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제6주 | 몸의 참여 (한정훈)
시편 119: 1 - 8
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5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신명기 30: 15 - 20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몸의 참여
인간, 미래의 주인?
미래는 바꿀 수 있는가, 아니면 바꿀 수 없는가? 인간은 어디까지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어느 한쪽을 갈등 없이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어느 한 쪽을 즉, 내가 보통 어느 쪽으로 생각하는지 확인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미래의 주인일 수 있는지 묻는 질문, 사실 답이 간단하지 않다. 바꿀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고, 바꿀 수 없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분명 가능성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성령에 힘입어 사는 사람이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미래 즉,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의 미래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아예 없지 않다. 질문을 바꿔 이렇게 묻는다면,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시작되는 미래는 어떤 미래인가? 오늘 구약 말씀은 이런 질문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미래는 몸으로 맞아들이는 시간이다. 먼저 이 말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미래가 그냥 오는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미래는 맞아들여야만 오는 시간이다. 준비를 해야만 맞이할 수 있는 손님과 같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맞아들이는가? 몸으로 맞아들이라고, 주현절 제6주의 네 본문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미래는 몸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몸으로 맞아들이는 시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시간이고 곧, 하나님 안에 있는 미래이다.
물론 운명과도 같은 시간이 있다. 히스토리에(Historie)의 역사와 게쉬테(Geschichte)의 역사가 있다. 히스토리에는 ‘his + story’라고 해서,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다. 반면에 게쉬테는 해프닝(happening) 즉, 사건의 시간이다. 신학자 불트만이 인간은 시간적 존재 혹은 역사적 존재라고 파악했을 때, 역사는 바로 게쉬테를 말한다(김용준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52). 미래는 운명과도 같은 사건에 의해서 좌우지되기도 한다. 미래가 운명에 달려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시간에는 운명적인 성격, 도래하는 또는 충격으로서의 속성이 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 운명과도 같은 시간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어떻게 반응-또는 참여-하는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몫이다. 따라서 게쉬테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만이 역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만이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랑이 뭐길래
신명기에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표현한다(16). 그런데 이때 말한 사랑이 뭔지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이렇게 구체적인 실천을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복을 얻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은 법을 지키라는 말과 같다. 시편도 마찬가지이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1).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라 한다. 하나님 뜻대로 생각하고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걸 이야기한다.
오늘 나눌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몸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해야 되는데, 아는데 이런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복음서를 보면, 귀신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았다고 말한다. 그 말씀에 참여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면, 아는 것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다.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다(2). 하나님의 말씀에 몸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명령은 지키고, 하나님의 뜻이 없는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적극적으로) 끊어내는 것이 몸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몸의 참여
우리는 대개 웃을 일이 있어야 웃는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웃으면 마음도 따라 웃는다. 동경하는 대상에 시선이 먼저 가는 것은 체계적인 분석을 거쳐 이성적인 정리가 됐기 때문이 아니다. 행동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에, 감정에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때, 사랑은 촉촉한 느낌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사랑은 몸으로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혼한 후에 가정생활도 그렇다. 내가 육체적인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몸으로 전달하지 않으면, 가족에게 그 사랑은 온전히 전달될 수 없다. 어린 시절에 놀아주지 않은 아빠와는 커서도 서먹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랑은 몸으로 하는 일이다.
몸이 웃으면 마음도 웃는다는 말은, “몸이 웃으면 마음의 어떠한 슬픔도 몰아낼 수 있다. 그런 주술적인 힘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의 알짬은, 웬만하면 몸을 웃는 버릇, 무조건 싱글벙글하라는 말이 아니라, 기쁨을 삶에 주된 태도로 가지려는 마음에 손을 들어주는 말이다. 성경도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 이 말은 슬퍼하면 다 죽었어 이런 뜻이 아니라 (슬플 때도 있고, 슬퍼해야 할 때에는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그런데 기본적인 삶의 태도, 삶의 방향을 웃는 방향, 기뻐하는 방향, 감사하는 방향으로 잡고 있는 것은 슬퍼하지 말아야 할 때, 슬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할 때, 돕는 힘이 된다는 뜻에 가깝다. 의지적으로 슬픔이나 두려움과 싸워야 할 때, 우리를 이끄는 힘이 된다. 몸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설익은 행동주의
이번 복음서 말씀이 긴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과연 몸으로 참여한다는 게 무엇인가?”이다. 그럼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한다고 할 때 하는 행동만 하면 사랑하는 건가? 그건 또 아니다. 몸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설익은 행동주의에 갇히지 않는다. 설익은 행동주의는 개인에게는 물론이고,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복음서 말씀은 “네가 실제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해서- 혹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어겼으면 이미 어긴 것과 다름없다”고 가르친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해서, 법에 의해 제재받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인생과 마음은 법보다 강력한 양심, 신념과 사상에 지배받는다.
반대도 중요하다. 실제로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마음에서 원한다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합리화를 경계해야 한다. 어쨌든 오늘 중요하게 살펴보는 점은 설익은 행동주의이다.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 없이 행동에 몰두하는 것은 세상을 감당 못할 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다(헨리 나우웬 <기도의 삶> 38). 몸의 참여는 내적일치와 통일성을 추구한다. 실체와 분리된 관념, 영혼 없는 행동은 불완전하다. 몸은 육체적인 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통일성을 갖춘 내적으로 일치된 몸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
신약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망한다. 육에 속한 증거라고 말한다. 청년회에서 나누는 말씀이 어른들이 익숙한 메시지와 다른 현실을 두고, 우리는 맞고 어른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게 목표도 아니다. 다만 다음 세대를 살 우리에게 어른들의 사고방식, 세계를 보는 시선과 태도, 조직 운영방식이 맞지 않을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 시대를 이끌어 가려면, 새로운,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낯선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를 참된 비전으로 이끈다.
이 믿음을 지녀야 하는데, 문제는 새 시대를 열어젖혀 맞이할 그 위대한 시선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집중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헌신된 사람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다.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게 목적이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느냐? 사고가 자유로워지고, 정직한 인식을 위해서다. 다음 세대 그리스도인으로서 건강하게 자라가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져서, 진리에 헌신하고, 평화에 헌신하고, 생명에 봉사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게 목적이다. 사람의 사람을 만드는 게 복음의 목적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게 복음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집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다. 왜 존재는 언어가 필요했을까? 왜 언어에 깃들어야 했을까? “말씀이 육신을 입어”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을까? 왜 약해지셨을까? 왜 전능을 포기했을까? 이걸 이해해야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가 있다. 예수님이 참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상은 이단 사상이다. 몸이 없는 실재는 있을 수 없다. 몸을 세워나가는 노력이 있어야 거기에 정신을 담을 수 있다. 정신만 존재할 수는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뜻이 좋다면 실력을 길러야 하고, 조직도 갖춰야 한다. 마음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진실을 이해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꿈이 있고 계획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실천할 몸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이상을 꿈꾼다면 그걸 실행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정신만 중요한 게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고, 뜻만 중요한 게 아니라 절차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오늘 신약본문 고린도전서 3: 9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9).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이 세상을 회복시켜나가는데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이 뭔가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가 언어라는 집을 필요로 하듯이,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집으로 삼아서 거처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이 진실에 대해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게 왜 중요한지, 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더듬어 볼 수 있는 힌트가 된다. 왜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좌절하더라도 아예 쓰러져서는 안 되는지, 왜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려는 계획과 의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를?”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다. 하나님이 그만큼 우리를 신뢰한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길 바란다.