때나 음력 삼월삼짇날이 되면, 온 산의 푸릇푸릇한 기운을 만끽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나가 봄의 생명기운을 누리는 날이야. 밟을 답(踏) 푸를 청(靑), 답청(踏靑)! 갓 피어오른 푸르디푸른 쑥도 뜯어 쑥떡을 해먹고, 화사한 참꽃, 진달래꽃을 따서 화전을 붙여먹는 날이지. 오늘이 4월 6일 한식날이니, 어제가 바로 청명이었고, 바로 그 며칠 전이 삼짇날이었지. 그러니 지금이 한창 답청의 계절이야. 나사로! 그대도 임금님이 부르시면 어서 달려 나가서 그분 모시고 신나게 생명의 기운을 누리는 답청(踏靑)을 즐기기 바라오.”

 

바로 그 때였어.

언제 오셨는지, 꿈에도 그리던 그분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그거도 아주 큰 목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는 더 생각할 겨를, 조금도 머뭇거릴 겨를도 없이 달려나갔지.

사실 마음은 달려나갔지만, 내 몸이 온통 천으로 돌돌 싸여있는 바람에 꼬물꼬물 간신히 밖으로 나갔지.

무덤 밖은 온통 화사한 기운이었단다.

계절도 계절이지만, 우리 주님 예수님의 생명기운으로 온통 가득했거든!

 

...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그 뒤에 있었던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들려줄게.

내가 비록 성경책에는 대사 한 줄 없는 엑스트라 같지만, 사실은 할 말이 아주 많은 중요한 인물이거든!

 

우리 사랑스런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얼마나 신바람나게 덩실덩실 춤을 추었는지.

동네사람들, 여기저기서 찾아온 조문객들이 얼마나 놀라고 황홀했는지...

나중에 기회 있을 때 실감나게 들려줄게.

 

내 이름은 나사로야, 베다니의 나사로!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아주 좋은 이름이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단다.

비록 병들면 아플 수밖에 없는 이 육신세상보다, 내가 잠시잠깐 나흘 동안 머물렀던 죽음 뒤 저 안식이 하늘처럼 편안했지만, 그래도 내 사랑하는 누이들과 다시 만나고, 나 나사로를 통해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천하에 널리 알릴 수 있었으니, 아! 내 이름 나사로, ‘하나님의 도우심’! 너흰 내 이름이 정말 부럽지 않니?

 

[이정훈 지음. 2014년 4월 6일 주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